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에 적혀있는 문장이다. 왜 일본 사람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땅이 아닌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혀 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다쿠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진정으로 조선의 예술과 미를 사랑했다. 조선의 공예를 좋아하며 조선의 소반(밥상)을 연구하고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그는 또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을 소명이라 믿고 조선의 산과 삼림을 푸르게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쿠미는 인간의 가치를 실현해 나갔다. 신분이나 국적,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사랑과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아사카와 다쿠미와 관련된 몇 개의 사례들을 통해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삶에서 배울 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1장 조선의 삼림을 푸르게 만들다
자연을 사랑한 다쿠미의 어린시절
1890년 7월 다쿠미의 아버지 조사쿠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1월 15일 다쿠미가 태어나자, 조부모인 오비 덴에몬과 기쿠는 은거하려던 계획을 버리고 손자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다시 농사일에 몰두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쿠미의 어머니인 게이와 함께 염색 일을 했다.
다쿠미는 조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 1897년 4월, 무라야마니시 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다쿠미의 누나는 다쿠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학교에 가는 길에 하치만 궁이 있는데, 그곳에는 삼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어요. 그것을 뽑아와서 집에 심기도 했지요. 메밀, 잣, 밤나무를 길러서 이웃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요. 다쿠미는 그런 일들을 참 좋아했어요. 그리고 어려서부터 유머와 재치가 참 많았어요.
―사카에
다쿠미의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한 다음 날인 1901년 1월 16일, 존경하고 사랑했던 할아버지 오비 덴에몬이 세상을 떠났다. 그 해 봄, 다쿠미는 아키타 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졸업한 뒤 1년간의 보수과를 거쳐 1906년 야마나시 현립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던 다쿠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형 노리타카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사카와 형제는 사이가 좋았고, 고후 시외 이케다촌에 세를 얻어 같이 자취했다. 그 이듬해인 1907년 8월, 야마나시현에서는 산림의 나무를 함부로 벌채하는 바람에 하천이 범람해 232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향토사가인 데즈카 요이치는 이 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농업학교 재학 중이었던 다쿠미는 수해의 참상을 보았을 테고, 치수의 근원인 조림의 중요성을 통감했을 것이다."
―데즈카 요이치
다쿠미의 학생 시절에 대해 동급생이자 처남이며 평생 친구였던 아사카와 마사토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함께 그의 집에 신세를 진 적이 많았는데, 그때 톨스토이가 쓴 <부활>의 줄거리 등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음이 퍽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부활>의 첫 부분을 잠자리에서 들으면서 신비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지요. 다쿠미는 들국화를 캐서 집 마당에 심어놓고 혼자서 감상하기도 했답니다. 꽃 이야기를 해서 생각이 나는데, 학교의 두엄간 앞에 꽤 큰 흙 더미를 쌓아둔 곳이 있었는데, 다쿠미의 제안으로 거기에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꽃이 한창일 때 아주 아름다웠어요.
그때부터 산에 나무를 심는 일과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 심기는 자연을 아름답게 하는 길이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다쿠미다운 생각이었습니다.
―아사카와 마사토시
1909년 3월 다쿠미는 야마나시 현립 농업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뒤 아키타현 오다테 영림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헤어지기 전에 쥐여준 돈을, 다쿠미는 졸업하면 부모님께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며 몰래 불단에 놓아둔 채 떠났다.
그가 아키타현에서 한 일은 국유림의 벌채나 식목이었다. 톨스토이를 좋아했던 다쿠미는 아키타현의 사람들을 그의 작품인 <카자크인들>에 나오는 코카서스 사람들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1912년경 당시 아사카와 마사토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런 다쿠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아름답게 갠 가을날 아침, 괭이와 도시락을 어깨에 메고 노래하며 활발하게 서리를 밟으면서 걸어오는 젊은 여자나 청년을 보면, 기뻐서 오두막에 있지 못하고 뛰쳐나오곤 했지.
산속의 여자들은 고후 근처의 시골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착한 데가 있네. 꼭 코카서스의 여자를 보는 듯한 기분이라네.
내가 머무는 오두막의 관리인은 사냥의 명수에다 술을 좋아하고 체격도 매우 크다네. 나는 그가 아키타의 에로슈카라고 믿고 있어. 화롯가에서 이런 감상에 젖어 있는데, 전근 명령을 받았지.
친해진 인부들도, 들꽃이 아름다운 산도, 가상의 에로슈카도, 마루야나도 모두 남겨둔 채, 떠나야 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서 생활하게 되었어. 겨우 백 일 만에 마루야나도 에로슈카도 머릿속의 고인이 되어버렸지. 그렇지만 산과 들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있네.
나는 죽을 때까지 언제 어디서나 산과 들, 나무와 풀, 물과 벌레와 친구로 지내면서 살고 싶다네.
―다쿠미의 편지
이 편지에서 자연을 친구로 여겼던 다쿠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무렵 그는 자연의 정취에 취해 이런 하이쿠를 짓기도 했다.
밝은 달아 신 산포도가 가지에 주렁주렁.
조선에서 목격한 황폐해진 삼림
1914년 4월, 다쿠미는 형이자 아버지 같았던 노리타카를 따라 조선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5월 17일 경성부 독립문통 3-6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일병탄이 있은 지 불과 4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식민지로 계속 건너오고 있었다. 1910년 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수는 약 17만 명이었는데, 그 수가 1911년 말에는 21만, 1912년 말에는 24만, 1913년 말에는 27만, 1914년 말에는 약 29만으로 현저히 증가했다.
그 무렵 조선에는 '무단통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전국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인 헌병은 치안 유지 등의 경찰 업무뿐 아니라 일본어 보급이나 부업 장려 따위의 일까지 광범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인 조선 총독이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뿐 아니라 현지 주둔군의 사령권까지 쥐는 군정과도 같은 통치 방식이었다. 조선인들에게는 정치 결사를 결성하는 일은 물론, 정치 집회나 강연회를 개최하는 권리조차 인정되지 않았다.
일제는 또한 대대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했다. 이 사업은 표면적으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 목적은 소유권을 신고하지 않는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는 데 있었다. 이 토지조사 사업은 홍보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절차가 복잡하고 신고 기간도 짧아 대다수 조선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 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생활 터전을 뺏긴 농민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는 예로부터 무주공산이라 불린 많은 공공림이 있었으나 군용목재가 필요했던 일본은 이미 총감부 시대(1905~1910년)에 삼림법을 공포하여, 조선의 공공림을 국유 임야로 편입했다. 그것들은 1910년의 경술국치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손에 넣은 국유림을 '조선 특별 연고 삼림양여령'을 발표해 일본인 자본가나 일부 친일 조선인 등에게 '양도' 하였다.
다쿠미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임업시험소의 직원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일람>에 의하면 당시 임업시험장은 1913년 4월에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아래 촉탁 한 사람과 직원 두 사람을 두고 '임업시험소'라는 이름으로 막 발족한 상태였다. 다쿠미는 임업시험소에서 조선에서 자라는 나무 및 수입된 나무종의 묘목을 기르는 등 임업 관련 시험 조사에 종사했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뒤 거의 10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3·1독립운동이다. 3.1 운동은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해 이내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4월 상순에 최고조에 이른 뒤 점차 사그라졌지만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만 해도 그 참가자가 2백만 명에 이르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육군 6개 대대를 증파하여 운동을 탄압했다. 이 탄압으로 7천 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의 어용 신문 <경성일보>는 독립운동을 폭동으로 왜곡하고 운동 지도자를 인신공격했다. 또한 독립은 허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예를 들면 11월 25일, 가토 후사조 사장은 "조선인이 해야 할 일은 망상과 미몽에 사로잡혀 독립운동이라는 미친 거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내어 노력하고 지덕을 닦아 산업을 번창시켜서 동양의 대국민이 되도록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일본의 지식인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으나, 야나기 무네요시나 요시노 사쿠조 등 몇몇 사람들은 조선인의 마음을 받아들여 일본 정부를 비판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일본 정부는 방침을 전환하여 유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문화정치'다. 새로운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실시한 정책으로, 소수 조선인이 지방 정치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한글 신문 발행을 허가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규제 완화는 극히 제한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 철저해졌다. 문화정치의 목적은 친일 세력을 육성해 지배의 안정화를 꾀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방면에서는 쌀 생산 증식 계획이 실시되었다. 1918년 쌀 폭동에 따른 일본의 식량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이었다. 또한 국유림을 손에 넣은 일본인 산림 자본가들은 군용재나 갱목 등에 필요한 산림을 계속 남벌했다. 물론 녹지를 위해 조림 사업도 했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산림 보호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의 산림 이용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전까지 조선인은 생활에 필요한 목재를 주인 없는 산에서 자유롭게 가져왔지만 그 산들이 국유지가 되면서부터 산에 출입하면 사람들을 체포했다. 아래는 이러한 실정에 관련된 기술들이다.
미쓰이 합명회사는 황해도 해주 부근에서 상당히 넓은 산림을 사들였다. 사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고등 정책으로, 총독부는 여러 재벌에게 조선의 민둥산을 사서 나무를 심게 하여, 재벌의 자금으로 민둥산을 녹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임간 도로도 만들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아무 나무나 심었기 때문에 녹화는 진행되었지만, 그 후 산림 전문가들을 난처하게 했다.
―호시노 야스노스케
일본은 36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치산 사업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삼림 육성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고 실행하였다며 자랑하고 있으나, 현재 조선 삼림의 양상은 황폐하기 직전이다. 일본 정부가 황폐해진 조선의 삼림을 보호, 육성하는 데 힘쓴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무분별한 식목과 벌채로 산림이 균형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지나친 벌목으로 민둥산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시 부근과 철로변의 조림에는 특별히 유의했다.
―<조선경제연보>(1948년), 조선은행 조사부
“중부 또는 남부 지역, 특히 인가 부근의 황폐한 임야를 부흥시키는 조림 사업은 선전용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림창 소관의 임야는 식민지 사업으로 수탈했다. 말하자면 선전 임업과 수탈 임업이라는 이중적인 삼림 정책을 쓴 것이다."
―<한국임정사>, 경제학자 지용하
그 무렵 다쿠미는 모종 기르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식물의 씨를 채집하기 위해서 한반도 각지를 답사했다. 그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조선인의 생활상을 보고 듣게 된다. 때로 조선총독부나 일본인을 원망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옛날에는 저것이 제일막이었고, 제임가의 흔적은 뒤편 계곡에 있다. 삼막사는 그 시대의 제삼막이었다. 절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 이전에 이 근처 일대는 훌륭한 삼림이었다. 절에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독부가 들어선 후, 절 소유의 삼림이 주변의 좁은 부분으로 한정되면서 최근 절에서는 땔감이 부족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지금 이 산은 일본인 부자가 독점 입수하여 경영하고 있는데 해마다 황폐해 갈 뿐, 그 유명한 관악산의 송이버섯도 절 부근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삼막사 주지 스님
이렇듯 그는 '노승'이나 '안내원' 같은 조선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진정한 조선인들의 생활을 접함으로써 조선을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삼림 수탈 정책을 비판하는 기록도 남겼다.
길가에서 낙엽을 모으고 있던 안내원의 친구들은 양복을 입은 낯선 일본인과 동행한 그를 보고, 산지기에게 잡혔나 보다 하고 수군거리며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산지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지기가 엄하게 군다 하더라도 이 겨울밤을 추운 방에서 새울 수는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땔감을 모아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산간에 자기 소유의 임야도 없고, 대대로 지역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땅도 갑자기 남의 사유지가 되어버렸으니, 도둑질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지기의 감시가 엄중하고 나무를 훔치는 자에 대한 형벌이 가혹해도, 산은 푸르게 되지 않는다. 산을 푸르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고장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삼림을 녹색으로 바꾸는데 한 평생을 바치다
조선에 건너 온 다쿠미가 본 조선의 산은 녹색은 거의 볼 수 없고 돌무더기만 노출되어 있는 적갈색의 민둥산이었다. 수백 년에 걸친 부패한 정치와 끊임없는 외침에, 확립되지 못한 소유권으로 인해 대부분의 산은 주인 없이 황폐해져 버린 이른바 ‘무주공산’이었다. 이 처참한 산 색깔에 마음이 아팠던 그는 이 산들을 다시 녹색으로 바꾸는데 한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다쿠미는 처음에 직원으로 시작해 1922년 8월 기수(기사의 다음 직위)가 되었다.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더 이상 승진하지는 못했지만 다쿠미는 양묘일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출세를 바라지 않았다. 사카에가 1926년 다쿠미를 만나 하급직이라서 월급이 너무 적으니 직업을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다쿠미는 "내 취미는 묘목을 기르는 것이에요"라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직장인 임업시험장에서 다쿠미는 성실하고 유능한 임업 기수였다. 그는 임업에 관련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고 임업 시험 조사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쿠미가 최초로 발표한 임업 관련 논문은 <대일본 산림 회보> 1917년 6월호에 기수 이시토야 쓰토무와 공동으로 쓴 한국 잎갈나무의 양묘(묘목을 기르는 것) 성공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다쿠미 등은 1915년 가을, 한국 잎갈나무의 양묘에 상당히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냈고, 1916년에 '다소 확장적인 사업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업적이 임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는 1940년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펴낸 <조선의 임업>에 잘 나타나있다.
“임업 시험을 시작한 이래, 주된 업적은 여러 해 동안 양묘에서 어려운 문제로 여겨오던 한국 잎갈나무와 잣나무의 양묘에 성공한 것”
―<조선의 임업>
실제 한국 잎갈나무는 철도의 침목 용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수종이다. 이 논문에 대해 야마나시현 임업기술센터 연구원인 세이도 구니히로는 "묘목을 기르고 산에 숲을 조성하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낸 연구"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쿠미가 기른 한국 잎갈나무 묘목은 광릉시험림(지금의 국립수목원)에 심었다. 그리고 비교 연구의 자료로 심은 신슈 잎갈나무나 가라후토 잎갈나무와 함께 지금은 훌륭한 대목으로 성장했다. 그 중 일부는 통나무가 되어 시험장 안에 통나무집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다쿠미와 이시토야 쓰토무는 그해 10월, <대일본 산림 회보>에 미국산 교목의 양묘와 조림(나무를 심어 삼림을 조성하는 것)의 실적을 보고하였다.
1919년 4월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출판된 <조선 거수·노수 명목지>는 1916년 실제로 조사·수집한 재료 5천 3백여 점에서 발췌해 조선의 크고 오래된 나무를 기록한 책으로 모든 나무의 명칭을 한글로 붙인 점이 눈에 띈다. 책의 '서언'에는 이시토야가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도이 하마이치가 편집한 '아사카와 다쿠미 저작일람표'에는 이 책이 다쿠미와 이시토야의 공동 저술로 되어 있다. 본래 공저인데 기수인 이시토야의 이름만 싣고, 당시 직원이었던 다쿠미의 이름은 생략한 것이 아닐까.
1919년 8월에는 1913년부터 1918년에 걸쳐 조선의 주요 나무 및 외래 나무종의 양묘에 대해서 시험 조사한 <수묘 양성 지침 제1호>를 펴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시험 조사는 총독부 기수인 이시토야 쓰토무가 담당하고, 묘포장에서의 재배는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가 맡았다."
―<수묘 양성 지침 제1호>, '일러두기'
세이도는 이 책에 대해 "거의 자료가 없던 그 당시 상황에서, 다양한 수종을 다루고 양묘 방법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한, 매우 귀중하고 가치있는 자료다"라고 평가했다.
1920년 농상공부 삼림과는 식산국 산림과가 되었고, 임업시험소도 임시직 기사 두 명, 기수 네 명, 속 한 명의 구성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임업시험소를 북아현리에서 청량리로 옮기고 기사와 기수를 각각 한 명씩 증원했다. 1922년 8월에는 명칭을 '조선임업시험장'으로 바꾸고 기사 한 명, 기수 열한 명이 증원되어 결국 기사 네 명, 기수·속 다 합쳐서 모두 열일곱 명이 되었다.
다쿠미는 1921년 시험장이 청량리로 옮겼을 때, 안뜰에 소나무(반송)를 심었다. 그 나무는 지금도 푸른 녹색 잎을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다음 해 2월, 다쿠미는 청량리에 있는 한옥으로 이사했고, 8월에는 임업시험장 판임직원이자 기수가 되었다.
다쿠미는 1924년 3월 <조선산림회보>에 <묘포를 담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보낸다>를 발표했다. 이는 1923년 가을 양묘강습회에서 강연한 내용의 개요를 쓴 글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고안해낸 '가파'와 '대파'라는 새로운 양묘법을 소개하며 직접 자연에서 배운 비결은 이론과는 달리 당장 요긴하게 쓰인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 하는 가파는 흙과 섞은 종자를 되도록 좁은 면적에 모아두고, 그 위에 흙과 낙엽을 덮어 바람, 비, 눈, 진눈깨비를 자연 그대로 종자에게 작용시키는 방법이다. 이를 ‘노천매장법’이라고도 부르는데, 다쿠미의 임업 관련 업적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다쿠미의 동료들이 남긴 기록이다.
“아사카와 씨는 잘 자라지 않는 종자를 노천에 매장하는 방법으로 숙성시켜 싹을 틔우는, 이른바 '노천매장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방법을 응용해 씨앗을 모래와 섞어 땅에 묻어두면 싹이 빨리 나게 됩니다.”
ㅡ김이만 고문
“임업 시험에 관한 아사카와 선생님의 제일 훌륭한 업적은 한국 잣나무의 노천매장법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법이지만, 당시의 임업계에서는 세계적인 발견이었습니다.”
ㅡ오민영 육림부장
“한국 잣나무는 솔방울이 커서 잣을 많이 채집할 수 있는 수목인데, 그 당시에는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사카와 씨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이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임업연구원 조재명 원장
한편 다쿠미는 1925년 3월호 <조선 산림 회보>에 <싸리나무의 종류>를 발표했다. 민둥산을 조림하는 데 싸리나무가 적합하다는 사실은 당시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다쿠미는 한반도에 자생하는 싸리나무 10여 종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다섯 종의 특징을 서술하고, 민둥산 조림에는 특히 참싸리가 적합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1926년 6월에 발행된 <임업시험장 보고> 제 5호에는 삼림 조성에 중요한 나무의 종자를 빨리 발아시키는 실험에 대한 '두 번째 보고서'가 실렸는데, 이 실험을 주로 담당한 사람이 다쿠미와 기수 노지 사쿠조였다.
다쿠미는 첫 번째 보고서에서 '노천매장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종자의 발아 촉진이 성공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보고서에서는 보호매장이라는 방법을 새롭게 고안해내고, 총 34종의 나무를 실험하고 그 과정 및 결과를 정리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콩을 이용해 종자의 발아를 촉진하는 방법이다. 토양 양분이 적은 화강암질 땅에 콩을 심어 질소를 공급함으로써 인공 조림을 더 쉽게 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일본에서 치산 사업에 콩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1949년 이후의 일이다.
―보고서에 대한 세이도의 평가
또 같은 해 10월에 발행된 <임업시험장 시보> 5호에 실린 기수 정태현의 한반도에서 자라는 주요 나무종의 분포와 적합한 재배지에 대한 논문도 다쿠미의 조사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었다.
다쿠미가 생전에 발표했던 임업 관련 논문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다쿠미의 친구였던 도이 하마이치에 따르면, 그 밖에도 '병충해', '시베리아오리나무와 산오리나무의 파종과 양묘에 대하여', '잡초 이야기', '비료 이야기', '모리오카의 조선 소나무' 등의 유고가 있었다. 또 다쿠미가 죽은 지 약 1년 뒤인 1932년 3월 <임업시험장 보고> 13호로 <주요 묘목 비료 3요소 시험>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서문에 등장하듯 다쿠미가 시험한 내용을 정리한 뒤 촉탁인 가타야마 요시오가 결론을 붙인 것이다.
다쿠미는 와병 중에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는데, 여러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독백이므로 단언키는 어려우나 식목일을 앞두고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다쿠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오로지 조선의 임업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이런 간절한 노력으로 조선의 산들은 어느 정도 녹색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림 철학
1926년 다쿠미는 <조선과 만주> 10월호에 <묘포 비료로서의 퇴비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묘포지를 매년 계속해서 사용하면 해가 갈수록 메말라서 결국은 쓸 수 없게 된다는 속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조선 산림 회보> 1927년 7월호에는 <민둥산 이용에 대해서>를 발표했는데, 여기는 다쿠미의 조림 철학, 나아가서는 인생 철학이 잘 나타나 있다.
'전화위복' 이라는 말은 예부터 성현들이 살아온 방식을 잘 보여준다. 불행을 불행으로만 여기고 대처할 경우, 우리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질 뿐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다시 생각해 보면, 견디기 어려운 고통도 기쁨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이는 예외 없이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다. 만약 불행이 불행인 채로 끝났다면, 이는 그 사람의 불운을 탓하기보다는, 차라리 지혜와 노력이 모자랐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항상 나쁜 것 속에 좋은 것을 감추고 있다. 고통 뒤에는 즐거움이 온다. 이렇듯 화를 복으로 바꾸는 원리를 산업에 적용한 것이 바로 재활용이다.
―<민둥산 이용에 대해서>의 첫부분
일반에 알려진 민둥산의 특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잔디가 없고 항상 벌거벗고 있다. 둘째, 표토가 안정되지 않아 붕괴되기 쉽다. 셋째, 암석이 풍화하기 쉽다. 넷째, 땅이 얕아서 하층에 항상 적당한 습기가 있다. 다섯째, 배수가 잘 된다. 여섯째, 여름과 낮에 지표 온도가 매우 높으며,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크다. 일곱째, 해충과 병균 등이 매우 적다. 여덟째, 토양에 부식질이 거의 없다. 아홉째, 대체로 토양의 성질이 좋고, 모래와 찰흙의 혼합 비율이 적당하다. 이러한 특징은 평지의 토양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런 땅도 주의해서 조사, 연구한다면, 새로운 사실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둥산을 어떻게 이용할지 여러 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세 가지 방법을 예로 들어보자면, 싸리나무나 오리나무 종류를 파종하여 조림하거나, 대나무 숲을 조성하거나, 고구마나 땅콩 등을 재배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 중에는 벌써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연구해야 할 과제가 더 많이 남아 있다.
―<민둥산 이용에 대해서>
지금은 조선의 산업에서 민둥산이 암적인 존재로 치부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닌 날이 오리라 고대한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전에는 찌푸린 얼굴로 보았던 민둥산을 이제는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문제는 아직은 시험 단계에 한 발 들어선 것에 불과하다. 이 시험은 연구실에서 시험관을 흔드는 사람뿐 아니라, 기후나 토질이 서로 다른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이 다방면으로 관찰하고 연구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지면을 빌어 필자의 얕은 소견을 피력하고 현명한 여러분의 도움을 바라는 바이다.
―<민둥산 이용에 대해서>의 맺음말
이 글에서 알 수 있듯 다쿠미는 군침을 흘리며 민둥산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한탄하면서 바라보던 민둥산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고 사랑한 것이다. 그는 푸른 산과 민둥산을 비교해서 우열을 논하거나 일본인과 조선인을 비교해서 일본인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의 임업과 관련해서 주변 사람들이 남긴 회고를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다쿠미가 일하는 방식에는 매우 독창적인 데가 있다. 종종 실험에 쫓기기도 했지만, 그는 그 방면의 학자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이 있었는데 그는 면밀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나도 가끔 산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에게는 일종의 철학이 있었다. "결국 산림은 자연의 법칙에 맡겨야 한다. 그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결론짓던 다쿠미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라'는 <성경>의 구절이 생각나서 "결국 과학도 종교도 공예도 길은 하나다"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풍부한 암시로 가득 차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저는 미쓰이 합명회사 소유의 삼림에서 숯을 구워 인천에서 요코마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 다음 잎갈나무와 소나무를 심었지요. 다쿠미 아저씨는 조림에 관해서는 만물박사였고, 조선의 산을 사랑하셨죠. 조선 전국을 돌아다녔고요. "취직하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취직하고 나서도 공부를 해야 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찾아가면 일 이야기뿐이었어요. "숯을 구울 때 1퍼센트라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니까, 노력해야 해"라고 종종 충고하시곤 했죠. 세심한 분이셨습니다.
―고미야마 다쓰야
다쿠미는 조선의 삼림을 황폐하게 하는 수탈적인 임업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21세기에 이르러 이슈가 되고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인식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인식들은 그의 일기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사무소에 출근해 사방 식재에 관한 시험 조사를 생각했다. 종기로 곪은 피부를 고약으로 덮어버리거나, 부서진 온돌을 아무렇게나 덮어씌운 듯한 치산 사업, 이른바 '사방공사'를 위주로 하는 사업에는 찬성할 수 없다. 산의 생명력을 이용해 산림을 키워가는 방향으로 하지 않으면 조선의 산을 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면의 시험 조사나 자연 현상의 관찰에 대해 더욱 신경쓰고 싶다. 오늘 지금까지와 같은 사방공사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도자와 박사(당시 임업시험장 장장)의 신경을 건드렸으나, 앞으로는 내 주장을 일에서 표현하고 인정받겠다. 비록 내 주장이 옳다고 해도 이렇게 서로 다투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 같다.”
"이전의 조림식 사방공사나 그에 따른 공사들은 자연을 무시하는 부분이 많다. 자연이 알려준 방법이 더 효과적임을 실증해 보여주고 싶다."
“오늘 장장이 시험 결과를 보고, 기분 좋게 내 의견에 동의했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잔디 심기 공사는 완전한 토목공사이고, 임업을 위한 사방 식재의 기초 작업이 아니다. 임업가가 행하는 사방공사는 지반과 식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식물의 생존을 통해 지반을 안태하게 하고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닥치는 대로 땅에 막대기를 박거나, 돌을 쌓아놓거나, 잔디를 심으면 되는 일 혹은 계단을 만들거나 하는, 건축기술자나 일꾼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조선 국경의 삼림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홋카이도의 삼림도 그들 때문에 벌거벗은 몸이 되어버렸고 가라후토도 얼마 걸리지 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압록강 상류부터 시베리아 쪽으로 눈을 돌릴 게 틀림없다. (……)
하여튼 저런 공업은 삼림을 황폐하게 한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조선의 삼림도 송충이가 갉아먹은 소나무처럼 다 못 쓰게 될지 모른다. 제지 사업은 현대에 반드시 필요하므로, 삼림을 이용하는 것은 전혀 상관 없으나, 나무를 자를 때도 벌채한 후 땅이 황폐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쓰고 삼림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기
2장 조선 예술의 미美에 빠지다
조선의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세 사람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1910년 초, 별나게도 우리 문화를 사랑했던 일본인 세 사람이 있었다. 종교철학자이며 ‘조선의 예술’을 미학적으로 접근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서울 남산소학교의 교사로서 조선도자기에 심취하여 이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조선의 공예분야를 깊이 연구한 아사카와 다쿠미다.
노리타카는 야마나시현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신설된 일본인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노리타카는 근대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한국의 자기와 백자의 아름다움에 착안한 인물이었다. 고려청자에 비해 조선의 백자는 한국 내에서 조차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사람도 없고 만든 곳이나 백자의 이름, 만드는 용법들까지도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백자의 아름다움에 반한 노리타카는 부족한 월급을 쪼개 백자를 발굴해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조선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아사카와 노리타카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노리타카가 조선으로 건너온 것은 조선 공예품에 대한 커다란 관심 때문이었다. 당시 대다수 일본인들이 식민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조선 땅을 밟았던 것과 달리 노리타카는 오직 조선 미술공예에 이끌려 조선을 찾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다쿠미에게 노리타카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조선에 들어온 후 그의 친동생 다쿠미가 형의 조선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발견에 대하여 공감하고 탄복하여 다음 해인 1914년 조선으로 들어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4년 노리타카로부터 조선 도자기를 선물로 받으면서 조선 예술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로부터 1916년 야나기도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조선 문화 예술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내(야나기)가 조선 도자기에 끌려서 사들인 최초의 물건은 (가쿠슈인)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1911년 무렵), 간다 진보정의 어느 골동품 가게 앞을 지나다가 문득 눈에 띈, 남빛으로 모란꽃무늬를 넣어 구운 오래된 항아리였다. 거금 3엔을 주고 사들였는데, 물론 당시는 그것이 조선 시대 물건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
두 번째는 1916년에 노리타카가 조선에서 우리 집으로 로댕의 조각품을 보러 왔을 때, 선물로 가져온 청화백자추초무늬모따기항아리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조선 도자기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회상
흔히들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재평가하고 민예품을 모아서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 본인은 자신을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해 준 사람이 아사카와 형제였고,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운영하는 데 다쿠미의 역할이 컸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1916년 8월 야나기가 조선으로 건너오는 데는 아사카와 형제와 청화백자추초무늬모따기항아리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야나기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철화자기 항아리를 하나 사서 내게 보냈다. 경성에 도착해서는 둘이서 한여름 염천을 매일같이 골동품 가게를 뒤지며 보냈다. 이러한 열기가 동생 다쿠미에게 전해졌다."
―노리타카의 회상
야나기는 이 때 다쿠미 집에서 묵었는데, 이것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학생 때부터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누님은 러일전쟁 당시 재한 인천 총영사로 있던 가토 모토시로와 결혼했고, 누이동생은 나중에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이 된 이마무라 다케시와 결혼했다. 그런 인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선을 알게 된 계기는 아사카와 형제를 알고 난 이후였다. 아현리의 다쿠미 집에 묵으면서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활짝 눈 뜨게 되었다. 그래서 1921년 도쿄에서 조선 도기전을 개최했던 것이다. 한때 조선에 영주할 결심을 한 적도 있었다.
―야나기의 회상
야나기는 다쿠미 집에서 조선 민예에 눈을 떴다. 그는 다쿠미가 조선식으로 사는 모습을 보고, 또 민예품을 만든 '한민족'에 대한 다쿠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뒤에서 떠받치고 있는 그 무엇을 발견했을 것이다.
야나기는 이때 조선에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후에 <석불사의 조각에 대해서>를 썼다. 그리고 여기에 "경성에서 보낸 보름 동안의 추억을 위하여 이 논문을 아사카와 노리타카 씨, 다쿠미 씨 두 분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를 넣었다. 노리타카와 다쿠미, 특히 다쿠미가 정확한 소재와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야나기가 조선의 미를 이론화하여 논문을 쓴다는 협력 방식이 이때 생겼던 것이다. 야나기와 다쿠미의 만남에 대해서 시인 오오카 마코토는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에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전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경험한다. 즉 아사카와 다쿠미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쿠미의 식견에 깊이 감동했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다쿠미가 일단 조선 땅에 온 이상, 조선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인의 생활에 완전히 융화된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야나기는 다쿠미가 조선인을 깊이 사랑하며 또한 그들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그 자체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오오카 마코토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야나기는 "조선을 경험한 지식인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사상에 거의 아무런 현명함도, 깊이도, 또한 따뜻함도 없음을 알고" 단호하게 펜을 들었다. 야나기는 <요미우리 신문>(5월 20일~24일)에 '조선인을 생각하다'를 발표했다. 그 글에서 "우리 나라는 올바른 사람의 길을 밟고 있지 않다"고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이 그들의 이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라며 독립운동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글을 쓴 야나기의 마음속에는 아마 3년 전 방문한 조선에서의 추억, 특히 다쿠미와 지냈던 추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운 야나기와 다쿠미
1920년 초겨울 다쿠미가 야나기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야나기는 이론가인 동시에 실천가로 추진력이 대단한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미술관 설립을 위해선 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으로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에 대하여>가 발표되었다. 기부금을 보낼 곳으로는 야나기의 주소인 '치바현 아비코'와 더불어 '경성부 서대문국 아현'이라는 다쿠미의 주소도 씌어 있었다.
나는 우선 여기에 민족예술로서 조선의 멋이 배어 나오는 작품을 수집하려고 한다. 미술관을 통해 사람들에게 조선의 미를 알리고 그 작품에 배어 있는 민족의 따뜻한 인정을 일깨우고 싶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져가는 민족예술을 지속시키고 부활시키는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야나기의 호소문 중
호소문이 발표되자 속속 기부금이 도착했다. 시가 나오야 등 <시라카바> 동인과 인도인 싱 같은 야나기의 친구들은 물론,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등도 기부금을 보내왔다. 야나기 가네코는 1921년 5월 조선에서 개최한 음악회 수입 약 3천엔을 기부했다. 이리하여 1922년 10월 22일까지 모두 9480엔의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1921년 이후 야나기는 미술관 설립 때문에 자주 조선에 왔다. 그해 1월 11일 야나기는 경성에 와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만나 미술관으로 사용할 건물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사이토는 그 요청에 응했고, 아름답고 작은 한옥 건물인 관풍루를 무료로 빌려주었다.
해군 대장이었던 사이토는 해군 소장을 지낸 야나기 아버지 후배였고, 야나기 매형 가토 모토시로나 매제 이마무라 다케시와도 잘 아는 사이었다. 미술관 건물을 대여해 준 데는 그러한 친분도 작용했겠지만, 정치가인 사이토 나름의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총독에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무단통치에서 방향을 바꾸어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를 창설했으며 한글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조선 문화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사립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을 저지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고, 당시의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가 고백하듯, 미술전람회는 별다른 취미 없이 정치에 열을 올리는 조선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글 신문의 발행도 독립운동에 대한 완충장치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었다.
물론 다쿠미나 야나기의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운동은 당시 일본정부의 정책 방향과 대립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고유의 민족문화인 풍습과 습관, 나아가 조선어와 이름, 가족제도를 말살하여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추진하는 동화 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근거가 조선(사람)은 일본(사람)보다 열등하다는 멸시 사상이었다. 조선총독부 어용언론인으로 일제시대 '조선 전문가'로 활동했던 호소이 하지메는 1908년부터 3년간 조선에 살았고 그 후에도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여 조선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21년 6월 2일, 야나기는 다쿠미, 아카바네 오로와 함께 미술관에 진열한 작품을 찾아서 7월 15일까지 경성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약 3백 점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미술사학과 학생이었던 사회학자 아루가 기자에몬이 조선 미술에 관한 졸업 논문을 쓰려고 조선으로 와서 다쿠미 집에 묵은 시기도 이 무렵(1921년 7월 10일경)이었다.
“훌륭한 조선 시대 도자기나 장롱, 책상까지 잔뜩 수집하고 있고, 고려 시대 도자기도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야나기는 아사카와가 조선의 라프카디오 헌과 같은 존재라고 했으며 그 없이는 조선민족미술관을 만들 수 없다고 항상 말했다.”
―아루가의 회상
야나기는 7월 하순 도쿄로 돌아갔다가 8월 2일 다시 경성에 왔다. 경성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 이마무라 지에코를 문병하러 온 것이다. 지에코는 4월 초에 죽었고 장례는 6일에 지냈다. 장례가 끝난 뒤 야나기는 다쿠미 그리고 미술관 설립 운동의 협력자였던 진남포의 명망가 도미타 기사쿠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도미타 친구로 면포를 거래하여 거상이 된 후쿠나가 마사지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에서 빌린 관풍루가 좁아 후쿠나가가 경성의 남대문로에 갖고 있는 땅에 미술관을 세우려 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미술관 부지를 찾는 중에 다쿠미와 아카바네 오로가 중심이 되어 1921년 11월 26일과 27일,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의 이름으로 서양 회화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명화 복제품 170여 점이 전시되었다. 12월 4일부터는 보성학교로 장소를 옮겨서 전시했다. 야나기와 동료들이 일본에서 했던 행사를 조선에서는 다쿠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한 것이다.
야나기는 1922년 1월 1일에 다시 경성을 찾았다. 미술관 설립에 적당한 곳을 찾고, 조선민족미술관의 이름으로 '블레이크 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전람회가 열린 1월 14일까지 다쿠미는 야나기 등과 함께 관악산의 가마터 유적을 순례했다. 그리고 다쿠미는 같은 해 <시라카바> 9월호에 그때의 기행문인 <가마터 순례의 하루>를 기고했다. 이 무렵 다쿠미는 연적을 모으고 있었는데, 이렇게 수집한 연적을 대부분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했다.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된 다쿠미의 소장품은 3백여 점에 이른다.
야나기는 9월 15일, 또다시 경성을 찾아 조선민족미술관 이름으로 '조선 시대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다. 전람회를 준비하면서 다쿠미는 야나기와 아카바네 오로, 지리학자인 오다우치 미치토시, 민속학자인 곤 가즈지로들과 함께 분원 가마터를 조사했다.
1922년 10월 5일부터 7일에는 조선민족미술관 주최로 경성 오곤정에 자리한 조선귀족회관에서 '조선 시대 도자기 전람회'가 열렸다. 그리고 청화백자진사연꽃무늬항아리나 청화백자철사포도 다람쥐무늬항아리 등이 전시됐다. 그리고 미술관 설립 운동을 하고 있는 다쿠미, 노리타카, 야나기 그리고 도미모토 겐키치가 도자기에 관한 강연을 했다. 다쿠미는 '조선인이 사용하는 도자기의 명칭'이라는 제목으로, 노리타카는 '조선 시대 도자기의 역사', 야나기는 '색의 조화, 형의 정돈' 그리고 도미모토 겐키치가 '기교'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카바네 오로가 전람회의 포스터 제작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체신국에 근무하던 야나이 다카오와 모리나가 마사조가 잡일을 거들었다. 이때 전시된 도자기는 4백여 점이었으며, 입장객은 1천 2백여 명, 그 중에 3분의 2가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1923년 11월 하순, 야나기는 조선에 와서 미술관으로 사용할 적당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결국 찾을 수 없어서 다시 사이토 총독에게 부탁해 경복궁 안 집경당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은 고종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서쪽에 있는 거의 비슷한 모양의 함화당과 연결되어 있다. 이때는 집경당을 전시실, 함화당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리하여 미술관은 1924년 4월 9일에 개관하였다.
'조선민족미술관'이라는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다. 미술관 건물을 제공한 조선총독부는 미술관 명칭에 상당한 반감을 표시했고,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뺄 수 없겠느냐고 교섭도 해 왔다. 하지만 다쿠미와 야나기는 완강히 거절했다. 이 두 글자를 빼면 정부 보조금 정도야 받을 수 있겠지만 이는 그들의 참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은 원칙적으로 매년 봄·가을 한 차례씩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평상시는 문을 닫고, 희망자가 있으면 다쿠미가 문을 열어 안내했다. 현재 기록으로 확인되는 가장 먼저 열린 전람회는 1925년 4월의 전람회다. 그때는 다쿠미, 야나기, 하마구치 요시미쓰가 중심이 되어 모쿠지키 불상 사진전을 개최하고, 아울러 그간 노리타카와 다쿠미 등이 발굴한 도자기 조각을 전시했다. 1927년 10월 9일에는 미술공예품 2천 점을 전시했고, 1928년 7월 21일부터 30일까지 조선 도자기전을 개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했고 그 뒤에도 다쿠미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지원했다. 개관 다음해인 1925년, 야나기의 중매로 다쿠미의 재혼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그 무렵의 일이다.
결혼할 때 양복이 없는 것 같아서, 어머니께서 다쿠미에게 가만히 돈을 쥐어주며, "양복 좀 새로 사서 입으려무나" 하셨어요. 다음 번에 다쿠미가 왔을 때 어머니께서 "양복 샀니?" 하고 물으니, "모두 골동품이 되었어요"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거에요.
제가 1926년 조선에 갔을 때도 다쿠미는 조선의 귀한 것들이 지방으로 팔려가는 것이 안타까워 용돈을 모아 사들였어요. 가네코 부인의 음악회에서 생긴 이익금도 거기(조선민족미술관)에 집어넣었지요. 다쿠미는 입이 걸어서, "이번 가네코 씨의 음악회는 실패야" 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가 그 무렵에 마침 40일 동안 경성에 놀러 갔어요. 저와 어머니를 압록강 근처까지 데리고 갔지요. 미안해서 저도 여비를 좀 보탰는데 "계산해 보니까 돈을 더 받아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남은 돈을 몽땅 미술관에 기부했어요.
―사카에의 회상
다쿠미는 야나기 등이 일본에서 벌이고 있던 일본민예미술관 설립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8년 3월 도쿄 우에노에서 열린 박람회 때 만든 '민예 전시장'을 박람회가 끝난 뒤에는 오사카에 있는 야마모토 다메사부로의 저택으로 옮겨 '미쿠니소'라고 불렀는데, 다쿠미는 야나기를 격려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무렵 다쿠미가 야나기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야나기 선생님께
전보와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조선에 오실 계획을 보류하신다니 낙심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이번 여름 휴가쯤에라도 조선에 오실 수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부인께서 유럽으로 가시는 길이 드디어 정해졌다니 축하합니다. 일본에서도 외국에서도 일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토 선생의 편지는 벌써 도착했습니다만, 만나 뵐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오지 못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이토 선생의 편지를 지금 뜯어보니, 말씀하신 150엔의 환증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잘 맡아 가지고 있겠습니다. 이토 선생의 편지는 함께 보내드립니다.
중국의 포목이 마음에 드실지 걱정입니다. 값은 아주 싸서 예상금액의 반도 들지 않았을 겁니다. 정산은 이 다음에 하겠습니다.
민예미술관의 전시품을 많이 준비하셨다니 어떻게든 관람할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가형이 요 며칠 사이에 황해도로 가실 예정입니다. 원래 봄철은 매년 분주한 데다 올해는 특히 바쁩니다만, 다음 주부터는 편해질 전망입니다. 이번에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유감입니다.
이토 선생이 편지에서 말씀하신 돌냄비는 편의상 제가 그분에게 직접 보내겠습니다.
부인께 안부 전해주세요.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또 편지 드리겠습니다.
1928년 4월 10일 밤
다쿠미 드림
1931년 3월 17일 민예운동가 도노무라 기치노스케가 야나기의 소개장을 가지고 다쿠미를 방문해 조선민족미술관을 관람했다. 도노무라 기치노스케는 박물관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박물관에는 거창한 물건들이 유리 상자 속에 황량하게 진열되어 있어 '보는 기쁨'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조선민족미술관은 모든 물품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서로 호응하면서 생동감 있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의 도자기는 술병이나 항아리 같은 일상용품들로 친근감을 주면서도 굉장한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목공품의 변천에 놀랐다. 자유로운 형태의 상과 선반, 그리고 도자기가 잘 어우러져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다. 오래된 건축물인 전시장과 모든 전시품들이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차분함과 청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노무라 기치노스케
1931년 4월 2일 다쿠미가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뒤 조선민족미술관의 열쇠는 노리타카가 맡았다. 청소나 환기, 가끔 찾아오는 관람객의 다과를 준비하는 일은 주로 노리타카 딸인 마키에와 미에코 그리고 다쿠미 딸 소노에 몫이었다. 조선공예회 사람들이 함께 대청소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리타카 그림 친구이자 조선 풍경을 많이 그린 가토 쇼린진도 조선민족미술관을 이렇게 표현했다.
집경당에 수집된 민예품을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말문이 막힙니다. 어쩌면 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게 쉽게 말해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활 도구라면 무엇이든 모아놓았다고나 할까요. 오늘날 백화점이나 민예점 같은 데 있는 물건은 민예품답게 상당히 정교하고 값도 실용품보다 훨씬 비싸지만, 이 미술관의 물건들은 그렇게 일부러 만든 '민예품'이 아니었지요. 조선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보니 깨지거나 부서지거나 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물건이 적을 정도로 생활의 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가토 쇼린진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은 독립을 얻었다. 그리고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품들은 집경당에서 근정전 복도 한쪽으로 옮겨졌다. 그 중 일부는 미군에 의 해 손상되기도 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그 후 노리타카가 미군에 항의해서 전시품은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야나기는 일본 진주 미군에 랭던 워너가 있음을 알고, 안부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그와 연락을 취하여 노리타카 경성 주소와 미술품 보관 장소, 상황 개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랭던 워너는 야나기의 권유로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경성으로 직행해 조선민족미술관의 일을 처리했다.
그 후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은 한국전쟁 후 송석하의 국립민속박물관에 통합되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는지 전부를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민족미술관이 작성한 소장목록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창고에서 일부 품목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1997년 미에 현립미술관 주최 '야나기 무네요시전'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야나기가 남긴 기록을 보면 다쿠미가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을 읽고 삽화를 보면서 특히 최근 5~6년간의 일을 떠올렸다네. 삽화에 들어 있는 소반은 대부분 사실 자네(다쿠미)와 내가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모은 것들이지. 자금이 넉넉하지 않아 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저 이 물건들을 보존해야겠다는 일념만으로 힘을 합쳤지. 아니, 자네의 이해와 애정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걸세. 나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자네가 다 도맡아주었지. 어떤 물건은 고물상의 컴컴한 구석에 있다가 자네 눈에 띄었고, 또 산속 민가에서 자네 등에 업히어 멀리 옮겨지거나 생활비까지 털어 사들인 것도 있었지. 말하자면 자네가 이 물건들을 새로 탄생시킨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겠네. 장차 여기 수집한 공예품들을 보고 누군가 기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무엇보다도 자네의 노력에 감사할 것이네.
―야나기
더 읽어보기 : 고이즈미 야쿠모[ Lafcadio Hearn , 小泉八雲(소천팔운) ]
귀화 전 이름은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이다.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해(海)에 자리한 그리스령 섬인 레프카다(Lefkada)섬에서 당시 그곳을 식민 통치하던 영국 군대의 군의관인 아일랜드인(人)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한 후 교육을 받았고 어린 시절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1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州) 신시내티에 정착했고 1872~1875년 〈신시내티 데일리 인콰이어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1874년 주간 예술문학지를 창간하고 이후 뉴올리언스로 가서 폭넓은 번역·집필 활동을 했다.
1890년 〈하퍼스 매거진〉 특파원으로 처음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풍경과 정서에 영향을 받아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出雲]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마쓰에[松江] 지방 사무라이의 딸과 결혼한 후 귀화했으며 이후 일본의 문화와 문학을 서구에 소개했다. 또한 도쿄제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일본 민담과 괴담을 수집하고 기록하여 《괴담 Kwaidan: Stories and Studies of Strange Things》(1904) 같은 여러 권의 책으로 펴냈다. 일본 국민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마쓰에에 있는 그의 집은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옆에 기념관이 있다.
대표작으로 《괴담》 외에 《치타 Chita》(1889), 《동쪽 나라에서 Out of the East》(1895), 《마음 Kokoro》(1896), 《부처의 나라 선집 Gleanings in Buddha-Fields》(1897) 등 여러 권이 있다.
조선 도자기를 사랑하다
다쿠미는 한국이 그 전통과 역사, 미술 등 고유의 멋진 예술품들을 잃지 않길 바랬다. 마음속 깊이 일본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한국의 자기, 목공예품들을 그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쿠미는 10여 년에 걸쳐 주로 조선시대 도자기를 분류하고 그 종류에 따른 명칭을 수집하는가 하면 각 도자기 부위의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이는 연모 이름, 도요지 조사, 일본 도자기 명칭과 조선어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섭렵하고 있었다. 그것이 후에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밥상」 등의 명저로 남게 되었다. 다쿠미의 저서는 한국 예술품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쿠미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 예술에 대한 역사부터 사용법, 이름, 의의를 기록해 두었다. 훗날 백조종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를 이렇게 평가한다.
다쿠미는 <조선도자명고> 머리말에서 태어날 때 붙여진 이름으로 그릇들을 부른다면 더욱 친근함을 느끼고 나아가서는 그 그릇들을 사용하던 조선 민족의 생활상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된다며 분명하게 자신이 <조선도자명고>를 쓴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다쿠미의 인생관과 그만의 철학이 녹아들어 있다. 다쿠미는 도자기의 성쇠가 결코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도자기가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비참한 역사’의 연속이라며 ‘비애의 미’를 운운했던 야나기와는 상반되게 오히려 다쿠미는 전세계에 독보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훌륭한 도자기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다쿠미는 민예운동을 수집이나 하는 취미 차원이 아니라 ‘좋은 시대를 만드는 운동’ 이라 여겨 “민중이 각성하여 스스로 생각해 내고 스스로 키워나가는” 전인적 운동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선 국토에 산재해 있는 풍족한 원료로써 조선 민족이 처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이를 살려낼 수 있도록 하자며 우리 민족을 독려하고 도자기와 도공의 부흥을 주문하였다. 이는 조선 공예를 속속들이 이해하지 않고 이에 대한 애정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성찰의 결과이다.
다쿠미 형제는 전국 700여 곳 가마터를 조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발품을 팔며 일일이 가마터를 찾아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옛 가마터를 추정하여 유적분포도를 첨부하고 설명까지 곁들이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더 놀라운 것은 여러 가마터를 순례하면서 도자기 파편을 모아 도자기의 시대를 추정, 구분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이 밖에도 다쿠미는 <조선의 선반과 장롱에 대해서>(1930년), <조선 다완>(1931년)과 같은 조사 결과나 문헌을 직접 다루는 논문도 발표하였다.
다쿠미는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말로 도자기의 부흥을 부르짖은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쫓아다니며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하나하나 만져가며 검증과 고민의 결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요업의 진흥을 계획했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어 민중을 인도하는 목표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좋은 의미에서 유행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은 다쿠미가 높은 수준의 예술관을 지녔을 뿐 아니라, 유행을 선도해서 이끌어 가려는 대중성까지 염두에 둔 다쿠미만의 탁월한 식견이 녹아들어 있다. 다쿠미는 실제로 치밀하게 연차계획까지 세워 첫 해의 예산안까지 제시하였다.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추진력까지 겸비한 실무자로서 다쿠미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백조종의 아사카와 다쿠미 추도문 중
다쿠미의 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가마터나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녔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노리타카, 야나기, 무네요시 등과 함께 조사한 관악산 가마터 외에 수락산과 창동 등지의 가마터를 순례한 사실들도 발견할 수 있다. 다쿠미는 가마터를 순례하면서 도자기 파편을 모아 도자기의 시대를 구분하는 데 참고했다고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 도자기를 시대별로 구분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조선 도자기의 신'으로 알려진 노리타카 뒤에는 동생인 다쿠미의 협력이 있었다.
형은 <시라카바>에 보낼 <조선 도자기의 가치 및 변천에 관하여>를 저술하고 있다. 형의 원고는 문제의식과 사고방식이 좋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중요한 부분을 빠뜨려서 탈고 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약간 도와주기도 하고 읽어 주기도 했다.
―1922년 8월 6일 일기
훗날 <조선도자명고>로 이어지는 연구를 이때 벌써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2년 8월 26일 일기에 "오후에는 집에 가서 '조선 도자기 명휘' 를 작성했다. 이것을 고치고 보태나가면, 도자기를 분류할 때 편리하리라 생각한다"고 썼고, 다음 해 7월 20일에는 '조선 시대 도예품 명휘'를 완성했다고 썼다. 1931년 9월에 <조선도자명고>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기까지 8년 동안 원고는 자주 가필되고 정정되었을 것이다.
다쿠미가 골동품 가게를 돌아 다니면서 자신의 돈으로, 혹은 빚까지 얻어 뛰어난 작품들을 모으고 이를 대부분 묵묵히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했다는 사실도 그의 일기 속에 아래와 같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정오쯤 야나기 형이 왔다. 둘이서 미술관의 물품을 정리하고, 지게꾼을 불러 가노 씨 댁에 보냈다. 내가 이사하기 때문에 가노 씨 댁에 맡기게 되었다. 미술관 설립 계획이 구체적으로 세워진 지 이제 만 1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들여놓은 것이 스무 지게와 짐수레 한 대였다. 짐을 내놓았더니 방이 텅 비어서 쓸쓸해졌다. 4~5년간 개인적으로 사들인 수집품도 미술관에 보내서, 왠지 쓸쓸하기도 하고 홀가분해진 듯 유쾌하기도 했다. 쓸쓸함을 위로하기 위해서 정이 든 것, 특히 마음에 드는 몇 점을 다시 맡아서 내 방에 두기로 했다.
―1922년 1월 12일 일기
그에게는 자신의 물건도 하느님으로부터 '맡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기에는 "미술관을 위해서 책과 항아리를 사서 어제 받은 봉급을 다 써 버렸다."(1922년 5월 23일) 거나, "골동품 가게 사람들이 와서 오늘 받은 봉급을 대부분 가지고 가 버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빚은 거의 정리한 셈이다. 작년 말에 3백 엔 가까운 빚이 있었는데 조금씩 갚아서 드디어 다 갚았다."(같은 해 6월 21일)고 씌어 있다. 다쿠미는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서 말 그대로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임, 조선공예회
1928년경 '조선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임' 이 생겼다. 이 모임은 뒤에 조선공예회로 이름이 바뀐다. 당시 조선공예회 회원들의 모임에 대한 회상이다.
기껏 몇 명도 되지 않는, 돈이나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선량한 소시민이 모여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하고, 특히 조선 공예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그 아름다움을 발굴해 일본에도 알려서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민예운동과 친교를 맺었다. 이 모임에는 가마를 가지지 못한 도예가(노리타카), 은행원(도이 하마이치), 첼로를 연주하고 조각도 하는 구두 가게 아저씨(와타베 히사키치)도 있고, 선생(하마구치 요시미쓰)도 있는 등 중심이 되는 자도, 분파도 없는 모임이었다.
―우에노 나오테루 회상
아마 노리타카 씨가 제안했다고 기억하는데, "우리들은 모이는 기회가 많아도 잡담으로 끝나버리게 되어 아까우니, 무엇인가 조선에 관한 취미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첫 모임은 조선의 실내 놀이에 관한 모임으로 하자는 데 의견이 모여, 청량리의 어느 요정에 모였다. 모인 사람은 아사카와 형제, 아베 요시시게, 하야미 히로시, 우에노 나오테루, 도이 하마미치, 와타베 히사키치 그리고 나였다(이것이 조선공예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 다쿠미는 전에 궁궐에서 봉직했다는 점잖은 노인을 모시고 와서, 옛날 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시키고 그것을 통역해 주었다. 그러나 대개 다쿠미가 아는 이야기들이어서, 그저 의문점을 밝혀 주는 정도였다. 이때 그가 보여준 놀이 도구는 꽤 많아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헤이안 시대 느낌의 스고로쿠도 있었고, 화투도 있었다. 마작과 비슷한 골패도 있었다. 아마 어린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주기 위한 장치일 텐데, 지명이 적힌 지도 모양의 말판이나 벼슬 이름이 쓰인 말판도 있었다. 그 밖에 지금 시중에서 쓰고 있는 승경도, 장기, 윷 등 모두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이었다.
두 번째 모임은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고, 세 번째는 다쿠미의 안내로 색다른 조선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 나는 몸이 아파 가지 못했다.
―하마구치 요시미쓰 회상
그 밖에 모임의 회원으로 참여했던 인물은 다카하시 야스키요, 하치야 기지로가 있었다. 때로는 단카 모임인 진인회를 이끌던 이치야마 모리오도 합세했다. 이치야마는 조선 민요를 듣는 모임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모임은 거의 매달 한 번씩 열렸는데, 노리다카의 집에 모여 이야기를 듣거나 각자 갖고 온 물건을 경매하기도 했다. 가족들까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청소하거나 도보여행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모임에 공예품이나 헌 책을 가져와 경매에 부쳐 수입의 절반은 회비로 충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물건을 제공한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액수가 많고 적고 물건이 좋고 나쁘다는 비평, 불평이나 불만은 얼굴로도 말로도 나타내지 않았다."
―도이 하마이치의 회상
조선공예회는 다쿠미 사후에도 모임을 계속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유족들의 생활을 도왔으며 다쿠미의 유고를 정리해 책으로 출판하려 노력했다. 또한 그의 기일이면 산소를 찾아 성묘를 했다.
더 읽어보기 : 다쿠미의 이야기에 관한 소설 「백자의 사람」 역자 박종균의 글
‘백자의 나라에 살다’
- 민족의 자존심과 세계인의 모습을 일깨워준 소설
박종균
(소설 「백자의 사람」 역자)
오천 년 찬란한 역사 속에 단 한 번 외국을 침략한 적도 없이 면면히 이어온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은 20세기 세계격랑 속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침략주의에 의해 짓밟혀 치욕의 민족수난사를 견디어 내야만 했다. 불의와 울분과 통분의 긴 36년간 모진 세월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지울 수 없었던 치욕의 순간들이었다.
일제 36년 당시를 살았던 우리 국민 대다수는 아직도 증오를 떨쳐버릴 수 없으며 그 앙금은 세월이 지나도 가시지 않은 채 우리를 옥죄고 있으며 지금도 때로는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 정신대문제 등으로 불씨가 되살아나 적대감정이 다시 일어나곤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암울했던 일본 식민지 시절에 산림청산하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했던 80~90년 전 한 일본인 공무원이었던 아사카와 다쿠미를 소설화한 「白磁の人」, 번역명 「백자의 나라에 살다」로 출판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이며 실존인물인 다쿠미를 에워싼 사람들, 그의 생활방법, 그가 조선 땅에서 행한 일체의 사례는 전부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고 한다.
나는 1994년 당시 고려서적(주)의 번역요청을 받아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아사카와 다쿠미씨는 정말로 훌륭한 인물임을 알았고 지금 한일 신시대를 맞이하여 한일 친선을 위해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한일교류가 새롭게 빛을 발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보며 또한 지금 세계화시대의 세계인의 역할적인 측면에서도 다쿠미의 생활방식과 태도는 세계화의 시작이며 멀리 앞서 가는 선구자라 생각한다.
다쿠미의,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의지대로 가장 값지고 보람 있게 마감해가는 장엄한 한 인간드라마가 한일신시대의 새로운 또 하나의 효시가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화시대의 모범적인 선구자로서 우뚝 서기를 기대해본다.
다쿠미는 일본 야마나시 현립 농업고교를 졸업하고 1914년부터 조선 산림청 직원으로 17년간 근무하다가 조선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서울 청량리에 있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임업기사로 청량리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했다. 그는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했다. 이러한 다쿠미의 미적 감각은 백자에 머물지 않았고 밥상을 비롯한 조선의 목공민예와 민화 민속에 까지도 미쳤다. 다쿠미는 조선에서 생활하려면 조선말을 사용해야한다는 신조 아래 조선어를 배웠고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는 완전한 조선 사람의 모습과 행동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조선의 산을 푸르게 하기 위한 본업도 게을리 하지 않아 조선오엽송(잣나무)의 발아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쿠미가 쓴 「조선의 밥상」,「조선도자명고」두 권의 책은 민예품 명칭이 모두 한글로 쓰였다. 이것은 다쿠미가 주장했던 태어날 때의 이름으로 부르는 정신 “그 나라의 물건들은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부르는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다쿠미는 식목일 준비관계로 동분서주하다가 1931년 감기가 악화되어 폐렴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다쿠미의 죽음에 많은 조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석해하고 슬퍼했다. 다쿠미의 시신은 이문리공동묘지에 조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운구 매장되었고 그 후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옮겨졌는데 그의 묘는 지금도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지켜지고 있다.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인으로부터 사랑받은 다쿠미는 보기 드문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이다. 지금 나는 그가 분명히 고구려인의 피를 받은 우리민족의 후손일거라는 의심이 발전되어 동족의 정으로 깊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곤 한다.
일본인의 몸으로 한국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국적 삶을 풍미한 그는 오직 한국을 위한 삶을 살았다. 자기 동족인 일본인들에게 조소까지 받아가며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인이기를 갈망했던 유일한 일본인이 아니었던가! 조선 문화를 사랑했고 조선 예술을 사랑했으며 조선 세시풍속과 전통 민속을 사랑하여 이 땅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한복을 입고 운명한 일본인! “내 몸 속에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의 형 노리타카에게 말하자 “나도 그렇다. 경성에 도착했을 때 어둡게 연기 덮힌 하늘에 남대문이 떠올라 있었던 일은 지금도 가슴속 깊이 남아있어. 뭔가 신화 속에서나 상상해오던 영혼의 고국 품으로 온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어.” 라고 말한 그의 형도 똑같은 마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쿠미가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조선 땅에서 행했던 일련의 행적들이 지난 역사에 경종을 울리고 세계화를 부르짖은 현대의 각 민족에게도 귀감이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다쿠미를 소재로 하여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원작자인 에미야 다카유키는 회고한 바 있다.
다쿠미의 이러한 박애주의 정신과 훌륭한 그의 공적은 당시 한성신문에 기고한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철학자, 경성대교수, 전후 일본문부대신)는 “다쿠미의 생애는 칸트가 말한 대로 ‘인간의 가치란 실로 인간에게 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는 것을 실증했다고 했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 다쿠미 앞에 머리를 숙인다.”라고 솔직한 경의를 표했다. 또한 종교철학자이자 일본 민예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은 다음과 같이 다쿠미의 죽음을 애도했다. “나는 특별히 그를 인간으로서 존경했다. 나는 이 정도 도덕적 성실함을 가진 사람을 모른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스한 눈의 소유자이며 내가 끌린 이유는 그의 그러한 성실한 혼과 자기 자신을 끝까지 버린 훌륭한 인간됨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장남도 다쿠미가 아버지의 마음속의 유일한 친구였음을 증언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쿠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통곡했으며 서로 다쿠미의 관을 메려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 모두 응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민족지였던 동아일보까지 4분의 1을 할애하여 홍순혁洪淳赫의 서평 “浅川 巧著 「조선의 膳」을 읽고”를 게재했다. 그것은 사실상 추도문이었다. 동아일보가 한 일본인 죽음을 애도하여 이 정도 크게 지면을 할애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996년 한국임업시험장 직원일동으로 다쿠미의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의 산과 민예에 바친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공덕비에 음각 되어 있다. 1996년 다쿠미의 저서「朝鮮의 膳」,「朝鮮陶磁名考」,「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浅川 巧의 생애 」가 번역 출판되었고 한국민속학회의 주최로 「1920년대에 한국 민예를 연구한 浅川 巧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한편「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浅川 巧의 생애,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著」가 2002년 8월1일 增補 3版이 발간되었다. (1982년 초판) 1997년에는 한국임업연구원과 그 OB회인 洪林會가 다쿠미의 고향과 공동으로 묘지를 정비하고 한국 월간미술 9월호에 浅川 兄弟특집을 실었다.
1997년 11월 27일 롯데호텔 36층에서 浅川 巧公한일공동추모제 및 만찬회가 있었으며 한국 측에서는 정양모鄭良謨(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조재명, 조만제, 심우성과 일본 측에서는 오구라 카즈오 小倉和夫(在한국 일본대사)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날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는 “浅川 巧公의 생애 40년”이란 제목으로 추모강연을 하였다.
2005년 일본의 지식인, 문화인 120명의 찬동을 얻어 『‘白磁の人’영화제작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06년 3월 31일 한일양국 국회의원 4명과 일본대사가 동석하여 『白磁의 사람 영화제작 한국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일본 측 주관으로 한국 측 초청 만찬회가 코리아하우스에서 있었으며 최계환崔季煥, 이대순李大淳, 심우성 등 41명과 일본 측에서는 사카모토 타츠오坂本辰夫 등 17명이 참석했다.
한편 1998년 12월 1일에는 일본에서 다쿠미를 기리는 회보지 7호가 나왔다. 2009년 3월14일에는 浅川 巧 한일합작 영화제작발표회가 일본 후쿠토北杜시에서 거행 한국측 최계환씨 등 6명, 일본측에서는 350여명이 참석하였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민단신문 등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후원단체는 일본외무성, 일본문화청, 야마나시현 한국영사관, 민단중앙본부 등이며 특히 재일본 한국인 문화예술협회 고문인 하정웅河政雄은 다쿠미를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다. 하정웅은 아키다秋田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의 다쿠미의 헌신적인 사랑의 인생철학에 크게 감명 받아 다쿠미를 이상적인 심볼로 받아들였고 멘토로 삼아 다쿠미의 각종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하정웅은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하여 부산, 전북미술관 등에 10000여점 이상의 미술작품을 기증한 것을 물론 1989년 광주시각장애인 복지회관 건축 (2010년 4월10일 복지회관 재건축)을 하였다. 1995년부터 매년 8월19일부터 3일간 한일친선교류를 하며 다쿠미의 생애를 알리는 일에 행복해하고 있다. 2010년도에도 어김없이 와세다, 고려, 조선, 전남대생 50명과 야마나시현립농고, 호쿠토시고교 등 15명을 私塾 淸里銀河塾에 초빙하여 국제친선교류와 다쿠미의 생애에 관한 에미야 다카유키(소설 「백자의 사람」 저자), 오자와 류이치小澤龍一(백자의 사람 영화제작 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의 강연을 가졌다.
다쿠미는 갔어도 그에 대한 추모의 정과 그의 헌신적인 삶을 알리는 각종행사가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그를 알게 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다쿠미는 저 세상에서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며 만족해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는 희생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마음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면 우주은행에 행운이 쌓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희생 봉사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 신호가 아니겠는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다쿠미의 생활은 마치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은 환자가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어놓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숙명적으로 묵묵히 줄기차게 실천해가는 것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도 소설을 번역하면서 다쿠미를 사랑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경애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듯 다쿠미의 한국사랑은 다시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며 한국인 앞에 우뚝 서게 되었다. 또한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이런 사랑에서 복된 삶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보람을 느끼며 세상의 머릿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쿠미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진정한 인생 성공자이다. 사후 세월이 지나면서 다쿠미의 희생정신과 그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둥지로 한국 일본 산하에 세월이 가면서 세계인의 마음속에 행복의 파랑새로 자리 잡을 것이다. 우리는 다쿠미를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의 전기, 소설, 행사 등을 보면서 다쿠미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가며 세계인의 미래의 모습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주는 한 편의 인생 드라마임에 틀림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01년 浅川伯敎 巧 兄弟 기념관이 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고향마을에 건립되어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3장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다쿠미는 한국의 자연, 한국의 미 등을 통해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와 한국인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 산천을 사랑하고, 조선의 문화를 아끼다 보니, 그 문화의 주인공인 조선과 조선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일본어로 생활하였다. 다쿠미는 어느 날 왜 한국인의 땅에 살면서도 일본어를 쓰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 의문으로부터 다쿠미는 한국에서 사는 한국 사람과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술을 마시고 같은 옷을 입고 나아가 같은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런 생각은 당시 어느 일본인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자기들끼리 마을을 형성하여 조선인을 배척하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다쿠미는 한국말을 배웠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언어 습득 이전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사상과 문화 현상 전반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다쿠미는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오직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이 되어 조선을 바라 보았다. 외국어를 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어려운 작업을 다쿠미는 단기간에 익혔다. 임업시험장에서 고용하고 있던 한국인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웠던 것이다. 다쿠미는 이렇게 조선에 건너 온 여느 일본인과는 다르게 조선의 의식주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복을 입고 조선식 집에서 살며 조선 사람처럼 살았다.
그리하여 다쿠미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당나귀를 타고 망건을 쓰고 외출하는 일본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일본인 한국인 어느 누구도 다쿠미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다쿠미가 조선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전해진다.
어느 날은 조선인 최복현이 다쿠미에게 아이의 작명을 부탁했다. 이에 다쿠미는 최씨 문중의 돌림자를 써서 그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일본방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자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낼 정도의 집안이면 다쿠미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이름을 지어줄 사람은 많았을 텐데 굳이 다쿠미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만 보아도 다쿠미가 조선인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침에 수확한 야채를 팔러 온 한국인 할머니가 일본인으로부터 제값을 못 받고 파는 것을 보고 비싼 값으로 사들이고는 "내가 맛있는 야채를 사는 거니까 값을 더 쳐주는 거다"고 웃는 얼굴로 말하기도 하였다. 서울 골동품점의 가게 앞쪽에 놓인 비싼 백자단지는 부르는 값 그대로 주고 샀다.
술에 취해 걷고 있던 다쿠미가 역 앞에서 만난 한국인 남성 실직자에게는 일자리를, 여성에게는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주었다. 한국의 어린이들을 보면 과자를 사주며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이러한 다쿠미의 어린이들에 대한 따듯한 눈길은 다쿠미가 문장으로 남긴 "조선민예론집" 등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다쿠미는 전차 안에서 조선인으로 오해를 사 일본인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강요받기도 했었는데 자신이 일본임을 밝히지 않고 말없이 일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같은 일본인 동료에게 당신이 한국인이냐며 구박을 받을만큼 다쿠미는 조선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었다.
―백조종의 아사카와 다쿠미 추도문 중
스스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한국인처럼 생활하는 다쿠미는 서서히 한국인들의 마음속으로 다가갔다. 한국인처럼 행동하는 다쿠미를 미워하는 일본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한국인의 눈초리를 신경쓰지 않고, 다쿠미는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살았다. 그런 다쿠미를 총독부의 관리나 헝병들은 일본인답지 못하다며 괴롭혔다. 하지만 다쿠미는 그런 괴롭힘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나보다도 더 많이 참고 있다. 하지만…."
다쿠미는 언젠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해방되고 독립을 이룰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지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까지 한국의 전통과 역사, 미술 등 멋진 한국만의 예술품들을 잊지 않길 바랬다.
다쿠미는 1931년 4월 2일, 급성폐렴으로 선종했다. 40년의 짧은 생애였다. 일부 한국 사람들로부터 "친구"라고 불리던 다쿠미의 장례식에는 장대비 속에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다쿠미 덕분에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고 살아온 40여명의 젊은이들은 부디 그의 상여를 메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다쿠미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가장 좋아했던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잠을 자듯 관에 뉘였다.
청량리에 있는 비구니 사찰인 청량사의 비구니들은 다쿠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눈이 붉도록 통곡하였다. 다쿠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국인들의 슬픈 통곡 소리가 울렸다. 이문리공동묘지로 향하는 다쿠미의 상여는 지나가는 마을 입구마다 몇 번이나 멈추어져 조문을 받았다.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렇게 해서 다쿠미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한국의 흙이 되었다.
일본인의 몸으로 한국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국적 삶을 풍미한 그는 오직 한국을 위한 삶을 살았다. 자기 동족인 일본인들에게 조소까지 받아가며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인이기를 갈망했던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문화를 사랑했고 조선의 예술을 사랑했으며 조선의 세시풍속과 전통 민속을 사랑해 이 땅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한복을 입고 운명했다.
자신의 몸 속에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형 노리타카에 말에 다쿠미는 이렇게 답했다.
“내 몸 속에도 고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경성에 도착했을 때 어둡게 연기 덮힌 하늘에 남대문이 떠올라 있었던 얼은 지금도 가슴 속 깊이 남아있어. 뭔가 신화 속에서나 상상해오던 영혼의 고국 품으로 온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어"
더 읽어보기 : 참고자료
아사카와 씨는 평소에 한국옷인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식사도 모두 한국식으로 했으며 또 한국어도 유창했다. 술도 막걸리만 마셨다. 그의 관사는 한국인 동료들의 클럽 같았다고 한다. 당시 동료였던 방종원 씨는 "아사카와 씨는 남자 걸인을 만나면 반드시 면사무소로 데리고 가서 무언가를 찾아주었습니다. 여자 걸인을 만나면 주머니의 돈을 모두 주었죠. 아사카와 씨는 그런 사람이었어요"라며 옛날 일을 그리워했다.
―1964년 6월 28일자 석간 <도쿄신문> '세계의 화제, 한국인의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한 일본인의 무덤, 30년 만에 복원되다'
아사카와 씨는 한국말이 아주 유창했으며 항상 한국말로 이야기했습니다. 삼촌, 사촌 같은 가족 관계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요. 한국인 동료를 차별하지 않았고, 일본인 동료에게서 "당신은 한국인이냐"는 욕도 먹고 구박도 받을 만큼 한국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복을 즐겨 입어서 저녁 때 바지저고리 차림에 나막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긴 담뱃대를 좋아했고, 중국 모자를 쓰고 새끼로 짠 꼴망태를 등에 메고 시장에 가서 조선 골동품이며 도자기 등을 사모았습니다. 그 괴상한 모습 때문에 일본 순사의 조사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더군요.
아사카와 씨는 임업시험장 안에 있는 관사에 살았습니다. 평소 한국인에게 친절하고 한국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정월이나 연말에 많은 한국인 동료들이 그의 집에 놀러 가곤 했지요. 자기는 굶는 한이 있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고, 몇몇 한국인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주고 있었습니다. 주로 소학교 학생들이었고, 중학생도 두엇 있었는데, 대개 입업시험장 직원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아사카와 씨는 평소에 자기는 굶더라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한국인 동료나 노동자들을 도왔기 때문에, 돌아가셨을 때 장례비조차 없었습니다.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오. 조선식으로 제사를 지내 주시오"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당시 한국의 전통대로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이문리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나중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했지요. 당시 아사카와 씨에게 많은 은덕을 입었던 사람의 아들이면서 임업시험장 직원이기도 한 한상배 씨가 현재 묘소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당시 한국인을 괴롭히고 거만을 떨던 다른 일본인들과 달리 아사카와 씨는 늘 친절했고, 같은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동료 김이만, 1979년 4월 12일 인터뷰
언젠가 여자 채소 장수가 왔을 때 일이다.
“좋아요. 삽시다. 얼마요?"
“하나에 20전입니다만…."
옆에서 부인이 말했다.
“방금 옆집에서는 깎아서 15전에 샀대요."
“아, 그래? 그렇다면 난 25전에 사주지"
그는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돌보아주었다. 부인은 일부러 비싸게 사 주는 남편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부엌에는 가끔씩 남모르게 선물이 배달되곤 했다. 모두 가난한 조선인들이 호의로 보낸 것들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은 미워해도 다쿠미는 사랑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옷을 입은 다쿠미는 정말 행색이 변변치 못했죠. 그래서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요보, 요보"라고 놀림을 받곤 했어요. 전찻간에 앉아 있을 때, 누가 요보, 비켜"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면 아무말 없이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를 그만 둔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딱하다고 등록금을 내주며 학교에 끝까지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맏물이라며 옥수수도 갖고 오고 무도 갖고 오고, 마당을 쓸어주거나 목욕물을 퍼올려 주거나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도 용돈을 주었답니다. 월급날이면 동냥하러 오기도 했는데, 월급이 늦게 나온 달이면 "내일 다시 오게" 했답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지요.
―사카에
“얼마 동안 입어 익숙해진 한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었더니, 왠지 모르게 꽤 추웠다"(1922년 1월 4일)
이사 가던 날의 일기에는 "미닫이문 유리의 무늬가 보기 싫고 또 너무 밝아서 점쇠에게 조선 종이를 붙이게 하니까 방이 차분해졌다. 밤에는 시험장의 동료들 열두서너 명을 불러서 메밀국수하고 약주를 마셨다"(1922년 2월 25일)
“정동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와 숙직. 임 군, 박 군이 와서 트럼프 놀이와 바둑을 했고, 자고 일어나서 윤 군에게 조선어를 배웠다.”(1922년 12월 10알)
―다쿠미 일기 중
아사카와 다쿠미의 코스모폴리터니즘 박애주의
조선의 일상 생활용품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조선의 자연을 통해서 미를 발견하며 조선을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자연을, 사람을, 그리고 예술을 일본인의 눈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혜택을 받고 사는 인간으로서 사랑했다. 다쿠미는 몸소 인간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실천의 바탕에는 어떤 영웅주의도 아닌 휴머니즘에 입각한 진정한 인간애가 있었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식민지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뛰어 넘어 보편적 인간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했다.
다쿠미의 따사로운 눈길은 지위나 배움의 정도, 권력의 유무와 상관이 없었다. 아내를 잃고 다쿠미가 홀로 되었을 때 다쿠미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동료인 점쇠 일가였다. 일기에서 다쿠미는 점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등불 밑에서 조용히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가족 같다고 토로하였다. 피지배인의 이름에서 풍겨지듯 점쇠라면 당시 분명 하층민 피지배인이었을 것이다.
다쿠미의 일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남긴 유명 인사들도 여럿 나온다. 시인 변영로, 오상순, 소설가 염상섭, 철학자 김만수 등 ‘페허’ 동인들의 이름은 일기에 여러 번 등장하고 조선의 정치와 예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던 남궁벽의 산소에 성묘했다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다쿠미에겐 점쇠 일가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차별없이 똑같은 조선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베 요시시게는 수필, <어느 날의 만찬>에서 다쿠미가 세상 물정이나 화류계 사정에 밝은 이른바 ‘멋쟁이’와는 거리가 멀지만, 세리(稅吏)나 창부(娼婦)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아 기생 친구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다쿠미는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든 그저 같은 사람으로서 조선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일행 중에서 조선어를 할 수 있고, 조선인 친구가 있고, 자유롭게 조선인과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은 H군(노리타카)의 동생인 T군(다쿠미)뿐이었다. (……) 대체로 그는 세상 물정이나 화류계 사정에 밝은 이른바 '멋쟁이'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한편 세리나 창부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 진짜 기독교 신자다운 내면을 갖춘 사람이었다. 기생 친구가 있는 그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베 요시시게 수필, <어느 날의 만찬>
다쿠미는 평탄치 않은 개인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첫 아내 미쓰에가 서른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딸 소노에는 외삼촌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사키와 재혼을 하긴 했지만 둘 사이에 태어난 여자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슬픔이 뒤따랐다. 낯선 이국 땅에서 가족을 잃는 슬픔은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바삐 지낸다고 할지라도 순간순간 밀려오는 상실감을 떨쳐내기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다쿠미는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그것을 보여준다.
“다쿠미의 생애는 칸트가 말한 대로 ‘인간의 가치란 실로 인간에게 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는 것을 실증했다고 했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 다쿠미 앞에 머리를 숙인다.”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철학자, 경성대교수, 전후 일본문부대신)
“나는 특별히 그를 인간으로서 존경했다. 나는 이 정도 도덕적 성실함을 가진 사람을 모른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스한 눈의 소유자이며 내가 끌린 이유는 그의 그러한 성실한 혼과 자기 자신을 끝까지 버린 훌륭한 인간됨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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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를 하나로 여기고 개인을 단위로 하는 세계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다. 세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kosmos와 시민을 의미하는 polits를 합성한 신조어로,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나 세계주의로 번역된다. 국가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국가가 지닌 특유한 가치나 편견을 배제하고 하나의 세계국가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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