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번호 | 960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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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오기만 | 한자 | 吳基萬 | |
이명 | 吳基滿, 尹哲, 尹喆, 尹廣濟, 朴泰成, 朱仁國, 尹昌善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1905-08-21 | 사망년월일 | 1937-08-23 | |
본적 | 황해도 연백 銀川 蓮東 | |||
주소 | 中國 上海 法界 普恩 世路 |
공적정보
운동계열 | 중국방면 |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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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년도 | 2003 | 훈격 | 애국장 |
공훈록 | |||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제2학년을 수료한 후 면학을 목적으로 수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민족운동가들과 교유하였으며, 1928년 4월 16일 신간회(新幹會) 배천지회(白川支會)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 홍세혁(洪世赫) 등과 함께 격문을 배부하려다 연백경찰서(延白警察署)에 피체되어 해주지방법원(海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출판법위반 및 보안법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929년 1월 홍남표(洪南杓)의 권유로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였고, 동년 겨울 홍남표, 김형선(金炯善), 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해체하고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재류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구연흠, 조봉암(曺奉岩) 등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청년반제상해한인청년동맹(靑年反帝上海韓人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들은 중국공산당민족위원회 산하 청년반제대동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1년 6월 상해에서 김단야(金丹冶)로부터 국내의 김형선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동년 7월 경성(京城)에서 김형선을 만나 협의한 결과 함남 진남포(鎭南浦)에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32년 1월 진남포로 간 그는 한국형(韓國亨), 심인택(沈仁澤) 등과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여 동년 10월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赤色勞動組合埠頭委員會)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진남포상공학교(鎭南浦商工學校) 적색비밀결사(赤色秘密結社)를 조직하였고,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총파업을 선동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9월 상해로 도항하여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경에 의해 피체되어 국내 경기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동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인해 1936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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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번호 204390
3.1혁명 때부터 광복될 때까지 한 가정의 4부자와 사위까지
민족해방운동전선에 투신하여 고생한 사실을 기록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몇몇 학교에서는 임시교재를 쓴
동생 오기영의 자서전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피와 눈물과 뼈와 살의 기록
사슬이 풀린 뒤
이승만정권이 성립되고 닷새 뒤 1948년 8월 20일 머리말에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루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먹이고 하던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좌우대립 격심했던 해방공간 좌도 우도 아닌 자유주의자를 자처했던 오기영은 이승만정권 성립으로 친일경찰이 그대로 제 권리를 행사하는 세상 된 것을 보고 도로아미타불이요 제2의 해방이 필요하다 외치다가 1949년초 월북하고 말았다
1945년 해방 된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공동묘지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놓고 그 앞에 서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형님 오기만 그리고 시숙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김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더불어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르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을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탄성이면서
심장에서부터 울려나온 통곡이었다
그 가족의 수난사
가족사이면서 민족사 민족사이면서 대서사시
부친 오세형 고향 배천의 3.1혁명 주동자로 투옥
모친 윤인의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을 감당
본인 오기만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병사(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동생 오기영 3.1혁명으로 투옥(11세), 사상범으로 투옥, 수양동우회 등 총 4회 투옥
동생 오기옥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제수 김명복 오기만의 동지,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누이 오탐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매제 강기보는 오탐열의 남편,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의 평북 도책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 중 얻은 페결핵으로 순국(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조카 오장석 조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상해 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살던 중 옥사
동생 오기영의 첫 부인 김명복은 치과의사로 시숙 오기만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원이었다
동생 오기옥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복역하다 광복으로 석방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명문가
이회영 6형제
이육사 6부자
유관순 집안 9분
오기만 집안 9분
아차산성 제2보루 오르는 망우산 주능선 설태희 설의식 부자 묘역 가기 전 오른쪽
만해 한용운 선생 묘역 내려가는 길목 직전 오른쪽
늘 푸른 붉은 소나무 숲 사이 가족묘지
오세형가대대지묘 吳世炯家代代之墓
묘비 오른쪽
전생 다생에 인연 있는 우리들이 부모처자로 금생연을
지어 피를 물려가며 고락을 가티 하였더니 때가 이르매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알면서도 도라갔다
본시 생지필멸이라 무상을 깨다르니 남아서 슬퍼하는
이들도 백세 차기 전에 가티 흙으로 도라갈 것이매
살아 한집에 들었드시 여기 한 무덤을 지어 대대지묘로
삼았노라
세월이 얼마되랴 나도 가티 흙일 것을
그래도 정이로다 압세우기 이대섧어
무덤에 풀옷 입히며 눈물 다시 새로워라
계미년(1943년) 3월 22일
기영 합장
묘비 왼쪽 글
제1대
부 세형
처 인의
자 기만(을사(1905) 8월 21일생/정축(1937) 8월 23일 향년 33세)
제2대
부 기영(기유(1909) 4월 13일/
처 명복(병오(1906) 11월 13일/계미(1943) 2월 2일 향년 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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