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맛집 이야기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정종배 2023. 9. 1. 07:00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일어난 진도 7.9 관동대지진은
사망 및 행방불명 10만 5천여 명 피해자 190만 명
이재민 340여만 명이 발생했다
1차 피해는 지진 2차 피해는 화재 3차는 피해는 제노사이드
조선인 6,661명이 대학살 당했다

1924년 이후에는 잊혀졌다

지금까지 피학살자 중 이름이 밝혀진 이들은 400여 명
이름과 고향 주소가 기록된 사람은 30여 명이다
희생자의 영혼은 100년이 흘러가도 중음신으로 구천을 떠돈다

일본 땅 22곳에 위령비 위령탑 위령의 종 묘지 등 26개를
대부분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건립했다
그나마 둘은 민단 둘은 총련 4곳은 재일한국인들이 세웠다
총련은 학생들의 소풍지로 참배하고 관리한다

1985년 한국인들이 기금을 모아 한국의 재료와 손으로
일본에 세운 유일한 기림시설 <보화종루>가 무너져 가고 있다

고국에는 충남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사이타마 현·현북지부가 2003년에 건립한
‘관동대진재기옥현·현북지역 재일동포희생자위령탑’ 단 한 기 뿐이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리히터 규모 7.9의 대지진이
일본 도쿄와 간토 남부를 휩쓸었다
지진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시간에 벌어졌다
난롯불도 끄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온 터였다
도쿄는 3일 아침까지 화재가 꺼지지 않았다

현재 일본은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고 있다

9월 1일 당일 조선총독부는 매우 늦은 시간에 지진 발생 소식을 들었다
이튿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은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 정무총감 문서과장 토목부장 총독부 병원장 국민신문 기자 등 일본인 6인은
신석린(친일, 중추원)·민영기(친일, 매국수작)·박기양(친일, 매국수작)·이희두(친일, 군)·윤덕영(친일, 제국의회)·이진호(친일, 제국의회)·민대식(친일, 경제)·송진우(독립장, 문화운동) 등 9명의 한국인 유력자를 모아 대책회의를 열었다
진재지로 총독부 관리를 파견하여
도쿄 소재 조선총독부 출장소와 함께
조선인 실태 파악과 진재 처리 실무를 담당케 했다
사이토 총독도 10일 도쿄에 도착했다

조선인이 현장에서 참혹한 제노사이드를 목격한
일기 두 편을 소개한다.
진판옥일기와 HY生이다.

1923년 9월 1일~10월 9일 진판옥 일기

1920년대 임실에 거주하였던 진판옥(족보 경옥, 1903~1950)의 10대, 20대의 삶을 ‘진판옥 일기’(1918~1947)를 통해
학교생활, 경제생활, 여가활동, 구직 및 면서기 생활로 재구성하여 살펴볼 수 있다
1923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진학 및 취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로 엿장사, 우유배달, 신문배달, 건설현장,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경찰에 구류되어 10월에 강제송환 된다.

1923년 9월 1일 토 날씨 청晴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朝飯을 마치고 한 일 없이 놀면서 主人에게 또 한 번 말을 하였더니 終次 듣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마음만 杳々하였다. 그렁저렁 때는 되어 点心을 마쳤다. 暫間 앉았으니 金容善 氏가 死生에 이르러 업혀 왔더라. 그래 몸을 어루만져주고 겨우 情神을 차린 后 조금 있자니까 地震이 일어나기 始作하더라. 그래 봄에 한 번 겪은 일이 있어 염려치 않고 앉아 있었다. 그래 아주 甚하여 집이 넘어갈 듯하기에 어쩔 줄을 물으려 뛰어가 왔더니 집이 무너지고 煙突이 부러지고 야단이 났더라. 日人들도 生后 처음이라고 하며 놀래 짐들을 내더라. 그래 또 들어가 앉았더니 한 十分쯤 하여 또 크게 한번 하더라. 그래 또 뛰어나와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서 땅 노는 대로 움직였다. 처음(처번) 할 때 마침 深川區 時計로는 꼭 正午였다. 그래 그 后로는 準備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나 있던 집은 함석집에 가벼워서 넘어가지 않았다. 地震 끝에 起火가 四方에서 되었는데 그때에 마침 昨夜부터 南風이 甚히 불어 불의 形勢가 더욱 甚하였다. 우리 있는 집은 飛行機 工場 곁곁 집도 없고 띄어 있는 집이었다. 한참 있다가 市街로 求景을 나갔다. 過然 벽돌집이고 양옥이고 오히려 木製가 덜 무너졌더라. 안 상한 집이 없이 난리 중 어디 치어 죽은 사람을 여기저기서 끌어내고 길 저쪽도 갈 수 없고 이쪽도 갈 수 없더라. 그 중에라도 먹는 게 第一이더라. 도로 皈來하여 있었는데 그렁저렁 저녁이 되었는데 저녁을 지어 먹고 準備들을 하고 있었는데 불 形勢가 참 위험하더라. 그래 이제는 할 수 없어들 하여 避難을 하기 始作하였다. 나중에는 南風 어리어더니 東에서 불었다 西에서 불었다 北에서 불었다 정처 없이 四方에서 불어오며 소々리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도 딸려 나가게 위험하게 불었다. 연기는 온 하늘을 덮어 보이지도 않고 불로 空中을 이루고 가 이 모래비가 오다시피 벽돌 같은 것이 튀며 空中을 볼 수 없었다. 그래 우리도 바닷가까지 避難을 하였는데 한 三里 쯤이나 되었는데 불덩이가 떨어지고 불기운에 얼굴을 내어놓지 못하였다. 나는 마침 空中을 보다가 벽돌가루에 눈알을 데여서 빨리 눈을 비々고 눈물바가지나 흘렸다. 이 불을 무릅쓰고 한참씩 있다가 고개만 좀 내어놓고 진정(전)을 하였는데 또 海溢을 한다고 하여서 더욱 놀랐다. 그곳으로 數百名이 避難을 하였는데 밤새 그 사람 부르는 소리에 처량하여 들을 수 없더라. 그래도 잠밖에 무상한 게 없더라. 그중에라도 쿨々자는 사람도 많더라. 밤새도록 한숨 붙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눈만 비々었다.

一年이 되여 온 震災통 - 日記와 그 때의 回想

필자 HY生

기사 형태 문예기타
一年이 되여 온 震災통 - 日記와 그 때의 回想

9月 1日
地震 - 집 문허지는 壯觀 - 火災 - S君과 갓치 永代橋 方面으로 구경 - 그 때에 日本橋 方面에도 大火 - 갑작이 旋風 - 서 잇든 자리가 危險 - 烟火에 包圍 - 혼이 나서 歸家 - 餘震으로 坂本公園에 避難 - 公園附近에 數萬人 集合 - 地震은 連하야 火災는 四方으로 - 엇지나 되나? 이것이 이 世上일? - 數時間을 선 채로 - 다시 本石町方面으로 - 하도 끔직하야 精神이 어덜덜 - 黃昏 - 다시 公園으로 - 周圍를 에웨싸고 불길은 猛烈 - 數萬 群衆이 모힌 公園안이 刻一刻으로 危險 - 不安 恐怖 - 警官隊가 나팔을 불며 二重橋 압흐로 避難하라! - 그러나 얼골이 뜨거워서 - H와 S君으로 더브러 決心하고 갓치 二重橋로 向 - 中途에 苦心 慘憺 - 前後左右가 火炎의 山 - 避難人의 大混雜 - 旋風은 곳곳이 - 火氣充天 - 前進 不能 - 進退를 어대로? - 死! 死! 必死 突進 - 東京驛前의 大混雜 - 3人이 二重橋에 着 - 九死一生 - 一夜를 宮城압 草原에서 - 濠水를 隔한 저 쪽에는 불의 바다 - 暴音은 殷殷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