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국채표

정종배 2022. 2. 4. 06:07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국채표

 

한국 최초 기상학 이학박사 한국기상학회 창립 초대회장 제2대 기상청장

국채표(鞠採表, 1906~1967.2.5.) 55주기

 

 

오늘이 입춘이다.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이다. 입춘시는 오전 551, 이때 입춘첩인 입춘대길 건양다경 등을 붙어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역학에서 비로소 오늘부터 임인년 호랑이해가 시작된다.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양력 24일이나 5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이며, 입추로부터 꼭 반년이 되는 날로, 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날이다. 가정에서는 콩을 문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대문기둥·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 붙인다.

 

봄으로 접어드는 절후로 음력으로는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재봉춘(再逢春)이라 한다. 정월은 새해에 첫번째 드는 달이고, 입춘은 대체로 정월에 첫번째로 드는 절기이다.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이날 여러가지 민속적인 행사가 행해진다. 그 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춘축(春祝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하며, 각 가정에서 대문기둥이나 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옛날 대궐에서는 설날에 내전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春帖子)라고 불렀다.

사대부집에서는 흔히 입춘첩을 새로 지어 붙이거나 옛날 사람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쓴다. 제주도에서는 입춘일에 큰굿을 하는데, ‘입춘굿이라고 한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심방首神房 : 큰무당이 맡아서 하며, 많은 사람들이 굿을 구경하였다.

이때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옥황상제·토신·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입춘일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이기 때문에 보리뿌리를 뽑아보고 농사의 흉풍을 가려보는 농사점을 행한다. ,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한다.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라고 평가받던 국채표 당시 중앙관상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하늘엔 비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구름이 참 많습니다. 비의 응결핵만 공급해주면 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경제성을 입증하지 못해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탁월한 기상학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초인(超人) 국 박사는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한 선구적인 기상학자였다.

1906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난 국채표 박사는 1918년 담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까지 고향에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담양은 창흥의숙(昌興義塾, 현재 창평초등학교)’을 중심으로 근대교육을 정착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국 박사는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1920년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5년간 공부한 그는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조선 내에서 유일하게 고등 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29312일 오후 2시 연희전문학교 제11회 졸업증서 40명 수여식에서 국채표는 우등생으로 이인흥, 최활 등 3인의 이름과 사각모를 쓴 얼굴 사진이 동아일보313, 조선일보314일 신문에 게재되었다. 1941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바다의 날과 관련된 인물은 1964년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논문 태풍의 운동과 발달의 예보법으로 한국 최초 기상학 분야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상학자 국채표는 본관은 담양이며, 전남 담양군 출신이다. 국채표 중앙관상대 제2대 대장. 한국의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기반을 마련한 기상학자로, 한국에 맞는 태풍진로 예상법()의 방법을 창안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첫 감염병 임상학자부터 세종 1호기개발자까지 '과학 한국' 이들이 있어 지금이 있다한국을 빛낸 ‘1’ 2020년 지정 자연분야 국채표는 태풍 예보 국의 방법(Kook’s Method)’ 창안한국 기상예보 기반을 다지고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하다. 고도의 기상예보 기술 확보를 위한 중앙관상대의 기상시스템 현대화한국기상학회와 한국기상학회지창설로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 마련한 공로로 과기정통부, 2020년 과학기술유공자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로 선정되었다.

 

국채표는 해방 후 교직에서 물러나 국립중앙관상대로 자리를 옮기며 기상학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이 기관의 대장은 19266월 천문학 관련 논문 항성분광분석으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스승이었던 이원철(1896~1963)이 맡고 있었고, 그는 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부대장이 된 그는 1947고층권 기상연구의 책임자로서 일제가 5킬로미터 상공까지만 올렸던 기상관측 기구를 23킬로미터 상공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거둔 세계적인 성과이자 미래의 한국 항공기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소개했다.

 

또한,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전화로 일기예보를 자동으로 받을 수 있는 자동일기예보기를 설치하고,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는 기상 팩시밀리를 구축했다. 1964년 일본 교토대에 제출한 한국 및 한국 부근에 내습할 우려가 있는 태풍의 운동 및 중심시도의 통계적 예보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태풍 경로를 예측하는 국의 방법(Kook’s Method)’을 제시해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당시 기상예보에도 쓰였다. 지금의 한국기상학회를 1963년 창립했고, 현재도 발간되는 한국기상학회지1965년 창간했다.

 

국채표 대장은 한국의 기상예보 시스템을 현대화하고, 한국기상학회의 발족과 한국기상학회지 창간으로 한국기상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적인 기상학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와 교토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15년간 재직했다. 교사로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글을 꾸준히 게재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과학정보를 전달했다. 주로 계절과 절기와 관련된 자연변화나 대기 현상, 기상 현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과학대중화에 앞장섰다.

 

관상대가 광복 때까지 일본인 직원들만 있던 곳이어서 특히 기상분야전문가의 인력난은 극심했다. 그는 스스로 기상분야의 고급기술을 습득하여 인재 양성을 시작하기로 하고, 세계 기상학을 이끌고 있던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기 위해 1949년 시카고대학 기상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하고,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미군 제6군단에서 강사로 2년간 근무했다. 그 후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미 해군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On the prediction of three-day hurricane motion“이라는 성과를 발표했고 1958년 석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인정받았다. 이 연구는 미연방 기상국에서 인정하는 기상연구의 주요 성과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연구를 이어갔으나(농업기상학 전공) 중앙관상대 책임자를 맡기 위해 서둘러 귀국하는 바람에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1961년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정부는 그를 이원철의 후임으로 중앙관상대 대장에 임명했다. 대장이 된 그는 기상예측에 필요한 기자재를 정부에 요청했고, 미국에서 배운 기상학에 바탕으로 새로운 방법을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에 적용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전화를 통해 일기예보를 자동응답으로 전달받는 <자동일기예보기> 설치, 고층대기권의 기상 현상을 관측할 <고층기상관측소> 설립,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기상 팩시밀리> 구입 등을 추진하여 한국의 기상시스템 현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일본의 교토대학에 한국 및 한국 부근에 내습할 우려가 있는 태풍의 운동 및 중심시도의 통계적 예보법“(1964)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기상학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미국 시카고대학 시절부터 연구해온 내용을 발전시켜 한국에 적용한 것으로 태풍진로 예상법을 제안한 획기적인 논문이었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의 방법(Kook’s Method)’은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당시 기상예보에도 활용되었다.

 

그는 1963년 한국기상학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낙후된 한국의 기상학 발전을 위해서는 기상학을 연구하는 학자 간의 교류 및 후진 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로써 그는 중앙관상대의 기술연구원들과 기상학 관련 대학교수들과 함께 한국기상학회를 창설하고 지금은 세계적인 학술지가 된 한국기상학회지1965년 창간하며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에 앞장섰다.

 

국채표 대장은 한국의 현대적 기상예보 기술과 기상학의 제도적 발전을 이끈 과학자였다. 그는 낙후된 한국의 중앙관상대를 첨단시설을 갖춘 현대적 기관으로 재정비하고, 한국기상학회를 창립하여 기상학의 학문적 기틀을 닦았다. 그가 기상학계에 남긴 이러한 유산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기상학 및 기상예보의 초석이 되었다.

 

전 중앙관상대장 국채표박사(64·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38)5일 상오 9시 우석대학부속병원에서 별세했다. 이날 국박사는 친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었다. 국박사는 연전 수물과를 나와 일본 동도제대 수학과에서 수학하고 다시 영국시카코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한 후 귀국, 5·16 직후부터 677월까지 6년 동안 관상대장으로 일했었다. 영결식은 8일 상오 10, 종로5가 연동교회, 장지는 망우리 가족묘지. 유족으로 부인과 3남이 있다.” - 출처 중앙일보1969.02.06.

 

 

단비의 비문, “고 국채표 박사 영전에 드림 한 떨기 설매꽃처럼 청하하고 높은 님의 자취 이곳에 남기시니 님 가신 곳 더욱 빛나오리다” 1969325일 문학박사 이병도 글 문하생 씀

 

중랑구 마을지킴이 선두주자 김완숙 선생이 이끄는 중랑을 걸어요일행과 찾은 국평정지 터와 이기붕 가족묘지 터를 확인하고 답사팀은 내려가고 다시 혼자 눈여겨본 묘지를 찾았다. 국채표 씨 묘비인데 중앙고보 은사인 이병도 국사학자 글을 문하생이 썼다. 국채표 가족묘지였다. 부모님 유택은 옛 모습 그대로 잘 관리되고 있다. 국채표 묘지도 이장하지 않았다. 평장으로 묻힌 듯 봉분을 찾을 수 없다. 1992년 제5자랑스런 중앙인으로 선정되었다.

 

4대 음악인 가족인 함이영의 따님인 함천혜와 국채표 둘째 아들은 대학 동창으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국채표 후손들은 거의 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 있다. 후손 중 둘째 아들 국정련의 둘째 딸인 국미여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 대학 할아버지와 같은 기상학 분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인문학 중 과학 및 의학의 선구자 종두법의 지석영, 피부과 의사 1호 오긍선과 동경제대 의학박사 이영준 세브란스 제2,3대 교장, 국민보건의 선구자 경성의전 유상규 독립운동가, 콩박사 영양학자 김호직, 조선의 유일무이하고 일본과 맞장뜬 장형두 식물학자 등이 잠들어 있다. 서구식 간호사 1호인 이정애 이화여대 간호학과 초대 과장은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