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정종배(시인. 교사)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은 인물이 있다. 추모객은 유택의 주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과 고원과 기사로서 원조 한류 팬이라 일컬을 정도로 한국에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그의 한국생활 17년(1914년〜1931년)을 1934년 아베 요시시게(阿倍能成)가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947년까지 게재하였다.
광주시립 및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하정웅 명예관장은 중학교 때 ‘인간의 가치’ 글을 읽고, 20살 전후 어려운 상황을 다쿠미 고향 기요사토(淸里)에서 성공회 선교사 폴 러쉬와 만남 이후 사업을 일으켜 25살부터 크게 성공했다. 청리고원에 별장 은하숙(銀河塾)을 짓고 사업장과 가정을 오갔다. 재일한국인 화가 전화황과의 만남을 통해 재일동포 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림, 사진, 영화 등 10,000여점을 수집하여, 전부 국내에 기증하여 메세나 정신을 실천하였다. 재일한국인 화가들의 고향인 부산 포항 대전 전주 등에 기증하였다. 또한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무용인 최승희 관련 사진 및 자료를 수집하여 국립 고궁박물관과 관련 대학에 기증하였다. 다쿠미의 형님 노리타카에게 1945년 다쿠미의 일기를 받은 김성진씨가 일본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추모회에 일기 기증을 계기로 2001년, 다쿠미가 태어난 다카네정(高根町) 생애학습센터 내에 ‘아사카와형제자료관’을 개관할 때도 도자기 사진 등 많은 자료를 기증하여 한일교류의 장을 열고 있다. 일본 제일의 유기농과 낙농지역으로 성장하는데 기틀을 다진 폴 러쉬 선교사를 기리는 축제는 대대적으로 개최하는데, 다쿠미를 추모하는 모임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하명예관장은 사비로 2006년부터 다쿠미의 고향에서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를 개최하였다. 11회째부터 호쿠토시에서 인적 물적 지원을 하기 시작하여 올해 15회째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다쿠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를 (재)수림문화재단 주최로 2015년 설립하였다. 필자는 다쿠미 추모식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며 하명예관장과 인연을 맺어 숙장대행을 맡았다. 일본 청리은하숙에 학생들과 2016, 2017년 6월에 참가하였다.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는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21년(1987년~2008년) 동안 교육과 문화입국에 헌신한 재일한국인 김희수 선생의 수(秀)와 부인 이재림 여사의 림(林)자를 집자하여 2009년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다쿠미 선생이 1922년 이전하며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이끌어간 청량리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수목원) 앞 옛 영화진흥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김희수기념수림아트센터’를 마련하였다.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개인과 단체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후원하며, 서울 동북지역 문화예술 분야 진흥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의 아버지는 화구상으로, 아들이 다쿠미 선생만큼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다쿠미라 지었다. 작가는 20대부터 한국에 50여 차례 들어와 고대 한일 교류 관련 유적과 자료 및 1970년대 농촌, 5일장, 인사동 거리와 인물 등을 작업하여 민속박물관에 전부 기증하였다. 아사카와 형제도 수집한 민예품 도자기 등을 전부 한국에 기증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아사카와 형제와 인연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미를 ‘한(恨)의 미’라 규정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수집한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건립하였다. 아사카와 형제는 전국 도요지를 답사하며 경험한 무속신앙 농악 탈춤 등을 통해 한국의 미를 해학과 풍자 멋 흥취 등으로 보았다.
필자는 2000년 4월 첫 토요일에 다쿠미를 알았다. 전날 밤 수필집 “약손”의 저자 박문하 선생의 「또 한 권의 책」을 읽고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었다. 조화가 두 줄로 늘어서 있어, 유택에 올라가 확인하였다. 박문하 수필가가 일본 지인에게 『조선의 선(소반)』과 유작인 『조선도자명고』 두 권의 책을 구입하여 보내달라는 도서의 저자였다. 조선인은 유랑하면서도 이삿짐 맨 위에 밥상이 실려 있다. 온돌방에 가장 적합한 밥상은 실용성, 조형미, 예술성 등 쓰면 쓸수록 빛나는 동양 최고 민예품이라 극찬하였다.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인지하고 조선인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솔직하게 드러냈다. 주변 일본인조차 요시찰 인물로 경찰의 감시를 당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민족’이란 말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때 무고한 조선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식민지 관료로서 조선 사람들의 유언비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민족이라 일기에 기록할만큼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았다.
2004년 4월 다쿠미 유택에서 아사카와 다쿠미현창회 조재명 회장을 만났다. 그 뒤로 현창회 활동을 하였다. 《백자의 사람》 영화 제작후원회에서 레슬링선수 출신인 안토니오 이노키 중의원과 일본 대사 등을 비롯하여 한국 일본 추모회 관련 인물들이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2012년 일본 후원회 기금으로 영화 《백자의 사람》이 촬영하고 국내에서도 상영했다. 학교축제 및 재량과 창체 수업시간에 영화를 학생들에게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학교 전일제 봉사활동 및 체험활동을 망우리공원에서 실시하였다.
2010년 겨울방학 방과후학교 강좌에 ‘망우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을 개설하였다. 마침 조재명 회장의 급작스런 유고로 침체된 현창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백조종 부회장 제안으로 발간하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을 편집하며, 학생들의 글 20 편을 수록하였다. 입학사정관제가 시행될 무렵이었다. 학부모들이 귀신처럼 찾아 와 자료만 달라며 수강 신청하여 4개 반을 운영하였다. 그 중에 지금도 연락하는 졸업생은 이 번 평창올림픽에 군 장교로 참여하여 성화 봉송 행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학부모께서 경기도 화성에 일회용 용기제품을 생산하는 (주)서광알미늄 공장을 경영하며, 망우리공원 행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하이쿠 유파인 가부라안(燕庵)의 6대이고 증조부도 인도속설변의(人道俗說弁義)라는 책을 낸 학자였다. 다쿠미의 타고난 필력에다 피나는 메모와 정리 습관이 민예와 도자기 및 수목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과 소설을 쓰며, 책을 펴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일 년 먼저 남대문소학교 미술교사(조각 전공)로 부임한 형님 노리타카(伯) 뒤를 이어 1914년 24세 다쿠미는 식민지 조선에 왔다. 당시 대부분 일본인들은 한 몫 잡으려고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두 형제는 달랐다. 조선도자기의 신이라 일컫는 형님과 전국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하고 정리하였다. 도자기업계에서는 두 형제를 중시조로 기리고 있다. 고려청자만 알고 있던 조선의 도자기를, 조선백자의 뛰어난 미를 발견하며, 탐구와 조사는 형님이 동생은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펴냈다. 노리타카는 8.15 광복 후 미군정 당국이 조선총독부 건물 수장고에 뒹굴고 있는 도자기와 민예품 정리를 부탁받아 해결하고, 이듬해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9년 공저인 《조선거수노수명목지》는 지금의 천연기념물 지정과 나무 관련 연구의 지침서이다. 사방공사에 적합한 싸리나무 이름을 손수 지었다. 북아현동 중앙여고 자리인 국내 첫 수목원인 의령원에서 1922년 청량리 홍릉수목원으로 이전하는데 다쿠미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정리하여 현재 산림정책의 주춧돌을 놓았다. 또한 잣나무 씨앗 발아를 2년에서 1년으로 앞당긴 ‘노천매장법’을, 한국 노동자들이 주고받은 말을 이해하고 발견하였다. 지금도 이 발아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산림의 37%가 잣나무다.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청량사에서 다쿠미와 차 한 잔 마시고 한여름 밤 달빛 아래 정릉천을 걷는 피서법이 당시 최고 인기였다. 〚폐허〛 동인 염상섭, 번영로, 남궁 벽, 김유방, 김일엽 등과 교유하였다. 광화문 해체의 부당성을 알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을 동아일보에 전달하였다. 1922년 23년 사이 일기를 보면 지금의 월곡동 이문동 석관동 회기동 중랑천 정릉천 등에서 씨앗을 넣고 종묘를 길러 민둥산 녹화사업에 매진하였다. 당시 종묘장이었던 청량고등학교 교정에 일본식 탑과 속성수로 심은 꽃개오동나무 한 그루가 남아있다. 필자는 5년 동안 근무하며 다쿠미의 체취와 열정을 느끼고 그 정신을 이어가려 학생들과 더불어 노력했다.
다쿠미 묘지는 이문동 공동묘지에서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이장하며 풍수가 70년 후면 명성을 얻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명당에 쓴 묘는 점점 커진다는 말이 있다. 다쿠미 묘역도 조재명 회장의 헌신에 의해 조금씩 넓혀졌다. 2014년 다쿠미 고향 호쿠도시 의회에서 4,300만원 금액이 다쿠미 묘역 정비 사업으로 책정되어 그 해 10월 4일 재단장한 묘역에서 성대하게 추모식 행사를 치렀다. 지금은 망우리공원 묘역 중 둘레석을 둘러친 호화분묘(?)가 되었다. 다쿠미 선생과 제반 현황을 잘 모르는 사람은 독립지사 묘는 초라한데 쪽바리 묘는 이렇게 크게 모시는가라며 불만을 터트리는 분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또랑시인 필자는 추모시를 낭송했다.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망우분과가 주관하여 망우인문학 게임형 도전 러닝맨 행사를 치르고 있다. 가장 많은 학생들이 찾아 오는 묘역이 다쿠미 묘역이다. 1960년대 중반 광릉수목원장 조재명 현창회 회장 중심으로 수목원 퇴임공무원 모임인 홍림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추모 열기가 활성화 되었다. 공덕비와 상석 그리고 오석의 현창비 등을 세웠다. 일본에서도 소설과 평전 그리고 르포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1966년 김성진씨의 다쿠미 일기 원본을 다쿠미 고향 다카네정에 기증을 계기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가 조직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일간 민간교류 활성화에 공헌하고 있다. 매년 4월 2일 전후로 망우리공원 추모식에 참여하고 있다. 2008년 조재명 회장의 급서로 인해 현창회가 재편됐다. 다쿠미와 직접 함께 일하던 분들의 자제도 이제는 세상을 떴다. 도자기와 공예 관련 분야 뜻있는 분들이 현창회에 함께 했다. 대학 일본어학과 일본인 교수들이 다쿠미 관련 글을 발표하고 학생들과 함께 추모식에 참여했다. 현재는 조만제 회장님을 중심으로 아카사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로 확대 조직하여 오는 4월 2일 87주기 추모식을 망우리묘역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한복을 입고 온돌방에서 한국식 생활을 했다. 주변 어려운 사람을 돌봐 주었다. 장례식 때 비가 억수로 내렸지만,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실현하였다.
망우리공원에서 종종 다쿠미 유택을 참배하는 일본인을 만난다. 밤새 술을 마시다 아침 일찍 술집 여인들과 참배하는 일본인이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행사 때 조화를 자기 이름으로 세워달라고 10만원을 나에게 줘, 85주기 추모식 때 사용했다. 일본 청리은하숙에 참석하여 전화를 하였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올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인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다쿠미는 식목일 준비 과로와 감기로 인해 급성폐렴으로 운명하였다. 식목일을 제정하고 조선에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를 도입한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1866~1936) 묘지도 망우리공원에 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장, 영림창장으로 식민지 임업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조선총독부가 내걸었던 식민지문명화론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비판도 받는다.
망우리 사색의 길
성자로 빛나는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도시
정종배(시인, 교사)
오늘도 한강너머 뛰노는 저 산맥들
비바람 눈보라 아무리 휘몰아쳐도
어느 능선 어느 산봉우리 하나
삐끗하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이 곳 망우리 사색의 길
한 송이 성자로 빛나는
그대 향한 걸음걸음
물소리 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른 봄 물안개와
한겨울 얼음 밑에서도
저 한강 강 물결
쉼 없이 서해바다 향해가듯
볕 좋은 사색의 길을
순례의 길로 펼쳐 놓아
그대 향한 사랑노래
한 치도 어긋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여 심고 가꾼
조선의 민둥산이 이제는
솔바람소리 저녁노을 속으로
깊이깊이 배어들게
어느 한 곳 빠트리지 않고
밤하늘 별빛을 하나 둘
진달래꽃 꽃잎 틔우듯
조선의 밥상 위에 차려 놓은
이 좋은 가을 날
어느 누구 손목을
가을바람처럼 잡으려 하지 말고
이제는 우리들 작은 손
당신이 그리도 사랑한
조선의 흙 위에 꼿꼿이 자란
잣나무처럼 푸르러야 하지 않나요
이곳에 숨어 지낸다고 당신의 향기가
언제 어디든 숨을 수 있나요
내 사랑 아사카와 다쿠미
당신의 성스러운 땀방울 스며든
울창한 숲 속 오솔길
그 길섶의 꽃향기
어디 숨을 곳이 있나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천길 벼랑 성자의 꽃향기가
숨는다고 숨을 수 있는가요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리
지금여기 당신의 유택 앞에 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忘憂(マンウ)の里 思索の途
聖者として輝く 浅川巧功徳
- 80周忌 追悼の詩 今日も 漢江(ハンガン)越え連なりはしゃぐ山並どの尾根 どの峰 ひとつとて揺るぎなく此方 忘憂の里 思索の途貴方へ向う歩み足 春先の水靄と 真冬の張り氷の下からも休まず西の海へと向うが如く巡礼の途へと拓き敷き延べ一寸なりとも違えはありません 朝鮮の裸山が今となってはどの一所とて 見落とす事無く夜空の星明りを一つ二つ朝鮮の食膳の上に膳立てされたある誰かの手首をこれからは我らの小さな手朝鮮の土の上に真っすぐ育った 此処に隠れ過ごしたとて貴方の香が私の恋しい 浅川巧功徳鬱蒼たる森の中 寂しい細道何処か隠れ場所がありますか隠れようにも隠れきれるものでしょうか如何なる心配事も忘れられるとの忘憂の里我らはお互いに愛せざるを得ません
- 今 此処 貴方の幽棲宅の前に立った
- 未だに一度も見た事のない 千丈の断崖聖者の花の香が
- その道端の花の香
- 貴方の聖なる汗水が染み込んだ
- 何時何処でも 隠れますか
- 朝鮮松のように青々となりたくはないの
- 貴方がそれ程愛した
- 秋風のように取ろうとはせずに
- この佳き 秋の日に
- ツツジの花びらを浮かばせたかのように
- 松風騒ぐ音 夕映え中に 深々と染み込むように
- 貴方が余すところなく 其れ程までに愛し植え育てた
- 貴方への愛の詩
- 日差しの良い思索の道を
- あのアリスウ(漢江)の波浪
- 水音の辺を離れられません
- ひと房の聖者に映える
- 流れる江の水を見守るが如く
- 雨風 吹雪 にさらされても
- 詩人 鄭鍾培(ジョン・ジョン・ベ)
망우리(忘憂里)에 성자(聖者)여
정종배(시인, 청량고 교사)
봄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중
가을잔치 낱알들 터질 듯 차고 넘쳐
이 우주가 가장 무거워 풍성한
에메랄드 빛 가을하늘 가볍게 들어 올려
당신이 탱탱하게 좋아하신 조선의 가을은
올해도 어김없이 환하고
근심을 잊어버릴 이곳 망우리(忘憂里) 또한
하늘은 높다랗게 무르익고
가을볕과 풀벌레 울음소리 흥성(興盛)합니다
그동안 당신의 옹색(壅塞)한 유택(幽宅)을
이제야 새로 단장하여
당신의 가없는 인류 사랑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지금여기 모인 우리는
동락천 샘물 같은 뜻 깊게 새겨
모든 이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당신의 조선백자 빛 사랑을 심고 가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꿈꾸고 마련하겠습니다
조선의 벌거벗은 산하를 바보처럼 사랑하여
늘 푸른 나무들의 향기를 빚어내고
조선 민족들을 조건 없이 품에 안아
다른 이 보다 한 발 먼저 뛰어난 눈으로
지금은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잃어버린
조선 공예품에 대한 절대적 사랑 속에
온돌방에 딱 들어맞고
오래 쓰면 쓸수록 식구들의 윤기로 빛나는
조선밥상의 우수성을
당신이 아니면
어느 누가 알아보았겠습니까?
당신의 형님 노리타카와 빠트리지 않고 밟고 헤아린
삼천리금수강산 방방곡곡(坊坊曲曲) 도자기 가마터는
조선 도공들의 예술혼을 일깨워
현재 살아 꿈틀대는 도자기로 거듭나고
당신의 맑은 눈으로 안고 닦아
세월이 흐를수록 더 융숭(隆崇)한 달항아리
그 그지없이 비어있어 넉넉한 당신의 사랑의 길 위에
우리는 줄지어 발바닥 닳도록 꽉꽉 채워야겠습니다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님
이제는 조선의 사계절의 아름다운 배경과
당신을 기리며 본받고자 찾아온 이들이
당신을 잊을 수 없는 성자로 거듭 태어나길
조선을 한눈에 사랑하신
그 전 그대로 응원하여
두 손 꼭 잡아 주시길 빕니다
2014. 10. 4일
청량고등학교 망우리 추모공원 저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 담당 교사 정종배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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