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김병기 화백 한겨레 연재 " 아버지 졸업작품 '님프의 죽음'은 암울한 민족현실 상징"

정종배 2017. 3. 13. 19:08

아버지 졸업작품 ‘님프의 죽음’은 암울한 민족현실 상징”

등록 :2017-03-01 21:21수정 :2017-03-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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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서양미술 수용의 선구자 김찬영

김병기의 부친 유방 김찬영(1893~1960)은 1910년대 고희동·김관호에 이어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조선인 유학생 3호이자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 선구자다. 하지만 미술학교 졸업작품 ‘자화상’만 유일하게 원본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미술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917년 또 다른 졸업미전 출품작인 ‘님프의 죽음’은 흑백 도판만 남아, 미술평론가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이 2005년 펴낸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에 수록돼 있다. 사진 돌베개출판사 제공
김병기의 부친 유방 김찬영(1893~1960)은 1910년대 고희동·김관호에 이어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조선인 유학생 3호이자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 선구자다. 하지만 미술학교 졸업작품 ‘자화상’만 유일하게 원본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미술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917년 또 다른 졸업미전 출품작인 ‘님프의 죽음’은 흑백 도판만 남아, 미술평론가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이 2005년 펴낸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에 수록돼 있다. 사진 돌베개출판사 제공
담배 장사냐 엿 장사냐, 사람들은 놀렸다. 유화 도구를 들고 야외 사생이라도 나가면 사람들은 신기하다 했다. 유화물감을 보고 닭똥이냐고 물었다. 심지어 일본 유학 가서 ‘정신 돌았냐’고도 했다. 1910년대 이 땅에 서양 미술이 들어오던 때의 풍경이다. 1915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희동, 그를 두고 당시 신문은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보도했다. 이어 평양 출신 김관호와 김찬영이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들은 서양미술 수용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의 미술활동에 대하여 곱게 보지 않았다. 뒤에 고희동은 이렇게 회고했다.

“6년 만에 졸업인지 무어인지 종이 한 장을 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양화(洋畵)를, 더군다나 알 까닭도 없고 유채(油彩)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둥 냄새가 고약하다는 둥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둥 춘화도를 연구하고 왔느냐는 둥 가지각색의 말을 들어가며 세월을 보내던 생각을 하면, 나 한 사람만이 외로운 고생을 하였다는 것보다 그 당시에 그렇게들 신시대의 신지식과 신사조에 캄캄들 하였던가 하는 생각이 나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이다지도 새것에 기울어지는 풍조가 엄청나게 지나치는가 하는 감이 든다.”(<동아일보> 1959년 1월5일)

1915년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은 졸업작품으로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현재 도쿄예술대학 미술자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915년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은 졸업작품으로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현재 도쿄예술대학 미술자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희동의 도쿄미술대학 졸업작 가운데 하나인 ‘자매’는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하기 위해 모델을 자청한 신창기생조합의 채경을 그린 것”이란 고희동의 귀국 기사와 함께 <매일신보>에 소개된 흑백 도판만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희동의 도쿄미술대학 졸업작 가운데 하나인 ‘자매’는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하기 위해 모델을 자청한 신창기생조합의 채경을 그린 것”이란 고희동의 귀국 기사와 함께 <매일신보>에 소개된 흑백 도판만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기야 1909년 미술학교 입학 시절 고희동은 서양미술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없어 당황하기도 했다. 석고 데생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했는지 모른다. 담당교수가 하얀 석고상을 두고 어디가 제일 어둡냐고 물었다. 하지만 명암법 개념이 없었던 학생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목탄 데생을 통하여 대상의 입체감이라든가 명암 관계를 알게 된 것은 뒤의 일이었다. 하기야 지필묵에 의한 이른바 ‘동양화’만 보던 미술학도에게 서구미술 충격은 매우 컸다. 아카데미즘 미술을 수학하고 귀국했지만 조국의 미술 상황은 싸늘했다.

유교의 예술에 대한 시각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였다. 따라서 미술은 인격도야의 방편에 불과했지 직업적으로 창작에 몰입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사회에서 소통되던 산수화, 그것은 실제의 풍경이라기보다 이상향의 조형적 표현이었다. 자연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해도, 서양은 풍경화라 했지만 한자문화권의 동북아시아에서는 그런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 재현의 풍경화라는 개념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귀의해야 할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와유(臥遊)로서의 산수화였다. 지배계층인 왕공 사대부는 여기(餘技)로서 서화를 즐겼지 전업작가의 길은 손가락질했다.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은 중인 출신 화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20세기 조형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서화의 시대에서 미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이란 단어는 근대기의 신조어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합병의 성과를 선전하고자 9~10월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며 ‘그림’도 포함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박람회이자 근대 미술전시회의 효시다. <한겨레> 자료사진
1915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합병의 성과를 선전하고자 9~10월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며 ‘그림’도 포함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박람회이자 근대 미술전시회의 효시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국보다 먼저 유럽과 교역을 한 일본. 산업사회의 새로운 면모를 자랑하던 유럽은 대중 상대의 대형 전람회를 열면서 새 시대를 증거했다. 박람회의 시대가 온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은 유럽의 박람회에 초청받았다. 그때 출품 목록에 ‘파인 아트’가 있었다. 이 말을 일본은 ‘미술’이라고 번역해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조선왕조의 서화, 즉 글씨와 그림은 한 몸이라는 서화동체설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미술이란 장르가 부상되었다. 근대기의 시각 현실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중 상대의 박람회라는 형식은 새로운 환경의 표상이었다. 일제는 이 땅을 강점하고 조선총독부 주최의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열었다. 이른바 ‘시정(施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다(1915). 여기에 ‘미술’ 전시도 포함시켰다. 미술의 시대가 온 것이다.

“유화물감 보고 닭똥이냐…돌았냐고들”
1910년대 서양미술 첫 도입기 ‘천시’
도쿄미술학교 ‘조선인 화가’ 3명 탄생
고희동·김관호…김병기의 부친 김찬영

“법률 공부한다고 거짓말하고 화가로”
1917년 졸업작품 ‘자화상’ 유일한 원본
‘창조’ 등 문학 동인지 표지화도 여럿
“아쉽게도 원본없어 평가 못받는 사례”

“평양 중성리 본가 아버지 미술도구 널려
방엔 사모관대 관복차림 ‘조부의 초상’
처마밑엔 미완성 대작도 여럿 뒹굴어
그림 보며 오스카 와일드 ‘탐미성’ 떠올라”

평양 제일 갑부집안의 차남이었던 김찬영은 16살 때인 1909년 일본 도쿄로 유학해 서양문물과 예술을 향유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꼽힌다. 금강산의 폭포 앞에서 선 김찬영. 김병기는 영국제 유명 골프복에 ‘도리우치’ 캡과 ‘개화당’의 상징이던 지팡이 차림으로 김관호 등과 종종 사냥을 다니던 30대 시절의 부친 모습으로 기억한다. ‘한국미술기록보존소 자료집’(2005년·4권)에 실려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제공.
평양 제일 갑부집안의 차남이었던 김찬영은 16살 때인 1909년 일본 도쿄로 유학해 서양문물과 예술을 향유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꼽힌다. 금강산의 폭포 앞에서 선 김찬영. 김병기는 영국제 유명 골프복에 ‘도리우치’ 캡과 ‘개화당’의 상징이던 지팡이 차림으로 김관호 등과 종종 사냥을 다니던 30대 시절의 부친 모습으로 기억한다. ‘한국미술기록보존소 자료집’(2005년·4권)에 실려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제공.

1910년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한 선구자들은 고희동·김관호·김찬영이다. 더불어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유화가였다(1918). 중인 출신 고희동은 24살에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졸업 미전에 ‘자매’(1915)라는 ‘조선에서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을 출품했다. 이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평양이라는 지역의 특성을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평양과 신미술의 관계 때문이다. 선구자 김관호와 김찬영은 평양 출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20세기 전반부의 평양 문화와 예술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단 조국은 평양문화에 대하여 본격적 조명을 누락시켰다. 유방(維邦) 김찬영(1893~1960). 그는 조혼 풍습에 의해 13살에 결혼해 15살에 큰아들(김병용)을 낳았다. 둘째(김병기)가 1916년 4월생이니 1915년 여름방학 때 평양 체류 당시 잉태한 셈이다. 그러니까 미술학교 재학 시절의 김찬영은 이미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었다는 의미이다. 둘째까지 둔 상태에서 1917년 3월 24살의 나이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어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학교 입학하기 전 그는 메이지학원을 다녔다. 평양의 부친에게는 법률 공부를 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출세’를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선구자 김찬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물론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김찬영은 불행한 사례에 속한다. 현재 그의 미술 작품은 단 한 점도 국내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자화상’(1917) 1점만이 모교 도쿄미술학교(현재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김찬영은 1920~24년 <폐허>, <창조>, <영대> 등 문예 동인 활동에 참여해 문학비평·시·희곡·에세이와 함께 표지화와 삽화까지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했다. 특히 동인지의 표지화에는 작가의 글까지 직접 덧붙여놓아 원본이 거의 없는 그의 작품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창조 8호(1921년 정월)의 표지화에는 ‘평화’라는 제목과 함께 새·짐승·사람이 상징하는 신화적인 서사의 의미를 풀이해놓았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김찬영은 1920~24년 <폐허>, <창조>, <영대> 등 문예 동인 활동에 참여해 문학비평·시·희곡·에세이와 함께 표지화와 삽화까지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했다. 특히 동인지의 표지화에는 작가의 글까지 직접 덧붙여놓아 원본이 거의 없는 그의 작품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창조 8호(1921년 정월)의 표지화에는 ‘평화’라는 제목과 함께 새·짐승·사람이 상징하는 신화적인 서사의 의미를 풀이해놓았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창조> 1921년 1월 창간호 표지. 사진 서지학자 오영식씨 제공
<창조> 1921년 1월 창간호 표지. 사진 서지학자 오영식씨 제공
‘자화상’은 측면의 상반신을 화면 가득 묘사한 유화 작품이다. 이지적인 분위기를 띠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들판과 같은 배경과 하늘은 무겁고 어둡다. 암울한 시대를 상기시키면서, 젊은 예술가의 각오를 짐작하게 한다.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미전은 의무적으로 자화상을 출품하게 했고, 대부분은 모교에서 소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덕분에 김찬영의 ‘자화상’이 남아 있게 되었다. 현재 43점의 조선인 자화상이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김찬영의 또다른 졸업미전 출품작 ‘님프의 죽음’은 현존하지 않을뿐더러 그 존재 자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제목에서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암울한 시대에의 상징성을 읽게 한다. 김찬영은 1920년대 초반 문학 활동에도 참여했다. <창조> 동인과의 활동은 특기사항에 해당한다. 동인지에 글과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창조 8호(1921)의 표지화 ‘평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찬영은 이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표지가 의미하는 것은 ‘평화’일까 한다. ‘말’ 위에서 내리지 않으면 아니 될 그때를 상징한 것이다. ‘새’와 ‘짐승’과 ‘사람’이 보조를 아울러 ‘해’ 뜨는 곳’을 향한다. 그것은 ‘평화’다. 큰 자연이 창조할 ‘평화’다.”

해 뜨는 곳을 향하여 걸어가는 일군의 집단. 새와 짐승과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간다. 바로 평화의 땅, 해 뜨는 곳이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 곳, 바로 평화의 대지이다. 김찬영의 이 그림은 안정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구도와 탄탄한 묘사력을 보여준다. 창조 9호(1921)의 표지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역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다. 화면을 대각선 구도로 분할하고 전면에 노인의 상반신을 단순하게 묘사했다. 노인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하여 말했다. “사람은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다만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려 한다.” 상징성이 큰 작품이다. 표지화 같은 작품의 원본이 남아 있다면, 김찬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921년 6월 나온 <창조> 9호의 표지화인 김찬영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역시 대각선 분할 구도와 노인의 상반신만 등장시켜 강한 상징성을 보인다.(오른쪽 사진) 김병기는 부친의 작품에서 ‘저항으로서의 탐미주의’를 찾아낸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1921년 6월 나온 <창조> 9호의 표지화인 김찬영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역시 대각선 분할 구도와 노인의 상반신만 등장시켜 강한 상징성을 보인다.(오른쪽 사진) 김병기는 부친의 작품에서 ‘저항으로서의 탐미주의’를 찾아낸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나는 1985년 뉴욕 새러토가의 김병기 자택에서 화백을 처음 만났다. 그때 화백은 아버지의 미술 작품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주었다. 30년이 훨씬 넘었으나 생생한 자료여서 주목을 요한다.

“아버지의 작품을 나의 기억을 더듬어 순서대로 기록하면, 먼저 평양 중성리 집, 내가 자라고 또 조부께서 임종하신 방의 머리맡에 걸려 있던 정방형의 유화가 있다. 한 25호 정도일까. 서양 부인이 머리 빗는 그림이다. 잘 다듬어진 전통적 기법의 약간 ‘라파엘 전파’를 닮은 갈색조의 작품이다. 가는 금액자에 끼워 있었다. 이 작품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나의 추측으로는 한 모작(模作)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래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나의 소년기 형성에 어떤 작용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가 놓고 간 많은 미술 서적, 지금의 기억으로는 많은 영국 잡지 <스튜디오>가 서가에 흩어져 있었고, 또한 말라 굳어버린 영국제 뉴톤 회구(繪具)가 커다란 박스 속에, 그리고 그 박스에 끼워 있던 목판 스케치들, 그것은 풍경을 커다란 점으로 그렸었다. 또한 오래 기억에 남으며, 지금으로는 퍽 죄송스런 기억이건만 방에 놓기에는 너무 커다란 대작 몇 점이, 농부(農婦)를 그린 몇 점이 미완성인 채 처마 밑에서 비를 맞고 있던 광경을 지금은 모두 한 어린 기억으로 간직한다. 또한 오래 기억으로 남는 작품으로는 사모관대를 한 조부의 상이다. 한 25호 크기, 이조풍 관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상, 퍽 능숙한 전통기법이었고 또한 이조 장식 문양의 발랄한 색감이었다. 이 작품은 오래도록 서울 장교동 아버지의 집에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그 종적을 모른다.

일제 때 평양 서기산 남단에 있던 상품진열관(평안남도상품진열소)은 평양에서 유일한 전시장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본 정식 전람회의 하나이고, 삭성회 계통의 작품들, 김관호·이종우를 비롯하여 몇 분 서울 화가의 작품도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여기에 전시되었던 아버지의 ‘모녀상’, 아마 이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대표작일 것이다. 강한 외광과 같은 온실을 배경으로 등의자에 모녀 반신좌상, 옆에는 홍초(紅草)가 그려져 있다. 퍽 강한 색조의 인상파풍의 사실화였다. 이러한 경향은 그 시절 일본을 경유한 인상파풍으로서 하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법은 퍽 당당한 고전적 기법을 거친 것으로 느껴지며 또 여기에 라파엘 전파와도 같은 탐미성이 결부되어 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억으로는 아버지와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성을 같이 생각해왔다. 이것은 또한 초기 문예지 <영대> <폐허> 등에 관여한 아버지의 행적을 생각하게 하며 김동인·김억·주요한 등의 이름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한 변모로서의, 하나의 저항으로의 탐미주의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왔다 가는데, 영원히 남아 있을 우리의 땅을 생각하면서, 지금 나는 미주의 어느 한구석에서 많은 감회와 더불어 또한 많은 경의로써 아버지가 걸어간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구술·집필 윤범모/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84769.html#csidx45c662084a14678bd25048f2465b8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