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김병기 화백이 그리워하는 구상과 이중섭(구상선생 특집)

정종배 2017. 3. 13. 21:06


김병기 화백이 그리워하는 구상과 이중섭

 

                                                                                                             정종배(시인)

 

한국 추상미술 1세대 화가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현재도 새로운 신화를 빚어내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의 화가를 만났다. 그 주인공은 태경(台徑) 김병기(金秉騏) 화백이다. 김화백과의 첫 만남은, 수림문화재단 주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미술대회 초청 인사로 선정하여 찾아간, 2015년 늦가을 화백의 평창동 작업실이었다.

이후 수림문화재단 하정웅 이사장, 동경한국학교 무용교사 박경란, 한국근대미술 전통표상을 주제한 박사학위 준비생인 도모코씨 등을 김병기 화백과 교류를 주선하며 작업실을 찾아갔다. 김화백을 만난 지인들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한동안 시간이 정지되는 느낌이라 정말 고맙다고, 김화백과 다시 만날 약속을 주고받았다.

필자는 김화백과는 전화 드리면 언제든 작업실에 들어오라 할 정도로 가깝고 정이 들었다. 이런 인연으로 큰 스승 구상 시인의 옛일을 이야기하시는 김화백과 11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5시부터 석식을 함께하며 4시간 동안 주로 이야기를 듣고 메모하여 문학가와 이중섭 화가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김병기 화백은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정부수립 한국전쟁 남북 관계 미술교육 사회상 등을 정확한 기억력과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세계를 생생하게 되살려 내고 있다. 특히 시인 이상의 동경에 마지막 행적과 장례식, 이중섭 화가의 어릴 적부터 시작하여 서울에서의 생활과 장례식, 수화 김환기 화가와 일본 유학과 뉴욕에서 교류와 장례식 등 예술가들의 마지막을 함께한 전설을 풀어내고 있다. 올 가을 수림문화재단 동교 김희수 기념 아트홀에 전시된 춤꾼 최승희 사진전을 찬찬히 감상하며 어글어글 잘 생겼다며 평안도 사투리로 80여년의 과거를 눈앞에 펼쳐 놓은 듯 말씀하였다.

북한 정부 수립 후 평양에서 시인 백석의 생활, 윤동주 시인의 숭실고보 시절 기억 등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전할 수 없는 귀중한 증언을 머리 하얀 소년이 어제 일처럼 말씀을 이어갔다. 오장환 황순원 김광섭 김광균 조지훈 박인환 등 시인들과의 사귐을 말씀하였다. 시와 그림은 같다며, “시는 언어로 그림은 붓으로 그려내는 예술이다며 미술과 문학과의 공통점을 이야기하였다.

 

시인 구상과의 만남은 이중섭 화가를 통해서였다. 시인 구상과 김병기 화백은 이대원 화가의 단골집인 인사동 선천집에서 김광균 이중섭 김이석 양명문 차근호 등과 자주 만나 광복전후 남북관계 한국전쟁 전과 후의 어려움을 서로 위로하며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였다. 한국전쟁 시 종군화가와 작가로서 함께 조국의 운명을 열기 위해 고민하고 예술세계에 대한 격려와 뜻을 펼쳤다. 시인 백석과 구상과의 미남에 대한 말씀을 하였다. 두 분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미남으로 인정하였다. 백석은 구수하고 지성적이며 어수룩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였다. 백석 시인의 남과 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삶과 예술을 높이 평가하였다. 시인 구상의 따뜻한 웃음으로 구도자적인 삶과 시와 사람을 구별하지 않은 만남은 지금도 본받고 싶다고 하였다. 시인 구상을 이중섭과 우리가 더 오래 사귀었다며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며 친구들과 놀리면 구상 시인은 환한 웃음으로 답을 하였다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시인 구상의 딸인 구자명 작가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며 옛 추억을 되새겼다.

이중섭은 평양 김병기 화백 집에서 처음 붓을 잡았다고 할 정도로 죽마고우이다. 김병기 화백은 본인은 추상미술를 통과하여 정착하였고, 이중섭 화가는 추상미술의 입문 과정으로 끝났다며 아쉽다 하였다. 오산고보 민족정신과 한국전쟁 경험을 그림으로 표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의 크기가 작은 것은 바로 전쟁의 상흔이라며 지금의 남과 북 관계를 걱정하였다. 전쟁은 어떤 경우라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며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남북 민족공동체로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 평화 운동을 펼쳐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또한 미국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화백은 지금도 미국 CNN 방송을 밤새워 시청하고 작품을 그리며 세계정세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 또한 독서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지금도 평양냉면 맛을 추억하고 싶어 시내 유명 냉면집을 지인들과 찾아 간다. 모임에 나가 분위기에 맞는 영시를 정확하게 외울 정도로 적확한 기억력과 높고 깊은 지식의 화수분으로 주변을 경이롭게 하고 있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김화백을 뵙고 정리하여, 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필자가 보낸 카톡 메시지로 김화백이 꼼꼼하게 읽었다. 광복 다음 날 서울역 풍경 이야기에서 남한 사람들이 소련군을 환영하는 상황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안도현 시인을 만나면 말을 해달라고 하였다. 마침 1129일 제8회 구상문학상 시상식에서 안도현 시인을 만나 이야기 하였다. 안도현 시인이 놀라며 녹취하여 글을 썼는데 김화백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하였다.

그림은 생활과 직결되는 드라마로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한다. 이중섭은 민족적 가책과 자유의식 양심 등이 마당을 쓸고 음식을 거절하며 수녀님이 주면 받아먹는 등의 행동으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림은 손으로 하는 예술의 마지막 전통의 수호자라며, 사진 기계 판화 등의 현대 물질문명의 세계를 비판하였다. 또한 기본을 중시하여 이중섭과 최영림의 작품에서 데생의 부족을 지적하며 아쉬워하였다.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간다는 이 우주 안에 새로운 변화와 법칙에서 기본을 중시하며, 하나님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한국생활 49년과 미국생활 49년 귀국 후 3년 백세청풍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림은 현실을 대변하는 정신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한갓 장식과 취미일 뿐이다라며 깨어있는 예술세계를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김화백은 과거와 옛일은 이미 지나갔다. 젊어서는 여인들이 오지 않더니, 나이를 먹으니 묘령의 여인들이 마음 놓고 그냥 작업실에 들어온다며 해학과 위트의 영원한 청춘으로 이중섭의 친구가 아닌 김병기 화가로서 오늘을 그린다며 작업실 식탁 옆 벽에 걸린 <신라 토기의 시간과 공간>의 작품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태경(台徑) 김병기 화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김화백을 소개한다.

'세계 최고령 현역 화가',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등등. 이러한 화려한 수식어는 모두 태경(台徑) 김병기 화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김병기 화백은 우리나라 추상미술 1세대이자 우리 현대미술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분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병기 화백은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하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전시 심사위원의 영예를 누렸다.

김병기 화백은 1916,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병기 화백은 학창 시절부터 한국 서양미술의 대가로 자리 남은 이중섭 화백과 절친한 교우 관계를 맺어왔다. 그 인연 탓인지 김병기 화백의 이름은 늘 이중섭 화백과 함께 자주 등장해왔다. 어린 시절의 두 소년은 함께 화가를 꿈꿨고 청년 시절에는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함께 하였다. 1930년대에는 각각 제국미술학고, 도쿄문화학원에서 야수파, 추상, 초현실주의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세례를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화단을 이끌어나가는 중추가 됐다. 이중섭 화가의 생일(1916.9.16)과 김병기 화백(1916.4.10)의 생일 바뀌어 이제야 바로 잡았다. 고은 시인이 이중섭 평전을 쓰기 전 김병기 화백과 대화중에 410일 김병기 화백의 생일을 이중섭 화가의 생일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기념하였다.

평양 출신인 김병기는 어릴 적부터 평양의 신식문명과 전통적인 풍류를 동시에 누리며 성장했다.

부친은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도쿄에서 서양화를 유학한 김찬영이다. 부친은 문화재 수집가 김덕영이라는 이름으로, 북에 김덕영 남에 전형필로 불릴 정도로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서울 후암동 집이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다 날려버렸다. 또한 창조페허동인 김유방 필명으로 문학비평활동을 주로 하였다. 김병기 화백이 미술평론으로 단단한 필력을 드러낸 것은 이와 같은 예술적 유전자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화백의 아들도 미국 뉴욕에서 조각가로 활동하여 화업 3대를 이어가고 있다. 김병기 화백은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중섭(1916~1956) 문학수(1916~1988)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추상 등 1930년대 일본의 새로운 미술을 직접 체험했다. 6·25 전인 1947년 월남해 줄곧 한국 추상미술의 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해방 공간에서 북조선 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냈고, 6·25 때는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미대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울예고 미술과를 개설하고 미술과장으로 학생들을 길러냈다.

1945816일 해방이 된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 서른 살의 김병기는 서울역에 내렸다. 서울역 광장은 광복의 감격으로 광야 같았다. 김병기는 아버지의 집이 있던 돈암동까지 걸어갔다. 당시 평양에 있던 그의 장인은 소설가 김동인의 형인 김동원이었다. 김동원은 도산 안창호의 수제자로서 흥사단의 이름을 대신한 수양동우회의 핵심 멤버였다. 김병기가 서울에 온 이유는 장인 김동원의 밀서를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송진우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김병기는 창덕궁 근처에 살던 송진우를 찾아갔다. 그 집은 민족주의 우파 계열로 한민당 창당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김동원의 편지는 평양의 조만식 계열과 서울의 송진우 계열이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자는 일종의 제안서였다.

서울에 온 김에 김병기는 종로의 한청빌딩 건물에 자리 잡고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미술본부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이쾌대 화가를 만났다. 정치적으로 여운형 계열과 가까웠던 이쾌대는 나중에 월북을 하고, 조만식 계열과 가까웠던 김병기는 월남을 하면서 두 화가의 운명은 엇갈렸다.

해방 다음날 서울 땅을 밟았다가 평양으로 돌아간 김병기는 여러 장르 예술인들과 평양예술문화협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미술동맹의 서기장을 맡다가 1947년에 결국 서울로 월남한다. 그때부터 그림 창작보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예술기획자로서의 역할이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1947년 남한으로 정착하기 전 네 번에 걸쳐 남북한을 오갔다. 김화백은 평양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활동이 서울이었기에 서울 친구들과도 활발하게 사귀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눌러앉아 살았다. 해외로 출국하는 일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 미국은 낯설었지만 선생의 예술혼을 실현시킬 꿈의 공간이었다. 뉴욕 근교의 히피들과도 자주 어울렸고, 고달프고 가난했지만 영혼은 자유로웠다. 수화 김환기 화가도 김화백의 뒤를 이어 같은 과정으로 뉴욕 생활에 정착하여 현재 한국 작가로서 그림 값 1위에서 5위까지 차지하는 점화(點畵) 시리즈가 나오게 됐다.

한국미술사에서 사라진 김병기의 이름을 다시 불러낸 건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였다. 윤 교수의 주선으로 198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22년 만에 첫 귀국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올해 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바람이 일어나다는 주제로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61017일에서 111일 까지 일본 동경 탐(TOM)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직접 참가하여 일본 미술 관계자들과 1930년대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을 증언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2년 반 사귄 일본인 여자 친구의 사진과 그림을 핸드폰에 담아 와 옛 추억을 꺼내 아름답던 과거를 정리하며 미래를 여는 영원한 현역 김병기화백님, 우리들의 멘토로 오랫동안 함께 하여 주시길 빌겠습니다. ()

김병기 화백(1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