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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인물열전 3.1운동 이화여고 6인 결사대 김분옥 56주기

정종배 2022. 4. 12. 14:32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3.1운동 유점선·노예달·신특실·유관순·서명학·김분옥 6인 결사대 초대 여자경찰국장
김분옥(金芬玉, 1903~1966) 56주기

 

이화여고 1학년 유점선·노예달·신특실·유관순·서명학·김분옥 등은 3.1운동 전날 6인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중에 한 분인 김분옥 여사 묘역을 망우리공원 안에서 그 소재를 확인했다. 6인 중 유점선·노예달·신특실·유관순 네 분은 국가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여 서훈을 추서했다. 서울특별시 우리 동네 3.1만세운동 참여자 명단에 김분옥(남대문역전 시위, 3월 5일, 독립운동사 2권 1부(편) 1장 2절)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2017년 1학기 학교 일과 중 목요일 오전 수업이 없었다. 망우리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유명인사 묘지를 참배하며 삶을 성찰하고 마음의 정리나 학생들의 봉사활동·체험활동을 통해 나라사랑 및 미래 삶의 방향 잡기 등의 자료를 찾았다.

도산 안창호 묘지 터와 유상규, 이영학, 이인성 묘역을 참배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유상규 선생 묘역 위 구리둘레 제1길에서 박인환 묘역 쪽 사잇길로 들어섰다. 100미터 내려오는데, 오른쪽 50여 미터 지점에 돌배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찾아 들어가 꽃그늘 아래 꽃향기를 즐기다, 묘역 상태는 수풀로 뒤덮여 관리가 되지 않은 폐묘에 가까웠지만 지붕돌을 씌운 묘비가 서 있었다. 수풀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다가가 묘비를 꼼꼼하게 읽었다. 유관순과 6인결사대 일원으로 만세운동 함께 한 김분옥 여사의 묘역(묘지번호 203454)이었다.

 

묘비 앞면, +김분옥여사지묘. 묘비 뒷면, 1903년 음 11월 12일 평남 강서군 하에서 내부주사 김극서씨 2녀로 탄생하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야 한국여성의 무지미개함을 통탄하고 속히 교육받아서 부녀계몽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12세에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하시다. 성적이 우수하야 여러 번 월반하고 늘 반의 수위를 차지하셨다. 재학 시 방학 때마다 농촌계몽운동과 전도 강연에 바빳고 3.1운동 때 유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학교당국에서는 그 재질을 상하야 이화대학을 졸업하자 장학생으로 도미 유학시켜 가사과를 전공케 하였고 귀국 후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사과 창설에 공을 남겼다. 미국에서 김해 후인 김양천씨를 알게 되어 1930년 귀국하야 결혼하고 3남 2녀를 두어 단락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녀교육에 전심전력하시와 오남매 전원 도미유학을 시켰고 밖으로는 산업발전에 힘써 국가경제의 재건을 꾀하고 안으로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야 치산에 능하셨다. 조국 해방 후는 국가 사회에 몸을 바쳐 경제면과 부녀운동에 헌신 노력하여 많은 공을 남겼으니 동기간이나 친지간에 우애가 깊어서 남을 돕고 협력하는 정신이 풍부하였다. 말년에 부군을 따라 도미하여 재미 중인 자손들을 고루 만나본 후 고국에 유류공급의 원활을 도모하여 조국경제를 돕고자 모국방문 여행 중 불의의 병으로 신음하시다 약석이 효를 얻지 못하고 1966년 4월 13일 독실한 신앙을 갖고 영면 승천하시다. 주후 1966년 4월 30일 건립 동생 만식 지음.

 

김분옥과 6인결사대와 남편 김양천 경력과 삶을 추적하여 보았다. 전남 장흥과 평남 평양인지 출생지부터 달리 알려졌다. 인터넷 포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뒤졌다. 분명하게 생애를 다 들여다보며 부부의 삶을 추적하여 근현대사 행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개인정보법이 가로막았다. 그나마 김인병 경찰관의 도움이 컸다. 김분옥의 경찰 기록은 국가기록원과 경찰관 인사자료에도 없었다. 따라서 명확한 자료 근거는 없고 당시 신문기사와 한국경찰사에 나와 있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김분옥 경찰 계급은 총경 보직은 초대 여자경찰국장(공안국 여자경찰과에서 여자경찰국으로 승격) 재직 기간은 1947년 7월부터 1948년 9월로 신문기사 보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안맥결 독립운동가의 경찰 기록을 참고하면 더 확실한 삶을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봉성 아내인 안맥결 서울 여자경찰서장 총경은 경찰역사인물에 등재되었다. 안맥결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삭의 몸으로 고문을 견뎌냈지만, 수감 기간 기준을 못 채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다 서훈 조건을 낮춰 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김분옥은 이대 출신 김활란 모윤숙 박인덕 등과 함께 한 친일 경력으로 경찰청 '경찰의 인물'에 선정되지 못했다.

 

김분옥 여사의 남편인 김양천 자료는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 초대 내각의 빈약한 비서실의 정무담당 비서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2대 비서실장은 김양천 전 경무대서장이다. 그때 직제가 구분하지 않아 경호실장 역할까지 겸했다고 전해진다. 1949년 6월 이기붕 초대 비서관장 아래 비서실은 정무·공보·서무·문서·경무대 등 5명의 비서관을 두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 권부 이미지를 심었던 사람은 이기붕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잘 알려진 바 그대로이다. 이기붕이 기회를 잡은 것은 미국유학 시절로 이승만, 허정, 김활란 등 당대 내로라하는 유학생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후일 대통령 비서관장(실장), 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박사의 신뢰와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자기 아들 강석을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켰으며, 무수한 정상배를 밀어내고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심어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자택은 ‘서대문 경무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는 「인의 장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있는 비서관장을 비롯하여 비서관 및 경호책임자 등이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경로를 통제했기에 가능했다. 발족 당시에는 비서관을 정무담당 김양천, 김종회, 박용만이 맡았고 공보담당 김광섭, 서무담당 이중춘, 문서담당 김석진, 경무대 관리는 황규만, 오일육이 맡았다. 이후 안희경, 유창준, 박찬일, 구본준, 최치환도 비서로 근무했다.

김분옥 여사 묘역은 20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100주기 추모식을 맞이하여 새로 단장한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와 함께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초하고 내년도 예산을 확보하여 단장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같은 날 이영학 독립운동가 묘역 주변 큰 나무도 베어냈다.

 

필자가 2020년 9월 말 망우리공원 묘역을 답사하며 잃어버린 돋보기를 찾기 위해 아침 일찍 망우산에 올랐다가 묘지를 관리하는 분을 통해 김분옥 여사 어머니 박남신 권사의 묘소를 찾았다. 김분옥 여사가 둘째 딸로, 딸 묘지 50미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도 탄포리교회 권사로 인술을 펼쳐 많은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였다는 내용의 묘비도 잘 보존되어 있다. 박남신 여사: 묘비앞면 ㅡ +박남신여사지묘, 묘비뒷면 ㅡ 1876년 음 11월 22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박연회 2녀로 탄생 18세시 김해 김극서 씨와 결혼 2남 2녀 기독교 독신 탄포리교회에서 여집사 10년 인술에 능숙하여 다수 창생의 생명 구원 조국 해방 후 월남 1957년 6월 25일 음 5월 27일 서울에서 별세 연82세

 

1899년 도산 안창호가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와 교회인 점진학교와 탄포리(장로)교회를 세웠다. 1965년 도산의 조카인 안맥결과 박남신의 아들이며 누이 김분옥 여사 비문을 지은 김만식 씨는 친구로 도산 선생 묘지 참배 사진으로 미루어, 도산 집안과 박남신 집안은 탄포리교회를 중심으로 세교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원묘지와 망우리공원을 거쳐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 4월 1일 중랑망우공간이 준공되어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태원무연분묘합장묘’에 유관순 열사 유해가 포함되었다는 추정하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가 열사 100주기를 맞아 설립되었다. 201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은 유관순 열사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아이콘이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1운동 이화여고 독립운동 참여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 해방 후 한국의 잔 다르크를 찾아 교과서에 수록하기 위해 미군정청 박창해(1916~2010)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발간 편수관이 이화여고를 방문하였을 때 6인 결사대 1인인 서명학 당시 교감 선생님이 증언했다. 처음에는 누구를 추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화학당 김활란 박인덕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 등은 친일 행위로 이화학당 전체가 어려운 궁지에 몰렸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묘책을 찾았으나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 국정교과서 편집실 안에 유관순의 먼 조카인 유제한 편수사가 유관순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그때까지 어느 신문에도 유관순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1947년 2월 소설가 박계주는 경향신문에 ‘순국의 처녀’를 기고하여 유관순을 처음으로 알렸다. 1947년 9월 신봉조, 박인덕, 김구, 이시영, 유제한 등이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그해 11월 천안 병천 아우내에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제막식 날 유관순은 ‘호국의 신’ ‘겨레의 수호신’이 되었다. 모윤숙은 「영원히 빛나리 조선의 딸 유관순」이란 시를 썼다. 유제한은 “기념사업회는 남북분단의 위기 상황에서 유관순을 통해 애국심을 고양시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조직됐다”고 추도사를 읽었다. 이구영이 시나리오를 쓰고 윤봉춘이 감독한 영화 〈순국의 처녀 유관순〉을《영화시대》에서 특집으로 다뤘다. 소설가 전영택은 박창해와 초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1948년 유관순 전기로는 최초인 『순국 처녀 유관순전』을 펴냈다. 늘봄 전영택은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지닌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유관순에 대한 노래도 발표됐다. 1947년 이화여고 교사 김재인(1913~2005)이 작시를 하고 박은용(1919~1985)이 작곡한 <유관순 노래>가 11월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유관순과 21 열사 행적비 개막식에서 이화여중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1948년 임학수(1911~1982)가 작시하고 안기영(1900~1980)이 작곡한 <유관순> 합창곡도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서울대 음악학부 교수였던 작곡가 박은영은 평양음악연구소 실장, 작사가 임학수는 김일성종합대학 영문학 교수, 작곡가 안기영은 평양음대 교수가 되면서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1952년 문교부 편수국은 청소년의 애국심과 국가관 고취를 위하여 새로운 노래를 만든다. 6.25 전쟁 때 원고지 보따리만 안고 남하한 강소천이 영도다리 인근에서 영생고보 동창인 박창해 당시 문교부 장관 비서였던 극적으로 만나 곧바로 교과서 편수국에 들어갔다. 강소천 작시 나운영(1922~1993)이 작곡한 <유관순 노래>가 <3.1절 노래> 노래와 교과서에 실리어 온 국민의 노래로 자라 잡아 널리 알려졌다.

이로부터 유관순 열사 추모가 시작하여 3.1운동을 넘어 일제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매조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1960년 소설가 박화성이 유관순 전기 성격의 장편소설 『타오르는 별』을 출간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증언자를 만났다. 소설 속에 실명을 써 6인 결사대의 3.1만세운동을 묘사하고 서술하였다. 1972년 소설을 재출간하면서 ‘나오는 사람들의 그 후 이야기’를 통해 유관순의 다섯 학우 및 동무인 6인 결사대 중 서명학은 이화여고 교감 교장을 거쳐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위원, 김분옥은 모 회사 사장의 부인, 국현숙과 김희자는 고인이 됐고, 유점선은 알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