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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학송 84주기 추모식

정종배 2017. 3. 2. 09:29
구리, 아차산 망우리인문학공원 ‘서해 최학송 84주기 추모식’ 열려
한국의 고르키, 1920년대 빈궁문학의 최고봉...31세에 요절
기사입력: 2016/07/11 [11:53]  최종편집: ⓒ 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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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경기인터넷뉴스] 아차산 망우리공원(공동묘지)에는 60여명의 애국지사와 예술인들이 묻혀있으며, 작년부터 이 공원은 인문학의 보고로 인식되어 “망우리인문학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지난 9일 오전 10시에 우리나라 빈궁문학의 최고봉인 서해 최학송 84주기 추모행사가 관계자 20여명이 모여 서해의 문학 업적을 기렸다.
 
▲  사해 최학송 84주기 추모식...전체 묵념  ⓒ 오병학 기자

이 추모식은 (재)수림문화재단이 주최를 했으며, (사)중랑문화연구소, (사)최학송기념사업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등이 공동으로 주관했으며, 망우인문학을 이끌고 있는 김영식 작가, 장정례 다큐감독, 박상인 문화생태해설사 등 관계자, 청량고 문화동아리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청량고 문화동아리의 임호균, 신해림, 신유림, 김희원 학생이 서해의 대표작을 낭독했으며, 청담고 시절 서해의 묘역을 살피고, 중랑구청에 묘역의 아까시를 제거 해 달라고 청원을 넣어 지금의 묘역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한 금중혁 군(더불어 민주당 금태섭 의원의 장남)이 군입대를 앞두고 헌화를 했다.
 
▲ 서해 최학송 84주기 추모식...헌주와 헌화     ⓒ 오병학기자

이날 추모제를 관장한 정종배 시인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14년 전 묘역을 처음 발견해 문학계에 알렸으며, 이후 인연이 되어 무덤을 돌보고 작년부터 추모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정종배 시인은 “서해는 살어서도 죽어서도 외로움이 배어있다. 작은 출발이지만 그를 위로한다는 것은 내 자신의 문학을 위로 하는 것과 같다. 조촐한 행사지만 이를 통해 서해 선생이 위로 받고 그의 작품이 새로이 평가를 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 서해 최학송 84주기 추모식...서해의 대표작을 낭동하는 청량고 학생들     ⓒ 오병학기자

김영식 작가는 “내년 초에 날을 잡아 이곳에 누워있는 인물들을 함께 시제를 지내듯 합동 추모 형식의 행사를 모색하고 싶다. 그리고 개개인의 기일에 제를 모심으로 그들이 끼친 문학적, 사회적, 정치적 업적과 비평을 함께 나누는 인문학의 보고로 재생산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서해 최학송은 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31년 일생 중 8년간 60여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22세 되던 해에 “서해(曙海. 아침바다)”를 사용했고, 그의 대표작으로 “탈출기, 홍염, 십 삼원,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등 우리나라 빈궁문학의 선봉장이었다.
 
▲최서해선집(연변인민출판사) ⓒ 중국 연변 운동주기념회제공
 
1932년 6월 위문협착증으로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한 뒤, 7월 의전병원으로 옮겨 대수술을 받았으나 과다한 출혈로 수술 이틀 만에 31세로 사망했다. 23일에는 서울 백합원에서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가 결성됐다. 1933년에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추도식이 열었으며, 이듬 해 6월 미아리의 묘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 후 묘지는 1958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돼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