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시집 박꽃
허연(용성) 시집 '박꽃'
머리글
- 사십리-
단로 사십리, 이것이 내가 걸어온 좁고도 굽은 길이다.
다섯 살 먹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일곱 살 자피던 해에 어머니를 여읜 나는 꼬불꼬불한 소로 사십리를 친 외할머니의 여윈 손을 붙들고 걷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어느 산비탈에서 그들조차 작별하고 단영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기도 하고 의외에 좋은 동행을 얻어 실개천을 손잡아 건널 때도 있었다.
사십리, 먼 길은 아니지만 로방에 한숙을 경험하고 점촌에 밥을 빌은 적도 적지 않다.
이제 오십 고개를 바라보니 걸어온 길을 한번 회고하고 가까워오는 앞 고개를 넘으려 한다.
굽고 거치른 소로를 걷는 동안 나는 싱겁고 우스운 일이 많은 바른손 편만을 치우쳐 보며 걸었으나 때로는 왼손 편에 따르는 슬픔도 곁눈으로 보고 지냈다.
희망이 앞에 있거나 하여 물러섰다 가도 또다시 발을 옮겼건만 그러나 아직도 평탄하고 넓은 길에 나서지 못했다.
사람의 일생은 길어야 한 팔십리 길을 걷는 셈이다. 그러나 혹은 오십리도 못 다가서 해가 지고, 잘 걷는 사람은 팔십오리에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한다.
요행으로 동무를 잘 만나 심심치 않을 수도 있고 요행으로 평탄한 길을 쉽게만 걷고 마는 사람도 있다.
가는 길은 같은 길 이언만 비바람 안고 가는 신세, 설한을 떨며 지내는 사람, 동로이탄의 각색을 생각할 제 행로와 인생은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것인 줄 깨닫는다.
내가 걸어온 사십리 단로 날씨는 좋았던가. 나빴던가, 동행은 누구누구 머물러 쉬던 곳과, 발을 차던 돌부리, 헛발 빠지던 구뎅이,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볼가 한다.
소화 십칠년 구월 십칠일 허연
아버님 46세에 쓰신 글입니다.
소화 17년을 계산해 보니 1942년이 됩니다. 내가 태어나기 일년 전이요, 손위 형인 일이 우리 나이로 두 살 되던 해입니다. 먼저 간 큰 형님 진은 개구쟁이 우리 나이 일곱 살, 아버님이 제일 예뻐하셨다는 첫 딸 경숙 누님이 여덟 살 때 이미 죽음을 예비하셨으니 기막힌 일입니다.
9월 17일도 특별한 날인데, 이 머리글을 쓰신 때부터 당신 사셨던 기간만큼 46년이 더 지난 뒤, 당신 가신지 39년 뒤에 (1988) 박꽃 피는 이 땅에 올림픽이 벌어지고 그 개막일이 9월 17일이 되었습니다.
박꽃
박꽃은 소박한 흰 꽃
조선의 옷 빛
물들지 않은 조선의 옷 빛
순박한 그 맛은
조선 사람만이 아는 귀한 꽃
황혼에 새 이슬에
고개 드는 흰 꽃
수집은 조선처녀
빛없이 타는 백열,
해진 뒤에 박나비만 기다리는
깨끗한 꽃
박꽃은 소박한 흰 꽃
조선의 옷 빛
물들지 않는 조선의
순박함으로
조선 사람만의
가슴에 피는
귀한 꽃
황혼에, 새 이슬에
고개드는
수줍은 조선 처녀
순결로 타는 백열
해진 뒤 오는
박나비만을 기다리는
깨끗한 꽃
소의 유언
지금은 멍에가 무겁다
고개가 숙어 입이 땅에 끌린다.
갈리다 남은 이빨이
드문드문 빠지고
거츠른 새김질 어렵다.
인제는 끌려갈 때가 됐는데
옷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자가
꽁문에 칼을 수건에 싸서 질르고
찾아와 나는 끄러갈 때가 됐는데.
아, 불상한 사람
약하고 가난하고 게으른 인간이여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저것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저 힘없는 것들이.
내 가죽이라도 벗어 너늘 주마
내 발톱까지라도 뽑아주마
내 고기를 뜯다 남은 뼉다구까지
두 손으로 붙들고 빨아먹고
할타 먹으라 나 죽은 뒤에는.
저자연보
1896. 8. 11 평남 안주군 용현리 출생
평남 순안 재림교회 운영 위생병원 사환으로 활동하다 삼육학교 만학도로 입학 공부(임정기 허연 한승인 3인 도원결의 이상으로 평생 벗으로 사귐)
1919년 3.1만세운동 주도함
1920 상해까지 도보로 6개월 동안 잠행 도착함
1921년 상해삼육(초급)대학 입학 이듬해 졸업
1923년 임시정부 김규식 박사 입학 추천서(Roanoke College) 지니고 도미
1924년 LA, SF 등지에서 학자금 마련 위해 포도밭 노동
1926년 Roanoke College 입학(Sophomore)
1927년 시 '춘심'
1928년 시 '청천강' '두견' '봄' '냇가에서'
1929년 Roanoke College 졸업 시 '희망'
1930년 U-Penn 졸업(경제학 석사) 흥사단 입단(한승인 추천) 박마리아와 선을 봄,귀국 시 '청천강' 개작
1933년 협성실업학교 교사
1934년 연하의 신여성 김귀애와 결혼(김윤경 홍남파 등 들러리 섬)
1935년 장녀 경숙 출생
1936년 장남 진 출생 시 '귀성'
1938년 수양동우회(101인회) 사건으로 옥고(1년 2개월)
1941년 차남 일 출생
1942년 시집 '박꽃' 간행하기 위해 원고지에 정서하고 시 순서까지 배열함
1943년 삼남 달 출생
1945년 해방 미군정 입각 제의 거부
1946년 중앙상업학교(4년제 대학 과정, 피천득 영어 담당) 창립
1947년 시 '잠들기 전'
1949년 8월 12일 향년 53세로 귀천
2010년 5월 31일 시집 '박꽃' 발행
도산의 발치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망우리공동묘지 안장됨
2023년 8월 18일 오전 10시 74주기 추모식 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