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제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

정종배 2023. 7. 9. 11:13

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설가 서해 최학송 묘역에서
2023년 7월 8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가 열렬다.
주최는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이고 주관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었다.
 
협찬은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 성애병원, 법무법인 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용인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반올림피자(정릉점), 지노출판사, 성도치과, ㈜서광알미늄, 대학인입시연구소, 제삼한강유통(주),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76, 홍일고 32, 한성고 25 동기회. 학다리중고 25·6회, 망우산마을공동체마을과아이들 등이다.
 
서해 최학송(1901. 1. 21 ~ 1932. 7. 9)은 소설가로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을 쓰지 않는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빈궁문학’의 선구자이다. 대표작으로 「탈출기」·「홍염(紅焰)」·「그믐달」 등이 있다. 1920년대 잡지 편집의 귀재이다.
 
10세 전후부터 가난하고 맵고 짠 삶을 살았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많은 글은 읽었다. 편지로 춘원 이광수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았다.
 
한국 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본명은 학송. 일명 서해(曙海)·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 이명은 저곡(苧谷) 등이다. 1911년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5학년 때 중퇴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방랑하며 하층민의 생활을 했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 「우후정원(雨後庭園)의 월광(月光)」·「추교(秋郊)의 모색」·「반도청년에게」를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시 「춘교(春郊)에서」·「자신(自信)」 등을 발표했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吐血)」을 연재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같은 해 10월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의 첫 번째 추천 작가로 문단에 나왔다.
 
서해가 우서 계용묵을 《조선문단》에 추천하여 살아생전 앙숙이었다 서해가 일찍 죽자 우서는 후원과 작품세계를 평가했다. 후원 모임도 주도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두 작가의 묘지는 150여 미터 사이이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입사하여 이 잡지에 간도 체험을 생생하게 그린 「십삼원(拾參圓)」(1925. 2)·「탈출기」(1925. 3)·「살려는 사람들」(1925. 4) 등을 발표했다. 그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1929년까지 활동했으며, 1926년 KAPF 맹원이자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재혼했다. 《현대평론》·《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어릴 적 굶기를 밥먹듯 해 환장해서 죽은 서해를 위로하듯 망우리 서해의 묘역 앞에 개암이 열린다.
 
서해는 무골호인으로 사람이 좋았다. 《매일신보》 옮기는 걸 막기 위해 주변에서 후원금을 주고 사후 유족들을 돕기 위한 자선 모임도 이뤄졌다. 병상 기록도 남아있다. 서해 최학송 춘해 방인근과 문단 삼해로 일컫던 소설가 성해 이익상(1985~1935)은 서해에게 헌혈을 많이 하여 내가 일찍 죽는다고 하였다. 사망진단서 싸인을 망우역사문화공원 태허 유상규 경성의전 교수가 하였다. 최초의 문인장으로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다. 크고 멋진 묘비도 세웠다. 1958년 이산 김광섭 중심으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서해 최학송 유족들의 부재로 2010년 무연고 처리 문제가 있어, 2006년부터 세 번에 걸쳐 묘역을 정비(2010년 세 번째는 필자에게 몰래 좋은 일 한다며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유통 부회장이 공사 비용을 댐)한 필자에게 서울시시설관리공단 망우리공원 사무소에서 묘지관리인이 되어주었으면 하여 묘적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산 신명균 묘역도 2003년 망우리공원 무연고 묘지를 정리하여 용미리공원묘지로 옮겼는데 그 장소를 누구도 알지 못하여 안타깝다. 현재는 필자와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봉사단’에서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2012년 서해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동국대 명예교수)를 조직하였다. 2015년 (사)중랑문화연구소(이사장 남화창) 주관 최학송 83주기 추모제가 열리기 시작하여 (재)수림문화재단(이사장 하정웅) 후원에 이어 2020년부터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사장 조명래)가 주관하여 추모문화제로 오늘에 이르렀다. 100주기 안에 남북통일 되어서 북한의 후손들과 더불어 추모문화제를 치르길 바란다.
 
‘서울문학의 집’에서 ‘그립습니다..... 금요문학마당·182 서해 최학송 소설가’를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에 치렀다.
 
최서해의 아들 ‘백’과 ‘택’은 1932년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서해의 고향 성진을 향해 북으로 갔다. 어머니가 죽고 뒤이어 할머니마저 운명하여 고아처럼 떠돌다, 8·15 해방되자 죽어도 영광 외가에 가서 죽자며 남으로 내려왔다. 영광 외가에 도착한 지 일주일만에 폐병을 앓던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외숙인 시조시인 ‘조운’마저 북으로 가버려 ‘택’도 1947년 다시 북으로 갔다. 평양의 중앙당 교육장에 찾아가 서해의 아들임을 말하자 그곳에 숙식을 제공하고 1949년부터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여 준박사로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을 역임할 때, 198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신필림영화제작소 신상옥 감독에게 서해의 소설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길 명하여 최은희 주연 북한 전역에 상영하였다.
 
이에 택이 아버지 최서해의 신산한 삶과 문학 활동 내력 가계 상황도를 일화 중심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글을 북한 잡지 《조국》(1985. 9)에 「생활의 결론」이라 발표하여, 서해의 가족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그 당시 택의 자식들은 다섯으로 모두 대학을 나와 평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과 북이 어서 교류하여 서해의 후손들이 망우력사문화공원 묘지에 성묘를 오는 날을 기대한다. 최택의 수기는 《문학사상》(2010. 3)에 재수록하였다.
 
서해 최학송의 소설은 남과 북 중국 그리고 러시아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주요 작가이며 작품입니다.
 
마른장마 사이와 무더운 날씨에
제91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문화제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 망우리공원과(과장 이준희) 긴급출동반이
행사장인 서해 최학송 묘역을 깔끔하게 벌초를 하였다.
그리고 추모 화환과 베너까지 설치하여 행사가 한결 빛이 났다.
 
먼저 행사에 참석하시는 단체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 이준희 과장을 비롯 구청 관계자 분들과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봉사단(회장 이혜성) 단원들
중랑문화원 향토문화 해설사(회장 김경애) 회원들
중랑문화원 인문학 강좌 중랑인문학글쓰기반(반장 임호연 전 동부시장 상인회 조합장),
망우산마을공동체 마을과 아이들(대표 최성호 선생님) 사진 타짜모임,
 
문학평론가 이명재 전 중앙대 국문학과 교수
연안차씨 대종회 차광찬 회장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 위령의 종루 보수 및 추모문화제를 돕는 사람들 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유진 전 한국영상대학교 교수와 기획위원 강경석
시인 김인옥 임성용 안영정 
시낭송가 홍성례
수필가 양정순
화가 김희옥 등
 
30여 명이 넘게 모였다
 
이명재 문학평론가는 서해 최학송 문학을 19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의 효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틀을 다진 작가로 자리매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홍시낭송 홍성례 시낭송가가 추모의 글
동아일보 1932년 7월 18일자에 실린 상허 이태준의 '오호 서행 형'을 낭독하였다.
 
추모글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 동아일보 1932. 7. 18
 
양주작가회 회장인 임성용 시인은
보성권번에서 판소리를 배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보성 동편제 소리꾼으로
북 장구도 없는 어려운 가운데
적벽가 눈대목 '새타령' 에 앞서
조조가 호림곡으로 도망을 할 적에 칼 맞고 창 맞은 군사들이 설움타령 하는 대목을 한소리 하여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탄성을 자아내고
사색의 길 답사하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올해도 제물로 피자가 올랐다. 매년 피자가 제물로 오른 얘기가 화제가 된다.
정종배 시인의 청량고 제자인 김남규 군과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오시는 분들의 따끈한 음복으로 이야기로 거듭났다.
 
서해 최학송의 청소년 시절 만주에서 만난 자치동갑이며 처남인 시조시인 조운이 매제 서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어 남긴 시조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동요와 관련 된 분들의 노래를 함께 부를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덥고 행사 진행 시간이 예정보다 지연되어 다음 해로 미뤘다.
 
우리나라꽃 / 박종오 요 함이영 곡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오빠 생각 / 수원 최순애 박태준 작곡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국 뻐국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 가시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귀뚤 귀뚤 뀌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우리의 소원 / 석영 안석주 안병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스승의 은혜강 소 천 동요 권 길 상 작곡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아아 고맙고 고마워라 스승의 그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바다보다 더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길은 오직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위해 겨레위해 일하오리다
아아 고맙고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