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13도창의군탑 2018년 광복절 맞아 ‘왕산 허위 의병대장 외손녀’ 귀국 헌화/ 정종배
의병의 날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의병이란 외국의 침략에 맞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저항 조직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징발 명령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종군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자위군(自衛軍)에 해당한다. 의병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의병이라 하면 임진왜란과 20세기 전후의 항일 의병을 일컫는다.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때는 조선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와 구한말(대한제국)이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일제 침략에 맞서 제1, 2차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제1차 의병 항쟁은 갑오개혁 이후 단발령이 선포되면서 일어났다. 제2차 의병 항쟁은 러일 전쟁이 끝날 무렵 일어나 이후 대규모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의병의 날은 2010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6월 1일로 지정되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의병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 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취지에서다. 매년 의병의 날에는 전국 지자체 등을 중심으로 기념식과 공연 등 관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왕산 허위 의병대장
외손녀 외손녀 최나딸리야, 전따마라와 친구인 김나딸리야 3분이
러시아에서 귀국해 13도 창의군탑 찾아 헌화 장면을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주최 교보생명 후원 청소년 퀴즈 프로그램 '러닝맨'을
날씨가 무더워 게이트볼 돔 경기장에서 진행하며 목격하였다.
외손녀 일행을 프로그램을 잠시 멈추고 학생들 앞에서 모시어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외손녀는 한국말 못한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겨우 이어가며 깊은 마음을 전했다.
만주로 강제 이주되고, 또 연해주로 또 다시 중앙아시아로 가족이 분산 강제 이주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에서, 과거는 과거이겠지만,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확실하고도 분명한 모습이다.
조선시대 군대해산(1907년)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창궐했으며, 독립운동 대표적인 ‘5대 항일 가문’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계시며, 국권을 빼앗긴 힘없는 나라를 위해, 외세에 억압받는 백성을 위해, 그리고 자주독립 국가를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1907년 11월 망우리 일대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만여 명에 이르는 의병이 13도창의대군소를 설립했다.
이에 총대장에 이인영, 이인영 총대장은 부친상을 당해 충보다는 효를 우선하겠다고 고향 문경으로 떠나,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해 1907년 12월 양주에서 결성된 48진 1만여 의병군은 1908년 1월 양주군 수택리에 총 집결하여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선발대 300여 명이 서울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진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들의 희생정신과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더 기억해야 한다. 허위 선생은 1908년 교수형을 앞두고 왜승이 명복을 빌려 하자,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며 일갈했다.
대법원장 지낸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은 왕산 허훈, 허신, 허겸, 허위 4형제와 직계 후손들, 왕산의 사촌인 허형 선생의 형제들과 후손들, 항일 시인 이육사 집안까지 아울러 10여 명이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낸 허위 선생은 1908년 1월엔 전국 13도 연합 의병부대 군사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하며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허위 선생은 같은 해 6월 일제에 체포돼 경성감옥(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신설동로터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연해주에 살던 허위 선생의 후손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옮겨졌다.
13도 창의군탑(十三道 倡義軍塔)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본동에 소재한 기념탑으로 13도창의군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서울로 진격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곳에 세워진 기념탑이다.
비록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7월 31일 동아일보사에서 13도창의군 기념탑을 망우리공원 입구에 건립했다.
13도창의군탑을 세운 현대추상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1915~1982)선생의 종택이 이원수의 '고향의 봄'의 살구꽃 아기진달래 꽃대궐의 배경이었다.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온다.”고 쓸 정도 선산(구미)는 유명 인사들이 많이 태어났다.
선산의 3대 인물은 야은 길재 왕산 허휘 중산 박정희를 꼽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왕산 허위를 존경하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본인의 호를 ‘중산’이라 정하였다고 전한다.
구한말 의병에서부터 일제 말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만, 2017년 말 기준으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분은 여성 265명 포함 총 1만 4,830명입니다.
애국선열 가운데는 단신으로 나선 분들도 계시지만 더러는 집안, 또는 가문 차원에서 집단으로 나선 경우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5대 항일가문’을 꼽는데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이 그 주인공입니다.
왕산 허위 가문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뉩니다. 우선 허훈·허신·허겸·허위 왕산 4형제와 그 직계 후손, 왕산의 사촌 허형 선생의 형제들과 후손, 그리고 항일시인 이육사 선생 집안까지 아우릅니다. 이육사 선생의 모친 허길 님은 허형 선생의 딸입니다. 전부 합쳐서 10여 명에 달하는 분이 항일투쟁에 참여하셨는데요, 뒤에 나오는 석주 이상룡 선생 집안과는 겹사돈을 맺은 사이기도 합니다.
안중근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은 직계·방계를 포함해 총 15명이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안 의사의 윗대에서는 삼촌 안태순 선생을 비롯해 안 의사와 두 동생 정근·공근, 사촌동생 명근·경근·홍근, 조카 원생·낙생·춘생·봉생·우생, 여성들로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 여동생 성녀, 백범 맏며느리이기도 한 조카 미생, 조카며느리 조순옥·오항선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안 의사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분들입니다.
석주 이상룡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은 고성이씨 종손 집안으로 경북 안동의 99칸 종택 ‘임청각’으로 상징됩니다. 3천석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부하였으며, 직계 및 방계 포함해 총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석주 선생의 당숙 이승화 선생을 비롯해 형제 상동·봉희, 아들 주형, 손자 병화, 조카 형국·운형·광민, 매부 박경종, 처남 김대락, 처제 김락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우당 이회영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불립니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는데 현 시가로 600억대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투쟁 전선에 바쳤다고 합니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등 6형제는 해방 때까지 한 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살아서 귀국한 분은 다섯째 시영뿐이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의 상징이죠.
일송 김동삼 가문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 역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일송 선생을 비롯해 숙부뻘인 김대락 선생, 아우 동만, 형제 장식, 사돈 이원일 등 총 5명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습니다. 일송 선생은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1937년 59세에 옥사하셨으며, 아우 동만은 1920년 9월 일제의 간도 토벌(경신참변) 당시 일본군에 피살되었습니다.
이밖에도…
백범 김구 선생 가문을 비롯해 집안 전체가 독립투쟁에 헌신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우리는 이들 가문에 존경과 예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유관순 가(家) 사람들의 독립운동
망우리공원 이태원분묘무연고 28000여명의 유해와 함께 이장되었으리 추정하고 2018년 유관순유족회 이화여고동창회 등 관련단체에서 표지비를 세웠다.
올 9월 28일 순국 100주년이다.
중랑구에서 방치되었던 무연고 분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유관순 가家의 사람들』 의 저자인 이덕주 최태육 교수는 책을 끝맺으며 “유관순 가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민족의식이 강한 민족의 영웅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 땅의 수많은 세민이 겪었던 아픔과 똑같은 아픔을 겪었고 이 아픔이 독립운동으로 발현된 것”이라 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와 개혁의 삶으로 인도했던 유관순 가의 신앙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돌아봐야 할 삶의 자세”라고 역설하고 있다.
유윤기(1845-1919)
유관순의 할아버지, 지령리교회 처음 교인으로 장남 유중권 내외가 일본군에게 학살된 것과 차남 유중무, 손자 유우석과 손녀 유관순이 투옥되는 아픔을 겪고, 두 달 보름 후에 별세하였다.
유빈기(1883-1927)
유관순의 6촌 할아버지(재종조)이자 유윤기의 사촌 동생. 지령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공주읍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됐다.
유중권(1863-1919)
유관순의 아버지. 아내 이소제와 함께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지령리 집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1919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소제(1875-1919)
유관순의 어머니, 4월 1일 당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군 헌병에게 학살되었다.
유우석(1899-1968)
유관순의 오빠. 4월 1일 공주읍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검에 자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유관순(1902-1920)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만세운동 때 입은 자상과 3.1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당한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중무(1875-1956)
유관순의 숙부. 지령리교회 최초 교인으로 전도사와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와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령리교회를 지켰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유예도(1896-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도피 하여 홍성 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노마리아(1898-1982)
유관순의 사촌 올케, 남편 유경석이 유관순과 유예도를 도피시키고있는 동안 유중권을간호했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유윤기, 어린아들 유제 경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일본헌병의 온갖 횡포를 감수해야 했다.
유제경(1917-2012)
유관순의 5촌 조카이자 유중무의 장손, 1919년 4월 1일 이후 어머니 노마리아와 함께 지령리 집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소위 불경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해남도에서 노역으로 형기를 마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망우리공원 오기만 독립운동가 집안도 이에 못지 않아 소개한다
그 가족의 수난사는 가족사이면서 민족사의 대서사시이다
부친 오세형 고향 배천의 3.1혁명 주동자로 투옥
모친 윤인의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을 감당
본인 오기만(吳基滿, 1905~1937)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상해 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받고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병사(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동생 오기영 3.1혁명으로 투옥(11세), 사상범으로 투옥, 수양동우회 등 총 4회 투옥
동생 오기옥(1919`1950?)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제수 김명복 오기만의 동지 치과의사 시숙 오기만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원으로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누이 오탐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매제 강기보는 오탐열의 남편,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의 평북 도책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조카 오장석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또랑시인 고향 함평
호남가의 첫 고을 함평천지
일제 강점기 호남 3성 3평으로 불리는 곳으로 일제가 함부로 발 붙이기 어려웠다
1976년 가을부터 함평고구마사건 1978년 4월 대한민국 수립 후 처음으로 정부가 농민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 보상한 민주주의 한 획을 그었다
정유재란 월야 팔열부정각
표산 정감(鄭瑊) 표산사 충신각
(또랑시인 고향으로 정유왜란 진주성 싸움 전투대장으로 장렬하게 산화하여 선무원조일등공신 책록되신 감(瑊) 할아버지 고종 4년 충신정려 표산사에 배향됨, 일제강점기 고향 뒷산 8장수 무덤이라 일컫는 후백제 고분을 전문도굴꾼을 머슴으로 위장하여 3년 동안 부장품을 싹쓸어 간 규모로 보면 영산강 유역 가장 큰 장고형 고분군)
남도제일 창의 남일 심수택(1781~19090 의병장
죽봉 김준(김태원, 1870~1908)은 나주 거평면 갈마지 출신으로 또랑 건너 함평에서 자라 호남창의회맹소에
동생 청봉 율과 함께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동학도이래 가장 유명한 무뢰한이며 신출귀몰하다’고 일제군경이 평가할 정도로 1908년 전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그는 허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광산구 어등산에 은신 중 일본 군경에 포위되었다가 발각되어 교전끝에 전사하였다.
1919년 초, 김태원 부인 낙안 오씨는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충의의 맥은 형제뿐 아니라 부인에게도 이어진 집안으로 호남 충의가(忠義家)의 귀감이라 하겠다.
또랑시인 학다리중 동기인 김혁제 할아버지 형제로 광주광역시 죽봉로 명명하고 농성동로터리에 동상을 세워 기리고
혁제는 후손 없는 청봉 율 할아버지 출계하여 사손으로 대를 잇고 있다.
1862년 4월 철종 13년 전라도 최초 봉기 함평농민항쟁 주동자 정한순
영화 기생충 감독 봉준호 외할아버지 박태원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군상>의 주인공으로
일제강점기 수탈과 홍수로 평남 강서로 이주하는 엄다 불암마을
박화성 소설 <고향없는 사람들> 엄다 학다리 들판 지나 떠난 눈물로 떠난 학다리역 급수탑은 국가지정 건축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신광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