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
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
망우역사문화공원 서해 최학송 묘역에서
2023년 7월 8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주최는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이고 주관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다.
협찬은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 성애병원, 법무법인 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용인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반올림피저(정릉점), 지노출판사, 성도치과, ㈜서광알미늄, 대학인입시연구소, 제삼한강유통(주),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76, 홍일고 32, 한성고 25 동기회. 학다리중고 256회, 망우산마을공동체마을과아이들 등이다.
서해 최학송(1901. 1. 21 ~ 1932. 7. 9)은 소설가로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을 쓰지 않는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빈궁문학’의 선구자이다. 대표작으로 「탈출기」·「홍염(紅焰)」·「그믐달」 등이 있다. 1920년대 잡지 편집의 귀재이다.
10세 전후부터 가난하고 맵고 짠 삶을 살았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많은 글은 읽었다. 편지로 춘원 이광수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았다.
한국 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본명은 학송. 일명 서해(曙海)·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 이명은 저곡(苧谷) 등이다. 1911년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5학년 때 중퇴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방랑하며 하층민의 생활을 했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 「우후정원(雨後庭園)의 월광(月光)」·「추교(秋郊)의 모색」·「반도청년에게」를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시 「춘교(春郊)에서」·「자신(自信)」 등을 발표했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吐血)」을 연재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같은 해 10월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의 첫 번째 추천 작가로 문단에 나왔다.
서해가 우서 계용묵을 《조선문단》에 추천하여 살아생전 앙숙이었다 서해가 일찍 죽자 우서는 후원과 작품세계를 평가했다. 후원 모임도 주도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두 작가의 묘지는 150여 미터 사이이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입사하여 이 잡지에 간도 체험을 생생하게 그린 「십삼원(拾參圓)」(1925. 2)·「탈출기」(1925. 3)·「살려는 사람들」(1925. 4) 등을 발표했다. 그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1929년까지 활동했으며, 1926년 KAPF 맹원이자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재혼했다.
네 번째 부인 분녀와 결혼 전
영광에 와 모악산(불갑산)을 조선8경이라 뻥튀기로
마누라가 예쁘니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했지요
《현대평론》·《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어릴 적 굶기를 밥먹듯 해 환장해서 죽은 서해를 위로하듯 망우리 서해의 묘역 앞에 개암이 열린다.
서해는 무골호인으로 사람이 좋았다. 《매일신보》 옮기는 걸 막기 위해 주변에서 후원금을 주고 사후 유족들을 돕기 위한 자선 모임도 이뤄졌다. 병상 기록도 남아있다. 서해 최학송 춘해 방인근과 문단 삼해로 일컫던 소설가 성해 이익상(1985~1935)은 서해에게 헌혈을 많이 하여 내가 일찍 죽는다고 하였다. 사망진단서 싸인을 망우역사문화공원 태허 유상규 경성의전 교수가 하였다. 최초의 문인장으로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다. 크고 멋진 묘비도 세웠다. 1958년 이산 김광섭 중심으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서해 최학송 유족들의 부재로 2010년 무연고 처리 문제가 있어, 2006년부터 세 번에 걸쳐 묘역을 정비(2010년 세 번째는 필자에게 몰래 좋은 일 한다며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유통 부회장이 공사 비용을 댐)한 필자에게 서울시시설관리공단 망우리공원 사무소에서 묘지관리인이 되어주었으면 하여 묘적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산 신명균 묘역도 2003년 망우리공원 무연고 묘지를 정리하여 용미리공원묘지로 옮겼는데 그 장소를 누구도 알지 못하여 안타깝다. 현재는 필자와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봉사단’에서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2012년 서해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동국대 명예교수)를 조직하였다. 2015년 (사)중랑문화연구소(이사장 남화창) 주관 최학송 83주기 추모제가 열리기 시작하여 (재)수림문화재단(이사장 하정웅) 후원에 이어 2020년부터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사장 조명래)가 주관하여 추모문화제로 오늘에 이르렀다. 100주기 안에 남북통일 되어서 북한의 후손들과 더불어 추모문화제를 치르길 바란다.
‘서울문학의 집’에서 ‘그립습니다..... 금요문학마당·182 서해 최학송 소설가’를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에 치렀다.
최서해의 아들 ‘백’과 ‘택’은 1932년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서해의 고향 성진을 향해 북으로 갔다. 어머니가 죽고 뒤이어 할머니마저 운명하여 고아처럼 떠돌다, 8·15 해방되자 죽어도 영광 외가에 가서 죽자며 남으로 내려왔다. 영광 외가에 도착한 지 일주일만에 폐병을 앓던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외숙인 시조시인 ‘조운’마저 북으로 가버려 ‘택’도 1947년 다시 북으로 갔다. 평양의 중앙당 교육장에 찾아가 서해의 아들임을 말하자 그곳에 숙식을 제공하고 1949년부터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여 준박사로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을 역임할 때,
198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신필림영화제작소 신상옥 감독에게 서해의 소설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길 명하여 최은희 주연 북한 전역에 상영하였다.
이에 택이 아버지 최서해의 신산한 삶과 문학 활동 내력 가계 상황도를 일화 중심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글을 북한 잡지 《조국》(1985. 9)에 「생활의 결론」이라 발표하여, 서해의 가족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그 당시 택의 자식들은 다섯으로 모두 대학을 나와 평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과 북이 어서 교류하여 서해의 후손들이 망우력사문화공원 묘지에 성묘를 오는 날을 기대한다. 최택의 수기는 《문학사상》(2010. 3)에 재수록하였다.
7월 8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행사를 치를 예정입니다.
시간 나시는 분들은 오시어 따끈한 피자와
국밥 한 그릇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소설가 최학송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정종배 올림
조운과 최학송
미아리공동묘지 서해 묘비
2006년 재단장 이전 묘역
단장 이후 서해 묘역
묘소 입구 개암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