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 서거 62주기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 진보당 사건 사법 살인 사형 당함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죽산 조봉암은 1898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아들만 3형제 중 빈농의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다. 어머니 유(劉)씨가 봉황새를 본 태몽을 꾸었다. 이름에 ‘봉황새 봉(鳳)’자를 쓸까 하다가 너무 엄청난 것 같아 ‘받을 봉(奉)’ 자를 써서 봉암(奉岩)이라 하였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였으나,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평화로운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죽산은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인 농업보습학교를 마쳤다. 강화군청 손대기로 있다가 주산을 잘한 덕분에 월급이 10배인 10원을 받은 강화군청 고원으로 올라가 근무했다. 왜인 서무주임과 사사건건 다투기 1년 만에 군청을 나와 감리교 줄기교회 일을 도우며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된 죽산을 개인적인 삶에서 사회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3.1혁명이었다. 강화에서 3.1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했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죽산 조봉암이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실린 「내가 걸어온 길」에 밝힌 내용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서대문형무소로 갈 때의 나와는 전연 딴사람이었다.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출옥 후 서울로 올라와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일제하 기독교계 경성 지역 ‘대부’였던 월남 이상재 강의를 느낌 깊게 들었다. 폭탄 수십 개를 만들어 YMCA를 사북으로 독립운동을 하려 했다는 거짓 귓속질로 평양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족대기질을 당하고 20일 구류 살이를 하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그 뒤 일본에 건너가 세이고쿠 영어학교에서 잠깐 영어를 배운 뒤 주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서 공부했다. 빈손으로 갔던 죽산은 엿장수를 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학교 공부보다는 독서에 빠져 수많은 책을 읽었다. 문학을 거쳐 사회와 세계 현상을 시원하게 밝혀주는 사회과학 바다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회주의사상과 운동에 깊이 들어가 있던 김찬(金燦, 1894~ ?) 입김을 받은 것이었다.
일본 동경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 가운데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에 쏠려 있던 김찬·정재달· 박열·조봉암 등이 흑도회를 만든 것이 1921년 11월이었다. 민족해방이 먼저인가 계급해방이 먼저인가를 놓고 날카롭게 다투던 두 두럭은 1923년 찢어졌다. 무정부주의자 박열을 사북으로 한 풍뢰회와 공산주의자인 김약수를 사북으로 한 북성회가 그것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북성회원 가운데 한 무리는 신사상연구회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이 얽이잡아낸 두럭은 북풍회였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목격한 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국내의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뒤 통합대회 결렬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하였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김조이와 혼인하고 인천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지정돼 일체의 대외활동이 중지되었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8년 5·1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다.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추진하였다. 한민당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었으나 ‘친일파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막고자 한민당을 멀리하였던 이승만은 반한민당 세력 우두머리인 죽산을 입각시킴으로써 한민당 세력을 잡도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수리비를 농림부 예산을 전용하였다가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며 죽산은 “양심에 비추어 추호라도 비행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지청천을 누르고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제2대 민의원이 개혁적이고 민족적인 공기 덕이었다. 죽산을 비롯한 민족주의 좌우파 세력들이 민족통일 문제로 화두로 삼으려는데, 개원 6일 만에 6.25가 터졌다. 27명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1952년 8월 5일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죽산은 한민당 뒷몸인 민국당 이시영보다 3만표 이상을 앞서는 차점으로 낙선했다. 죽산은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을 부통령후보로 삼아 대통령에 출마하여 216만 3,808표(23%)를 얻었으나 다시 낙선하였다.
1956년 11월 10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1심에서 5년이었는데, 항소심에서 사형이었고,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도 사형이었다. 죽산이 교수대 이슬로 사라진 것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쯤이었다.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추모제가 매년 7월 31일 열린다. 시각은 11시 사형집행 시간에 맞춰 거행된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유언을 남기고, 사형 집행 전 막걸리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우고 싶다고 하였다. 담배는 피웠다고 한다. 가끔씩 참배객이 남기고 간 불붙은 담배가 죽산 유택 혼유석 옆에 보인다. 한여름밤 죽산 유택에서 지인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죽산의 민족을 위한 삶을 되새겨본 적이 몇 번 있다.
조봉암의 큰 딸 조호정은 당시 이화여고 학생으로 교복을 입고 아버지 생명을 구원하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특히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 여사한테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전해진다.
죽산의 장례는 너무도 호젓했다. 충현동 산 4의 5번지 평생 집 한 채 없이 전세로 살던 막다른 골모 높은 축대 위 양옥 죽산 댁 근처의 교통을 차단하고 상가에 조문객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겨우 40장의 출입증만 발부받았다. 유족과 40여명의 진보당 간부만이 장례를 준비했다. 장지로 가는 차량도 한 한 대의 영구차로 제한했다. 장의차가 가는 인도에는 경찰이 띄엄띄엄 지켜 서 있었다. 청량리에서는 숫제 차량을 통제했고 망우리공동묘지 부근은 더 많은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오 5시 30분 하관으로 죽산은 땅에 묻혔다.
저서로는 『공산주의 모순발견』·『우리가 나아갈 길』·『우리의 당면과제』 등이 있다.
죽산의 문중은 2011년 무죄 선고 직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1940년 1월 매일신보에 실린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광고와 이듬해 12월 같은 신문에 실린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해 휼병금(장병 위로금) 150원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그 이유였다. 2011년 대법원에 의하여 간첩죄 등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고 나서 유족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둘지 가부를 검토하였다.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백비도 하나의 역사다.
다음 글은 묘소 입구 왼쪽의 소나무 앞의 연보비에 새겨진 죽산의 어록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 중랑갑·을 서영교·박홍근 국회의원, 중랑구청 류경기 구청장, 전·현 이수연·여장권·김태희 부구청장 등 구청 관계자들과 망우리공원 답사하며 죽산 조봉암 연보비 어록을 함께 읽고 낭독하며 공무원의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