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동강 하정웅 이사장

하정웅 이사장 스토리

정종배 2017. 4. 10. 13:05

하정웅(1939~     )

 

  나는 믿는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을.”

 

하정웅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하지만 숱한 고난과 시련의 순간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왔다. 그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또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늘 그가 생각하는 메세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해왔다.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아온 하정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고 또 그의 삶 속에서 어떤 가치들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1장 인생을 바꾼 만남

 

전화황 선생과의 만남

스물다섯의 하정웅은 이스턴 백화점 화랑에서 무카이 준키치(向井潤吉)의 그림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화랑에 도착해 무카이 준키치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화랑 한 쪽에 묘한 작품이 하나 걸려있었다. 몽환적인데다 신비로운 보살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그는, 오래도록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 그림은 바로 전화황 작가의 작품인미륵보살이었다. 하정웅은 그의 자서전에서 미륵보살을 보았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한없이 온화한, 그러면서 한없이 아름다운 자태의 미륵보살이 기도 중이었다. 미륵보살은 마치 하정웅을 위해 기도하는 듯 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륵보살은 그를 비롯해, 온갖 상처로 몸부림치는 약자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또 한참을 마주하고 있으니, 미륵보살의 기도는 상처 입은 사람들만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미륵보살은 그를 위하여, 그는 타인을 위하여, 타인은 그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륵보살 위로 그의 어머니가 겹쳐졌고, 그리운 아키타가 떠올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조국이 어른거렸다. 하정웅은 '어쩌면… 이런 기도야말로 세상을 구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서, 어느새 기도를 올리게 된다.

―하정웅 자서전 중

 

  하정웅은 그날 바로미륵보살작품을 구입하였다. 하지만 작품을 산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미륵보살을 그린 작가 전화황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작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황 선생을 수소문한 그는, 전화황 선생이 재일한국인 1세 화가이고, 교토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전화황 선생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을 만들어 교토로 내려갔다. 교토역에 내리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무섭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를 뚫고 전화황 선생의 집에 도착하니, 선생의 집은 이미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변변한 세간을 찾아볼 수 없는 빈한한 집이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중이었는데,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것은 작품들이 빗물을 피하지 못한 채 흠뻑 젖어버린 것이었다. 집 안에서 비를 맞고 있는 전화황 선생과 그의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하정웅은 전화황 선생을 모른 척 하면 안 되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미륵보살이라는 그림으로 처음 만난 전화황 선생을 직접 대면하고 난 뒤로 하정웅은 전화황 선생의 그림 세계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 미륵보살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수집한 작품이었고, 전화황 선생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후원을 한 화가가 되었다. 그렇게 미륵보살은 그의 미술 작품 수집의 출발이자 원형이 되었다. 하정웅은 훗날 돌아보면, 전화황 선생을 만난 후부터, 그 분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라고 회상하였다.

  하정웅이 그토록 전선생을 흠모했던 이유는 그의 인생과 작품에 담겨있는 강렬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전화황 선생의 그림에는 우리 부모 세대들의 험난한 삶, ‘재일(在日)’이라는 정체성, 그가 헤쳐 온 고난의 시간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재일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뇌와 고통,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과 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화황 선생의 예술 세계와 인품에 감동받은 하정웅은 그의기도의 예술 40의 대표작품들과 주요작품들 92점을 수집했다.

  전화황은 일본에서 저명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미술계는 그를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전시회는커녕 작품이 소개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평안남도 출신인데다가,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이력이 있어서, 한국 방문이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완화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낸 첼리스트 전봉초 선생과 전화황 선생이 친형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생의 한국 방문은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한국방문을 주저했던 사람은 전화황 선생 자신이었다. 선생은 국적을 한국으로 고쳐서 한국 땅을 밟는 것이, 지금까지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 아닌지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선생을 위로하고 설득했다. 2~3년 간의 설득에도 선생은 좀처럼 한국방문을 결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황 선생은 하정웅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매일 밤 꿈에 그 아이가 보여. 고향에 두고 온 내 딸이 나타나…. 그래서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고뇌관음을 그렸어.”

 

괴로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선생을 보며 그도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쏟았다. 조국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재일한국인들의 고통을, 선생의 눈물이 대변하고 있었다.

 

1979 1 13.

 

  전화황 선생은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40년 만의 귀향이었다. 하정웅은 기꺼이 선생의 고국방문 길에 따라 나섰다.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뜨겁게 재회하던 모습, 선생 눈에 흐르던 기쁨의 눈물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족들을 만난 후, 진작 올 걸 그랬다며 어린아이처럼 웃던 선생을 따라서 그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선생은 일년에 한 두 번씩 한국을 방문하였다.

 

  하정웅은 선생의 예술 세계를 한국에 꼭 알리고 싶었다. 전화황 선생 같은 분이 조국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 전시를 적극적으로 주선했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1982, 그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져서전화황 화업 50주년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교토시립미술관에서 출발해 도쿄, 서울, 대구, 광주를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전화황 화업 50주년 전시회는 해방 후 재일한국인 화가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또 대규모로 소개했던 뜻 깊은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한국미술계가 재일한국인 화가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전화황 선생이 한국 미술계에 알려지고 난 뒤, 1996 10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전화황전을 다시 한 번 대규모로 기획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그가 그린 대표작품 92점을 전시할 계획이었다. 그 해 9월 중순, 그는 선생께 연락을 해서 전시 기간 중 꼭 한국을 방문해 달라 부탁을 드리고 선생은 흔쾌히 승낙한다.

 

  그런데 그 해 10 8, 10시경 하정웅은 선생의 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황 선생님이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정웅은 돌처럼 굳어졌다. 허망함과 비통함이 밀려와서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향년 87. 120살까지 거뜬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던 선생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1996년 광주시립미술관 전시회는 전화황 선생의 유작전이 되어버렸다. 선생은 이승을 떠났지만, 그는 그 후에도 선생의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97년 제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전화황 기념전을 주선했고, 그 전시회를 통해 전화황 예술의 진수를 국제미술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선생의 작품을 보러 오는 인파의 행렬을 보며 하정웅의 가슴에는 기쁨이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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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황 선생은 1909 26살 때 니사다 덴코우의참회의 생활을 읽고 출가해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탁발수행을 거쳐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소유를 실천하는 단체잇토엔에 들어가 생활했다. 잇토엔에서 교토 화단의 대가인 스다 구니타로를 만나면서, 전화황의 그림 세계는 더욱 깊어진다. 1947잇토엔 풍경으로 교텐상을, 1951년에는군상으로 행동미술상을 수상했다. 1953년에는 행동미술협회 회원이 되었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갓난이의 매장’, ‘피난민’, ‘아리랑 고개’, ‘재회’, ‘어느 날의 꿈’, ‘총살등이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조국의 참상을 접하고 사회적인 주제를 강렬하게 표현한 저항성 강한 작품들이다.

  전화황의 그림은 1960년대부터 새로운 경향을 보인다. 종교적인 정신성이 구현된불상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륵보살’, ‘백제관음’, ‘아수라상등의 작품에는 심오한 정신세계가 담겨있다. 그리고 꽃의 아름다움 보다는 꽃의 정기를 그리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모란’, ‘잡초 속의 꽃등도 그렸다.

  사람들은 전화황의 작품에서 인간의 번뇌와 해탈을 벗어나고자 하는 구도의 정신을 느낀다고 한다. 출가의 경험이 있는 그의 작품에 불교적 색채가 묻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종교를 뛰어넘는 예술을 꿈꾸었다. 전화황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기독교 신자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불상을 그릴까요? ()이나 불()을 초월하는 우주의 의지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국이 있다면, 현세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토가 있다면, 그 정토 또한 현세에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화황 선생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휴머니스트였다. 1982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때였다. 전시회에 대한 걱정보다,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때,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기아 어린이들의 실태를 호소하며 모금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10만 명 서명을 목표로 일본 전역을 뛰어다닌 일도 있다.

한편 그는 전쟁의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분노했다. 그리고 평화를 소망했다.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기를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소망을 성취할 때까지 자신은 죽을 수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이니 북이니 서로 갈라져서 싸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나는 세계가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재일한국인으로서 통한의 한을 표출하기보다는, 순수한 인류애와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그한을 승화시켰다.

 

이우환 화백과의 만남

  이우환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이자 잘 알려진 뛰어난 한국 작가다. 2011년 이우환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형 회고전 '무한의 제시 Making Infinity'를 열었다. 그 전시회에서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조각, 회화, 드로잉 등 90여 점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한국 작가는 백남준 외에 이우환이 유일하다. 2010년에는 일본 나오시마에서 이우환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이우환 미술관은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한국에서도 이우환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부산과 대구에서 각각 이우환 미술관을 세우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우환은 그야말로 한국과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이자 블루칩 작가다.

맨 처음, 하정웅은 이우환 화백을 독자로 만났다. 잡지에서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본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전화 통화를 하고, 2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처음으로 작가를 직접 대면했다.

  이우환은 1936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가 대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하이데거(M. Hidegger)와 메를로 퐁티 (M. Merleau-Ponty)를 공부했고,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우환은 자신이 심취했던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사상을 수용해 독특한 이론과 그만의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 절제와 여백을 기본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나무와 돌, 철판 등을 가공하지 않은 채 설치하거나, 물체를 최소화해서 극미(極微)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등, 1970년 일본 미술계를 강타했던 모노파(物派)를 선도했다.

  1970년대 이우환은 일본 모노파를 이끈 거장이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난해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 난해함을 탁월한 예술성으로 풀어낸 것이 당시 최고 권위의 미술잡지미즈에였다. 1980미즈에잡지 12월호에 이우환 기사가 실렸는데, 특집기사가 꽤 많은 페이지에 걸쳐 실리게 되었다. 표지 역시 이우환의 작품이었다. 하정웅은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미즈에를 발견한다. 하정웅은 잡지에 실린 작품을 보고 그 때까지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던 작가 이우환에게 큰 감동을 받게 된다.

  불필요한 표현을 배제한 채 사물을 최대로 단순화시킨 이우환의 작품에는 동양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있었다. 무심한 듯 배치돼있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조형미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동양의 전통과 현대의 미니멀리즘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세계로존재하는 모든 것은 점에서 시작된다.’ ‘의미 있는 것은 그려진 게 아니라 공간이다.’는 심오한 그의 철학엔 무릎이 쳐졌다.

  이우환의 작품은 교토에 있는 사찰 료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절제와 여백을 통해 무한대의 공간을 선사하는 료안지의 석정은, 점과 선으로 무한대의 공간을 느끼게 하는 이우환의 작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정웅에게 이우환의 작품은 어린 시절 자신의 집 뒤에 있던 조선인 무연고 묘를 떠올리게 했다. 아키타 오보나이 역 근처 그의 집 바로 뒤에는 큰 사찰 도겐샤(東源寺)가 있었다. 도겐샤에는 수 백 개의 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름이 없는 묘는 단 하나뿐이었다. 커다란 돌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던 묘.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그에게 그 묘 앞에 놓고 절을 하고 돌아오라고 시켰다.

 

  왜요? 어머니. 거기엔 커다란 돌만 있는데….”

  조선인들이 묻힌 묘다. 그러니 우리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니. 이 음식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하고 오너라.”

 

처음엔 어머니가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나중엔 애잔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그래서 커다란 돌이 덩그러니 놓인 이우환의 설치 미술 작품을 봤을 때, 집 뒤에 놓여있던 외롭고 커다란 무연고 묘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이 그의 가슴을 두드리는기도로 느껴진 이유이기도 하다.

  하정웅은 서점에서미즈에를 산 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미즈에의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500부 정도 남아있다는 답변에 곧바로 500부를 전부 사들이겠다고 했다.

  그 때 하정웅은 사이타마 새마을 미술회의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미술회 회원들은 물론 알고 있던 화가, 화랑 관계자, 학예사들에게 이우환 특집 기사가 실린 미즈에를 선물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이우환을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직접 아는 사이도 아니고, 부탁을 받은 일도 없는데다, 잡지에 실린 기사만 보고 이우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 그를 주위에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뜻밖에 이우환 선생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제 기사가 실린미즈에가 필요해서 출판사에 전화했더니, 하정웅 선생께서 전부 사셨다고 하네요. 혹시 지금도 그 미즈에를 가지고 있는지요. 있다면 10권 정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주저 없이 미즈에 20권을 보내주었다.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이우환 선생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1984년 도쿄에서 국제예술인대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우환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우환 선생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조용한 자리로 옮겨 이유를 물어보니, 선생은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유럽에 가서 활동을 해야 하는데 경비가 턱없이 부족해 많은 고민 끝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가 잡지에 실린 작품만 보고도 흠뻑 빠진 작가였으니, 하정웅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예상보다 좀 더 필요할지 모르니, 제가 700만 엔을 지원하겠습니다. 대신 선생님의 작품을 수집하게 해 주십시오.”

 

그 만남이 인연이 되어, 하정웅은 가마쿠라에 있는 이우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게 된다. 어떤 작품들을 선택하겠느냐는 선생의 물음에,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의 예술 세계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컬렉션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는 한 작가의 작품을 수집할 때 시간성과 역사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작품의 변화는, 곧 시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시대 순으로 수집하면, 작품의 흐름은 물론, 시대의 역사를 꿰뚫을 수 있다. 이우환 선생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부족한 부분을 제작해서 내용을 갖추겠다고 약속한다.

  몇 달의 시간이 흘러, 선생의 작품들이 그의 집으로 도착했다. ‘선에서 From Line’, ‘점에서 From Point’, ‘바람과 함께 From Winds’를 포함해서 연필과 수채 드로잉, 목판화 등 모두 13점이었다.  그리고 이우환 선생은 그가 잡지 미즈에를 보내준 것에 대한 답례라며 10호 크기의 작품선에서 From Line’도 따로 보내주었다.

  첫 대면 이후 이우환 선생은 유럽으로 떠났고,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되었다. 하정웅은 이선생과 계속 만남을 가졌고 인연을 이어갔다. 하정웅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우환 선생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화가이자 철학자이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섬세한 소년 같은 사람이다. 이우환 선생을 알고, 선생의 작품들을 수집했던 일, 그리고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할 수 있었던 일은 크나 큰 행운이었다. 그의 작품이 일류(一流)이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 이전에 사람이 일류(一流)기 때문이다.”

―하정웅 자서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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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환 선생은 1936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획기적 미술운동인 모노파[物派]의 이론과 실천을 주도하며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61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73~1991년 도쿄 다마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카셀도큐멘타 등 권위 있는 국제전에 참여했다.

  1994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무디마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97에는 프랑스 파리의 국립 주드폼므(Jeu de Paume) 갤러리와 서울의 갤러리현대, 박영덕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 밖에도 일본 요코하마미술관에서 열린 〈전후 현대일본의 전위미술〉(1994), 베네치아비엔날레 특별전(1995),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메이드 인 프랑스〉(1996), 서울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프로젝트 8(1996) 등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와 일본·독일의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으로부터》(1984), 《동풍》(1974), 《관계항》(1988), 《조응》(1988), 《점에서》(1975), 《상응》(1998) 등이 있다.

 

2장 기다림의 미학

 

추적자의 기질 기다림

  추적은 어린 시절 하정웅이 살았던 다자와 호수()에서 시작된다. 아키타(秋田)현 동부 중앙에 위치한 다자와 호수는 일본에서 가장 깊은 호수다. 둘레가 약 20, 수심은 무려 423.4m나 된다. 맑고 투명한 물빛은 보석처럼 빛나고 주변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절경을 만들어낸다. 혹한의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

  다자와 호수에는 호수를 지키는 여신다츠코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오래 전 다츠코라는 처녀가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직하고 싶다고 오쿠라산(大藏山)의 관음에게 빌었다. 보름날 밤, 갑자기 산이 부서져 내리며 물이 가득 차올랐는데, 그 때 차오른 물이 다자와 호수가 되었다. 다츠코는 용으로 변하여 다자와 호수의 주인이 되었고,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다츠코를 다자와 호수의 수호신으로 섬기면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 에메랄드 빛 호수 앞에 황금색 동상이 서있는데, 최근에 만든 이 동상은 호수의 수호신 다츠코를 형상화한 동상이다. 다자와 호수와 다츠코 동상은 한국 드라마아이리스의 주요 배경으로도 등장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다자와 호수에는 황금색 다츠코 동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동상이 있으니, 바로 히메관음(姬觀音)상이다. 이 히메관음상은 한국의 근대사와 관련된 은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하정웅은 열아홉 살 때 아키타를 떠난 후, 마흔 살이 넘어서야 아키타를 다시 찾게 된다. 당시에 그는 다자와 호숫가에 있는 호텔에 묵었는데 호수를 산책하다 문득 이곳에 다츠코 상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호수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호수 주변은 수풀로 가득 덮여 있어 어느 곳에 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헤매고 다닌 끝에, 호수와 마주 서있는 상 하나를 발견했다. 외롭게 호수를 바라보는 여인상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왠지 오랫동안 그녀가 그를 기다려 온 것만 같았다. 상을 살펴보니 히메관음(姬觀音)’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상의 이름을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구나.’

 

당시 하정웅은 다츠코 상이 사실 히메관음상이라는 깨달음 말고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 다시 다자와 호수를 찾았을 때, 그는 히메관음상 쪽에서 걸어 나오는 외숙부를 만나게 된다.

 

  히메관음상에 참배를 하고 오는 길이다.”

  참배요?”

  그래…. 늘 하던 일이지.”

 

  하정웅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의 외숙부가 히메관음상에서 늘 참배를 해왔다면, 그 상에 뭔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외숙부를 보낸 후 정신없이 히메관음상 쪽으로 내려갔다가 못 보던 안내판을 발견한다. 안내판에는 히메관음상의 건립 유래에 대해 적혀있었다.

 

 히메관음- 1939, 센보쿠 평야를 개척하고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다자와 호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에 호수에서 사라져가는 물고기와 호수의 신 다츠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깨끗한 재물을 모아 히메관음을 건립한다. 신이시여. 바라옵건대 큰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1939 11월 사코 불교회. 다자와 호수 마을

 

  1981, 다자와 마을 관광과에서 호숫가에 방치되어있는 히메관음상 주변을 정리하고 이 안내판을 세웠다고 했다. 조각가 아쯔야나기고헤이(1911-1956)가 이 상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태어난 해인 1939년에 이 상이 세워졌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하정웅은 이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호수의 물고기 정도를 추모하고자 이 아름다운 히메관음상을 세웠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도대체 히메관음상은 왜 세워진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풀고자 마을 관청을 찾아가 기록을 살펴봤지만 히메관음상의 건립유래는 남아있지 않았다. 1981년에 세운 안내판에만 그 유래가 적혀있을 뿐이었다.

  히메관음상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한 하정웅의 추적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는 히메관음상이 다자와 호수 도수터널 공사 때 숨진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외숙부의증언 아닌 증언때문이었다. 그의 외숙부는 오보나이 발전소 공사장에서 조선인들을 관리하는 담당자로 일했던 분이다. 그렇다면 공사장 상황과 조선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의 외숙부가 비록 그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은 없었지만 히메관음상을 찾아가 늘 참배를 했다고 그에게 말했던 일, 그리고 언젠가 그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렀던 일 등을 생각해보니, 히메관음상과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는 뭔가 깊은 관련이 있는 듯 했다. 언젠가 그의 외숙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스무 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손가락으로 꼽았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인 무연고 묘의 존재였다. 그의 집 뒤에는 사찰 도겐샤(東源寺)가 있었고, 사찰 안에는 조선인 무연고 묘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그에게 그 무연고 묘 앞에 놓고 절을 하고 돌아오라고 시켰다. 하정웅은 시키는 대로 했지만 늘 궁금해했다.

 

  이분들은 왜 일본에 왔을까? 왜 이름도 없이 이곳에 묻혔을까?

 

히메관음상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면서 하정웅은 호수 근처에 있는 사찰 덴타쿠지(田澤寺)를 방문했다. 그곳에도 조선인 무연고 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잡초 무성한 사찰 언덕에서 그 묘를 발견했을 때,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찰 기록에는 무덤의 주인이반도인이라고 기재되어있을 뿐, 몇 사람이 이장되었는지, 언제 이장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덴타쿠지에 조선인 묘지가 있다는 것은 다자와 호수 부근에서 조선인이 숨졌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조선인들이 이곳에 묻혀있다면 그들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숨졌는지,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묻혔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들의 존재와 죽음을 밝히는 일은, 누군가 감추려고 했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고, 그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다자와 호수 일대에서는 수력발전소 건설이 이루어졌다. 건설 현장엔 그의 아버지를 포함해, 많은 조선인들이 일을 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 중에서는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연은 어린 시절 다자와 호수 근처에서 살았던 하정웅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 어른들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전쟁 뒤 무서운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룬 일본은, 일본에게 불리한 과거사를 지우고 또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다자와 호수 주변에서 벌어졌던 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를 밝히려고 애썼지만, 추적에 뛰어든 순간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때만 해도 아키타에는 조선인 강제 연행의 실태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료가 없으면 증언이라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수력발전소 건설과 관계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만났지만,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증언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만에 출장을 간 하정웅은 우연히 이토 쇼키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토씨는 그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 자신이 전쟁 전에 센다치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현장감독을 지냈다고 말해주었다. 하정웅은 무릎을 쳤다. 이토씨가 공사장 현장감독으로 일했다면,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토씨는 하정웅의 부모님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고 귀한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와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센다치 발전소의 공사감독이셨으면, 조선인 징용자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겠네요?”

  그런 분들 많았죠…. 아키타에 들르세요. 다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이토씨와 하정웅은 아키타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아키타에서 다시 만난 이토씨는 대만에서 만날 때와 분위기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표정과 태도, 말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는 자신이 일했던 센다치 발전소 공사 현장에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없었고 희생자들 또한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하정웅이 집요하게 물어보자, 그는 덴타쿠지에 조선인 무연고 묘가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들어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하정웅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토씨와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하지만 잡아떼는 사람을 상대로 더 이상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토씨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이토 쇼키치씨처럼 처음에는 모든 사실을 알려줄 듯하다가, 다시 찾아가서 증언을 들으려고 하면 갑자기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정웅은 왜곡된 진실을 밝히는 일이 그토록 힘들다는 사실을 이 일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달라졌다. 1990년 대 중반, 아키타현이 정보공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 6월에는아키타현 조선인 강제연행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진상조사위원회의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센다치 발전소 건설 공사 현장에는 307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단 한 명의 조선인도 없었다는 현장 감독 이토 쇼키치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정웅은 이 징용 역사의 추적을 위해 수많은 증언자들을 쫓아다녔다. 그 중 그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군 감동의 증언자는 한국의 전라남도 영암에서 만났던 조사현 옹(1999년 당시 86)이다.

  1999년 일본 후생성에 보관되어 있던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1946)’ 명부를 조사하던 중, 하정웅의 이목을 집중시킨 부분이 있었다. 아키타 센다치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307명의 조선인 중 299명이 전라남도 출신이고, 그의 부모님의 고향인 영암 출신도 12명이나 되었다. 그는 혹시 생존해 계신 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 영암에 있는 그의 친척에게 12명의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참 후에 답변이 왔다. 삼호면에 조사현 옹이 생존해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사현 옹은 307명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단 한 명의 생존자였다.

  1999 3 2, 하정웅은 부푼 가슴을 안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조사현 옹에게 한걸음에 달려온 이유를 밝히자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터졌다.

  1944 7월 한 밤 중, 면사무소 직원이 들이닥쳐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했다.

 

  영산포에서 배를 탔는데 나주랑 보성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300명도 넘었어요. 부산을 거쳐서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다음, 기차와 트럭을 번갈아 타고 센다치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한 70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우리 조에 수용되었죠. 우리는 모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나는 몸집이 작은 편이라 식사 당번도 맡았지만, 주로 공사 자재나 흙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가혹한 노동이 끊이지 않았던 공사장, 늘 배를 곯았던 사람들, 도망치다 잡혀서 심한 고문을 당해 행방불명된 동료들, 공사장에서 다쳐서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16살 고흥 청년 등 응어리진 사연들을 탄식과 분노, 눈물을 함께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정웅은 조사현 옹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조사현 옹이 그 때까지 살아계신 것에 감사했고,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묻힐 뻔했던 귀한 이야기들을 증언해주신 것에 또 감격했다. 당시 일본 아사히 TV를 비롯해 한일 양국의 여러 언론들이 조사현 옹과 그의 만남을 방송과 지면에 소개했다.

 

  다자와 호수에서 일어났던 조선 출신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문서에 실제 생존자까지 확보했으니 아키타에서 벌어졌던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로 드러났다.

  한국인 강제노동의 역사는 이러했다. 1938년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다자와 호수 주변에서는 오보나이 발전소, 센다치 발전소, 나쓰제 발전소, 진다이 발전소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 중 1938년에서부터 1940년까지 2년에 걸쳐 다자와 호수에서 오보나이 발전소까지는 도수 터널 공사가, 그리고 다마가와와 센다치 강에서는 두 개의 도수로 공사가 실시되었다. 본래 필요한 인력이 7천 명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필요인력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4천여 명이 공사를 담당했다. 이 공사에는 일본인들은 물론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조선인 노동자들은 6백여 명에 달했다.

  당시 다자와 호반에는 조선인 합숙소가 있었다. 하정웅의 부모님도 다자와 호수 근처 공사장에서 일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기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일본인들은 어려운 작업과 위험한 작업이 있으면 거의 조선인들에게 맡겼다. 조선인들을 소나 말처럼 부리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게 살인적인 노동과 추운 날씨, 식량부족으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어린 시절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조선인 노동자들이 소를 때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영양실조에, 황달 증상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동포들의 참상을 볼 수 없었던 한 조선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짐을 나르는 소 한 마리를 죽였다.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나눠 먹였다고 한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처럼 히메관음상의 진실도 밝혀져야 했다. 그는 히메관음상 근처에 있는 사찰 덴타쿠지를 찾아갔다. 그가 주지 스님에게 히메관음상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스님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대 주지 스님이 살아계실 때, 도수터널 공사장 숙소에서 조선인 장례를 두 번 치른 일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신이 주지 직을 물려받은 후부터는 히메관음상 주변을 정리하고, 법요를 열어서 위령해왔다고 했다. 그리고 다자와 호수 마을의 사코 불교회에서도 1984년부터 매년 4월에 법요를 열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사코 불교회를 찾아가 히메관음상에 대해 물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사코 불교회 회원들은 그가 절박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지만, 우리들도 히메관음상이 도수 터널 공사 때 희생된 조선인 위령비가 아닐까 생각하며 지켜왔습니다.”

 

  히메관음상에 대한 하정웅의 추측은 터무니없는 공상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진실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지만, 히메관음상이 조선인 위령비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가장 강력한 증거가 덴타쿠지에서 발견됐다. 그는 덴타쿠지를 방문할 때마다 주지 스님에게 히메관음상이 만들어질 당시의 문서가 있지 않겠느냐며 건립취지서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주지 스님은 곤란해 하면서 보여주지 않았다.

  1991 6 12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 하정웅은 서울에서 날아온 중앙일보 김복기 기자와 함께 다시 한 번 덴타쿠지를 찾았다. 흠뻑 비를 맞은 채 주지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지 스님이히메 관음상 건립 취지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기대 때문이었는지, 긴장 때문이었는지, 문서를 받아 든 하정웅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주지 스님이 건넨 문서는 1939년에 작성된 건립취지서가 분명했다. 내용을 살펴보니, 1939 5, 다자와 호수 근처에 있는 네 개의 마을, 네 개의 사찰 주지들이 발기인이 되고 사코 불교회를 조직하여, 공사관계자를 비롯해서 네 개의 마을 유지 200명을 대상으로 모금을 벌여, 히메관음상을 건립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건립취지서 부언에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 히메관음상 건립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며, 개안식을 열면서, 각 회사 관계자로 하여금 그 직무로 인해 고귀한 목숨을 희생한 자의 추도 위령 조회식을 거행하여, 명복을 빌 것을 이에 아울러 부언함- 1939 5월 사코 불교회

 

  조각났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일제 식민 치하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왔고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스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자 다자와 호수 마을 사람들도 이를 애통해했다. 그리하여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마음을 모아 위령비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히메관음상이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분명, 가슴 아픈 조선인 수난의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히메관음상이 처음 세워질 때 이를 추진한 다자와 호수 마을 사람들의 고귀한 마음이다.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방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려 했던 따뜻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이 비통한 역사와 더불어 세상에 널리 알리고 오래도록 전해야 할 위대한 인류애가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동의 역사를 감추고 뒤틀려고 했던 추악한 시도도 또한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정웅은 히메관음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으니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추도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추도식이 진행되려면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했다. 추도식이 정기적으로 열릴 수 있도록 하정웅은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다.

  1990년 추분. 한국대사관의 정형수 공사와 다자와 호수 마을 당국 및 유지, 아키타현의 민단 동포들과 조총련 동포들까지 약 100여 명의 사람들이 히메관음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희생된 조선인 추도 위령제를 엄숙하게 거행했다. 지금까지도 매년 추분 날이면 히메관음상과 덴다쿠지에서는 추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하정웅은 추도 위령제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제대로 기록하고 알릴 수 있는확실한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세의 거울로 삼을좋은 마음의 비를 히메관음상 옆에 세우고자 했다. 이 비를 건립하기까지는 그러나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10년 동안 다자와 호수 마을, 사코 불교회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좋은 마음의 비를 히메관음상 옆이 아니라, 덴타쿠지 묘지 뒷산의 야트막한 언덕에 건립하게 되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좋은 마음의 비건립 때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비를 세우기 위해좋은 마음모임이 만들어졌고, 다자와 마을 지역 유지와 아키타현 내 재일한국인들이 기부금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많은 마음들이 모여 비가 세워졌고, 비명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1940년 완성된 오보나이 발전소 다자와 호수 도수 공사에서는 다마가와, 센다치 강, 다자와 호수에서부터 오보나이 발전소까지 세 줄기의 도수로가 굴착되었다. 지극히 난공사였던 이 사업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위험을 무릅쓰고 일했다. 이 사업에 이어 계속된 센다치 발전소와 나쓰제 발전소 댐 공사에서는 1944년 이후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들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이 땅에는 영원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의 흙이 된 조선인 무주고혼이 잠들어있다. 가장 불행한 시대의 통한의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정화하고자 뜻있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한다.

- 1999 11 11. 다자와 호수 마을 좋은 마음 모임 회장 사토 유이치

 

  아키타 지역의 조선인강제징용의 역사를 밝히는데 10여 년. 히메관음상의 비밀을 푸는데 10여 년. ‘좋은 마음의 비만 건립하는데 10여 년. 다자와 호수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바로 잡는데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수 십 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닐 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역사, 잘못된 역사를 되찾는데 수 백 년, 수 천 년이 걸리는 일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믿는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을.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이를 감추려고 했던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은폐를 방관했던 사람들에게 추상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엄혹한 시절이든, 태평성대든…. 어떤 시대에도 감춰진 역사를 밝히려 했던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수많은 추적자들 중 한 명일뿐이다. 짧지 않았던 추적의 시간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추적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자질, 그것은 바로기다림이다.

 

아사카와 형제의 기념관

  하정웅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기요사토를 여행한 뒤, 그곳이 인연이라는 생각을 지속하게 된다. 그의 사업이 안정되면서 하정웅은 기요사토에 있는 작은 땅을 매입해 아담한 산장을 지었다. 그리고 그 산장에은하장(銀河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은하장을 찾아 화초를 가꾸고 원고를 쓰며 미래를 구상했다.

  기요사토에 제 2의 거처까지 마련하고 나니 그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폴 러쉬는 진작부터 기요사토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비해 아사카와 다쿠미의 존재는 이곳에서 까맣게 잊혀져버린 상황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기요사토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 아사카와 다쿠미와 아사카와 노리타카 형제의 기념관을 지어서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뜻을 세우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 하늘은 어떤 형태로든 이를 도와준다는 하정웅의 믿음처럼 이번에도 그의 오랜 염원은 이루어져 20018 15, 기요사토에 아사카와 형제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는 아사카와 형제의 공적과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관을 비롯해 도서관과 향토자료관, 공연장 등이 이웃하고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아사카와 형제의 생애를 담은 기록영상물과 한국 도자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이 중 특히 다쿠미 일기장은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데, 이 일기장은 다쿠미가 1922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꼼꼼하게 기록한 자료로 400자 원고지 460매에 달하는 분량이다.

 

3장 예술에 대한 사랑

 

그림과 함께 성장하다

  하정웅이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오보나이 소학교 때부터였다. 소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그릴 일이 많아졌다. 소학교 시절의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동생들 돌보는 일도 까먹고, 가축들 밥 먹이는 일도 잊을 만큼 정신 없이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운동회, 학예회, 소풍 등 학교행사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학예회 날짜를 받으면 가장 열심히, 가장 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린 학생도 그였다.

 

  처음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아키타의 자연을 그렸다. 그러다가 차츰 학교도 그리고, 친구도 그리고, 가족도 그렸다. 그림 그릴 일들이 많아지자, 그림이 더욱 좋아졌다. 그림만 그리면 어떻게 시간이 가고 오는지 몰랐다.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그림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집에서 정신 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동생들 돌보는 것도 잊고 돼지 밥 주는 것도 잊어버려, 귀가한 부모님께 혼 나기도 했다.

 

중학교 때 만난 다구치 시세이 선생님은 소학교 때 싹튼 그림에 대한 하정웅의 열정에 기름을 부어 주셨다. 다구치 선생님은 가끔씩 도쿄에서 개인전까지 여는 화가였는데 어린 하정웅은 그 분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휴일이면 선생님은 자택에 있는 아틀리에를 개방해서 그림 좋아하는 학생들을 불러 함께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 모임에 빠지지 않는 단골 학생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하게 된다.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번듯한 직장에서 학생들을 뽑아가는 아키타 최고의 명문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진학한 일은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등하교부터 전쟁이 벌어졌다.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는 시내에 있어서 기차를 타고 통학해야 했는데, 오보나이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는 하정웅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제 시간에 등교를 하기 위해서는 새벽 5시 30분에 첫차를 타야 했다. 오보나이 역에서 아키타 시내 역까지는 편도 세 시간 거리.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 기차를 세 시간 동안 타야 했다. 그리고 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려면 또 30분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학교를 오가는 하루 여덟 시간씩 걸다. 아키타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센슈 공원이 있었는데,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공원을 통과해야 했다.

  기차 통학을 하고 사시사철 공원을 누비다 보니, 자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산 많고 물 좋은 아키타의 자연은 하정웅에게는 거대한 캔버스와 다름없었다. 봄이 오면 수많은 꽃들이 일제히 봉오리를 터트렸다. 하정웅의 자서전에는 당시 그가 느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화장한 여인들이 수줍게 외출을 하는 듯, 아키타의 봄은 술렁거렸다. 녹음이 우겨지는 여름은 너무도 짧았다. 그래서 아쉽고 더욱 기다려졌다. 간토 마쯔리, 본텐 마쯔리가 끝날 무렵이면 산들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가을이었다. 단풍의 향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겨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10월부터 눈발이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첫 눈이 내리고 나면, 며칠 안 돼 아키타의 평원은 눈의 나라로 바뀌었다. 기나긴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아키타 사람들은 마치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살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만반의 월동준비를 했다. 그렇게 철마다 달라지는 자연의 얼굴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정웅 자서전 중

 

  그는 기차 안에서 세상을 배웠고, 학교를 다니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 시절 하정웅의 감수성을 살 찌웠던 일등공신은 아키타의 풍요로운 자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아키타현청 미술대회에, 다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 하정웅의 작품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이 떨어지고 몰래 보낸 하정웅의 작품은 입상을 한다. 대회에 입상한 고등학생은 그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하정웅은 그림으로 아키타현 교육장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크고 작은 그림 대회에서 상을 휩쓸 그림에 대한 그의 갈망도 깊어다.

 

좌절된 화가의 꿈

  그림에 대한 그의 갈망과 열정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시끄럽다. 이딴 걸로 입에 풀칠이나 할 거 같아? 그림을 그리면 밥이 나오니? 돈이 나와? 넌 우리 집안을 이끌 가장이다. 그런데 환쟁이라니! 딱 굶어 죽게 생겼구나. 제발 정신 차려라 이 녀석아.

 

  는 펄펄 뛰는 어머니를 더 이상 막아 서지 못했다. 학교 문턱조차 가보지 못한 부모님.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와서 온갖 고생을 한 부모님. 당신들의 고생이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부모님의 불안과 두려움, 고통을 알기에 어머니를 끝까지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하정웅의 앞에서 그의 그림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길로 강으로 내달려 그림도구들을 집어 던졌다. 평소 분신처럼 여겼던 붓들과 물감들이 시퍼런 강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으려던 그의 뜨거운 열망이 너울너울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의 고난과 역경의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부모님이 왜 하정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셨는지 알 수 있다.

 

  1939년. 하정웅은 히가시오사카(東大阪市)에서 태어났다. 1939년은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격동의 해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징용의 법제화, 창씨개명령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가 태어난 해의 긴박했던 상황들은 이후 그의 삶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정웅은 태어나자마자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과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 상황에 던져지게 것이다.

  하정웅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었다. 영암의 가난한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나고 자란 그의 아버지는 열여섯 살 때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그의 아버지와 동향인 그의 어머니는 열여덟 살 때, 아버지와 혼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오사카에서 살림을 꾸린 그의 부모님은 1939년 첫 아들인 하정웅을 낳았다. 부모님에겐 신혼의 달콤한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매매일을 어깨를 짓누르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가 태어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아키타(秋田)에 있는 외숙부로부터 이사를 권유 받았다. 일본 동북지방인 아키타에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두 분은 주저 없이 짐을 꾸렸다. 그만큼 생존은 절박한 문제였다.

  아키타에서 하정웅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온종일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노동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혹한의 겨울이었다. 험준한 산악이 많은 아키타에서는 10월부터 눈이 내렸다. 한 번 쏟아지면 1미터 이상 쌓이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일 년의 반 정도를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키타로 왔는데, 오히려 더 극심한 가난과 추위로 빠져들었다.

  견디다 못한 하정웅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두 살배기인 하정웅을 데리고 전라남도 영암으로 향한 것이다. 당시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진저리를 쳤다.

 

  “아키타 생활이라는 게…. 가난하지, 춥지, 험한 일 투성이지, 말도 통하지 않지…. 정말 지긋지긋했다.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머니의 회상

 

  하정웅의 어머니는 조국이라면, 게다가 고향이라면, 어떻게든 아들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려 일주일 이상 걸려서 도착한 영암, 그의 어머니는 꿈에 그리던 고향에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두 살 배기 아들만 달고 돌아온 어머니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친척들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영암에 도착한 뒤, 어머니는 자신이 홀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듬해, 그의 어머니는 영암에서 여동생을 낳았다. 따뜻하고 말도 통하는 고향이었지만, 여자 혼자 남편 없이 아이 둘과 사는 건 막막했다.

  하정웅이 네 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가슴에는 여동생을 안고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단단히 부여잡은 채 다시 짐을 꾸려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향했다.

아키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센다치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터였다. 당시 아키타에서는 수력발전소 개발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 공사를 위해,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왔는데, 대부분 강제징용자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유노동자였지만 강제징용자들과 처지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날마다 제방으로 나가 맨손으로 시멘트와 자갈을 주웠다. 자갈이 사오십 킬로그램 정도 모이면 돌을 등에 지고 공사현장으로 날랐다. 노동은 가혹했지만, 임금은 형편없이 낮았고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정웅이 일곱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족들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수력발전소 건설이 완공되어 일할 곳이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는 바로 짐을 쌌다. 입에 풀칠 할 곳을 찾아 온 가족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험난한 시간이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묘한 풍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 통치가 끝을 향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한국인들이 모이는 자리들마다 희망과 욕망의 수군거림이 새어 나왔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오사카에 있던 모든 한국인들이 그랬듯, 그의 아버지도 부푼 가슴을 안고 귀국을 서둘렀다. 먼저 빈한한 가재도구들을 죄다 모아 영암으로 부쳤다. 그리고 부지런히 귀국선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아버지는 귀국선 표를 구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부터 미리미리 손을 써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표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짐은 진작부터 고향에 도착해 주인을 기다렸지만 아버지의 순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패전과 함께 오사카의 거리는 참담한 폐허로 변해있었다. 타버린 공장들 사이사이로 철골들이 엿가락처럼 휘어 구부러져 있었다. 화재를 겨우 면한 집들은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다.

  귀국의 꿈이 물거품이 된 후 아버지는 연일 술을 마셨다. 술 외에는 아버지의 원통함과 분함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돈 없는 것이 분했고 힘없는 것이 서러웠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다 못한 어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산지에서 직접 농산물을 떼어 팔거나 탁주를 만들어 팔았다. 하정웅은 어머니를 따라 교토, 나라, 가와우치 인근의 농가를 쫓아다니며 채소와 쌀 등을 구입했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양손에 어머니가 들고 있는 짐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꿰찼고, 또 다른 보따리는 등에 졌다.

 

  1948년 하정웅이 아홉 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오사카에서 아키타로 또 다시 이주했다. 귀국을 포기한 채, 오사카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하정웅의 가족을 외숙부가 한 번 더 부른 것이다. 아키타의 추위는 가혹했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끼니를 연명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부초처럼 떠도는 나그네 생활을 접고 단단하게 뿌리내릴 터전이 필요했다. 그의 부모님은 마음을 다잡고 아키타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도 차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표를 구했고, 식구들은 오사카 역사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아키타 행 기차. 하지만 이 기차는 하정웅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의 기차로 다가왔다. 기차가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역사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기차에 먼저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한 끝에 그의 가족들은 간신히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기차 안은 이미 인산인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고함, 살기 띤 눈빛 등등이 뒤섞여 기차 안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정웅은 광기를 내뿜는 어른들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깜짝 깜짝 놀랐다. 그러다 잠시 그의 어머니의 손을 놓친 순간이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하정웅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어머니를 외칠 뿐, 한 마디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어깨를 잡아채는 억센 손길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였다. 잠시 미아 신세였던 그는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정웅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간간히 눈을 뜨면 차창 밖으로 낯선 풍경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끊겨있던 선로, 무참하게 파괴된 거리. 황량한 들판. 잠에서 깨어 마주친 현실이 끔찍한 악몽 같아서, 나는 자꾸만 눈을 감았다.

 

  세 번째로 이사 온 아키타, 오보나이(生保內) 역 근처에서 허름한 집을 구한 그의 부모님은 이번 이사가 제발 마지막이기를 바랬다. 늦가을인데도 이미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가재도구를 전부 영암으로 부친 탓에 그의 가족에게는 변변한 이불조차 없었다. 볏짚을 이불 삼아 깔고 덮었다. 하지만 얼기설기 얽혀있는 볏짚은 살을 에는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다만 견딜 수밖에 없었다.

  외숙부에게 고용된 그의 아버지는 마차 짐꾼으로 일했다. 겨울에는 설국으로 변하는 아키타에서 마차는 유용한 운반수단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커다란 썰매에 말을 이어서 쉴 새 없이 목재와 목탄을 실어 날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차를 끌어 그의 아버지가 받은 돈은 한 달에 6천엔 남짓. 네 식구가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버지는 외숙부에게 미리 임금을 끌어다 썼는데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은 줄기는커녕 늘어가기만 했다.

하정웅은 오보나이 소학교(生保小學校)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신바람 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날다람쥐처럼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캐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껍질을 벗겼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야채가게, 생선가게, 식당 등에서 음식 찌꺼기를 모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모아온 음식찌꺼기를 커다란 솥에 넣고 끓여서 돼지먹이로 주었다. 사람들이 강에 버린 소와 돼지의 내장은 굶주린 그의 식구들의 배를 채우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씩 신문 배달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어린 하정웅까지 동원되어 쉴 새 없이 일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정웅의 부모님은 아들이 예술보다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하길 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그림에 대한 갈망과 재능을 알면서도 그 꿈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정웅의 화가의 꿈은 좌절하였다. 그러나 하정웅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훗날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첫 수집 작품을 가슴으로 받아들이

  등학교 졸업 후 사회에 뛰어들면서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는 일은 그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만큼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상황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림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20대 중반의 하정웅은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며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모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포기할 수 없는 취미는 신주쿠에 있는 이스턴 백화점 나들이였다. 그가 백화점으로 나들이를 다니는 남자가 된 것은 백화점 안에 있는 화랑 때문이었다. 화랑이라는 공간 자체가 좋았고, 전시되어있는 그림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오래된 벗들을 만나는 듯 반갑고 편안했다.

  의 나이 스물다섯, 자기 손으로 처음 그림을 구입하게 된다. 그 때 구입한 작품이 전화황 선생의 ‘미륵보살’, 작품은 그의 컬렉션의 출발이다. 전화황 선생을 알게 되면서 하정웅은 자연스럽게 재일한국인 화가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되었고 그들의 작품을 눈여겨보기 시작다. 재일한국인 화가들 중에는 탁월한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가난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하정웅은 재일한국인 화가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하정웅의 자서전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재일한국인 화가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또 그들의 작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도 출신이지만 전화황 선생처럼 해방 후 조총련에 관련되어 1983년에야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던 송영옥.

  1950년대 일본 화단에서 각광을 받다가 1960년대 초반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간 이후 생사를 알 길 없는 조양규.

  월한 예술혼을 지녔으나 35세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문승근.

  밖에도 곽인식, 곽덕준, 이우환, 오일, 손아유 등등…

  들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일본 화단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고, 한국의 화단과도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사막에서 보물을 찾아내 듯, 그들의 작품을 발견했고, 희귀 보물을 모으듯 그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하정웅 자서전 중

 

더 읽어보기 - 마음을 울린 고흐의 그림

무원이 몇 번이나 내가 탄 열차 칸을 들락거렸다. 그 때마다 의심에 찬 그의 눈빛이 나의 뒤통수에 내리 꽂혔다. 한 다섯 쯤 스쳐 지나쳤을 때였을까. 더 이상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겠는지, 승무원이 내 앞에 앉았다. 의심과 불안이 뒤섞인 그의 눈길에 공연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승무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밤에 어디 가니?”

  전시회요.”

  전시회?”

  네, 고흐 전시회요.”

  고흐 전시회? 고흐가 누군데?”

  화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고흐 전시회가 우에노 국립미술관에서 열리거든요.”

  그 전시회 보려고 이 밤에 기차를 탄 거란 말이지?”

  네.”

 

번에는 승무원의 눈이 내 교복을 훑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의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너 고등학생이지?”

  네.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학교는 어쩌고?”

  오늘이 우리 학교 수학여행 날이에요. 친구들은 다 수학여행 갔어요. 저만 이 기차를 탔구요. 정말로…. 고흐 전시회를 보고 싶었거든요.”

  침내 승무원의 눈에 의심이 걷혔다.

 

  도쿄 우에노 국립박물관에서 일본 최초로 고흐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나는 열병을 앓았다. 온몸이 들썩거렸다. 내 인생에서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정말 간절하게 보고 싶은, 아니 반드시 가야 할 전시회였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학교를 빠지면서 도쿄에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날짜를 따져보니 수학여행날짜와 고흐전이 겹치는 게 아닌가.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1학년 때부터 2학년 가을까지 20개월 동안 매달 500엔씩 걷고 있었다. 달마다 그 돈을 내기가 어려워, 나는 신문배달부터 산나물 채취까지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수학여행 경비를 충당해왔는데, 고흐전시회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해야 한다니…. 마음이 쓰라렸다. 수학여행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몇 번씩이나 마음이 뒤집혔다. 과연 학교에는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가. 집에는 또 어떻게 핑계를 댈 것인가.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확실해진 것은 수학여행 당일 새벽이었다. 일단 선생님께 심한 복통이 났다고 둘러대고 수학여행 경비를 돌려받았다. 그리고는 우에노 행 막차를 탄 것이다. 나름 몇 개월 동안 상상하고 준비했던 비밀작전이어서, 당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날 밤, 기차 안에서 승무원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승무원은 자기 할 일도 잊은 채, 차창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나의 말 벚이 되어주었다.

 

  기차에서 내려 한 걸음에 달려간 우에노 국립박물관. 드디어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섰다. 밤하늘의 별들이 빙빙 돌면서 날아오르고, 사이프러스 나무는 격렬한 춤을 추었다. ‘해바라기’는 노랗다 못해 눈이 부셨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형태와 색채가 눈을 파고들었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놀라웠다.

  하지만 처음에 느낀 놀라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슬픔으로 바뀌었다. 한없이 불행했던 고흐의 생애가, 지독하게 외로웠던 고흐의 고독이 그림과 겹쳐졌다. 자신의 불행에, 자신이 운명에, 붓으로 맞섰던 고흐의 열정이 느껴졌다. 나도 고흐처럼 살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다 쓰러지고 싶었다.

 

4장 메세나 디아포라스적 삶

 

메세나 정신의 실천 하정웅의 삶

  2004년 하정웅의 학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 동창회에서 학교를 빛낸 9명의 인사를 뽑았는데, 하정웅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하정웅이 수많은 동창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메세나 정신 때문이었다.

  1982년 한국의 광주에서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활동할 무렵부터 하정웅은 메세나(Mecenat)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메세나가 뭡니까?"

  메세나는 봉사이자 실천입니다."

 

메세나란 기업이 수익의 일부를 문화예술분야에 적극 지원함으로써 사회적인 공헌을 하는 활동들을 총칭한다. 하지만 하정웅은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봉사가 메세나라고 소개했다.

 

  지금도 하정웅은 어디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메세나에 대해 설파한다. 그러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뒤에서는 다른 반응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돈이 있으니까 그런 활동을 하지 살기 바쁠 때, 그런 여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정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메세나는 돈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지원할 수 있지만, 시간이 있으면 시간으로, 또 노동으로도 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메세나는 물질적 기부 여부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하정웅이 실천했던 메세나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했다. 수집한 그림들을 국공립 미술관에 기증했던 일도, 장애인 복지에 힘썼던 일들도 꽤 오랜 시간동안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니더니, 한국에서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재일한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1973년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 한국을 방문한 뒤 한국에 올 때마다 안기부 직원들이 붙어 다녔다. 정부에서만 감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기꾼, 위선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크고 작은 노력들이 쌓이면 한국 사회에 암암리에 퍼져있던 재일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다행히 그의 노력들은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해,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지 40년이 흐른 지금, 재일한국인에 대한 인식도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인식과 평가는 달라졌지만, 하정웅은 자신의 존재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한 하정웅의 생각이다.

 

  나는 나인데, 시대가 달라졌을 뿐이다. 시대가 달라져 나를 보는 눈, 내가 했던 일에 대한 오해가 풀어진 것뿐이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를 만큼 몰염치하지는 않다. 그런데 나에게 염치는 있지만, 눈치는 좀 없을 수도 있겠다. 아직도 틈만 나면세상을 믿고’, ‘세상에 이바지하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곳으로만들고 싶다는 메세나 정신을 외치고 다니니 말이다.

 

조건 없는 기증과 청년 작가의 육성

하정웅의 이름 앞에는 늘 "미술작품 1만점을 기증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만점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거나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도 짓는다. 하지만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하정웅은 50년 동안 1만 점에 달하는 미술 작품들을 수집했고, 1만 점을 한국에 전부 기증했다.

 

  하정웅의 기증의 출발은 광주였다. 1992년 광주시립미술관이 개관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지방도시 중에서 처음으로 생긴 시립미술관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1993, 하정웅은 오랜만에 광주를 방문해 화가 오승윤씨를 만났다. 오승윤씨는 대단한 화가이기도 하지만 하정웅에게 화가는 말을 섞다 보면 늘 마음의 공명이 일어나는 벗이었다. 그런 그가 하정웅에게 가볼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광주시립미술관이었다. 미술관으로 가는 도중 오승윤씨가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으로 미술작품 몇 점 기증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정웅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미술관을 둘러 본 하정웅은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시립미술관이라는 간판만 세웠지, 전시장 문들은 거의 닫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건물만 있고, 안은 텅 비어 있으니, 기묘한 광경이었다. 2층에 있는 제4전시실은 작품 한 점 걸려있지 않았다. 백 평 남짓한 공간이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하정웅과 차종갑 관장의 대화이다.

 

  작년에 미술관 문을 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도, 작품을 150점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시회를 열 상황이 아닙니다. 이 전시실을 꾸밀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작품들을 기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전시실을 채우려면 최소한 50점 정도는 있어야겠네요."

  네…. 그렇죠."

  그럼 제가 50점을 기증하면 됩니까?"

  놀라는 눈치였지만 관장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언제 우리 집에 한 번 오세요."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수집한 미술품들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하는 일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시립미술관 차종갑 관장과 화가 오승윤씨, 광주예총 회장 임병성씨가 일본 가와구치에 있는 하정웅의 집으로 찾아왔다.

 

  작품 50점만 있으면 미술관 운영이 가능합니까?"

  전시실 하나는 충분히 꾸밀 수 있지요"

  그럼 그 전시실엔 1년 내내 똑같은 작품들만 걸려있는 건가요? 관람객들은 한 번 관람하면 다시 갈 필요가 없는 거네요."

  ”......"

  철마다 작품을 바꿔주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지요."

 전시실을 채우려면 50점이 필요하고, ,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에 네 번은 작품을 바꿔야 하니 . 제 생각엔 200 여 점이 필요할 듯 합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212점을 기증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하정웅 선생님의 뜻 잊지 않겠습니다."

 

  하정웅은 말과 동시에 차종갑 관장에게 작품 기증 리스트를 내밀었다. 기증 리스트에 적혀있는 작품은 212, 전부 재일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컬렉션의 출발이 되었던 전화황 작품 92점을 비롯해서, 곽인식의 작품 38, 송영옥의 작품 17, 문승근의 작품 11, 이우환의 작품 12, 곽덕준의 작품 42점이 포함되었다. 훗날 그가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면, 전시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자리에 걸고 싶었던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그야말로 최고의 수집품들이었다. 당시 그의 심정은 그의 자서전에 잘 표현되어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결심한 후, 하정웅은 고이고이 기른 자식을 출가시키는 마음으로 한 작품 한 작품을 선별했다. 눈가가 젖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작품들은 나의 분신과 다름없다. 그래서 더 조국으로 보내야 한다.’

  지방도시의 시립미술관에 212점의 미술작품을 기증한 일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일이었기 때문에 급속도로 소문이 퍼졌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 때문에 광주시립미술관의 대외적 위상이 한꺼번에 격상됐다는 평가도 받았다. 규모면에서, 또 의미면에서도 한국 미술사 최초의 일이라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칭찬세례만 쏟아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난 중에서는 그가 수집한 작품에 대한 비난들도 있었다. 하정웅은 작품에 대한 터무니없는 평가절하가 안타깝기만 했다. 수집을 할 때마다 화가와 친분을 쌓고, 화가의 인생과 철학을 공부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작품을 이해하며 간절한 기도의 일환으로 미술작품을 모았던 그로서는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오해에 대해 일일이 대꾸 하지 않았다.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복잡다단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가 온몸으로 터득한 단순한 진리가 있다면, 기다림이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비난이 두렵고, 오해가 싫어서 자신의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믿었다.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지만,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대한 기증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1993 1차로 212점의 작품들을 기증한 후, 1999 2차로 471점을 기증했다. 세 번째 기증이었던 2003년에는 1,182점을 기증했다. 이 때 천 백 여 점을 기증한 것은, 그 해가 첫 기증으로부터 1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흘러, 2010 4차로 357점을 추가 기증하였다. 2012년에는 5차로 이우환의 신작 18점을 포함해서 80점을 기증했다.

  그렇게 지난 20년 동안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이 총 2,300점이 넘었다. 2300여 점 안에는 재일한국인 작가들의 작품들을 비롯해, 한국인 작가들과 일본인 작가들, 피카소, 루오, 샤갈, 달리, 헨리 무어 등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포함되어있다. 이 기증 작품들은 현재하정웅 컬렉션으로 불리고 있는데, 광주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65%에 달한다.

  20년에 걸쳐 광주에 2300여 점의 작품을 기증하자, 많은 이들이 기증의 조건에 대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나 그의 기증은 처음부터 조건 없는 기증이었다. 하정웅은 조건을 붙이면 기증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9년 광주시립미술관 측에서 그에게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정웅은 처음에는 없다고 대답했지만, 주변에 의견을 구하고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는 화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엔 어려운 환경 때문에 자신의 꿈을 꺾는 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어렵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작가들을 육성하는 사업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시작한 일이하정웅 청년작가 초대전이다. 그는 청년작가들을 발굴해서 키우는 사업이야말로 꿈을 키우는 사업이라고 믿었다. 2001년부터 매년 실시되고 있는 청년작가 초대전은 특정주제나 경향과는 상관없이 창조성과 실험성이 강한 작가, 작업 활동이 왕성한 작가, 그리고 성장가능성이 돋보이는 국내외 작가 5-6명을 선정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와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더 큰 꿈으로 피어난 기도의 미술관

  20대 중반의 하정웅은 우여곡절 끝에 뛰어든 사업으로 성공했다. 그 때부터 그의 미술품 수집도 시작되었다. 수집 작품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는 소망 하나가 자랐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씨앗에 불과했던 소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그 나무의 이름이 바로기도의 미술관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기도의 미술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고 싶었다. 일본 아키타의 다자와 호반(秋田 田). 1939, 다자와 호수 마을 사람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히메관음상을 세운 것처럼, 나 또한 재일(在日)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억압받고 희생당한 재일의 넋을 진혼할 수 있는 영속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 공간이기도의 미술관이라고 믿었다. 그 동안 재일한국인 화가들의 작품들을 꾸준히 수집했던 일, 그리고 감추어진 역사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일은 ‘기도의 미술관을 짓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정웅 자서전 중

 

  그가 기도의 미술관을 다자와 호반에 세우고자 했던 이유는 그곳에 서려있는 역사성 때문이었다. 다자와 호반은 오보나이 수력발전소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자, 조선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히메관음상을 세웠던 곳이었다. 때문에 다자와 호반이야말로 기도의 미술관이 들어서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로 여겨졌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아키타 센보쿠시(秋田 仙北市, 구 다자와 호수 마을)에 기도의 미술관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센보쿠시에서는 휴머니즘이 넘쳐나는 시도라며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미술관에 전시할 작품들은 그동안 수집했던 작품들로 충당할 수 있으니, 미술관 건물만 세우면 충분했다. 먼저 미술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자와 호반 선라이즈 호텔 옆에 있는 땅을 사들였다. 부지를 확보한 후, 미술관의 정식 이름을다자와 호수 염원의 미술관이라고 붙였다. 설계는 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 선생에게 의뢰했다. 이타미 준 선생은 선라이즈 호텔에 묵으면서 미술관 설계를 구상했는데, 그의 꿈이 활짝 피어나도록 온 힘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그는 전시 작품들을 더욱 열심히 모으는 한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이방자 여사에게 미술관의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이방자 여사는 기꺼이 현판 글씨를 써 주었고 오옥진 선생이 전각을 해주었다.

  전화황 화백에게도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뜻을 이야기했다. 선생의 작품미륵보살이야말로 기도의 미술관의 출발이었기에, 선생님의 지지와 응원이 필요했다. 미술관 터를 둘러보기 위해 다자와 호반을 방문한 전화황 선생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의 계획에 따라 미술관 설립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인 위안부와 강제징용자,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가 외교 문제로 번지게 되면서 한일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난기류가 흐르자 처음에 미술관 설립을 열렬히 환영했던 센보쿠시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미술관 설립을 허가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미술관 관람객의 수요가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학예사의 월급을 포함해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운영비가 모자랄 리도 없고 설사 부족하다 해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도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미술관 설립을 백지화시켜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냉각기일수록 이런 시도는 더욱 의미있다.’ ‘이 미술관은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는 백방으로 설득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의 방침은 확고했다. 결국 10년 이상 준비했던 기도의 미술관 설립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그는 그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었고, 또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았지만…. 미술관 설립이 좌절되었을 때….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 참담한 심정이었다. 식민지-광복-한국전쟁-분단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기가 지났으니, 정치적인 시련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순진한 생각이었다.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대치 중인 것처럼, 한일관계는 풀어졌다가 뒤틀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치는 나라 대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옭아매고, 우리를 지배하고, 귀한 뜻마저 꺾어버리는 요물이었다.

―하정웅 자서전 중

 

  그가 허망함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던 어느 날. 료안지에서 뵈었던 마츠쿠라 죠에이(松倉紹英) 주지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한 쪽 손을 펴세요."

 

  스님의 말씀대로 쥐었던 손을 펴야 할 때라면 쥐고 있었던 것이 아무리 귀한 보물일지라도 놓는 것이 순리였다.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 후 그는 다자와 호반에 세우려던 기도의 미술관에 대한 꿈을 미련도, 후회도 없이 놓아주었다. 그런데 꿈을 놓으니 기도의 미술관은 다른 곳에서 더 큰 꿈으로 자라 피어나기 시작했다.

  1993년 광주시립미술관 개관기념으로 그는 212점의 미술작품들을 기증했다. 첫 기증이었다. 그리고 201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광주시립미술관에 2300여 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광주에만 기증한 것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국공립미술관들에 기증 릴레이를 이어갔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영친왕과 영친왕비 유품 708, 포항시립미술관에 손아유의 작품 1,680, 부산시립미술관에 헨리 밀러, 세키네 노부오 등 420, 대전시립미술관에 손아유, 고삼권 등 235, 전북도립미술관에 손아유 등 249, 조선대학교에 가토 아키오, 손아유 등 460점 기증, 숙명여자대학교에 최승희 작품 718점과 영친왕비 유품 253점을 포함해 총971, 그리고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에 미술품과 미술자료를 포함해 3,400여 점을 기증했다. 그렇게 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기증 작품들이 어느덧 1만 점에 이른다. 본래 일본 기도의 미술관에 있을 예정이었던 작품들이 전부 한국으로 향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그 작품들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때 그의 수집품이었던 작품들은 언제든 대중과 만날 수 있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인 한국의 공공미술관들에 자리를 잡았다. 사私가 아닌 공公으로 돌아간 것이다.

 

  가난한 집 출신에 고생을 달고 살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인이 돼서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눈물지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일본에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려는 꿈도 품었다. 기도의 미술관이야말로 한일 과거사의 아픈 상처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터전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의 뜨거웠던 소망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혀 사라졌다.

  그러나, 기도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나 올릴 수 있는 게 기도다. 나의 오랜 염원이었던기도의 미술관은 바다 건너, 한국의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하정웅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웠다.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과 희생이 서린 땅, 상처를 딛고 빛나는 내일을 향해 꿈틀거리는 땅, 빛고을 광주는 내가 열망했던기도의 예술이 머물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컬렉션은 처음부터개인재가 아닌공공재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피어날 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예정된 운명에 기꺼이 따랐을 뿐이다.

―하정웅 자서전 중

 

‘함께' 세운 광주 시각 장애인 복지회

  광주 전시회를 앞두고 과로로 심하게 앓아 누운 하정웅을 치료해 준 분은 시각장애인 안마사 황영웅씨였다. 황영웅씨와 그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치료 마지막 날, 황영웅씨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힘들게 말을 꺼냈다.

 

  하정웅 선생님. 광주에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광주에만 수 백 명이고, 전라남도에는 이천 명이 넘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살고 계시네요."

  그런데 그 맹인들 중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합니다."

  ……."

  동료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모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직업 훈련을 하고, 교육을 시키고, 친목도 도모하려면 시각장애인회관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회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필요하다면, 그 동안 왜 회관을 세우기 위해서 않았습니까?"

  백방으로 노력했죠. 몇 년 전부터 시와 도청을 찾아가 우리의 바람을 알리고 진정해보았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습니다."

 

  황영웅씨는 정부나 공무원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사회에 대한 원망도 컸다. 장애인의 자립을 도와야 할 사회가 오히려 장애인의 자립 기반을 방해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받았던 냉담과 멸시, 무관심이 무수한 가시가 되어 그를 상처 입혔음을 알 수 있었다.

  하정웅에게는 황영웅씨의 아픔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눈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타 공업 고등학교 시절, 통학 기차 안에는 아키타 시 농맹아학교의 학생들이 있었다. 장애를 지녔음에도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환한 웃음, 공부에 대한 열정, 당당한 모습이 늘 그를 자극시켰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존재자체로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준 이들이 바로 그 학생들이었다.

또 고등학교 졸업 후, 하정웅이 도쿄에서 일과 야학을 병행할 때였다. 그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실명의 위기를 맞았다. 치료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디자인스쿨에서 진행하던 공부도 접어야 했다. 석 달 뒤, 운이 좋게 광명을 되찾았지만, 어둠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불편과 고통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세상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세상에서 차별 받고 무시당하고 있는 광주 시각장애인들의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그는 선뜻 돕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의지하기 전에 스스로 의지와 행동을 보이면 어떨까요?"

  무슨 뜻인지…."

"광주 시각장애인들 중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분들이 두 세 명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그 분들이라도 단결해서 조금씩 기금을 모으면 어떨까요? 저는 오늘 황 선생님께 안마 사례비로 6천원을 드리겠습니다. 5천원은 본래 요금이고, 1천은 저의 기부금입니다. 선생님도 5천 원 중에서 천원을 따로 떼어내서 회관 기부금으로 모으면 어떨까요?"

  "……."

  여러분들이 먼저 힘을 합치세요.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보신다면 저도 돕는 길을 찾겠습니다."

 

  하정웅의 말이 황영웅씨에게 다소 매정하게 들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돕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도울 때 무엇인가 필요한 것을 바로 건네주는 것은 임기응변의 방책일 뿐이다. 상대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 움직일 수 있도록, 의지를 끌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하정웅은 광주의 시각장애인들이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부터 가지길 바랬다.

 

  그 일이 있은 뒤, 1년의 시간이 흘렀다. 황영웅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정웅 선생님!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들이 직접 일을 하고 돈을 모았는데, 200만원이나 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하정웅 역시도 가슴이 뭉클했다. 황영웅씨의 의지에 감동한 그는 약속대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사업에 돌입했다. 먼저 광주 시청과 전라남도 도청을 방문해서 시각장애인들의 실태, 그리고 그들이 보인 자립 의지를 호소하고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자 시청, 도청 측은 물론 많은 시민들이 성금을 보내주었다. 그 성금을 기반으로 광주 호남동에 25평 정도의 사무실을 빌렸고 1983 7 19일 드디어 사단법인 한국 시각장애인복지협회 광주지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몇 번이나 시각장애인복지협회 광주지회를 방문해서 시각장애인들과 친교를 나누고 우정을 쌓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협회의 회원 수도 늘어나고 협회 운영도 잘 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복지협회 광주지회가 설립된 지 2년만인 1985년에 사고가 발생했다. 여성 시각장애인 한 명이 2층에서 굴러 떨어져 병원에서 스무 바늘이나 꿰맨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그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애초부터 2층에 협회 사무실을 빌린 것이 잘못이었다. 당시 자금이 부족해서 1층을 구하지 못하고 2층을 선택했는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하정웅은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하루 빨리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적합한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홋카이도에서 한일 교류전을 마친 한국의 미술단체목우회회원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목우회 회원들에게 광주 시각장애인협회의 상황을 전하고,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하려고 하니 그림을 기증해주시면 어떨지 부탁드렸다. 바로 협조하겠다는 흔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 후로 그는 친분 있는 화가들이나 미술단체 회원들에게 작품 기부를 부탁했다. 8월의 폭염 아래 서울, 목포, 광주, 대전 등을 다니며 취지를 설명했다. 110점이나 되는 작품들이 모였다. 30점 정도 기증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자신이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재일 전남도민회, 회원으로 속해있는 도쿄 왕인 라이온스 클럽,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도 호소하여 4000만원을 모았다. 그리고 기증받은 110점으로 자선 미술전을 개최했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 해, 7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그리고 모인 기금을 전라남도 도청에 전달했다.

 

  많은 분들의 호의로 7천만 원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장애인회관을 세우려면 총 1억 원 정도 돈이 필요할 듯합니다. 나머지 3천만 원은 시민 차원에서 모금운동을 벌이면 어떨까요?"

 

그는 시민들이 직접 모금운동을 벌인다면, 시각장애인 회관 설립 의미는 더욱 빛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금운동이 끝나면, 광주 시내에 땅을 사서 회관을 건립해주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후 1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도청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 도청이 아닌 협회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지금 세 들어있는 사무실의 사용기한이 만료되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시각장애인들이 하루아침에 쫓겨날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그는 한국으로 날아가, 도청으로 달려갔다. 시각장애인들이 처한 긴급한 사정을 설명하고 1년 전 기금을 기탁했는데, 현재는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나머지 3천만 원을 가져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3천만 원을 모금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하정웅 선생이 3천만 원을 들고 온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망감과 허탈함으로 그의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비참한 현실 속에 있는 시각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일본에 있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복지협회에 닥친 시련을 헤쳐 나가려면 새로운 회관 설립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날부터 부지런히 회관 부지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적당한 부지는 나타나지 않았고 시간을 낭비하기만 해서 피가 말랐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사직 공원 근처 부동교 옆에서 최적의 부지 162평을 발견했다. 부지 값이 1 530만원. 모인 기금은 7천 만 원이니, 부지만 사는데도 3천 여 만원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우물쭈물하다 땅을 놓치겠다 싶어, 모자라는 3천만 원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부지를 구입한다.

  그리고 땅을 사자마자 일들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시민 차원에서도 회관 건설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조직된 것이다. 162평 부지에 건평 130, 철근 콘크리트 골조에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을 광주시각장애인 복지회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건물 안에는 치료실, 안마실, 점자도서실, 녹음실, 세미나실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 후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이루어져 1988 4 23일 기공식이 거행되었고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실적을 기반으로 나라에서 5천만 원, 시에서 5천만 원. 1억 원의 건축 보조금이 지급되어 11 15일 공사를 착공할 수 있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1989 4 22. 드디어, 광주시각장애인복지회관(당시 이름사단법인 광주맹인복지회관’)이 개관했다. 복지회관 건물을 바라보며 그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8년이었다. 광주에 번듯한 시각장애인회관을 건립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일본에서 한국을 드나든 횟수가 70회가 넘는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막대한 경비가 들었다.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로 회관 건립에 성공한 건 결코 아니다.

  회관 건립은 많은 이들의 선한 마음이 모여 가능했다.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이 모였고, 모든 과정에 봉사를 보탠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로 인해 좋은 일도 많았지만, 오해도 많았다. 솔직히 괴롭고 힘든 일 투성이였다. 만약 처음부터 홀로 일을 추진하고, 혼자 행동했다면, 회관을 세우는 일이 이토록 험난하고 먼 길이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련의 과정마다 많은 이들이함께했고, ‘함께넘었다. 그리고우리 모두의 회관이 되었다. 이렇듯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좌우명은함께.

함께’를 머리에 이고 살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은사 마쓰모토 쇼스케(松本正典) 선생님의 말씀 덕분이다.

 

  좋은 일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하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혼자 일 하지 마라. 혼자 걷지 마라. 반드시 주위를 살펴보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도록 해라. 그래야 좋은 일이 더 귀한 일이 되는 것이다."

 

  마쓰모토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단 몇 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면, 그 뜻이 아무리 귀해도 결국에는 빛을 잃는다.

시각장애인회관을 설립하는 8년 동안, 가장 힘이 된 이들은 바로 시각장애인들이다. 숱한 오해와 시련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들은 힘을 보탰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들이 했던 말이 지친 나를 일으켰다.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최고의 비타민이었다.

―하정웅 자서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