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3.1혁명 맹산 시위 주도하고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 지기(知期) 문명훤(文明煊, 1892~1958) 독립운동가 64주기

정종배 2022. 10. 23. 03:30

3.1혁명 맹산 시위 주도하고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 지기(知期) 문명훤(文明煊, 1892~1958) 독립운동가 64주기

 

 

문명훤은 18921130일 평남 평양 신양리 176번지 52호에서 태어나 19581023일 서거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 방략을 모색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하였다. 19193·1혁명이 일어나자 평남 맹산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19193월 초순 이 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난 후 56명이 헌병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갔다. 그들이 헌병대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헌병들이 담 위로 올라가더니 들어왔던 사람들 모두를 쏘아 죽였다. 그러고는 내려와서 죽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다시 찔러 죽였다. 53명이 그곳에서 학살당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나중에 그 주검의 더미에서 기어 나와 탈출하였다. 그들이 계속 살아 있는지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한 여성 기독교인이 며칠에 걸쳐 여행한 끝에 그의 외국인 친구에게 위의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ㅡ재한 선교사 보고 문건

 

 

미국인 선교사 모펫 등이 본국에 보고한 이 문건은 현장에 있던 여러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문제의 사건은 1919310일 대동강이 발원하는 산간 지역인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일어났다.

 

 

상해에서 영어전문학교를 수료하고 19204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624일 의원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단우 562)하여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였다. 1931년 초에 귀국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76월 회원 15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4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 재판 끝에 1941721일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일경의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망우리공원 솔밭약수터 위 망우산 제2보루 밑 유택에서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402로 이장하여 안장됐다.

 

 

연보비 앞면, 말에는 본이 있고 글에는 법이 있다. 말과 글이 같은 민족의 사회에서 말의 본이 글의 법이오, 글의 법이 곳 말의 본이다. ㅡ「고등 한국말의 본」중에서

 

 

문명훤의 연보비는 망우산 동쪽 구리시 동락천 근처 독립지사 유상규 연보비와 나란히 서 있다. 묘지 터와 묘비는 망우산 제2보루 망우전망대 밑 북서쪽 중랑구 솔밭약수터 사이 9부 능선에 남아 있다.

 

 

묘비 앞면, 남평문공명훤의묘. 묘비 뒷면, ‘고등한국말의 본’ 저서 중에서 한문자 사용과 왜 생활 습속 등 노예 문화의 깔때기가 일소되고 자주문화가 수립되어야 곧 민족 문화가 순화되어야 민족성이 강대하여져서 민족적 긍지와 자부가 앙양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화동협진하는 기품이 촉진되어서 사대숭외 등 비굴의 누습이 민족에게서 사라지는 것이다 一九八四년 六월 대한민국 정부 알선으로 이 비를 세우며 아들 요식 대동 요현 대성 장손 명유 가려 뽑고 혜촌 김학수 쓰다

 

 

묘비 옆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十一장 二十五. 二十六절 말씀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나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입학한, 미국 이민 1세대인 문대동 미국 삼문그룹 회장은 문명훤의 둘째 아들이다.

 

 

지기 문명훤 어록 및 연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