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정종배 2021. 10. 28. 11:47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교정의 날 국제 애니메이션의 날(IAD)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교정의 날
국제 애니메이션의 날(IAD)

교정의 날 矯正의 날
날짜 10월 28일
분류 법정기념일, 비공휴일
교정관련 종사자들의 사기를 높이고 재소자의 갱생 의지를 키우기 위한 기념일. 매년 10월 28일이다. 법무부에 의해 주관되며 1959년 ‘교도관의 날’로 처음 제정된 이래, 1973년 ‘법의 날’에 통합되었다가 2002년 ‘교정의 날’로 다시 분리되었다.
교정의 날 국어 우리말샘
교정(矯正) 관련 종사자들의 사기와 재소자의 갱생 의지를 북돋우기 위하여 제정한 날. 1945년 10월 28일 일제(日帝)로부터 교정 시설을 접수한 날을 기념하여 정한 날로, 10월 28일이다.

왕산 허위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1908년 10월 21일 교수형을 앞두고 왜승이 명복을 빌려 하자,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며 일갈하고 순국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신설동로터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유관순
유관순은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조봉암
1956년 11월 10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1심에서 5년이었는데, 항소심에서 사형이었고,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도 사형이었다. 죽산이 교수대 이슬로 사라진 것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쯤이었다.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추모제가 매년 7월 31일 열린다. 시각은 11시 사형집행 시간에 맞춰 거행된다.

사형 집행 전 죽산은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담 배 한 대 피고 싶다고 하여 간수가 담 배 한 대 줘 피었고 술은 먹지 못하여 필자를 비롯 몇 몇이 한여름밤 죽산 묘역에서 막걸리를 몇 번 마시며 죽산의 얼을 되새겼다.

이정재
1961년 10월 19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이날 형무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감방에서 나와서 이동 중에 교도관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처음엔 흠칫했지만 바로 체념하면서 "오늘부터는 대접이 바뀌는구만?"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형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10월 21일 유족들에게 인도된 이정재의 주검은 곧바로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임화수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고대생습격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정재와 유지광 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는 등 재판 내내 울먹거리며 갖은 잔꾀를 부렸다. 그가 폭로한 화랑동지회 사건으로 이정재는 범죄단체조직 등이 추가되어 사형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는 훗날 유지광의 자서전 대명에도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가족 면회를 하던 날에 유지광은 임화수를 만나자 분노가 폭발하여 그에게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재판에서 이정재, 유지광,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 40세에 사형집행 당일, 사형장에 끌려오면서도 살고 싶다며 몸부림을 치다가 사형장에 들어와서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강경 몇 줄을 읊은 후 곽영주(전 경무대경찰서장), 최인규(전 내무부 장관), 그리고 간첩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와 최백근(사회당 간부)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임화수의 시신은 일명 "눈물의 곡절"이라 불렸던 그의 수행비서 차민섭이 수습하여 곧바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조용수
박정희 군부는 군사쿠데타 이후 바로 혁신계 체포에 돌입했다. 5월 18일 《민족일보》 간부 10여 명을 전격 체포했다. 《민족일보》는 5월 19일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됐다. 당시 선고공판 배석 판사가 대쪽판사라 알려졌고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이었다. 군사정권은 국내외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1961년 12월 21일에 사회당 간부 최백근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입회한 윤형중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날 사형당한 분 중 가장 나중 집행했고 목숨을 쉬이 놓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국제 애니메이션의 날(IAD)
1892.10.28 프랑스 파리 그레빈 박물관의 시각극장에서 에밀레이너드가 세계 최초로 애니메이션을 상영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

석영 안석주는 조선일보사에 근무했다. 1935년 조선일보사는 잡지 발간을 총괄하는 출판부를 신설했다. 초대 주간은 노산 이은상을 초빙했다. 안석주는 시인 백석·함대훈과 함께 《조광》 창간호를 준비하려 출판부로 발령이 났다. 석영은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 등 각 방면에 다재다능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이무영·박종화·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내놓았다. 《개벽》·《백조》·《학생》·《어린이》·《별건곤》 등 유명한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사만화로 이름을 알렸다. 《조광》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1947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겨레, 한민족이 입을 모아 부르는 <우리의 소원> 노래는 1947년 안석주가 가사를 쓰고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이 작곡한 것이다.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어린이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의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듬해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노래가 우리들에게 가장 감동을 준 장면은 아마도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정상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양쪽 수행원들과 함께 어울려 손을 맞잡고 부르던 바로 그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렇듯 남북 모두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예술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 사정이고 보면 안석주, 안병원 부자는 참으로 행복한 부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영화 분야에는 안석주의 이름이 올라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꿰뚫는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한 분 한 분 삶과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만화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 전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고 우리 선인들의 뛰어난 활동을 통해 우수한 자원의 보고로 많은 이들이 찾아올 수 있으리라 본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정종배, 지노 출판, 20121)에서

망우리공원 지도 위에 각 인물의 유택 연보비 위치를 표시하여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