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망우리공원 오세창

정종배 2019. 5. 6. 15:50
관리번호3378
액자프레임
성명
오세창
한자吳世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1864-07-15
사망년월일
1953-04-16
본적서울 서울 돈의
주소
미상

공적정보

공적정보
운동계열3.1운동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포상년도1962 훈격 대통령장
공훈록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博文局主事)가 되었고, 우리 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낭청·총재비서관(郎廳·總裁秘書官)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局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 6)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孫秉熙)·양한묵(梁漢默)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최 린(崔麟)·권동진(權東鎭)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 린과 최남선(崔南善)이 협의하여,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므로 손병희·최 린·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道師)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도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관한 계획을 알려 찬동을 얻었는데, 특히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尙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후에는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長)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全國愛國團體總聯合會)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고등경찰요사 17·2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786·81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6·787·8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0·679·7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70·76·91·2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1·1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78·640·657·658·659·663·665·6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6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01·10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20·28·38·41·43·44·46·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8·97·105·12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8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95면


망우리공원 위창 오세창

 

연보비

위창 葦滄 오세창 선생

(1864 ~ 1953 독립운동가, 언론인, 서예가)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은 것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서로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솔거 이하 근대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화를 밝혀 놓고

높고 낮음을 품평하였다.

 

 

묘비 앞면 六朝體 葦滄吳世昌墓

 

묘비 뒷면 정음체

에 잠드신 葦滄先生 吳世昌 어른은 一八六四年 七月

서울에 나시어 一九五三年 四月 世上을 떠나시니 享年 九十.

民族開化하여 몸소 그 先驅를 잡으셨고 祖國

光復을 위하여 獨立宣言 三十三人中하시었을 뿐 아니라

文化發展에 크게 힘주시어 書藝金石 考證巨擘

이루시니 平生에 남기신 偉功은 길이 빛나 비길 바 없다.

어른 가신 지 三年 後生遺族이 뜻을 모아 先生인 끼치신

빛을 오래 繼承하려 이에 一九五六年 十月 墓碑

세우다.

一九五六年 十月 日

 

전홍진 찬손재형(孫在馨) 篆 金應鉉

 

조선 화가들의 모임 서화협회 정회원

1928년 신라 솔거 이후 추사를 높이 평가하고 이완용 해서와 행서까지

역대 서화가 편년체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펴냈다

 

 

망우리공원 언론계

오세창 문일평 장덕수 설의식 김말봉 조봉암 최학송 계용묵 박인환

대한민국 서예의 계보

위창 오세창 김규진 소전 손재형 유희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원곡 김기승

대한민국 고서화 감식과 수집 3

오경석 오세창 오봉빈

보화각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의 영원한 멘토 멘티

 

위창에게 전각과 서화 감정을 배워

박정희 대통령 서예 선생으로

서도書道 대신 서예書藝란 말을 정립했던

전남 진도 2선 국회의원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세한도 연구로 박사학위 받고 소유한 경성제대 교수 지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鄰

1944년 거금 3천엔 전대차고 석 달 동안 문안인사

후지쓰카 치카시 "내가 돈을 받고 넘긴다면 지하의 완당 선생이 나를 뭐로 보겠소"

그냥 넘겨 받아오며 소장품 창고를 지어줬다

국회의원 선거 자금으로 사채업자 담보 넘겨

개성 거상 손세기 넘어가 아들 손창근 옹이 2010년 국립박물관에 무상으로 기탁함

1949년 위창이 소전의 청으로 이시영 정인보 청나라 인사 17명이 세한도에 제발을

쓰며 한시 한 수를 남겼다

 

阮翁尺紙冶延譽 京北京東轉轉餘

人事百年眞夢幻 悲嘆得失問如何

 

완당의 그림이여 그 명성 널리 떨쳐

북경 동경 전전 하였네

인생백년 참으로 몽환 같으니

비탄과 득실 따져 무엇 하겠는가

 

여초 김응현은 신안동김씨 김상헌 후손으로 형님 일중 김충현 선생과 형제 서예가로 일중은 반듯한 서체 여초는 호방한 서체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여초는 인사동 사랑방 터주 대감 역을 한동안 하였다

 

위창 집안은 조선조 중종 때까지는 양반신분 그 후로 역관 의관으로 중인 신분

조부 오응현 역관 최고직인 정3품 당상역관과 종2품 명예직 지중추부사

부친 오경석 당상역관 중국 사신 무역으로 부를 이뤄 신서적 구입 개화파 정신적 기반

중인 출신 학자 대치 유홍기 후원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홍영식 유길준 등에게 전수

1876년 강화도조약 막후역할 보수파 역적으로 몰려 변장과 칭병으로 1년 후 병사

위창은 자연스레 개화파와 교류 20세 역관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우리나라 최초 신문 한성순보 기자 겸임

우정국 통신국장 1897년 일본 문부성 초청 1년 동안 재일본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

1902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 망명 중 손병희 권유로 천도교 입교

손병희 참모로 만세보발행 등 국민계몽운동에 힘썼다

3.1혁명 천도교 대표로 민족대표 33인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 견지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의원

1946815일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받음

백범 김구 암살 국민장일 때 장의위원장 195390세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민족의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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