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위창 오세창
8대역관 집안 『근역서화징』 저자 간송 전형필의 멘토 서화가 우리 민족 어르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7.16.~1953.4.16.) 69주기
위창 오세창 선생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1864년 7월 15일 서울 종로 정선방(돈의동) 45번지에서 태어나 1.4후퇴 후 1953년 4월 16일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 오경석에 이어 2대에 걸친 문화재 수집과 감식안으로 이름을 떨쳤다. 본관은 해주 오씨이며 자는 중명(重明), 호는 위창으로 천도교인이다. 위창 집안은 조선조 중종 때까지는 양반 신분 그 후로 8대 역관으로 중인 신분이었다. 조부 오응현은 역관 최고 직인 정3품 당상역관과 종2품 명예직 지중추부사을 역임했다.
부친 오경석은 당상역관 중국 사신 무역으로 부를 이뤄, 신서적 구입과 신세대 인물들과 교류를 통해 개화파 정신적 기반이었다. 중인 출신 학자 대치 유홍기 후원과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홍영식, 유길준 등에게 전수됐다. 1876년 강화도조약 막후 역할 보수파 역적으로 몰려 변장과 칭병으로 1년 후 병사했다.
위창은 자연스레 개화파와 교류 1879년, 16세의 나이로 식년시 역과에 급제하여 한학 역관으로 활동했다.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우리나라 최초 신문 《한성순보》 기자 겸임 우정국 통신국장, 1897년 일본 문부성 초청 1년 동안 재일본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 망명 중 손병희 권유로 천도교 입교했다. 1907년 귀국하여 천도교의 기관지 《만세보》를 창간하고 《대한민보사》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망우리공원 언론계 인물은 오세창, 문일평, 장덕수, 설의식, 김말봉, 조봉암, 최학송, 계용묵, 임병철, 장형두, 박인환 등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 의원을 겸하였고, 이승만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1946년 8월 15일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받았다. 백범 김구 암살 국민장일 때 장의위원장, 1953년 90세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민족의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1953년 11월 8일 하오 2시 망우리 현재의 묘역에 납골 안장되었다. 묘지번호 203369이다. 망우리공원 오세창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1호로 지정되었다.
묘비 앞면, 葦滄吳世昌墓. 묘비 뒷면, 이 墓에 잠드신 葦滄先生 吳世昌 어른은 一八六四年 七月 서울에 나시어 一九五三年 四月 世上을 떠나시니 享年 九十. 民族의 開化를 爲하여 몸소 그 先驅를 잡으셨고 祖國의 光復을 위하여 獨立宣言 三十三人中에 列하시었을 뿐 아니라 文化의 發展에 크게 힘주시어 書藝와 金石 考證의 巨擘을 이루시니 平生에 남기신 偉功은 길이 빛나 비길 바 없다. 어른 가신 지 三年 後生과 遺族이 뜻을 모아 先生인 끼치신 빛을 오래 繼承하려 이에 一九五六年 十月 이 墓碑를 세우다. 一九五六年 十月 日
묘비 옆면, 전홍진 찬撰 손재형 전篆 김응현 서書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위창 오세창은 대한민국 근현대사 서화 수집 및 감식과 언론과 서예 등 사계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1918년 한국 최초 근대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1928년 신라 솔거 이후 추사를 높이 평가하고 이완용 해서와 행서까지 역대 서화가 편년체 『근역서화징』을 펴냈다. 오세창은 간송미술관 가는 도로변인 성북동 128번지 자택에 고서화 작품들을 보관하였다. 이 집에서 다양한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폭넓은 교류의 장소였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위창의 집에서 다수의 작품들을 감상하였다는 글을 남겼다.
위창은 고희동의 소개로 알게된 전형필에게 한국의 전통문화 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었다. 외사촌 형인 월탄 박종화 소설가에게 민족의 역사를 알게 된 전형필과 함께 문화재들을 구입·보존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보화각 현재의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의 영원한 멘토와 멘티 관계였다. 간송 전형필은 1934년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연구할 장소를 물색하다 현재 성북구 간송미술관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오세창은 그곳에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8년에는 망우리에 묻혔던 박길룡이 설계한 북단장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완공하였다. 그가 수집한 주요 문화재에는 김정희,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서화 뿐만 아니라 국보 12점과 보물 10점, 서울시 유형문화재 4점 등 중요한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었다. 1962년 사망하였는데, 문화재 수호 행적을 기려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간송 외에 김덕영, 오봉빈, 박영철, 박창훈 등 당대 대수집가들이 수집한 많은 수의 고서화 도자기 등 작품들이 위창의 감정을 거쳤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특히 서예가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위창체, 오세창체)를 창안하는 등 한국 현대 서예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대한민국 근현대 서예의 계보는 위창 오세창, 해강 김규진, 소전 손재형, 검여 유희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학남 정환섭, 시암 배길기, 원곡 김기승, 중관 황재국 등으로 망우리공원 인물들 묘비의 글씨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 회화사에 남을 청강 김영기, 아소 이인성, 대향 이중섭, 함대정, 권진규, 차근호 등이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함대정, 차근호 두 분의 묘지는 이장한 후 소재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위창에게 전각과 서화 감정을 배워 박정희 대통령 서예 선생으로 서도 대신 서예란 말을 정립했던 전남 진도 2선 국회의원 소전 손재형. 세한도 연구로 박사학위 받고 소유한 경성제대 교수 지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鄰) 1944년 당시 거금 3천엔 전대를 차고 석 달 동안 문안인사에 감탄한 후지쓰카 치카시가 마침내 "내가 돈을 받고 넘긴다면 지하의 완당 선생이 나를 뭐로 보겠소" 실토하고 그냥 넘겨 받아오는 대신 소장품 창고를 지어줬다. 국회의원 선거 자금으로 사채업자 담보로 넘겨 개성 거상 손세기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 손창근 옹이 2010년 국립박물관에 무상으로 기탁했다. 1949년 위창이 소전의 청으로 이시영, 정인보, 청나라 인사 17명이 세한도에 제발을 쓰며 한시 한 수를 남겼다.
여초 김응현은 신안동김씨 김상헌 후손으로 형님 일중 김충현 선생과 형제 서예가로, 일중은 반듯한 서체 여초는 호방한 서체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여초는 인사동 사랑방 터줏대감 역을 한동안 하였다. 지금도 인사동 술집에서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2021년 4월에 타계한 ‘쓴맛이 사는 맛’의 채현국 선생이 마지막 인물이 아니었을까.
여초 김응현이 쓴 현재 만해 한용운 묘비 앞면 글씨체가 광개토왕비문체이다. 2017년 9월 재일한국인 여성수필잡지 <봉선화> 편집인 오문자 선생이 망우리공원 답사 때 만해 한용운 묘비를 읽다 광개토왕 비문체를 알아보았다. 오선생의 남편 이진희 사학자가 전공인 광개토왕 탁본 왜곡 관련 일에 발 벗고 나선 일화 등을 말했다.
위창 오세창은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민족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연구가이고 수집가였다. 3.1혁명 33인 민족대표의 일인으로서 항일투쟁에서도 선봉에 섰던 위창은 서예와 서화 감식안에서도 당대의 제일인자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위창은 집안의 민족문화 컬렉션을 새로운 감회로써 되만지기 시작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떠돌아다니는 민족문화의 유산들 특히 서화를 힘을 다하여 찾아 모았다. 위창의 서화 수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서화가의 이름과 확실한 관계 기록 및 진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우선 후학들을 위해 이 나라 서화가 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을 세웠다.
위창은 그의 컬렉션의 분류 정리와 편저에서 조선이란 말 대신에 이 땅의 상징적 명칭의 하나인 근역으로 표기했다. 그는 《근역인수》라 하여 역대 서화가와 명인들이 직접 사용한 각종 도장의 인영(印影)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서화사 자료의 입체적인 조사와 개척적인 정리는 위창의 생애를 영광되게 한 큰 문화적 업적이다.
민족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착은 그가 3.1혁명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개를 보인 투철한 독립정신과 함께 당시 조선 사회에 참으로 값진 영향을 끼쳤다. 많은 뜻있는 학생과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다. 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높였다. 그러한 위창의 영향력은 한국 근대문화 초기의 커다란 사회적 공헌이었다. 위창의 선각자적인 문화재 연구 업적과 공헌은 오늘의 고고학 및 미술사학계의 선구자였다. 호암 문일평 묘역을 지나야 찾을 수 있는 망우리공원 묘역은 붉은 소나무가 북서쪽 현무로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