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번호 | 9614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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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봉성 | 한자 | 金鳳性 | |
이명 | 金鳳成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1901-03-03 | 사망년월일 | 1945-12-18 | |
본적 | 평안남도 강서 東津 古逸 401 | |||
주소 | 서울 新設 13 |
공적정보
운동계열 | 3.1운동 |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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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년도 | 2005 | 훈격 | 건국포장 |
공훈록 | |||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선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였던 이승훈(李昇薰)이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였던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부탁하며 추진되었다. 홍성익은 동료 교사인 김지웅(金志雄) 등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성학교 내의 업무는 김지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맡겼다. 당시 신성학교 4년생이던 그는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 등과 함께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그는 동교 학생들과 일제히 교문으로 뛰쳐나갔다. 사전 연락에 따라 옆에 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학생들이 천남동(川南洞) 시장에 도달할 무렵 시민들도 동참하여 시위군중은 1천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선천수비대와 경찰이 출동하여 발포를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는 상고 취지에서 일본이 내세우는 기만적인 동양평화의 허구성을 질타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잔학상을 지적하였다. 또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비판하는 한편, 2천만 동포는 죽음으로 혈전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2년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를 졸업하였고, 1927년에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1930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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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성(金鳳性)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사위다.
김봉성은 오산학교 초대 이사장을 지낸 민족대표 이승훈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때
신성학교 4년에 다니고 있던 김봉성은 신성학교 스승인 교사 홍성익과 김지웅에게 학생들도 동참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스승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고병간,박찬빈등과 함께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신성학교 학생들과 예수교보성여학교 학생들은 함께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남동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천군민 1천여 명은 선천읍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벌이자 경찰과 선천수비대는 총을 발포하자 십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봉성은 주동자로 체포되고 1919년 6월 3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출판 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쥬오대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30년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 지국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인 1934년 안창호의 조카 안맥결과 결혼하고 두 사람은 안창호가 설립한 점진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38년 2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보석으로 가석방되고 치료 도중 그해 3월 10일 별세하시자 김봉성은 평소 죽으면 유상규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도산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망우산 유상구 묘소 옆에 안창호 선생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로 본격적인 전쟁 체제에 돌입하자 양심적인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회개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그해 8월부터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 실태조사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각종 모임이나 단체를 수사하다가 수양동우회 사무실에서 경성 기독교 청년 면려회(勉勵會)에서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고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출한다는 내용이 담긴 인쇄물을 발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이 문서는 수양동우회 전국 35개 지부에 발송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일본 경찰은 압수한 회원명부를 가지고 배후에 안창호, 이광수, 홍난파, 목사 정인과, 의사 이용설, 이대위, 주요한,유형기 등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전국에서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8년 체포할 때 함께 체포당했다.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는 1926년 1월 흥사단의 조선지부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통합되어 출범한 단체로안창호, 주요한, 주요섭, 이광수, 김동원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교육, 계몽, 사회운동단체다.】
1945년 딸 김자영과 함께 연탄가스 중으로 숨졌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고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묘소는 망우리 도산 안창호 선생 묘소 터 오른쪽 옆에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 묘비를 찾아 제막식에 유족대표 참가한 후손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선생의 비석만 남기고 묘지를 옮겼다
도산 선생의 유훈을 실천한 선생의 뜻이 지켜지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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