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향산 이영학 66주기
정종배
2021. 12. 9. 14:17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향산이영학(1904~1955.12.10) 66주기
수양동우회 관련 아버지와 2대 독립운동 집안,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와 지국장
형은 친일인명사전 등재
동생은 국가유공자 서훈 받지 못하고
두 형제가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다
이영학은 1904년 평북 선천의 대지주 이창석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2년 수학하고 1924년 귀국하여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LA 모 하이스쿨에서 공부하다 5개월 만에 돌아왔다. 그해 10월 24일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로 임용되었다. 1928년 3월 20일 이영학은 선천지국장으로 임명된 이후 그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그해 7월 13일 신의주에서 열린 국경기자대회(남만주와 평북 일대 중심) 회장으로 피선됐다. 다음 해 7월 6일 선천체육회 창립 의원으로 참가하여 7월 26일 제1회 전조선개인정구대회 대회장으로 우승기를 수여하였다. 7월 30일 선천에서 열린 제5회 전조선정구대회 대회장 1930년 평북소년육상경기대회 대회장을 지냈다. 1933년 8월 22일 선천군 신문기자단을 창설 회장에 피선됐다. 선천지역 문화체육활동을 이끌었다.
1935년 4층 건물 선천회관을 건립했다. 동아일보 기사 내용 “6년 동안 모은 선천지국 수입금 1만원을 기초로 사재 2만원 의연금 1만원 도합 4만원 예산으로 시작한다.”는 착공 보도를 하였다. 조선중앙일보 회관 낙성식 기사(1935.1.11)에 “이영학 개인이 일금 5만원 거액을 들였다.” 매일신보(1934.12.13)는 “이영학이 6만원을 희사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영학의 부친 이창석(1860~1941)은 동아일보 창간 시 선천지국의 첫 지국장, 형 이영찬은 2대 이어 이영학이 3대 지국장이었다. 아버지 이창석은 29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38세에 개신교 교인이 되었다. 장로였던 51세 때 ‘105인 사건(혹은 선천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구속되어 3년간 복역했다. 평북도 평위원 등 각 방면의 공직에 있으면서 사회교육사업에 전력을 쏟았다. 고아원·유치원·양로원·보성여학교·명신학교·상업실수학교 등 설립자나 이사장을 지냈다. 지역 재해 때마다 거액의 기부를 하였다. 특히 선천회관 준공 시 토지 5만평(당시 시가 62,000원)을 기부하여, 도합 12만 5,000원 재단법인으로 경영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1941년 1월 19일 81세 일기로 별세하여 21일 선천회관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형 이영찬도 망우리에 묻힌 사업가로 충추원참의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이영학은 수양동우회 사건을 치안유지법으로 피체되어 고등법원에서 문명훤 등 24명과 함께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동사건 판결문에 이영학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이영학은 1924년 1월 중순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에서 흥사단에 가입하고, 다시 1월말에 경성 이광수 집에서 수양동우회(흥사단 국내 조직)에 가입했다. 이광수·장리욱 등과 회원모집과 활동 방안 등 수차례 협의와 수행했다. 개인적으로 동우회 기관지 《동광》을 출간하는 ‘동광사’에 100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선천의 목욕탕에 포스터를 붙여 민중을 선동한 사실 등이 적시되어 있다. 최종심에서 전원 무죄로 풀려났다. 부친과 아들 2대에 걸쳐 신민회 및 수양동우회 말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을 한 집안으로 그동안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단체의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과 독립운동사에서 그 비중은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의 제1회 위원회 개최를 위한 초청장에 오세창 선생을 비롯한 135명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한민당 발기인으로 동우회 회원들과 참여했다. 남북분단으로 북한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1.4후퇴 때 단신 남하한 후 홀로 외롭게 생활하다 심장마비로 오류동 집에서 별세했다. 부인 강경신은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와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망우분과에서는 이영학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기 위한 자료 찾기와 관계 기관 협조를 구하며 노력하고 있다.
묘비 앞면, '香山李英學先生之墓‘(향산이영학선생지묘). 묘비 뒷면, ‘선생은 단기 4237년(1904) 3월 24일에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창신동에서 나서 실업계와 사회사업에 허다한 공적을 남기고 4288년(1955) 11월 10일 (양력 12월 10일)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에서 별세하다. 단기 4289년(1956) 8월 추석 동지 일동. 묘지번호는 203566이다.
어제 엄숙집행 고이영학씨영결식
지난 십일 서거한 전 본보 선천지국장 이영학씨의 영결식은 작 십이일 상오 십일시 시내 중구 남대문로 이가 “흥사단”본부(대성빌딩)에서 엄숙히 집행되었으며 이어 유해는 망우리 장지에 안장되었다.
고 이영학씨는 일찍이 왜정하에서 본보 선천지국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사재를 던져 선천회관을 건립하는 등 독립운동과 문화발전에 공헌한 바 많으며 6.25 당시는 선천에서 괴뢰에게 피체 온갖 학대를 받다가 1.4 후퇴 시 단신 남하하여 쓸쓸한 생활을 보내던 중 지난 9일 상오 9시 심장마비로 오류동 자택에서 영면한 것이다.(동아일보, 1955.12.13.)
이영학의 호는 ’향산‘이다.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춘원이 이영학에게 적어 준 시에도 ’향산‘이 들어있다.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 이름이 ’가야마미쓰로(香山光郞)‘이다. ’향산‘이 단군조선의 묘향산일까? 일본 텐토가 2,600년 전에 즉위했다는 향구산의 ’향산‘일까? 춘원은 묘향산이라 밝혔다.
망우리공원 도산 안창호 선생 유택 주변에는 흥사단 단우인 유상규(199)·문명훤(562)·나우(222)·김기만(142) 등은 오른쪽, 조종완(563)·김봉성(554) 등은 왼쪽, 허연(265)은 남쪽, 이영학(1095)은 북쪽 도산의 유택을 동서남북 둘러싸 자리 잡고 있다. 문명훤·조종완·김봉성 묘지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독립운동가 김봉성은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와 선천회관 초대총무를 역임했다.
1970년대 말에 망우리 옛 도산 묘소 터 근처에서 연고가 없이 잠들어 있던 이영학(단우번호 1095, 1955.12.10. 서거)의 묘소가 발견되어 단우들이 정기적으로 이 묘소를 보살폈다.
2016년 3월 1일 도산 안창호 묘지 터에, 도산공원 도산기념관 수장고에 누워 있던 도산선생 묘비를 다시 세우는 제막식이 거행됐다. 행사에는 많은 흥사단 단우들이 참가했다. 행사 후 몇몇 단우들이 도산 선생 묘지 터에서 1시 방향, 구리둘레길 제1길에 올라 이인성 화백 유택 방향 왼쪽 10미터 자리 잡은 묘지에 올라 참배했다. 묘지는 관리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잡목과 낙엽 등으로 잔디 한 뿌리 자리지 못했다. 소나무 아까시 밤나무 등 키 큰 나무들로 인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떼를 입혀도 몇 년 못가 다 죽고 흙이 드러나고 봉분이 무너진다.
필자도 함께하며 흥사단 단우들이 향산 이영학 선생의 활동에 대해 대화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흥사단 단우로 매우 부끄럽다며 북쪽 고향을 둔 인물들의 묘지가 상대적으로 관리가 안 된다고 안타까워하며 잡목과 낙엽을 치웠다. 필자도 그 뒤로 관심 없이 지나치며 마음으론 언제 봉사활동 하면서 묘지를 정리하여야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묘지 관리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이 2018년 널리 알리고, 김영식 작가가 자료를 정리하여, 지금은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 활동으로 조금은 나아졌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보훈처에 서훈 공적서를 제출하고 등록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망우리공원 인물 중 북한 출신이거나 후손들의 형편에 따라 묘지 관리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최학송 묘지 관리인으로 등록한 이유는 우선 남쪽에 후손이 없고, 처가인 전남 영광 시조시인 조운 집안도 조운의 월북으로 이념의 상처를 입었다. 무연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봉분을 세 번 작업하고 학생들과 봉사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자격이 충분하다고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2010년 묘적부에 등록했다.
망우리공원이 힐링 숲으로 변모한 뒤 묘지 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묘역 주변의 나무 문제이다. 나무가 자라면 햇살이 차단되고 비가 오면 빗방울이 나뭇잎에 뭉쳤다 떨어져 봉분을 무너뜨린다. 이영학 선생의 무덤은 솔과 밤나무 숲속이라 어떤 식물도 자라지 못하고 잡목만 우거져 있었다. 박인환 묘지의 은사시나무와 아까시나무, 이중섭 묘지의 칡과 소나무와 아까시나무, 김석영 묘지의 개나리와 잣나무, 최학송 묘지의 아까시와 신갈나무, 김병진 묘역을 둘러싼 큰 나무들, 만해 한용운 묘지의 아까시나무, 함세덕 묘지의 큰금계국, 아사카와 다쿠미 묘지의 칡과 아까시와 소나무, 김상용 묘지의 벚나무, 이인성 묘역의 왜송, 유관순 합장묘의 잡목들 등이다. 필자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망우리공원 인물 묘역을 참배하며 아까시, 칡 등의 꼬투리와 은사시나무, 아까시나무 어린싹들을 뿌리째 뽑지만 쉽지 않다.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의 활동을 기대한다.
2020년 9월 중랑구청에서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기념 이태원분묘합장이장묘역을 정비하며 3.1만세운동 전날 이화고녀 1학년 유관순과 같은 밭 6명이 결사한 6인결사대 김분옥과 선천의 명문가이며 수양동우회 관련 아버지 이창석과 2대에 걸친 이영학 독립운동가 묘역도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