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정종배 2019. 4. 17. 10:20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정종배

ㅡ영광양반이어라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曙海

 

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춘원 이광수 편지 주고 받아

문학의 길 열었고

유택 아래 계용묵 소설가를

조선문단 데뷔 추천해

육당이나 춘원에게 받아야 하는데

니가 나와 동급인데

살아생전 라이벌로

서해 죽자

서해 문학 조명했다

청소년부터 못 먹어서 위문협착증으로 죽기까지

빈궁문학 탑을 세워

고향 회령으로 유족들이 올라갔다

두 아들 백과 택

부모 잃고 고아로 전전하다

광복 후 죽어도 외가에 가 죽겠다 내려와

일주일 만에 맏이 백은 폐병으로

옥당골 흙이 됐다

둘째 백은 외삼촌 조운을 뒤밟아 월북하여

아버지 서해 후광으로

소학교 졸업도 못했지만

김일성 대학 졸업 준박사로

김형직사범학교 학부장으로

다섯 자식 낳아

평양에 생활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령으로

신상옥 감독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 꼽은

서해의 대표작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여

북조선 전역에 상영했다

불갑산 아래 함평 출신 또랑시인 눈에 띈

후손 없어 관리 안된

서해 유택 단장하여

햇볕이 한 나절 놀다 간다

살아 생전 똥구멍 찌져지게 드난했지만

골상학적 미남이라

수혈 받고

최초 문인장으로

미아리공동묘지까지

장례식 행렬

당시 서울 자동차 몇 백대 중

50여대가 뒤따랐다

1958년 예총회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주도

이장추진위원들이 망우리로 이장하였다

중랑구 공공기관 신선한 먹거리 공급을 위한

영광군과 도농상생 급식공급 협약식 맺는 배경으로

서해 최학송 널따란 이마의 빛이 아니었을까

서해 최학송은 소설가는

남조선 옥당골 영광양반이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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