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망우리공원 문일평

정종배 2019. 5. 6. 15:48
관리번호80200
액자프레임
성명
문일평
한자文一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1888-05-15
사망년월일
1939-04-03
본적평안북도 의주 義州 西部 80
주소
서울, 中國 上海

공적정보

공적정보
운동계열 중국방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포상년도1995 훈격 독립장
공훈록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05년 도일하여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정칙학교(正則學校)를 거쳐 동년 가을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입학, 1908년 졸업한 그는 이 시기 관서(關西) 출신 유학생들의 자강운동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에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학회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 편찬원으로도 참여하여 국민주권론과 국가독립론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들을 기고하였다.

1908년 귀국 후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의주 양실학교(養實學校),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등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 출입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토요강습소의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를 포기한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예과를 수료한 뒤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강하였으며, 유학생친목회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담당하여 창간호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2년 국권 회복에 투신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한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상해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서 일본글 번역을 담당하면서 동년 5월, 신규식·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아시아 각 민족, 특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혁명당 영수 진기미(陳其美), 청년외교관인 고유균(顧維鈞) 등과 교유하는 한편,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918년경 귀국하여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애원서(哀願書)」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중앙고보·송도고보·배재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연구에 전념하게 된 그는 1923년 「동명」이라는 잡지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이라는 논설을 기고하는 등 역사관을 정립하였고, 1925년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귀국한 그는 1927년 2월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 자격으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간사를 맡아 통일전선의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8월에는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의사 및 기관지인 「자활(自活)」의 주필로 선임되어 민족자본 육성 활동과 그에 관한 계몽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활동한 그는 사론과 논설을 정력적으로 집필하면서 이 때부터 역사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을 전후하여 본격화하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에 참여하여 국학 진흥에도 힘을 쏟았으며, 1934년 5월 창립된 진단학회(震檀學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문헌고증 사학적 방법론의 도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27년부터 1939년 사이 발표된 100여 편의 글 가운데 90% 이상이 이 시기에 집필된 대중적인 역사관계 글들이었고, 많은 대중강연을 통하여 한국사의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가 1939년 4월 서거하였다.

그의 사후 1939∼40년경 조선일보사에서는 고인의 글을 묶어 『호암사화집』, 『호암전집』, 『소년역사독본』 등으로 출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471·969·98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67·12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97·468면
  •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권, 문일평(윤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8권 424·4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113·292·29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96·108·1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752·75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2집 3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23면
  •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일조각, 1994), 호암 문일평의 생애와 저술(최기영) 1788∼1820면
  • 조선심 조선혼 사학자 언론인

    호암 문일평

     

     

    본관 남평 족보 이름 명회 자는 일평

    호는 일제의 불의에 대항할 때는 호암虎巖을 노호하였고

    민족을 연명시키는 국학의 밭을 가꿀 때는 호암湖岩으로 자적하였다

    1888515일 평북 의주 한학자 문천두와 해주 이씨 사이 태어나

    1939년 서울 내자동 백송 담 너머 집에서 52세 생을 마감

    눈이 크고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만 드시면 일본 압제에 분통을 터르리고 화를 못 가누었다

    어려운 이웃이 청하면 벽시계를 전당 잡혀주고 쌀자루에 뒤주 바닥을 긁어 퍼주고 어렵게 사온 장작을 날라다주고 냉돌에 자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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