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 International Women's Day
여성의 인권과 지위 향상을 위해 제정된 날. 매년 3월 8일이다. 1908년 일어났던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기원했으며, 1977년 유엔에서 정한 ‘세계 여성의 날’과 관련 2018년 한국의 법정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하는 기념식과 관련 행사가 펼쳐진다.
1.제정 이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정한 기념일. 매년 3월 8일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 계기가 되어 1977년 유엔에서 정한 ‘세계 여성의 날’과 관련, 한국에서 2018년 법정기념일로 지정해 '여성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2.유래와 역사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사건에서 유래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보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음에 분노하여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노동 조건의 개선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요구했다.
이후 ‘빵과 장미’는 세계 여성 인권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911년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기념하는 첫 행사가 유럽에서 개최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됐고 유엔에서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했으며, 1977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화함으로써 세계 각국에서 이를 기념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20년 일제 강점기에 나혜석, 김활란 등 자유주의 진영과 허정숙, 정칠성 등 사회주의 진영이 각각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형식적인 행사에 그쳤던 ‘여성의 날’을 공식으로 기념한 것은 1985년이었는데, 그해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개최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국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2018년 2월 20일,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이 수록된 <양성평등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다.
<양성평등기본법>
제38조(여성의 날 등과 양성평등주간) ① 범국민적으로 양성평등 실현을 촉진하기 위하여 매년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하고,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1년 중 1주간을 양성평등주간으로 한다.
②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이 발표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로 한다.
3.관련 행사
한국의 여성의 날 행사는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하고, 한국여성대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한다. 이날 한국에서는 여성의 날의 의미와 현실, 슬로건과 메시지를 알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시상 및 발표한다. 이밖에 축하공연, 댄스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부대 행사가 진행된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은 1933년에서 1973년까지 40년 동안 서울시 공동묘지였다. 일제가 서울 도시 개발과 인구 급증으로 서울 근교 19개 공동묘지 중 도심의 공동묘지를 없애면서 망우리공동묘지를 개설했다. 또 다른 목적은 건원릉의 주변은 일반인들의 묘지를 조성하지 못하는데, 조선 왕조를 훼손하기 위한 자리 정하기로 알려졌다. 현재는 망우리공원으로 알려졌다. 약 48,000여기의 묘지가 있었다. 지금은 7,100여기 남아 있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들 중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역들이 묻혀있다. 교과서에서 뵐 수 있는 분은 50여 분을 포함하여 100여 분의 삶과 사상 작품 등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특히 그 분야의 첫 번째, 제1호 자격증으로 활동하신 여성이나, 묻힌 분들과 관계를 맺은 여성을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소개한다.
임숙재 김활란 박원희 유관순 김분옥 이경숙 박마리아 최승희
임숙재(任淑宰, 일본식 이름: 豊川淑宰, 1891년 7월 22일~1961년 6월 8일)는 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한국의 교육인으로, 본관은 풍천이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이다.
포털사이트에 남예산 임 과부 이야기 임숙재 총장이라는 글이 떠다니고 퍼 날라 많이 알려져 있어 소개한다. 19세 젊은 과부가 총장이 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람이었지요.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1913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충남 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 1918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를 졸업 하고 1921년 귀국했다.
1926년 3월까지 모교인 숙명여고 교사, 1926년 4월부터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를 지냈다. 1938년 5월 고등관 7등으로 종7위에 서위되면서 의원면직 되었다. 1939년 4월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전공은 의상 재봉이었다. 해방될 때까지 지냈다.
감리교 신자인 그는 숙명여전 교수를 지내며 기독교 조선감리교회의 부인연합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 이사,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말기에 강연을 통해 전쟁 지원을 역설한 기록이 남아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한 쪽 이상 친일 기록이 수록되었다.
광복 후 1945년 11월 숙명여전 교장이 되었고, 1955년에 이 학교가 숙명여자대학교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자 그해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61년 6월 8일 사망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박원희(朴元熙, 1898 ~ 1928)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1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귀국 후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활란(金活蘭, 1899 ~ 1970) 인천시에 출생하여 서울에서 별세했다. 기해년(己亥年)에 태어나서 '기득'(己得)이라고 불렸으며 '활란'(活蘭)이라는 이름은 세례명인 헬렌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호는 우월(又月). 기독교적 가풍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1907년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화학당 재직 중에 3·1운동을 맞았다. 1922년 7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편입하였다. 1924년 6월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10월 보스턴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여름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 1927년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였고, 1928년 미국 캔자스 시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종교·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회의에 신흥우·홍병선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논쟁을 벌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10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부터 이화여대 교수 및 학감 직을 맡고 있었는데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서는 부교장직도 겸했다.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하였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1년 9월 30일 김옥길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구성된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이념 분과에 참여하였고, 교육심의회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 이념 확립에 힘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서 적십자사 일을 보았고 이어서 공보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는데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여학사협회,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김활란 전도협회를 조직하여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64년 10월 16일 한국복음화운동의 기틀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어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년 동안 추진했다. 이것은 1968년의 새시대 복음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5월 미국 웨스팅 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의 교육 부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끝뫼 김말봉(金末峰, 1901 ~ 1961)
1932년 부산 출신 최초 신춘문예 당선자이다. 1954년 최초 여성 장로 1957년 여성 작가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해방 후 말봉은 상경한다. 동자동 당시 한신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었던 성남교회 새벽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박애원을 경영한다. 끝뫼의 ‘공창제폐지운동’은 우리나라 여성 인권운동이 시작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김분옥(金芬玉, 1903 ~ 1966)
1927년 10월 20일 지금의 천도교 중앙교당에서 열린 근우회 주최 여성문제대토론회 저녁 9시에 끝났는데, 마지막 연사로 동대문 부인병원 간호사였던 김분옥 여사가 여성의 지위 향상은 지식의 함양에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화여고 1학년 유관순, 서명학, 김희자, 김복순, 국현숙 ,김분옥 등은 3.1혁명 전날 6인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 중에 한 분인 김분옥 여사 묘역을 망우리공원 안에서 그 소재를 파악했다. 6인 중 유점선, 노예달, 신특실, 유관순 네 분은 국가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여 서훈을 추서했다. 서울특별시 우리 동네 3.1만세운동 참여자 명단에 김분옥(남대문역적 시위, 3월 5일, 독립운동사 2권 1부(편) 1장 2절)이 수록되었다.
2018년 1학기 학교 일과 중 목요일 오전 수업이 없었다. 망우리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유명 인사 묘지를 참배하며 마음의 정리나 학생들의 봉사활동 체험활동을 통해 나라사랑 및 자신의 삶의 방향 잡아 보기 등의 자료를 찾았다.
도산 안창호 묘지 터와 유상규, 이영학, 이인성 묘역을 참배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유상규 선생 묘역 위 구리둘레길에서 박인환 묘역 쪽 사잇길로 들어섰다. 100미터 내려오는데, 오른 쪽 50여 미터 지점에 돌배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찾아들어가 꽃그늘 아래 꽃향기를 즐기다, 묘역 상태는 수풀로 뒤덮여 관리가 되지 않은 폐묘에 가까웠지만 묘비가 서 있었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다가가 묘비를 꼼꼼하게 읽었다. 유관순과 6인결사대 일원으로 독립운동 함께 한 김분옥 여사의 묘역을 찾았다.
묘비 앞면: +金芬玉女士之墓(김분옥여사지묘)
묘비 뒷면: 一九0三年(1903년) 陰(음) 十一月(11월) 十二日(12일) 平南(평남) 江西郡(강서군) 下(하)에서 內部主事(내부주사) 金克瑞氏(김극서씨) 二女(2녀)로 誕生(탄생)하시다 어려서부터 英特(영특)하야 韓國女性(한국여성)의 無知未開(무지미개)함을 痛歎(통탄)하고 速(속)히 敎育(교육) 받아서 婦女啓蒙(부녀계몽)을 하겠다고 決心(결심)하고 十二歲(12세)에 上京(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하시다 성적이 우수하야 여러 번 월반하고 늘 반의 수위를 찾이하셨다 재학 시 방학 때마다 농촌계몽운동과 전도 강연에 바빳고 3.1운동 때 유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학교당국에서는 그 재질을 상하야 이화대학을 졸업하자 장학생으로 도미 유학시켜 가사과를 전공케 하였고 귀국 후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사과 창설에 공을 남겼다 미국에서 김해 후인 金良千(김양천)씨를 알게 되어 1930년 귀국하야 결혼하고 3남 2녀를 두어 단락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녀교육에 전심전력하시와 오남매 전원 도미유학을 시켰고 밖으로는 산업발전에 힘써 국가경제의 재건을 꾀하고 안으로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야 치산에 능하셨다 조국 해방 후는 국가 사회에 몸을 바쳐 경제면과 부녀운동에 헌신 노력하여 많은 공을 남겼으니 동기간이나 친지간에 우애가 깊어서 남을 돕고 협력하는 정신이 풍부하였다 말년에 부군을 따라 도미하여 재미중인 자손들을 고루 만나본 후 고국에 유류공급의 원활을 도모하여 조국경제를 돕고자 모국방문 여행 중 불의의 병으로 신음하시다 약석이 효를 얻지 못하고 1966년 4월 13일 독실한 신앙을 갖이고 영면승천하시다
주후 1966년 4월 30일 건립 동생 만재 지음. 묘지 번호 203454
김분옥과 6인결사대와 남편 김양천 경력과 삶을 추적하여 보았다. 인터넷 포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뒤졌다. 분명하게 생애를 다 들여다보며 부부의 삶을 추적하여 근현대사 족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개인정보법이 가로막았다.
김분옥의 경찰 기록은 국가기록원과 경찰관 인사자료에도 없었다. 따라서 명확한 자료 근거는 없고 당시 신문기사와 한국경찰사에 나와 있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김분옥 경찰 계급은 총경 보직은 여자경찰국장(공안국여자경찰과에서 여자경찰국으로 승격) 재직 기간은 1947년 7월부터 1948년 9월로 신문기사 보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 독립운동가의 경찰 기록을 참고하면 더 확실한 삶을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봉성 아내인 안맥결 서울 여자경찰서장 총경은 경찰역사인물에 등재되었다. 안맥결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삭의 몸으로 고문을 견뎌냈지만, 수감 기간 기준을 못 채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다 서훈 조건을 낮춰 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김분옥 여사의 남편인 김양천 자료는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 초대 내각의 빈약한 비서실의 정무담당 비서관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은 김양천 전 경무대서장이다. 그 때 직제가 구분하지 않아 경호실장 역할까지 겸했다고 전해진다.
1949년 6월 이기붕 초대 비서관장 아래 비서실은 정무·공보·서무·문서·경무대 등 5명의 비서관을 두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 권부 이미지를 심었던 사람은 이기붕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잘 알려진 바 그대로이다. 이기붕이 기회를 잡은 것은 미국유학 시절로 이승만, 허정, 김활란 등 당대 내로라 하는 유학생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후일 대통령 비서관장(실장), 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박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아들 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켰으며, 무수한 정상배를 밀어내고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심어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자택은 「서대문 경무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는 「인의 장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비서관장을 비롯하여 비서관 및 경호책임자 등이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경로를 통제했기에 가능했다. 발족 당시에는 비서관을 정무담당 김양천, 김종회, 박용만이 맡았고 공보담당 김광섭, 서무담당 이중춘, 문서담당 김석진, 경무대 관리는 황규만, 오일육이 맡았다. 이후 안희경, 유창준, 박찬일, 구본준, 최치환도 비서로 근무했다.
김분옥 여사 묘역은 20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100주기 추모식을 맞이하여 새로 단장한 이태원묘지무연합장묘와 함께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초하고 내년도 예산을 확보하여 단장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같은 날 이영학 독립운동가 묘역 주변 큰 나무도 베어냈다.
필자가 올해 9월 말 망우리공원 묘역을 답사하며 잃어버린 돋보기를 찾기 위해 아침 일찍 망우산에 올랐다가 묘지를 관리하는 분을 통해 김분옥 여사 어머니 박남신 권사의 묘소를 찾았다. 김분옥 여사가 둘째 딸로, 딸 묘지 50미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도 탄포리교회 권사로 많은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였다는 내용의 묘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단포리교회는 1899년 도산 안창호가 강서군 동진면에 점진학교와 함께 세운 장로교회다. 1965년 도산의 조카인 안맥결과 박남신의 아들 김만식 씨는 친구로 도산 선생 묘지 참배 사진으로 미루어봐 도산 집안과 박남신 집안은 단포리교회를 중심으로 세교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유관순(柳寬順, 1902. 12. 16 ~ 1920. 9. 28)
지금도 망우리공원을 공동묘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망우리, 왠지 으스스하고 음산한 분위기로 밝고 환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다. 허나 그 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알고 나면, 왜 그런 분이 공동묘지에 유택이 있지? 의문과 관심을 갖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명시되어 있다. 3.1혁명하면 유관순 열사가 상징적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집안으로 부모님, 숙부, 이웃 아저씨들이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의롭고 심지가 곧은 성격으로 당시 170Cm(5척尺 6촌寸)로 대단히 큰 키였다. 인물도 훤칠했고 씩씩하며 활달하여 뚝심도 남달랐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발행 『이화백년사』에 - 유관순은 1916년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유관순 열사 어록’에 “나는 학교에서 청소를 해서라도 도움을 받은 것을 갚겠다.”는 말을 싣고 있다. 정동교회 손정도와 이필주 목사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유관순은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해를 인수하여 수의를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위패) 54에 봉안되어 있다.
이태원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지와 주택지 개발로, 3대 9명의 독립유공자 가족들이 삶에 쫓겨 관심을 두지 못하는 사이, 유관순 열사의 묘지가 무연고 묘로 소실되어(1935년에 추진하여 1936년 4월에 이장이 끝남) 이곳 망우리공원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묘비는 소화 11년, 1936년 12월) 안에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추석과 설 명절에 이태원묘지무연분묘비와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3분과 새로 파악한 나용환, 박동완, 이종일, 홍병기 4분을 포함 총 7분이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그 외 방정환, 문일평, 조봉암, 유상규, 김영랑, 문명훤, 이병홍, 설의식, 강학린, 김병진, 채동선 등이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올해는 망우리공원 사무소 자리에 망우역사문화관(휠링 센터)을 건립할 계획이다. 독립운동과 문화 예술에 관련된 인물들의 관련 영상 자료 및 책자 등을 수집하여 전문도서관이길 희망한다. 문화관을 이용하여 선인들의 정신과 활동을 종합적으로 기리고 입체적으로 이어받길 바란다. 사색의 길과 사잇길을 걷는 모든 이가 스스로 깨달아 실천하는 능동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의 시공간이길 빌어본다.
망우리공원 이태원분묘무연고 28,000여명의 유해와 함께 이장되었으리라 추정하고 2018년 유관순유족회 이화여고동창회 등 관련단체에서 표지비를 세웠다. 2020년 9월 28일 순국 100주년이었다. 중랑구에서 이태원묘지무연합장분묘를 새롭게 단장하여 코로라19 펜데믹 상황에서도 엄숙한 추모식을 거행했다.
독립운동 명가인 유관순 가(家) 사람들의 독립운동 활약을 소개하면 다음가 같다.
유윤기(1845 ~ 1919) 유관순의 할아버지, 지령리교회 처음 교인으로 장남 유중권 내외가 일본군에게 학살된 것과 차남 유중무, 손자 유우석과 손녀 유관순이 투옥되는 아픔을 겪고, 두 달 보름 후에 별세하였다.
유빈기(1883 ~ 1927) 유관순의 7촌 할아버지(재종조)이자 유윤기의 사촌 동생. 지령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공주읍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됐다.
유중권(1863 ~ 1919) 유관순의 아버지. 아내 이소제와 함께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지령리 집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1919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소제(1875 ~ 1919) 유관순의 어머니, 4월 1일 당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군 헌병에게 학살되었다.
유우석(1899 ~ 1968) 유관순의 오빠. 4월 1일 공주읍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검에 자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유중무(1875 ~ 1956) 유관순의 숙부. 지령리교회 최초 교인으로 전도사와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와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령리교회를 지켰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유예도(1896 ~ 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도피 하여 홍성 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노마리아(1898 ~ 1982) 유관순의 사촌 올케, 남편 유경석이 유관순과 유예도를 도피시키고있는 동안 유중권을간호했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유윤기, 어린아들 유제 경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일본헌병의 온갖 횡포를 감수해야 했다.
유제경(1917 ~ 2012) 유관순의 5촌 조카이자 유중무의 장손, 1919년 4월 1일 이후 어머니 노마리아와 함께 지령리 집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소위 불경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해남도에서 노역으로 형기를 마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면 /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 <유관순 노래> -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하면서 부르는 이 노랫말을 지은 분은 강소천 아동문학가이다. 강소천 유택은 망우리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와 마주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유해를 찾지 못해 망우리공원 이태원묘지무연고분묘합장비에 함께 있으리라는 추정하여 추모의 열기가 뜨겁다. 이렇게나마 추모하는 분위기도 독립운동에 힘쓴 모든 분들께 조금이나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답사하고 망우인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도록 힘을 쏟겠다.
난석(蘭石) 박은혜(朴恩惠, 1904~1963
ㅡ장덕수 부인 경기여중고 교장 15년 은석초 설립자
아호는 난석(蘭石). 평안남도 평원 출생. 목사인 박예헌(朴禮獻)의 장녀이다.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을 역임한 장덕수(張德秀)의 부인이다.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후쿠오카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 두부크대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뉴욕의 비빌리컬신학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재미생활중인 193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활란(金活蘭)의 소개로 장덕수를 만나 종교활동을 펼치다가 1933년 같이 귀국하여 한때 아동잡지인 『아이생활』을 편찬하였다.
1934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부임하여 종교학을 강의하였으며, 1937년 10월에 혼인하였다. 광복 후 고황경(高皇京)의 뒤를 이어 경기여자중학교 교장에 부임하여 1960년까지 15년간 교육에 열중하였다. 재직중인 1947년 12월에는 서울 제기동의 자택 청설장(聽雪莊)에서 부군이 정치적인 피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러한 실의를 딛고 여성교육에 열정을 바쳐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받았다. 제자 중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옥길(金玉吉)을 가까이 두면서 ‘이화 우먼’으로서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저서로는 각종 연설문과 작품 등을 모은 자서전적인 『난석소품(蘭石小品)』이 있다.
호는 난석.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을 역임한 장덕수(張德秀)의 부인이다. 정신여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1932년 미국 아이오와 주 듀부크대학을 나왔다. 이어 뉴욕의 성서신학교에서 사회종교학을 전공, 1935년 종교 교육학사의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종교학을 강의했다.
1937년 10월 장덕수와 결혼했고, 8·15해방 후 고황경의 뒤를 이어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15년간 재임하다가 사임하고 사립국민학교인 은석국민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7년 12월 남편이 자택에서 정치적 피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으나 실의를 딛고 한국의 여성교육과 여성해방운동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연설문과 작품 등을 모은 〈난석소품 蘭石小品〉이 있다.
이경숙(李景淑, 1924.3.9.~1953.11.18.)
ㅡ“이 겨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사회운동가
묘비 앞면
李景淑무덤
묘비 뒷면
소년시절엔 일정하 민족애의 꽃
청년 때엔 정열적인 어린의의 스승
장년엔 크리스챤홈의 태양
이 나라 MRA운동의 개척자의 하나
순수한 신앙 착한 덕행의 30년
일생은 이 고장 여성의 영원의 거울
1953년 11월 18일 서울대학교 교수 유달영 씀
성천 유달영 선생 개성 호수돈여고
이경숙 3년 내리 담임교사
입학 때는 우울하다
담임을 아버지로 믿고 따라
2학년부터 놀라운 성장에
눈을 몇 번이나 비벼 바라봤다
평균 97점 성적으로 졸업했다
늘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겸손했다
유달영 중매와 주례로 결혼했다
이경숙의 한결같은 신념은
"이 겨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으로
페스탈로치와 같은 삶을 살고자
개성 큰 학교 스카웃을 외면하고
시골학교 교사로
늘 너그럽고 부드럽고 남 앞에서 말하기 쑥스러워하였지만
불의에는 엄숙하고 날카로운 얼굴로 맞서며
몸과 마음 다 바쳤다
샤머니즘에 완고한 시어머니 시집살이 고달펐으나
"제 며느리는 성인이죠
이 하늘 아래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도 착하고 어진 마음씨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어요 선생님"
며느리를 좇아 크리스천이 되었다
성천에게 고백했고
화장터에서 이경숙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
큰 스승 시인 구상 말년에
불편한 몸을 고물차로 모시고
성천 집에 찾아가 수세하는 두 분의 우정을
지켜보며
아끼는 제자 중 이경숙을 으뜸으로 여긴다며
두 손을 잡아 주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유택과 남동쪽으로 이웃하여
4월 5일 식목일 전후 다쿠미 선생 추모식
참배객들이 많을 때는
이경숙 선생의 유택을 이용했다
다쿠미 선생과 같은 남향이다
이경숙의 호수돈 여고 스승 유달영, 유달영의 양정고보 스승 김교신, 김교신의 무교회 운동 스승 우찌무라 간조와 연결되어 유달영 박사의 글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