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민족대표 33명 중 1인의 독립운동가, 목사, 교육자, 반민족행위자 박희도(朴熙道, 1889~1951) 71주기
박희도는 감리교 중앙교회 전도사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로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3·1혁명 학생 주동자로 적시되어 있다.
박희도는 3·1혁명에서 기독교계의 회계를 맡으면서 민족대표 포섭에 실무적인 역할을 맡았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다.
3.1운동 후 출옥 후 우리나라 최초 사회주의 관련 잡지 《신생활》』을 창간했다. 조선 최초 사회주의 관련 《신생활》』 필화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두 번째 감옥을 살았다.
이후 친구 부인인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기사로 여제자와 키스 내기 화투를 했다는 것이 알려져 전국이 시끄러웠다. 이를 처음 보도한 신문은 몽양 여운영 선생이 사장이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이 사건으로 박희도가 여자와 곱사춤을 잘 추는 명인이라고 소개되는 만해 한용운 시인과 합성 드립까지 나왔다. 당시 신문 가십란에 단골 스타가 되었다.
중앙보육학교(현 중앙대학교)를 임영신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잡지 《동(양지)광》의 창립과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 되었다가
1951년 9월 26일 별세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다.
1958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묘지번호 109628이다.
친일행위자로 반성과 성찰의 후일담을 남긴 드문 경우다. 연보비는 없지만 육군정훈학교에서 묘비를 세웠다.
형님과 동생들도 독립운동을 하였다.
형님인 박희숙은 옥고를 치렀다.
여동생인 박영복과 남동생인 박희성은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 서훈을 받았다.
박영복은 독립운동가인 남편 강문성과 미국에 안장되었다.
박희성은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7년 박희도 후손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 자리 잡기 전까지
망우리 박희도 가족묘지를 돌봐준 이는
휘경학원 설립자인 황온순 여사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김명신 독립운동가는 사촌누이 박경신의 남편이다.
김명신은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1919년 3월 1일 해주읍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전달하여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자료를 찾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한다.
여기까지 읽으셔도 됩니다. 좀 더 자세히 읽으려면 다음을......
3·1혁명 당시 중앙교회 전도사이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였던 박희도 유택은 망우역사문화공원 민족대표 한용운 시인과 오세창 서화가 묘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두 분의 묘역은 사색의 길 위에, 박희도 묘역은 사색의 길 아래에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갈 수밖에 없다. 민족대표 33인 중 변절하여 반민족적 행위를 범한 최린⸳정춘수⸳박희도 3인이다. 박희도 목사는 그의 부모님 묘역 아래 묻혀 있다. 중랑구청에서 연보비도 세우지도 않았다.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으로 독립유공 포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민족대표 33인은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들은 비웃었다고 한다. 아울러 재판을 받으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는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박희도는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장소를 변경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김제선 조사관의 출두 요청을 받고 이튿날 특위에 출두하였다.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불구속되었다.
비석 건립 일자와 주체는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으로 돼 있다. 반민특위 조사 이후 사망할 때까지 박희도는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했다. 반민족행위자 중 자숙하고 조용히 지낸 경우는 드물다. 이런 인연으로 육군정훈학교 측은 1958년 미아리공동묘지에서 이장하며 그의 사후 7년 뒤에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 기미년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 배위 김희신 합부. 뒷면 : 고선생은 단기 4222년 8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 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
박희도의 부인 김희신은 1968년 1월 27일 향년 75세로 소천하여 정릉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남편과 합장되고 슬하에 2녀 1남을 두었다.
박희도는 1889년 8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한문을 배우고,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했다. 이후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16세 되던 해(1905년)에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이후 해주군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부터 전개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회원확대 운동에 <열심단>으로 참여하여 금패 포상을 받을 정도로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그는 함경남도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서울 협성학교 부교장을 거쳐 1916년 10월 장낙도·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와 함께 중류 이하 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표방한 중앙유치원을 설립했다. 중앙보육학교를 거쳐 지금의 중앙대학교 뿌리이다. 중앙대학교 유아교육학과 76학번 또랑시인 동기들은 졸업한 학과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 전도사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로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3·1혁명 학생 주동자로 적시되어 있다.
또한, 박희도는 3·1혁명에서 기독교계의 회계를 맡으면서 민족대표 포섭에 실무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 같은 여건을 십분 활용하여 3.1혁명 준비과정에서 민족대표들과 학생 측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약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출옥한 후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현 동대문구 용두동) 교회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1월 김명식 등이 주도한 <신생활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3월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신생활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만기 출소하였다. 이 사건은 《신생활》 11호가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것이 빌미가 되었고, 이로 인해 잡지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였다. 조선 최초 사회주의 관련 출판 필화사건 및 재판이었다.
1924년 말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도덕적 인격수양과 경제적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조직된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8년 9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고, 같은 시기 신간회 동경지회 간부(대표회원)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동회(同會) 회보 편집위원을 담당하였으며, 10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 조선고아구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교육과 사회운동에 종사하다가 1934년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려 재기를 꿈꾸던 그에게 또다시 또 악재가 등장했다.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미투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4년 3월 17일 박희도가 제자를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 신문은 이후로도 10여 차례에 걸쳐 관련 기사를 실었다. 사태가 커지자 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를 벌였으나 도중에 피해 여성이 애초의 주장을 번복하는 등 논란이 가중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얼마 뒤 중앙보육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중앙일보》의 박희도 스캔들 관련 보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며 과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민족지사에서 자치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박희도가 언론의 표적이 됐다는 지적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30년대 중반경부터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논란 사건 후 친일 행적으로 독립유공 포상도 제외됐다. 이후 박희도의 삶은 이전과는 180도 뒤바뀌었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그가 친일로 변신하여 일제 통치를 찬양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1934년 11월 친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일선융합을 표방하며 조직한 시중회의 발기인·이사로 1937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요망’ 준비위원에 참여하여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이후 1942년 5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환영하고 감격해하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조선 총독, 조선군사령관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938년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939년 1월 ‘내선일체’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사를 창설하여 기관지 《동양지광》을 발행하였다. 1945년 5월 폐간할 때까지 동 잡지사의 사장,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에 여러 차례 칼럼을 썼으며, 수많은 친일파들에게 지면을 제공하였다. 당시 단골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용제는 《한국문학》 1978년 8월호에 기고한 '고백적 친일문학론'에서 "동양지광은 항일 지하단체의 본거지였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김용제는 제1회 '국어(國語)문예총독상'을 수상한 1급 친일문인이다. 여기서 국어는 일어를 말한다.
또한, 1939년 5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전쟁협력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및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참여로 활동하였다. 이밖에 1937년 9월부터 지방 순회 좌담회와 강연회 등에 참가하여 황민화, 지원병, 학병, 헌납 권장 등을 역설하였다. 이 같은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박희도의 형님 박희숙(1886~?)은 3·1혁명 당시 동생 박희도를 도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3,500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1921년 1월 징역 2년에 처해졌다. 1923년 만주 봉천 목사와 청년회 임원으로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이후 행적은 파악되지 않는다.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1892~1965)은 1915년부터 1937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새크라멘토지방회(朔都地方會), 새크라멘토한인부인회,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로스앤젤레스지부(羅城支部)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5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 국치기념식(國恥紀念式)에 참여하였고, 1917년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 1918년 3월 3일 새크라멘토지방회에 가입하였다.
1919년 8월 2일 다뉴바에서 각 부인회 대표자들이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자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여 합동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여자애국단 새크라멘토지부에서 활동하며 1921년과 1930년 3ㆍ1절기념식에서 순국선열 추도, 학생운동 후원 등을 역설하였고, 1924년 8월 대한여자애국단 창립기념식에서 여자애국단의 역사를 강연하였다.
1934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부단장ㆍ단장, 1935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중국항일전쟁 후원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활동하면서 1918년부터 1937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영복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성명은 권영복으로 이명이 박영복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의 결혼으로 강영복으로도 부른다. 남편 강영문도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국가보훈처 자료를 찾다가 오류 신고를 하였다. 공훈록 이름에 권영복으로 이명에 박영복으로 기재되었다. 생몰연대 1892~? 으로 기재되었다. 남편인 강영문도 독립운동가로 생몰년도 1878~? 로 기재되어 1888~1968년으로 신고하였다. 신문기사에 부부의 무덤에 생몰년도가 새겨져 있다.
박희도의 동생 박희성(Howard S. Park, 1896~1937)은 연희전문 출신으로 임시정부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서 1920년 2월 20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김종림이 발기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willows)에 세운 한인비행사 양성소에 3월경 입학해 1년여 동안 비행술을 배웠다. 1921년 3월경 노다이 지방에서 열린 대운동회에서 시험비행을 하여 관람 군중으로부터 '한인소년비행대장'이라는 애칭을 받았다. 4월 10일 레우드 시티 비행장에서 항공 면허 시험을 치르던 중 추락하는 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나, 5월 22일 다시 시도해 세크라멘토 비행장에서 국제항공증서를 받게 되었다. 7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회의에서 육군비행병 참위로 임명되었다. 국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1937년 1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0년 11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박희성의 안장식에 박희도의 손자인 박흥남 씨가 미국에서 살다 참석하였다. 1977년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갔다. 빈손으로 조국을 떠났다. 아버지는 세탁소를 자신은 뉴저지주에서 회사원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밝혔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박희도 가족묘지를 돌보는 이가 있다. 박희도의 후손들이 197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생활이 안정되지 않은 상당 기간 묘역을 돌보았다. 그분은 휘경학원(1970년) 설립자로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미국 영화 《전송가, Battle Hymn》(1957년)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안순양의 실제인물이 황온순(1903~2004) 여사이다. 황온순 여사는 이화학당 시절 찍은 단체 사진에서 유관순 열사가 어깨동무를 한 바로 옆의 학생이다. 황온순 황해도 연안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1916년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경성여고보 1학년 때 아버지의 별세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3·1혁명에 참여했다. 1921년 박희도의 지도로 중국 길림여자사범학교에서 유아교육 공부를 하고서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였다. 이화여전 유치사범과에 입학하여 2회로 졸업하였다.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수령한 김명신은 황학소, 이동혁, 최명현. 김창현, 임용하 등은 1919년 3월 1일 해주읍 만세운동에 주도하여 각각 1년 8월 옥고를 치렀다. 김명신과 임용하 두 분은 독립운동 서훈을 받지 못했다. 자료를 찾아 정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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