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우리의 소원 작사가 석영 안석영

정종배 2023. 2. 24. 08:40

《백조》 동인, 문화예술계 전방위 달란트, 동요 <우리의 소원> 작사가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1901~1950) 73주기
 
 
 

석영 안석주는 널리 알려진 동요 <우리의 소원>의 작사가이고 삽화계의 선구자이며 각종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일제 말기 친일감독으로 변모했다. 한국 영화 도입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인으로 기억할 수 있다. 아명은 안석영安夕影이고, 본명은 안석주安碩柱이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야스다 사카에安田榮였다.
 
안석영은 1901년 4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0년 2월 24일 서울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구본웅·김창섭·이제창·장발 등과 함께 ‘고려화회’를 조직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아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혼자서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동경혼고양화연구소’에 들어갔으나 신병으로 퇴소하고 1921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김동성으로부터 노수현·이상범 등과 함께 만화를 배웠고, 모교인 휘문고보의 도화 강사로 재직하였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22년 11월 나도향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1922~23)의 삽화 때문이었다. 안석영은 이 삽화를 맡으면서, 조선 삽화계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안석영은 1922년 이기세·윤백남·민대식·박승빈·이원섭 등이 조직한 극단 ‘예술좌’ 창립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연극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다가 홍사용·이상화·박영희·나도향 등과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여 잡지 표지를 그렸다. 김복진과 함께 ‘토월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여, 2회 공연 <부활>(1923)의 주인공 네프류도프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휘문학교 미술 교사를 하면서, 1923년 7월 ‘토월회’의 무대미술을 담당하였고, 8월에는 김복진, 김기진 형제와 함께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며 신극운동에 동참했다.
1923년 ‘파스큘라(PASKYULA-박영희·이익상·이상화·김형원·김기진·연학년·안석영·김복진)’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도쿄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한 뒤, 192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만화 <허풍선이 모험기담>, <바보의 하로일>, <엉터리> 등을 연재했다. 같은 해 연말에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1925년 4월 김복진, 이승만(화가) 등과 함께 ‘조선만화가구락부’를 조직했고, 8월 김복진,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조직, 6인의 중앙위원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으며, 기관지 《예술운동》의 삽화를 그렸다. 1927년 신간회 창립 당시 간부로 참여했고, 1928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으며, 벽초 홍명희의 연재소설 「임꺽정」의 삽화를 그렸다. 1931년 카프 제2차 방향전환 때 박진명·강호·이갑기 등에 의해 제명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서 사회비판적 내용을 다룬 만문漫文만화, 미술평론, 소설, 시, 삽화, 연극평론, 시나리오 등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이때 연재소설의 삽화를 혼자 도맡아 그렸다.
1933년 《조선일보》에 소설 「만추풍경」을 연재한 뒤, 1934년 자신이 쓴 소설 「춘풍」이 박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진출하여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1937년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미망인의 사랑을 그린 소설 「연가」를 비롯해 「허무러진 화원」과 평론 「조선문인인상기」, 「조선문단 30년 측면사」 등을 발표했다.
1935년 《조선일보》사는 잡지 발간을 총괄하는 출판부를 신설했다. 초대 주간은 노산 이은상을 초빙했다. 안석주는 시인 백석·함대훈 등과 함께 《조광》 창간호를 준비하려 출판부로 발령이 났다. 《조광》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석영은 일본 유학 후 미술·영화·문학·연극 등 각 방면에 다재다능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이무영·박종화·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 말타기」를 내놓았다. 《개벽》·《백조》·《학생》·《어린이》·《별건곤》 등 유명한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만문만화로 이름을 알렸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 풍경을 매우 잘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천재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둔 뒤 함흥 영생고보 인기 만점의 교사로서 활발한 수업 외 활동 중 교내 연극반을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1936년 성탄절 축제를 앞두고 백석은 석영을 함흥으로 초청했다. 석영은 백석이 청을 흔쾌히 받아들었다. 백석이 연출하고 당대 최고의 연극인이 지도한 크리스마스 연극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 지었다. 그 당시 영생고보 문예반 담당교사는 초허 김동명 시인이었다. 초허는 망우역사문화공원 망우산 능선에 묻혔다 2010년 10월 10일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12-1번지 고향 뒷산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망우역사문화공원 건너편에 유택을 마련한 강소천 아동문학가도 영생고보 늦깎이 학생으로 백색 시인으로부터 개인적인 지도를 받았다.
 
안석영은 1927년 극단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미술감독 및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며, 12월 신문사 기자였던 이익상, 김기진 등과 함께 ‘영화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안석영은 심훈 감독의 〈먼동이 틀 때〉의 미술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안종화의 감독 데뷔작 〈노래하는 시절〉(1930)의 각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안석영은 1931년 개봉된 〈화륜〉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키노 제작, 김유영 감독의 〈화륜〉은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이었던 김유영,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등이 《중외일보》에 발표한 연작(공동 원안)을, 김유영과 서광제가 각색하여 제작한 임한 작품이었다. 당시 카프 계열 작가들은 이 작품을 기화로 한동안 침체되었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재건하고자, 공동 창작을 제안하고 시도하였다.
1935년 안석영은 이규환 감독의 〈바다여 말하라〉와, 박기채 감독의 〈춘풍〉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러한 행로는 안석영의 감독 데뷔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안석영의 감독 데뷔작은 〈심청전〉이었다. 〈심청전〉은 1937년에 이기세가 대표로 있던 ‘기신양행’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석금성․김소영․김신재․조석원 등이 출연한 영화였다. 〈심청전〉은 조선 영화 초창기인 1925년에 윤백남프로덕션 창립 기념작으로 이경손 감독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바 있었는데, 12년 만에 리바이벌된 셈이다. 과거와 달리 안석영의 〈심청전〉은 35㎜ 12권 분량의 발성영화였다. 각본은 안석영이 직접 썼고, 이명우와 이필우 형제가 촬영과 편집 그리고 녹음을 담당하였다. 이 영화의 일부 프린트 판이 러시아 국립영상자료원에서 제공되어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존되어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석영은 친일 영화감독으로 변모했다. 1941년에 개봉된 〈지원병〉은 조선인이 자원입대할 수 없는 현실에 실망하던 청년 춘호(최운봉 분)가 우여곡절 끝에 지원병 모집에 합격하고 이를 주위 사람들이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원병〉은 안석영이 직접 각색한 작품이기도 했다. 1942년에 개봉된 〈흙에 산다〉는 총독부의 인삼재배정책을 옹호하고 이 사업을 권장할 목적으로 만든 영화이다. 두 작품 모두 친일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 어용 국책영화에 해당한다. 안석영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의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황도학회’에 영화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외에도 ‘근로문화인부대’활동,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의 친일활동을 하였다.
 
해방을 맞은 후 1950년 2월 24일 병으로 죽기까지 안석주는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해방 직후 ‘조선영화건설본부’(1945.8)의 내무부 부장을 맡았고, 이후 개편된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안석영은 ‘한국영화협의회의’ 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중앙일보사 고문을 역임하며 ‘영화감독 구락부’를 결성했고, 좌익의 ‘문화단체 총연맹’에 대항하여 1947년 2월 출범한 우익 문화단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참여했다. 1949년에는 윤봉춘 감독의 〈애국자의 아들〉의 원작을 제공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에서 연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만주일보》사 편집위원을 지낸 후, 《문화시보》를 창간하기도 했다. 작품 및 관련 도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먼동이 틀 때〉(When the Sun Rises(Meondong-i teul ttae), 조선, 1927, 미술),
〈노래하는 시절〉(Season for Singing(Nolaehaneun sijeol), 조선, 1930, 각본),
〈춘풍〉(Spring Wind(Chunpung), 조선, 1935, 각본),
〈바다여 말하라〉(Sea, Talk to Me(Bada-yeo malhara), 조선, 1935, 각본),
〈심청전〉(Story of Sim-chung(Sim Cheongjeon), 조선, 1937),
〈지원병〉(Volunteer(Ji-wonbyeong), 조선, 1941),
〈흙에 산다〉(Rural Life(Heur-ge san-da), 조선, 1942),
〈애국자의 아들〉(A Patriot's Son(Aegugja-ui adeul), 한국, 1949, 원작) 등이며
저서에는 『안석영문선安夕影文選』(관동출판사, 1984) 등이 있다.
 
1947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겨레, 한민족이 입을 모아 부르는 <우리의 소원> 노래는 1947년 안석주가 가사를 쓰고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安丙元( 1926~2015)이 작곡한 것이다.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의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되었다가 하지만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통일'로 바꿨다. <우리의 소원>은 1950년부터 교과서에 실렸고 이후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우리 겨레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8분의 6박자, 내림마장조의 서정적인 가락이다. 노랫말에서 표출되는 간절한 소망과 겨레의 의지가 이 노래를 박력 있고 힘찬 노래로 불리게 한다. 작사자는 작곡가의 아버지로서, 부자 합작의 3·1절특집 어린이오페레타 <우리의 소원>의 몇 곡 중에서 이 곡만이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가 우리들에게 가장 감동을 준 장면은 아마도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정상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양쪽 수행원들과 함께 어울려 손을 맞잡고 부르던 바로 그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렇듯 남북 모두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예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 사정이고 보면 안석주, 안병원 부자는 참으로 행복한 부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영화 분야에 안석주의 이름이 올라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4년 11월 14일 망우리공동묘지 안석영 묘비 제막식 같은 날 김영랑 시인 이장 및 묘비 제막식을 치렀다.

안석영의 가족관계를 소개한다.
안석주의 장인인 해관 김일선金一善(1872~1935) 선생은 1872년 5월 16일(음력) 서울 누상동 유각골에서 아버지 김재희金在熙씨와 어머니 장張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신학문은 별로 배우지 못했다. 기독교에 입교하기는 1902년부터였다. 그는 1911년에 이르러 유명한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 박성춘朴成春씨와 함께 승동장로교회의 초대 장로로 피선되어 1935년 1월 24일 이승을 떠날 때까지 그 교회의 주인 장로로 있었다. 그리고 1906년에 그 교회가 사립승동기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초창기부터 그 학교의 교사 또는 교장직을 맡아 일했으며, 1920년부터는 경성보육원(한국 최초의 고아원이며 오긍선 박사의 기독보육원의 전신)을 설립하여 그 원장이 되었다. 1924년에는 오늘날의 경기대학, 인창중학, 인창여자상고, 경기국민학교의 전신인 사립인창학교를 설립하여 재단법인 인창의숙의 이사장이 됐다.
이처럼 그의 활동은 폭넓은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장로이면서 일반사회에 나아가 육영사업과 사회사업의 개척자가 됐다. 그 중에도 제일 두드러진 공헌은 역시 우리 YMCA를 통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두 가지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는 재정관리 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중 계몽운동이었다. 재정관리 면에 대한 그의 공헌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전임자를 말할 필요가 있다. 즉 초창기 한국YMCA 재정관리 면에 공헌자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김일선 씨와 브라운(J. M. Brown) 씨라 할 수 있다.
 
브라운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오늘의 서울기독교청년회의 전신)가 창설될 때 그 창설 이사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그 보재위원장 즉 오늘의 재정위원장이었다. 그는 본래 영국인으로서 1894년경에 한국 정부의 초빙을 받아 그 재정 고문과 인천세관 고문을 겸임하고 있었다. 역사가 이선근씨의 말에 의하면, 그는 황실과 정부의 불요불급한 경비를 절약하여 수지의 균형을 잡도록 노력했고, 나아가 일제에 대한 국채상환에도 남다른 수완을 보여 기한 전에 완불할 수 있게 해 일반 국민의 찬양을 받게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러시아의 모략을 받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한국YMCA창설운동에 참여하여 그 창설이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YMCA 창설 초기부터 일반회원으로 입회하여 처음에는 청년회학관 교사가 되었고, 그 뒤 곧 이사가 되어 이사회의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치밀하고 재리에 밝아, 회계가 된 다음부터는 재정 관리면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전임자 브라운씨와 마찬가지로 청년회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사가 되자 그는 물론 재정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1904년 현재의 우리 청년회의 집터 약 1천 평을 사들일 때 자기의 돈 8,000원을 선불하였으며 1907년 옛 회관을 지을 때에는 먼저 거액의 사재를 희사하면서 모금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24년에는 서울YMCA(당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가 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재정관리의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금고만 맡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회원모집으로부터 거액기부 또는 일반모금운동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으며, 그가 있음으로 해서 YMCA 재정난이 해소되었고 재원이 발굴되곤 했던 것이다. 보통 돈 관리 잘하는 사람은 돈을 움켜잡고 돈을 못쓰게만 하는 것이 흠이다. 그리고 재원을 발굴하거나 돈을 모아들이는 재주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일선씨는 그와는 달랐다. 그는 손창원과 같은 재산가를 잘 움직여 거액을 기부하게 했으며, 자기 돈도 아낌없이 내어놓았다. 또한 돈 관리 잘하는 사람은 사업 방면에는 어둡고 무관심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엇이나 유익한 사업이라면 몸소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재정의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그의 특징은 민중계몽운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했다. 그 당시 청년회는 일요강화 또는 강연회를 통하여 일반 청년계와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는 이 방면에 있어서도 큰 구실을 했다. 그 당시 Y멘으로서 말 잘하는 지도자를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성격으로 볼 수 있는데, 외국 유학을 한 윤치호, 신흥우 등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고, 외국 유학을 전혀 못하고 국내에서 이름난 이상재, 김필수, 김창제 등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김일선 씨도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김창제, 김필수, 김일선, 이 세 김씨는 Y의 3대 웅변가라는 칭호까지 들은 유명한 강사들이었다. 이 세 김씨는 각각 특징이 있었는데, 김창제는 평신도로서 교훈적이며 예언자적인 웅변가였으며, 김필수는 유학출신의 교회의 목사로서 얼큰하게 술에 취하면 웅변을 더 잘한다는 소문이 났으며, 이에 반하여 김일선씨는 교회의 장로로서 어장語長은 매우 짧으나 아주 조리 있고 권위 있게 말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청년회 안에서보다 일반사회에서 먼저 강연을 시작했다. 또한 1906년 독립회관(예전의 문화관으로서 독립문 옆에 있었다)에서 자주 대중강연을 했는데 그 때 “벙어리 천사”, 즉 거만하고 무례한 중국 사신을 골탕 먹인 한국 거지의 이야기를 해서 명성을 날리었다. 또한 청년회 강당에서 일요강화에서 자주 강연을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시던 성경을 인용하여, 강연할 때는 울지 않는 청중이 없었다고 한다.
 

안석주의 처남인 김대연은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1930~40년대 종로2가에서 금희악기점, 경성악기점 등을 운영했다. 당시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악기점이었다고 한다. 대가의 외아들답게 배포가 컸던 김대연은 친구와 함께 금광에 투자했다가 재산을 다 날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안석주 식솔들마저 집과 땅을 잃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신당동의 적산가옥으로 이사했고 이때부터 궁핍한 생활이 시작됐다. 안석주의 4남 5녀들은 비록 음악적 재능을 모두 활짝 펼치진 못했지만 재능만큼은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석주는 1921년 아내 배화여고 졸업한 김흥봉과 결혼했다. 현재 대부분의 후손이 캐나다로 이주한 상태다. 국내에는 차녀 희숙과 3녀 희복이 있다.
 
장남 병원은 수많은 동요를 작곡한 인물로, 안병원은 한국 동요사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꼽힌다. <우리의 소원> 이외에도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로 시작하는 <구슬비> 등 동요 300여곡을 작곡했다. 미국 민요 <징글벨>의 가사를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라고 번안한 이도 안병원이다. 그는 광복 직후 <스승의 은혜>를 작곡한 권길상 씨와 어린이 노래 단체인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었다. 또 YMCA 어린이합창단과 서울시연합소년합창단 등을 이끌며 동요 작곡과 보급에 힘썼다.
안병원은 중학생 시절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상영된 '빈 소년합창단' 순회공연 기록영화를 보고 동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는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미국 48개 주를 돌며 200여 차례나 공연했다. 전후 폐허가 된 한국을 도와달라는 기금 모금 공연에도 참가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어린이 노래 음반을 냈고, 이를 통해 불우한 아동들을 도왔다. 안병원은 경기여중·고와 숙명여대 등에서 음악 교사와 강사로 활동하다가 1974년 형제들이 정착해 사는 캐나다로 이민 갔다. 캐나다에서 빵집과 편의점 등을 운영하면서 토론토YMCA와 한인 교회 등에서 합창단을 지휘했다.
 
안병원은 2006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남북이 통일을 이뤄 '우리의 소원'이 흘러간 추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진정한 바람"이라며 "통일이 되는 그날 판문점에서 남북 어린이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이 곡을 부르고 싶다"고 했었다. 안병원은 직접 그린 유화 작품을 모아 북한 어린이 돕기 전시회도 열었다. 안병원은 2015년 4월 5일 캐나다 토론토 노스요크병원에서 별세했다.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인 안희숙은 1960~70년대 활발한 연주활동과 많은 제자를 길러낸 원로 피아니스트다. 제자들이 희연회(스승의 이름 ‘희’와 모교인 연세대의 ‘연’을 따서 만들었다)를 결성, 사제간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한세대 음대 명예교수인 안희복은 서울시향 플루티스트로 활약하다 도미, 맨해튼음대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 후 대학에서 성악을 가르치며 ‘안희복 오페라단’을 결성, 신진 오페라 가수들을 길러냈다. 안 교수의 남편은 서울대 명예교수인 테너 박인수. 그는 정지용의 시에다 곡을 붙인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불러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악가다.
 
2020년 3월 19일 집사람과 파주 청아공원을 찾았다. 1920년대 이후 예술계의 팔방미인 안석주 선생을 참배하고 안석주 묘비를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석영의 잠든 공간 앞에 참배하고, 묘비 뒷면에 영랑의 시 「바다로 가자」의 첫 행과 둘째 행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큰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永郎詩 바다로 가자-에서가 새겨져 있는 석영 안석주 묘비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진달래꽃 울타리 안에 가려있었다. 유족들이 허락한다면 석영의 묘역도 다시 망우리공원에 모시어 ‘통일의 노래 광장’을 마련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