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최학송 87주기 추모식

정종배 2019. 7. 14. 23:04

 

 

 

 

 

 

 

 

 

 

 


2019.7.14.() 오전 1130분 소설가 서해 최학송 87주기 추모식 거행

신현고 상봉중 걱정없는 동네 연합동아리 활동

 

소설가 서해 최학송 87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며, 최학송기념사업회 정종배 사무국장은 지난 금요일 최학송 묘지를 답사했다. 2000년 묘지 확인과 2006년 이후 3번에 걸친 봉분 및 묘역 단장으로, 1958년 미아리공동묘지에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며 이장준비위원회 회장 김광섭 시인 이후 가족들이 북한에 있어 무연고묘지로 방치되던 서해 묘지를 2010년 서울시시설관리공단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동국대 명예교수)를 조직하여 제자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는 신현고 교사 정종배 시인은, 20195월부터 망우리공원에 안장된 근현대 유명인사 60명의 묘역을 일대일로 관리하는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봉사단가족 중심으로 묘지관리 시작하고, 묘비 옆에 마련한 대리석 화병에 붉은 장미꽃이 마른장마 무더위에 빛나고 있어 감회가 깊었다.

 

중랑구청 후원을 받은 신현고 상봉중 걱정없는 동네 연합동아리 활동은 9시에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김영식 작가의 인문학 강의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최학송기념사업회 주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주관으로 개최하는 소설가 서해 최학송 87주기 추모식은

김영식 작가의 사회로 추도식은 참석인사 소개와 세계 유수 공동묘지보다 다양하고 독보적인 인물들의 유택인 망우리공원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해도 손색이 없는 망우리공원 인사 중 1920년대 빈궁문학 소설가로서 최학송 추모식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정종배 시인의 초헌과 감사 인사 특히 중랑구청 복지팀장과 주무관과 영원한 기억 봉사단과 걱정없는 동네 연합동아리 활동 학생들의 참여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학생들에게 최학송 선생과 춘원 이광수와의 편지를 통한 문학수업과 문단 데뷔 인생의 사표로서 관계를 소개하고 삶의 스승을 자신이 잘 선택하여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잡은 서해 최학송 추모식을 거행하는 좋은 장소와 행사에 참석을 뜻깊게 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헌관으로 중랑구청 복지팀장과 주무관 영원한 기억봉사단가족이 안동소주 제주를 바쳤다.

이명재 문학평론가(중앙대 명예교수)2004년 묘지 입구 작가 최학송 문학비의 사설문학비를 세운 우리문학기림회 회장으로, 서해의 문학은 1920년대 체험과 빈궁문학의 정수로 춘원 이광수와의 관계로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창립식만 참석하고 활동을 하지 않고, 계용묵 소설가의 조선문단추천을 서해가 하여 계용묵 소설가가 나는 육당과 춘원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같은 급인 서해가 하였다며 살아생전 경쟁관계를 극복하는 인간관계의 지속성으로 장례식에 당시 서울 자동차 50여대가 뒤따를 정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종헌으로 박상인 선생님(숲해설가, 궁궐지킴이)의 서해 최학송의 탈출기에서 두부 만드는 대목을 예로 들면서 요즘 콩에 빠진 근황을 알렸다. 망우리공원 수목 생태 환경의 건강함과 서해 묘역 주변 팥배나무 안내판 옆 개암나무에 대해 설명했다.

 

신현고 상봉중 걱정없는 동네 연합동아리 회원 중 신현고 1학년 김강민 전동휠체어를 타고 9시부터 김영식 작가의 인문학 강의를 참여했다.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뇌병변장애인으로 중학생 때부터 학기 초에 담임선생님의 시간을 빌려 직접 만든 PPT로 반 친구들에게 짧은 시간이지만 강연을 하며, 현재 네이버 카페에 굴려라 휠~ 돌아가라~ 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막 활동을 하고 있다. “오늘 활동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잠들어 계신 분들의 여러 이야기도 듣고 오늘을 통해 또 한 가지 망우리공원의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도 찾게 됐고, 다양한 인물의 사상과 작품 인격을 통해 내 삶의 영양분을 채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전동휠체어 쌩하고 달렸다.


신현고 1학년 김혜성 최은진 학생이  소설탈출기서두를, 상봉중 2학년 정민석 강솔 소설 <홍염>의 결말을 읽었다


추모제 음복으로 피자를 돌렸다. 피자 대리점을 운영하고 자가용으로 배달한 김남규는 청량고 제자이다. 고등학교 생활은 가정 환경에 치어 문제아였다. 여친에게 왕빈대였다. 제 집보다 여친의 아파트에서 기거한 날이 많았다. 군대 제대 후 트럭으로 채소를 팔았다. 외대역앞에서 퇴근길에 만나, 망우역 앞 노점을 잡아 주었다. 과일을 팔았다. 겉은 조금 상처가 있더라 달고 맛있는 물건을 가져오길 당부했다. 2년 동안 생각보다 훨씬 장사를 잘하였다. 결혼 전에 아들을 낳았다. 결혼식에 주례를 설 수밖에 없었다. 3개월 시장조사를 끝내고 정릉입구에 중소업체 피자대리점을 냈다. 종종 연락할 때 안전사고 예방을 강조했다. 피자를 좀 더 다르게 구워냈다. 고2 시절 피자가게 알바가 큰 도움이 됐다. 딸까지 나아 안정된 가장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고3 때 퇴학 처분을 담임 책임지고 막아낸 보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 위로가 된다. 

어르신들은 입에 맛지 않을지 모르나 학생들 기준으로 점심 대신 피자를 먹었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는 열 살까지는 굶지 않았다. 가산이 넘어간 뒤 만주 지방 전전할 때 굶기를 밥 먹듯 해 그로 인해 위문협착증으로 30대 초반 요절했다.

추모식 날자가 학생들의 기말고사 끝나야 잡기 때문에 7월 중순이다.무더위 아니면 폭우나 태풍으로 행사 참석한 분들께 미안하다. 묘역에 아까시 신갈나무 그늘로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오면 이파리에 굵은 물방울로 뭉쳐 봉분이 파였다. 아내 몰래 비자금으로 3번이나 봉분을 단장한 이유였다.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 전화를 해 아까나무 포함 다섯 그루를 베어냈다. 신갈나무도 베어야 하는데 민원이 제기될까 염려되어 고엽제를 투여했다. 끈질긴 생명력이라 마르던 가지에 다시 잎이 달렸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 사색의 길로 내려가 피자를 먹었다. 서울둘레길 제2길 일요일이라 등산객이 많았다. 신현중 학생들과 중랑구청 관계자들은 가까운 전망대로 이동하여 피자를 먹었다. 추모식 끝나고 중랑구청 관계자께 팥배나무 몇 그루를 제거하여 행사장으로 쓸 수 있게 건의를 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 조봉암 선생 유택 옆에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 허가를 얻어 묘역 옆 공터를 정리하고 넓히여 행사를 잘 치르고 있다.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정종배

ㅡ영광양반이어라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曙海

 

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춘원 이광수 편지 주고 받아

문학의 길 열었고

유택 아래 계용묵 소설가를

조선문단 데뷔 추천해

육당이나 춘원에게 받아야 하는데

니가 나와 동급인데

살아생전 라이벌로

서해 죽자

서해 문학 조명했다

청소년부터 못 먹어서 위문협착증으로 죽기까지

빈궁문학 탑을 세워

고향 회령으로 유족들이 올라갔다

두 아들 백과 택

부모 잃고 고아로 전전하다

광복 후 죽어도 외가에 가 죽겠다 내려와

일주일 만에 맏이 백은 폐병으로

옥당골 흙이 됐다

둘째 백은 외삼촌 조운을 뒤밟아 월북하여

아버지 서해 후광으로

소학교 졸업도 못했지만

김일성 대학 졸업 준박사로

김형직사범학교 학부장으로

다섯 자식 낳아

평양에 생활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령으로

신상옥 감독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 꼽은

서해의 대표작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여

북조선 전역에 상영했다

불갑산 아래 함평 출신 또랑시인 눈에 띈

후손 없어 관리 안된

서해 유택 단장하여

햇볕이 한 나절 놀다 간다

살아 생전 똥구멍 찌져지게 드난했지만

골상학적 미남이라

수혈 받고

최초 문인장으로

미아리공동묘지까지

장례식 행렬

당시 서울 자동차 몇 백대 중

50여대가 뒤따랐다

1958년 예총회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주도

이장추진위원들이 망우리로 이장하였다

중랑구 공공기관 신선한 먹거리 공급을 위한

영광군과 도농상생 급식공급 협약식 맺는 배경으로

서해 최학송 널따란 이마의 빛이 아니었을까

서해 최학송은 소설가는

남조선 옥당골 영광양반이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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