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김영랑 시비를 찾아서

정종배 2019. 4. 3. 10:20


김영랑 비석을 찾아서/정종배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기다리고 있을 테요

영랑 김윤식(1902~1950)의 대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앞 구절이다.

5월이면 내 고향 함평 표산 충신각 담장 앞 화단에 모란꽃이 만개했다. 정유왜란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하여 초혼장으로 모신 신재愼齋 할아버지 무용담을 들으려 충신각忠臣閣에 아이들이 모였다. 친구들과 모란꽃 향기가 있느냐 없느냐 다투었다. 학교에서 삼국유사 선덕여왕 이야기를 듣고 온 날은 해름까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의 지혜를 알아보려 모란꽃에 나비가 앉는지, 노을이 질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학다리중1 , 양성우 시인이 모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첫 시집 발상법출간하여 싸인 받아 읽었다. 선생님은 함평 출신 최석두. 이수복 시인과 시 몇 편을 소개했다. 남도 출신 영랑. 용아 시인의 대표시를 낭독했다. 도서관에서 두 시인의 시집을 대출하여 읽었다. 영랑 시인과 첫 대면이었다.

고등학교 문학수업 시간 남도의 정서와 가락을 실은 영랑 시를 읽고 시를 써 보기도 했다. 시문학파 영랑과 용아 시인의 활동을 알았다. 영랑과 용아의 우정과 시문학지 발간의 후일담을 읽고, 나도 시집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강진읍 영랑 생가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남도 답사를 하며 처음 방문했다. 1906년에 입주한 안채는 퇴락했다. 사랑채는 예전 모습이었다. 대나무 울타리와 흙담장 그리고 동백나무 은행나무 등이 눈에 들어왔다. 모란꽃은 다 지고 이파리만 무성하게 한여름 땡볕에 지쳐 있었다. 마루에 앉아 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를 암송하며 강진만 너른 품을 새겼다.

영랑은 14세에 결혼하여 16세 때 첫째 부인이 죽었다. 집안 조카인 김현구 시인이 애도시 두 편을 썼다. 선산 입구 아담한 묘지에 잠들어 있다. 완고한 아버지를 설득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문예반 활동하며 안석주.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선근. 이태준. 이승만(화가) 등과 선후배로 교류를 가졌다. 친구인 최승일 동생인 최승희(무용가)와의 사랑은 양가 어른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최승희와 사랑을 실패하고, 영랑이 강진 집에 내려와 목을 매 자살소동을 편 동백나무가 안채 옆에 지금도 정정하게 서 있다.

2000년 중랑구 장안중학교로 전근 갔다. 4월 초 식목일에 망우리공원에서 1914년에서 1931년까지 17년 동안 한국의 산림녹화 및 도자기와 민예를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 - 1931)의 묘지를 찾았다.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 형제로 인해 한국에 온 야나기 무네요시가 규정한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 즉 한의 미가 아닌, 다쿠미 선생은 흥과 가락과 멋으로 파악했다. 다쿠미 선생은 조선민족미술관 건립(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폐허동인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 남궁벽 등과 교류했다. 한여름 밤 성동역(제기동)에서 내려 정릉천변을 걸어, 다쿠미 선생과 청량사에서 차담을 나누는 교류가 당시 명사들의 최고 풍정이었다. 홍릉. 광릉수목원 이전 작업 전반에 걸쳐 능력을 발휘하였다. 1929조선의 소반, 1931조선도자명고를 유작으로 펴냈다. 어려운 한국인을 돕고, 가난한 동료 직원 자녀의 학비를 대신 내줬다.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한복을 입고, 온돌문화 등 한국식 생활을 즐겼다.

식목일 행사 준비로 과로하여 40세 폐렴으로 죽어, 상여를 서로 메겠다는 한국 이웃들의 애도 속에 한복을 입고 이문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여, 1960년대 중반 한국인들이 세운 묘비에 공덕비功德碑라 새겼다. 산림청 퇴직한 분들의 친목모임 홍림회洪林會에서 세운 묘표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새겨 기리고 있다. 다쿠미 선생의 고향 야마나시현 사람들은 한국을 관광하며 망우리를 찾아 와 참배한다. 망우리 묘역 중 지속적으로 참배객이 이어지는 분은 다쿠미 선생일 것이다.

2000년 이후 내 삶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영향으로 방향이 바꿨다. 내 명함에 10여개 활동 단체가 적혀 있다. 친구들은 내가 종전과 다르게 다양한 대외활동으로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으며 유명 인사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1932년 서해가 죽자 유족들이 모두 북으로 가 관리가 않된 소설가 서해 최학송 묘지를 찾아 문학인들에게 알렸다. 묘지는 아까시 뿌리로 얽히고 덥힌 상태로 거의 평평한 맨땅을 드러냈다. 2006년 이후 집사람 몰래 만든 비밀통장을 깨, 세 번 묘역을 단장했다. 2010년 서해 최학송 묘지 관리인으로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묘적부에 등록했다. 제자들 중심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23년 헌신한 재일한국인 실업가 동교東喬 김희수(1924~1912) 선생이 두산그룹으로 대학교를 이전하며 받은 1200억원 전액 ()수림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재단 이사장인 동강東岡 하정웅(1939~ , 재일한국인 실업가로 재일한국인 화가 중심 그림과 사진 등 만여 점 수집하여 한국 각 지자체와 관계 단체 및 학교에 기증, 광주시립미술관.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명예관장) 선생은 사비로 2006년부터 아사카와 다쿠미 고향 호구토시 청리에서 청리은하숙 행사를 치르며,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을 추모하며 기리고 있다. 재일한국인으로서 일가를 이룬 학자, 실업가, 활동가 등을 초청하여 23일 재일한국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일교류 가교의 뜻깊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성황리에 마무리 짓는다. 수림문화재단 후원금으로 2015년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가 출범하여, 한국 측 책임자(숙장대행)로 학생 교사 등과 함께 일본 청리은하숙에 2016~17년 참가했다. 또한 20172월 도쿄 릿쿄대학 중앙교당에서 열린 제10회 윤동주시낭송회에도 학생들과 참여했다. 뒤풀이 장소에서 관동대진재 다큐 제작하는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을 만나, 지금까지 교류하며 주로 관련 인물들을 연결하는 일을 돕고 있다.

파인 김동환 장편 서사시 승천하는 청춘을 파인의 딸인 소설가 김채원 작가가 화봉문고 전시장에서 낭독했다. 김영랑 시인의 막내딸인 김애란 여사가 영랑의 시을 차고를 낭독하는 모습을 오충공 감독이 영상에 담았다. 세 번째 작품 <1923년 제노사이드 - 93년의 침묵>을 제작하고 있다. 안동 예안 원촌 육우당六友堂 시인 이육사 딸인 이옥비 여사도 인터뷰를 허락받았다.

망우리공원에는 한국근현대사 유명 인사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유택을 마련하여 잠들어 있다.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방정환. 지석영. 문일평. 최학송. 김상용. 계용묵. 이중섭. 이인성. 권진규. 강소천. 박인환. 함세덕. 조봉암. 김말봉. 차중락. 장덕수. 이병홍. 오기만. 설의식. 이광래 등이다.

안창호. 박찬익. 나운규. 임방울. 송진우. 채동선. 김영랑. 안석주. 송석하. 김동명. 이영민. 강학린. 조종완. 문명훤. 이기붕 일가 등은 이장했다.

오충공 감독과 망우리공원 묘지를 돌면서 관동대진재와 관련 인물을 찾았다. 김영랑. 송석하. 계용묵. 조봉암. 최신복. 방정환. 유상규. 아사카와 다쿠미 등이 관동대진재 당시 도쿄에 유학 중이거나, 나중 조사요원 및 일기에 참상과 소회를 기록했다. 방정환 선생은 후원금을 모금하여 도쿄 무너진 한국 YMCA동경지부 재 건립에 힘을 쏟았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서울에서 생활하며, 신문 및 지인들의 전언으로 들은 한국인들에 대한 유언비어와 그에 따른 참상에 대해 한국인들은 본성 자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은 민족이라 일기에 적었다. 이런 선생의 행적으로 지금도 일본 보수 쪽에서는, 조선총독부 말단 직원으로 한국 측 입장을 존중하고 행동한 선생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은 하지 않고 있다. 2010한국을 사랑한 일본인을 편집하며, 선생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강사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승낙을 받았는데, 끝내 글은 오지 않았다. 일본의 대학 강사 자리를 이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이 활동한 산림과 도자기 및 공예 분야 전문가 중 절대적 마니아가 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산책하는 일반인 중에는, 왜 쪽발이를 추모하고 인정하느냐며 행사 현수막을 찢거나, 화환을 집어 던져 버린다. 작년에는 대리석 화병을 두 조각 내 숨겨두기까지 했다. 그 깨진 대리석 화병을 내가 보관 중이다. 올해는 묘지 입구 안내판을 꺾어 놓았다.

192391일 일어난 관동대진재 혼란에서 우리 민족이 무고하게 당한 참상을 경험하고 한국인들은 대부분 귀국했다. 일본의 경찰 군인 및 자경단의 제노사이드로 인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수습하기 위해 관동대진재 이후 2년 동안 유학생과 한국인을 전면 일본 입국을 통제하였다.

관동대진재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희생당하지 않았고 하층민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는 6660명에서 많게는 2만 명까지 이른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송석하 선생은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민속학을, 최신복은 아동문학을, 조봉암은 독립운동을, 김영랑은 독립운동과 저항시를, 유상규는 대중의 의료보건, 계용묵은 소설을 쓰는데 매진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식인들은 민족적 참상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식민지 작가들은 총독부 문화정책에 순치되어 갔다. 서구의 상징주의 시와 이론을 소개한 김억의 노력이 문인들에겐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정체성 회복의 방법 하나가 민요와 시조를 되살리는 길이라며 상당수가 독립론자에서 자치론자로 변절했다.

그나마 파인 김동환의 승천하는 청춘, 이기영의두만강등에서 실제 도쿄 현장에서 경험한 참혹한 상황을 다루었다. 당시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이를테면 관동대진재 문학으로 꼽을 만한 작품의 수효가 많지 않다. 그래도 다수를 점한 것이 시 갈래이다. 이상화의 <독백>, 김소월의 <>은 대화체 발화법을 채택함으로써 그 파멸적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적인 경지를 보였다. 관동대진재 이후 국내로 들어온 유명 문인들은 김소월. 이상화. 김동환. 김영랑. 염상섭. 이육사. 이기영. 채만식. 한설야. 함석헌 등이다.

김소월은 지진 이후 한 달 동안 연락 두절 되어 가족들이 죽었다고 포기했다. 시인 구상의 맏형님도 도쿄 유학 중 지진 이후 연락 두절되어 행방불명 됐다. 김소월의 <초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영랑. 이육사의 저항시의 근저에는 관동대진재 참상을 목격한 민족애가 표출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윤동주 시인 아버지도 당시 참상을 목격하고 급히 귀국했다.

 

임종국은 친일문학론(1966)에서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 오상순. 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 이희승, 젊은 층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등 문장 출신,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로작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망우리공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공동묘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건원릉 조선 왕조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적인 공동묘지 조성 이후, 망우리하면 사람 살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중랑구청에서 대대적인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내실을 다지며 준비하고, 다양한 자문과 행사를 통해 자료를 구축하고 있다. 1933년부터 197340년 동안 많게는 5만여 기 공동묘지였다. 현재는 장묘문화가 변화되어 7000여 기 남았다.

영랑 시인은 휘문의숙과 일본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 고향 강진에서 시를 쓰고 가업을 이어갔다. 첫 시집 永郎詩集은 박용철에 의해 1936, 두 번째 시집 永郎詩選은 서정주에 의해 1949년 발간 됐다. 영랑 시는 두 시집에 제목 없고 번호만 있다. 영랑의 원고에는 제목이 있었다. 용아에 의해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번호가 제목을 대신했고, 그 번호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은 두 번째 시집 발간으로 인해 혼란을 빚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영랑 시는 86, 수필 편지 등은 23편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진읍 영랑 생가는 전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어 강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랑문학관이 아닌 시문학파기념관이라 명명한 것은 영랑에 대한 강진읍 사람들의 의식을 반증하고 있다.

영랑은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하여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영랑은 일본에 유학했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함께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일제 강점기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고 독립만세로 형무소까지 다녀온 전력으로 집 앞에 두 명의 경찰이 늘 지키는 세월에도 끝끝내 신사참배, 창씨개명 거부와 단발령을 불복했다. 선영의 부친 비석에 조선인, 상석에 태극 문양을 새기는 항일 자세와 일제의 탄압에도 지조를 지킨 굳건한 민족 시인으로 살았다. 201899년만에야 백범 김구선생의 임시정부 광복군 군자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다.

영랑은 19485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문필가, 일본 청산학원, 중앙청출판국장 경력을 내세워 한국민주당 대동청년단 후보로 4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최하위 7,405득표로 낙선한 뒤, 9월말 생가와 전답을 정리하고 서울 신당동 29074호 단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좌익 청년들이 영랑이 이승만 계열의 후보로 출마하였다는 이유로 위협과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정든 고향을 떠났다.

영랑이 이사한 신당동 집 가까이에 석영 안석주 작가가 살고 있었다. 석영과의 인연은 사후에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석영이 19502월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장례식 장소에서 휘문의숙 동창들이 모여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물었다. 영랑이 불쑥 나네라고 대답했다. 6.25전쟁 9.28수복 전날 파편 맞고, 다음 날 사망했다. 장충사獎忠祀 뒤 군사도로 아래에 묘지를 썼다. 4년 후 김광섭 시인이 주도하여 망우리공동묘지 석영 유택 옆에 이장했다. 19541114일 경향신문에 김광섭 시인이

永郞 金允植兄追慕그의 移葬하여란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생략)

오는 十四日(십사일) 市外忘憂里(시외망우리) () 夕影(석영) ()柱兄(주형)이 누운 옆에 영郞兄(낭형)이 자리를 잡게 되어 牡丹(모란)詩人(시인) 碑石(비석) ()牡丹詩(모란시) ()을 새겨지게 되었다. 이와 別途(별도)過去三十餘年間(과거 30년간) 畫壇(화단)으로부터 演劇映畫(연극영화) 小說(소설) 各方面(각 방면)貢獻(공헌)하여 ()채를 날린 故夕影(고 석영) ()柱兄(주형)墓前(묘전)親知(친지) 몇 분의 精誠(정성)으로 平素(평소)에 즐기던 바다로 가자詩一節(시 일절)을 뒷()에 새긴 ()가 서게 된 것을 이날 또한 뜻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경건한 형성을 사랑하는 인간의 지순한 노력에 의하여 다시 형성된 것이 문화라면 그것을 이루어 인류의 마음에 새기는 사람 l 그가 가는 것을 산천과 세월에 맡긴다하더라도 그를 지키고 그에게 하나의 표석을 세워줌이 또한 문화의 마음일진대 앞으로 이 나라의 저명한 문인 학자 예술가의 共同(공동)한 묘지가 설정되기를 바라며 이번 문인 諸氏(제씨)의 노력으로 貧寒(빈한)에 휩쓸려 子女就學(자녀취학)()()永郎遺家(영랑유가)一燈(일등)의 도움이라도 있게 된 것을 幽明(유명)을 위로 삼아 끝으로 이에 附記(부기)해 두고자한다.(필자,평론가)

 

연합신문 19451121일자 永郎墓 이장 특집으로 영랑의 遺詩 <>과 김광섭, 박진, 설창수씨의 추모사, 永郎墓 이장 경과보고 등을 집중적으로 싣고 있다. 1114일 상오 11시 시내 獎忠祀에서 故 永郎 金允植 묘지 이장식을 거행한 후 망우리 묘지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永郎墓 移葬式 순서

(사회 異河潤) 묵념, 式辭 李憲球, 경과보고 孫基梁, 遺詩 <모란이 피기까지> 낭독 이한직, 哀辭 김광섭, 추모사 모윤숙. 오종식.안종화. 설창수, 遺詩 <> 낭독 조애실, 詠唱 김소희, 참석자 분향, 유가족 인사.

 

망우리 영랑의 묘지는 부인 김귀련 여사의 사망으로 1990년 천주교 용인묘원으로 이장 합장했다. 망우리공원 묘지 터에 묘비를 묻고 갔다. 그 묘비를 찾기 위해 자료를 뒤적였다. 2008년 영랑이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3년 휘문고 명예졸업장을 96년만에 막내딸인 김애란 여사가 가족 대표로 수상했다. 셋째 아들인 김현철 자유기고가는 MBC기자를 접고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박정희 승은 입은 2백여 여인들>이란 글을 2013년 발표했다. 박정희 상습 성폭력에 한 맺힌 영화배우 김삼화 여사를 취재하여 그 내용을 폭로했다.

김애란 여사와 연락이 닿아 2015년 망우리공원 영랑 시인의 묘지 터를 찾기로 나섰다. 대학 은사인 함동선 시인도 함께 했다. 김애란 여사는 부친의 묘지 터를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이장한 날 오빠가 오지 말라하여 참석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오빠의 말씀으로 큰 나무가 묘지 뒤에 있어 관리하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하며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함동선 시인은 박인환 시인 묘지 학생들과 답사 때, 영랑 시인 묘지를 찾아 참배한 기억을 되짚었다. 박인환 시인 묘지를 기준하여 13시 방향 50M 근처를 찍어 주었다.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장 김선기 시인의 연락을 받았다. 영랑 시인 생가 뒤편에 강진군에서 세계모란공원을 조성하며 그 안에 영랑 시인 부부 묘를 이장하는데, 묘지 장소를 정하여 달라고 영랑의 막내딸인 김애란 여사와 함께 내려 와 달라했다. 집사람과 함께 김애란 여사를 모시고 토요일 출발하여 생가 뒤편 읍내를 내려다보는 장소를 정하였다. 군청에서는 북서쪽 한적한 곳에다 모실 장소를 정하여 두었다. 강진군과 남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국가유공자 서훈 받은 항일 저항 시인의 유택으로는 미흡하다고 말을 하며, 당당하게 강진들과 강진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내정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 첫 4년을 주막 주모에게 기식한 사의재四宜齋를 강진군에서 복원했다. 오랜만에 초가지붕 밑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남도의 정서와 한식을 맛보았다.

김애란 여사가 영랑 시인 장례식과 망우리공동묘지 사진을 나에게 맡겼다. 중랑구에서 망우리공원 관련 기념관을 짓고 운영하면 기증하여 주기를 부탁했다. 중랑구청에서 1970년대까지 중랑구에 관련 사진 공모를 하였다. 석영과 영랑 묘지 관련 사진 다섯 장을 파일로 응모했다. 구청 관계자 연락이 왔다. 석영 안석주 선생 묘지 앞 사진은 확실하게 인정하고, 두 장의 사진도 석주 선생 묘지 앞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허형만 시인의 永郎 金允植 硏究저서를 다시 찾아 읽었다. 시인 김광섭의 19541114일 경향신문에 발표한 글을 읽고 의문 풀렸다. 같은 날 영랑시인 이장과 묘비 제막 및 석영 안석주 선생 묘비도 세웠다. 석영 선생의 묘비의 행방도 찾았다.

현재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영랑 시인의 유택이 고향으로 이장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말 당시 상황을 이리승냥이이가 판을 치는 짐승 같은 세상이라 보고, 독을 차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저항 의지를 불태운 항일 민족 시인으로, 남도의 정서를 남도 가락으로 잘 표현했다. 남도 여행 일 번지 목록에 빠지지 않은 영랑 생가. 강진 읍내 상가들은 영랑이란 이름을 걸고 생활하고 그 자부심으로 살고 있다.

셋째 아들 김현철 칼럼리스트가 제안한 서구식 조각 양식으로 세울 묘지(기념탑)를 건립하지 못한 것은 주민들의 반대다. ‘왜 혐오시설이 들어오느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 밑바탕에는 영랑 시인의 제헌국회 출마가 결정적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안 조카인 김현구 시인에 대한 아쉬운 점도 있다. 영랑 시인 그늘에 늘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김현구 시인을 기리는 뜻깊은 분들은 그렇지 않지만, 일부 주민들의 막무가내 식 반대는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랑 시인 유족들은 1948년 서울로 이사한 후 강진에 살지 않고 있다. 시인의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유족들이 지난 3월 강진군에 기증했다. 시문학파기념관 전시실에 영구 보존하고 전시하기로 했다. 항일 저항 민족시인이며 남도를 대표하는 시인의 유택이 원만하게 고향 강진 땅에 안장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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