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동교 김희수 이사장

동교 김희수 이사장 스토리

정종배 2017. 4. 10. 12:37

김희수(1924~2012)

 

  애비나 형아처럼 니도 커서 일본 가가 배워야 한데이. 인자 배워야 살제 그라나믄 고마 죽는데이."

김희수가 어릴 때 그의 할아버지는 늘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배움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훗날 김희수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넘어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의 철학을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이어지는 김희수의 이야기를 통해 김희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그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1장 배움의 철학

 

어린 시절의 멘토 할아버지

  김희수는 1924 6 19일 아버지 김호근, 어머니 심교련의 둘째 아들이자 칠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두 분, 형님 한 분, 아래로 남동생 둘에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딱 중간 위치라 형과 누나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치다꺼리 해야만 했다. 그런 그의 집안이 진동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논밭과 임야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탈한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대대로 이어져 온 터전을 다 빼앗아가고 말았다. 이때부터 김희수의 집안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조 있는 선비 집안에서 일본인의 소작농이 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집안 살림이 빠듯하고 어려울 때 그가 태어났다. 나라를 빼앗기고 땅을 잃어버린 백성으로, 그의 가족은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또 못 배우고 무지한 백성으로 태어난 탓에, 그렇게 모진 고난의 세월을 견뎌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김희수와 그의 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조선조 중기 문신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과 그 손자와의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문건은 비록 출사길이 막힌 죄인의 가문이었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살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의 손자를 엄하게 교육시켰다. 다음은 이문건이 쓴 양아록(養兒綠)의 한 구절이다.

 

  언제 정신과 학식, 견문이 자라 장차 스스로 보호할 줄 알게 될까? 천금 같은 귀한 몸 잘 보존해야 하니 삼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이다. 아직은 어린 나이여서 무엇을 보면 마음이 먼저 따라간다. 깨우쳐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꾸짖어도 위엄을 보이기 어렵다. 보살피고 기르는 일 진실로 쉽지 않지만 어렵다고 해서 어찌 감히 소홀히 할 것인가? 늙은 할아비 마음이 이런 까닭에 날마다 그 일에 대해 생각한다.”

 

  김희수의 할아버지는 고향에 홀로 남겨진 손자를 위해 직접 훈육선생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김희수를 불러 앞에 앉혀 놓고 천자문을 직접 가르쳐 주셨다. 처음에 김희수는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 채 할아버지가 불러 주시는 대로 따라 읽고, 해석해 주시는 대로 뜻을 외우며 천자문을 독파했다. 김희수의 할아버지는 이문건과는 다르게 온화한 방법으로 훈육하셨기 때문에 김희수의 기억 속에 천자문을 배우는 일은 무섭거나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할아버지의 사랑과 배려 아래 김희수는 한문의 맛과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정식으로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다 쓰고 읽고 해석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배운 천자문 실력은 진동공립보통학교 시절은 물론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때도 김희수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할아버지는 김희수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천자문 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생 및 삶의 원리들을 하나씩 일러 주셨다. 김희수의 어린 마음 한구석에 뻥 뚫려 있었을 아버지의 빈자리를 천자문 수업 시간을 통해 넉넉히 채워 주셨던 것이다.

 

 

청년 시절의 멘토 이백순 선생님

  그 당시 마을 인근의 학교는 진동공립보통학교가 유일했다. 1933년 봄, 김희수는 이 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일제는 학교를 통해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말과 일본의 역사, 문화 등을 가르치며 한국의 젊은이들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인 선생님들은 말만 선생님이었지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일본식 긴 칼을 옆구리에 차고 교실에 들어왔다. 선생님으로서의 따뜻함이나 지적인 여유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칼을 차고 들어온 일본 선생님에게 배우는 수업이 재미있을 리 만무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울 때와는 달리 공부가 재미가 없었다. 일본인 선생님들은 친절하게 설명을 하거나 제자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4학년 때 서울에서 한국인 선생님 한 분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이백순 선생님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근무지로 진동공립보통학교에 발령을 받아 내려온 것이었다. 이백순 선생님은 다른 일본인 선생님들하고는 많이 달랐다. 상냥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많은 것들을 잘 알고 또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는 선생님이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나라를 잃고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아세요?”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못 먹고 못 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우리가 힘들어도 열심히 배워 실력을 갖춰야만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때까지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던 선생님의 이런 말씀은 어린 김희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김희수는 이백순 선생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수업에 임했다. 이백순 선님을 통해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되고, 학교 가는 일이 즐겁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이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김희수는 어렴풋이나마 자기 자신과 가족의 미래,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4학년 될 때까지 한국말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김희수는 한국말을 공부할 수 없었다. 학교의 일본인 선생님들이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아 교재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백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국어 교과서를 나눠 주고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다. 힘이 없어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말과 글이 온전히 살아 있다면 정신까지는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선생님의 교육철학이었다. 선생님은 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직 잘 모르죠? 이제부터 선생님과 함께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더 아름답게 잘 쓸 수 있는지 배워 보도록 하겠어요.”

  글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도구예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하고, 문법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좋은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써봐야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 우리말로 글을 써야 우리 정신을 지킬 수가 있는 거예요.”

 

  이백순 선생님 덕분에 김희수는 비로소 우리말로 글을 쓰고, 읽고,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는 국한문 혼용체로 글을 썼기 때문에 우리말 실력과 함께 한자 실력도 갈수록 나아졌다. 그런 선생님을 만나 배울 수 있었던 건 김희수에게 큰 행운이었다. 서슬이 퍼런 일제의 감시와 다른 일본인 선생님들의 수많은 눈총 속에서 어떻게 이백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런 수업을 과감하게 진행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백순 선생님은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위원장, 부산일보 초대 주필을 역임한 뒤 625전쟁 후 부산 부시장으로 재임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일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김희수가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된 바탕에는 이백순 선생님의 아낌없는 조언과 가르침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중앙대 재단이사를 맡아 제자 김희수의 곁에서 궂은일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동경전기학교 고등공업과 입학과 기술을 배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영국,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데 이어,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던 한국과 일본의 경제사정은 최악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말았다. 전쟁의 흉흉한 소식이 가득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김희수는 오랜 고민 끝에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약소국에 대한 전쟁과 무분별한 침략이 자행되는 이런 약육강식의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가장 실용적인 첨단학문과 실질적인 지식을 익히는 것이 올바른 시대의 흐름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희수는 1939년 동경전기학교 고등공업과에 입학하였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나면 폐허가 된 일본 땅에 대대적인 건설 붐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에 맞춰 전기 사용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건설기술과 더불어 전기기술이 각광받는 분야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죽기살기로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조차 어려운 때, 장정인 김희수와 그의 형이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했지만 쉽사리 목돈이 되진 않았다. 집안 경제를 책임진 사람은 작은아버지였다. 변변한 기업이나 일자리가 조차 드물던 시절 작은아버지는 동경간이재판소 서기관이라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물론 김희수와 그의 형도 편안히 공부만 하고 지냈던 건 아니다. 우유배달에 신문배달, 각종 외판원에 잡부(雜夫) 일까지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렵게 돈을 벌어가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동시에 학교에서는 이론교육과 더불어 배선, 송전, 발전 등 전기공학에 필요한 실무적인 과목들을 배웠다. 어렵사리 시작한 공부라 피곤을 잊은 채 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애썼다.

 

  이런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던 작은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어느 날부터 감기 증세가 점점 심해지나 싶더니 이내 폐렴으로 발전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변을 당하고 말았다. 가족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작은아버지는 41세로 슬하에 2 3 5남매를 두고 있었다. 1940년 일이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집안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전세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제의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갈수록 가중되고 있었다. 일제는 관동대지진 이후 재일한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각 지방별로 지부를 조직하여 한국인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재일한국인들을 조사하고 감독함과 동시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탄압하며, 그들을 일제에 충성하는 존재로 만들어 아예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아버지는 한국인들의 자립과 자치를 돕는 갱생회(更生) 일을 맡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일제는 김희수의 아버지로 하여금 갱생회 일을 그만두고 협화회에 가입해 일할 것을 끈질기게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이를 필사적으로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집안 형편은 점점 더 곤란하게 되었다. 이 무렵 가장을 잃은 작은어머니 가족은 짐을 꾸려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작은아버지가 안 계신 일본에서 여자 혼자 다섯 남매를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번에는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작은누나와 고모들이 모두 출가를 하자 더 이상 고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지기도 하였거니와 작은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후 여생을 큰아들과 손자들 곁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온 가족이 일본에서 함께 살게 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한 학기 휴학을 하고, 돈이 생기면 다시 등록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니 자연 졸업이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늦어졌다. 입학한 지 4년 만인 1943년 동경전기학교 고등공업과를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김희수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전기회사에 취직했다. 전기회사의 본사는 평양에 있었다. 마침 압록강의 수력전기가 개설되어 변전소에서 일할 직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인이었던 김희수는 평양으로 발령이 났다. 그 후 광복이 되기까지 약 2년간 그는 평양에서 일을 했다. 진남포에 군수공장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어 진남포와 평양을 오가며 일을 했는데 학교에서 기초적인 이론과 실습만을 배우다 직접 변전소에서 기계를 만지며 일을 하니 신기하기도 할뿐더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식이나 기술이 날로 향상되고 있었다. 태어나 진동면 외에는 나라를 둘러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그는 2년 동안의 평양 근무를 통해 우리 국토의 진면목을 체험하면서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훗날 김희수가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김희수에게 그럴 바에야 좀 더 일찍 상고나 상대를 나와 사업에 뛰어들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비즈니스를 전공한 사람이었더라면 부동산을 투자의 대상으로만 생각해 설계, 건축, 시공, 관리, 보수 등에는 소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단기간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그가 전기공학을 전공한 공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부동산을 단지 투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이 사는 행복한 공간으로 파악해 설계부터 관리에 이르는 모든 단계들을 꼼꼼히 챙겨가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장 극복의 미학

 

힘들고 열악했던 환경

  전후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생산설비는 파괴된 데다 국토는 황폐하여 식량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과 군인들이 속속 들어왔지만 군수산업이 붕괴되었고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1946년 당시 광공업 생산은 전쟁 전과 비교해 약 30퍼센트, 농업 생산은 60퍼센트까지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미군정이 예금봉쇄라는 극약처방을 내렸지만 물가는 끝없이 폭등을 거듭했다. 1945 12월에는 몇 달 사이에 물가가 두 배 이상 올랐으며, 1946년에는 1년 동안 물가가 무려 네 배나 올랐고, 다시 1년 후인 1947년 말에는 또다시 물가가 네 배나 상승하였다. 식료품이나 의복 등 생활필수품들은 구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 실업자는 무려 1300만 명에 달했으며, 엥겔 계수는 80퍼센트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온 가족이 번 돈을 모두 모아 식량을 사더라도 식구들이 배불리 먹기가 힘겨울 지경이었다. 김희수 형제 역시 먹고 살기 위해 전보다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 그 와중에도 일자리는 찾아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죽어라 일해 요즘 돈으로 4만원에서 5만원 정도를 벌었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당시 그들에게 그 돈은 생명과도 같았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어느 날 소변을 보는데 붉은 빛깔의 피오줌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구조가 지속되자 일본인들은 물론 수백만 명에 달하는 재일한국인들의 생활은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졌다. 애당초 먹고 살 길을 찾아 일본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이제 먹고 살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지경이었고, 강제징병이나 노무자로 끌려온 사람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광복이 되었다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한국으로 귀환하려는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드는 통에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 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인 귀환자들을 돕기 위한 건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김희수는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이들을 돕기 위해 위원회에서 틈틈이 약 1년을 일했다. 종전 이후 먹고 살기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자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이러다 보니 시모노세키 항에는 언제나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며칠씩 줄을 서서 배를 기다리며 노숙을 하기도 하고, 길바닥이든 어디든 아무데서나 마구 용변을 보는 등 질서가 엉망이었다. 배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난리가 벌어졌다. 건국추진위원회에서는 질서를 바로 잡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무사히 돌아가도록 돕는 일을 했다. 기다리다 못해 작은 돛단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려던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파도를 만나 배가 부서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했다. 정치적으로 해방이 되었을 뿐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렵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기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왕 고생한 거 일본에서 더 자리를 잡으면서 자식들 공부를 마저 시키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어머니 생각에 동의하였다.

  그 즈음 평생 소원이었던 광복을 맞이하고,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김희수의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49 2 2일 향년 만83세였다. 할아버지는 김희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정신세계 절반은 할아버지에 의해 형성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던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할아버지는 그에게 아버지이자 친구였으며 스승이자 멘토였다. 할아버지를 통해 천자문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며, 말을 배웠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한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에 정착하기로 한 이상 김희수는 남다른 각오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해 공부도 계속해야 했고 생활 기반도 좀 더 확실하게 다져 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의 번민은 점점 길어졌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경 시내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희수의 눈에 번쩍 띄는 게 있었다. 이리저리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 쓰고 있는 모자, 끼고 있는 장갑 등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다들 먹고 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벗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 바로 이기야, 바로 이기라꼬!”

 

그는 시내 한복판에서 무릎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1947년 김희수는 동경 시내 최고 번화가인 유락조(有樂町)역 앞에 작은 가게를 하나 얻어 양품점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먹고 입는 것은 안 할 수 없다는 것, 먹는 장사는 너무 흔하고 치열하다는 것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유락조역 앞은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서 장사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 무렵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스웨터나 블라우스, 셔츠, 바지, 모자, 양말, 스타킹 등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필요한 패션 용품들을 도매로 가져다가 소매로 되파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종업원 두 명을 두고 문을 열었다.

  양품점을 차리는 데 들어간 밑천은 그 동안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생활비에 보태고 남은 돈을 모아둔 것이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한 종잣돈은 그에게 말 그대로 생명과도 같은 돈이었다. 그런 돈을 투자해서 양품점을 연 것은 김희수 나름대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품점 이름은 금정양품점(金井洋品店)이라고 지었다. 금정이란 일본사람들이 부르던 김희수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가나이라고 읽었는데 뜻을 풀이하면돈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의미였다. 상점 이름으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뜻이 마음에 들어 양품점 이름을 금정이라고 지은 뒤반드시 돈이 흘러 들어오는 우물을 파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처음에는 경험도 없고 장사에도 서툴러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손님들 입장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매출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조금 지나자 이제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다.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전후 워낙 물자가 부족하던 때라 어딜 가나 섬유제품들이 귀한 대접을 받았다. 정부에서도 물가안정과 유통질서 확립을 위해 아무데서나 함부로 팔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를 할 정도였다. 그런 시절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번화가에 양품점을 냈으니 물건만 있으면 얼마든지 판매가 가능한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개업을 할 때는 쇼 케이스 두 개 정도에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되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종업원을 더 채용하게 되었다. 김희수의 확신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물건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기 때문에 그는 아무리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모르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작은 가게일망정 양품점을 운영하며 그가 배운 것은 신용의 중요성이었다. 그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용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좋은 물건을 제값에 팔아 금정양품점은 믿고 살 수 있는 가게라는 확신을 심어 준 것이다. 작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손님을 속이거나 하자 있는 물건을 가져다 놓지 않았다. 거래처에도 똑같이 신용을 지켰다. 신용은 신용으로 이어지며 계속된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구멍가게 수준의 장사였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했다. 일본인들의 차별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철저하게 신용을 지킴으로써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 복수하는 길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나갈 수 있었다.

  양품점이 잘 되면서 생활비와 학비 걱정이 없어지자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9년 그는 동경전기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삼각형 인생이 전개되었다. 매일 집과 학교, 양품점을 오가며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양품점 운영도 잘되고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에도 재미를 들일 즈음 조국에 또다시 시련이 밀어닥쳤다. 1950 6 25일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일본 교포 사회에 다시 한 번 거센 파도가 일었다. 조국에 전쟁이 났으니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은 전세가 너무 급박하니 나중에 안정이 되면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뿐 끝을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이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최악의 상황을 헤매던 일본 경제가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기적처럼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쟁특수가 생겨난 것이다. 광복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며 연명을 거듭하던 한국 경제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면, 패전 이후 암흑기를 이어가던 일본 경제는 한국의 비극을 딛고 기사회생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모든 것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일본 경제는 상승세를 타면서 패전국의 암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당당한 독립국가의 활기가 넘쳐났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김희수는 1953 3월 동경전기대학을 졸업한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온 이후 수많은 역사의 풍랑과 생존의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이뤄낸 값진 결과였다. ‘배워야 산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이로써 작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지면서 학업을 계속하느라 휴학을 밥 먹듯 한 탓이었다.

  16년 인고의 세월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함께 성장시켰다. 이 일을 통해 김희수는 어떤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신용과 용기만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어떤 일을 해도 일본사람들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시던사필귀정(事必歸正,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간다는 뜻)’이라는 말이 책 속에 있는 허구의 경구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와 생활 속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가르침임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3장 경영철학

 

열악한 사업 조건 속 성공을 이끈 경영철학

  금정양품점의 성공으로 사업에 자신감을 갖게 된 김희수는 대학 졸업 후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두 번의 사업에서 연거푸 실패의 쓴맛을 맛보게 된다. 일본 사회는 이방인들에게 절대 녹록하지 않은 곳이었고, 재일교포로서 불리한 조건 속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돈이 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사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전후 고도성장을 거듭하며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짐에 따라 땅과 건물에 대한 가치가 연일 수직상승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부동산 사업이 가장 안정적이고 현금 흐름이 좋은 사업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그는 맨 처음 금정양품점을 시작할 때의 그 순수했던 마음으로 다시 금정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한다.

 

  그는 금정기업주식회사의 경영철학으로절약(節約), 내실(內實), 합리(合理), 신용(信用)을 내세웠다. 효율적으로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절약을 실천해야 했으며, 입주자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화려한 외형보다 실속 있는 구조를 갖춰 나가야 했고, 이를 위해 줄일 건 줄이고 투자할 건 투자하면서 회사를 합리적으로 운영해야만 했다. 나아가 입주자들은 물론 회사 직원들 모두에게 믿을 수 있는 건물, 믿을 수 있는 회사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금정 제1빌딩은 지하 2층에 지상 6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당시에는 꽤 크고 근사한 빌딩이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가진 돈을 다 투자한 데다 빚까지 내서 지은 건물이라 임대가 잘 되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김희수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번듯하게 빌딩을 지어 임대를 시작했지만 가끔씩 문의만 들어올 뿐 임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빌딩을 짓고 나서 처음 2년 동안은 사글셋방에서 난방기구도 없이 겨울을 나기도 했고,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모아둔 저금통을 헐어서 쓸 정도로 힘들게 생활해야만 했다.

  그런 난관에도 그는절약, 내실, 합리, 신용이라는 경영철학을 철저하게 지켜 나갔다. 우수한 입주자들을 확보하고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빌딩을 정성을 다해 성실히 관리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빌딩은 기계와 같습니다. 따라서 항상 보고 또 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반드시 고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이 빌딩 구석구석을 점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직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말이다. 결국 어려운 시기가 지나자 금정빌딩에 대한 소문이 좋게 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서로 입주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 진심이 통한 것이다. 사람들은 한 번 가게나 사무실을 얻어 입주하면 좀처럼 이사를 가려 하지 않았다. 임대료를 밀리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김희수는 드디어 시부야(澁谷)에 금정 제2빌딩을 지었다. 임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빌딩 안에 있는 모든 사무실과 가게들이 전부 계약 완료된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였다.

 

김희수의 인간공학적 건축 휴먼빌

  금정 제1빌딩 맨 꼭대기 층에는 일곱 평 남짓한 크기의 사장 사무실이 있었다. 오래 전에 지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딩이었다. 김희수는 늘 계단을 걸어서 건물을 오르내리며 틈나는 대로 이곳저곳 둘러보곤 했다. 지나다 만나는 입주자 모두는 그의 소중한 고객들이었다. 그는 항상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그들이 무엇을 불편해 하는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내면 즉각 조치해서 고치거나 시정한 후 이를 바로 통보해 주었다. 입주자들이 내 집처럼 편안하게 일하고, 쉴 수 있는 빌딩을 만드는 것이 김희수가 부동산 임대업을 하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지켜온 신조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여러 가지 물자들이 부족하던 시절이었고, 주요 사회 기반시설들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때라 툭하면 여기저기서 고장이 나거나 사고가 일어나기 일쑤였다. 때로는 수돗물이 안 나올 때도 있었고, 갑자기 전기가 끊어질 때도 있었으며, 가스가 안 나오거나, 냉난방이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하면 입주자들의 불편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빌딩 내에 전기, 상하수도, 냉난방, 전화, 기타 보수 공사 등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채용해서 확보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빌딩이 여러 개로 늘어나면서 아예 이런 기술자들을 모아 건물을 관리하는 회사를 별도로 만들어 운영하였다. 김희수는 학교에서 전기 기술을 배운 공학도였기에 누구보다 관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빌딩에서는 사고가 한 번 발생하면 이를 고치는데 여러 날이 걸렸지만 금정빌딩에서는 기술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즉시 출동해서 바로 고쳐 주곤 했다. 그러니 입주자들의 만족도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어느 건물보다 김희수의 건물이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금정빌딩에 입주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사고가 났을 때만 기술자를 불러다 고치면 늘 기술자들을 직원으로 데리고 있는 것보다 돈이 훨씬 더 절약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기술자들을 직원으로 데리고 있으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고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 미리 점검을 해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으며, 빌딩 구석구석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고장이 나도 근원적인 처방을 할 수가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만 기술자를 부를 경우에는 임시방편으로 처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사업을 돈만 보고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일을 하다 보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입주자들에게 최대한 많은 임대료를 걷어 들이고, 입주자들의 편의를 위하는 일에는 최소한의 돈만 쓰고자 한다면 당장 몇 푼 더 벌 수 있겠지만 사업을 오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긴 안목에서 보자면 입주자들의 행복을 위해 지금 돈을 더 쓰는 것이 결국은 나중에 내 이익으로 돌아오게 되는 법이다.

  이렇게 빌딩을 철저하게 관리한 덕택에 금정 제1빌딩은 지은 지 무려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고장이나 사고가 나지 않는 튼튼하고 안전한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다 보면 사무실이나 가게를 얻어 입주한 사람들이 다 일이 잘 되고 형편이 점점 나아지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월세를 못 내거나 관리비를 못 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떤 때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 등이 이를 속이고 몰래 입주해 말썽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법을 따지고 계약서를 따지며 모질게 대할 경우 빌딩 주인은 피해를 줄이고 편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억울한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우리가 조금 힘들어도 입주자들을 다 한 가족처럼 대해 주세요. 우리가 그분들을 믿어야 그분들도 우리를 믿습니다. 그분들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합니다. 이걸 꼭 잊지 말고 실천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김희수가 직원들에게 늘 당부하던 말이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이런 사장의 방침을 따르느라 굉장히 힘들어 했고, 입주자들이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생기곤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직원들이나 입주자들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려하는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빌딩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법보다 더 자연스럽고 구체적인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금정빌딩은 어느 곳에 지어진 몇 번째 빌딩이든 간에 모두 인간을 위한, 인간의 편리를 위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공간으로 건축되고 관리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금정기업주식회사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직원들과 손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희수는 이런 소감을 밝혔다.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축하객 여러분, 오늘로써 우리 금정기업주식회사가 창립 20돌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회사를 이만큼 성장시키는 데 기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흔히 부동산 사업은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남들이 쉽게 일할 때 우리는 어렵게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금정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개 작은 장사치는 먼저 자기 이익을 취한 뒤에 그 나머지를 가지고 손님에게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큰 장사꾼은 먼저 손님에게 혜택을 주고 나서 그 나머지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업가이자 올바른 기업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손해가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 보면 그것이 바로 이익을 창출하는 길이며, 그런 기업만이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금정기업주식회사는 바로 이런 정신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하여 50, 100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내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 빌딩을 한 번 와 보십시오. 일본에서 우리 빌딩보다 더 좋은 빌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철저한 사전 조사와 계획

  당시 일본인들은 부동산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김희수는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하면서 꾸준히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머지않아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자금이 모아지는 대로 계속 토지를 매입해 빌딩을 지어 나갔다.

  우리나라가 아직 보릿고개에 시달리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을 시기에 일본은 이미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각 가정에 보급되고 있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동차, 에어컨, 컬러텔레비전까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패전의 쓰라린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고 당당히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 부동산 임대업은 최고의 호황을 맞게 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들의 국민의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응해 온 결과였다. 부동산 사업은 그 담보력 때문에 자금난에 심하게 허덕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재일교포가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적격이었다.

  김희수는 큰 자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대보증금으로 다른 빌딩 건축을 시작했고, 그 건물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융자를 받아 그 돈으로 다시 다른 토지를 매입하여 빌딩을 신축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빌딩을 늘려나갔다.

  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신축할 때 그는 반드시 사전에 철저한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였다. 긴자(銀座)의 어느 길목에 빌딩을 지을 만한 땅이 나왔다고 하면 그는 적어도 3주간 정도는 근처에 진을 치고 앉아 그 일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나 행인들의 성격과 유형, 차량 통행 정도, 주변 환경과 발전 전망 등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파악해 나갔다. 그 결과를 토대로 빌딩 신축 여부와 건물의 성격과 규모, 설계와 시공의 차이 등을 결정한 것이다.

  1961년 금정 제1빌딩을 완공한 이후 5년 만에 금정 제3빌딩이 건축되었다. 1966 3월에는 빌딩의 환경관리와 경비업무를 맡을 회사로 금성관재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이어 1967 5월에는 공기조절과 전기, 급수배수, 위생설비의 설계와 시공을 맡을 회사로 국제환경설비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계속해서 1978 8월에는 건축과 설계를 담당하는 회사로 국제건축설계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바야흐로 빌딩의 설계, 건축, 임대, 관리 업무까지를 총망라한 금정기업이 출현한 것이다.

  부동산 사업을 통한 회사의 급속한 성장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경 시내는 물론 긴자만 해도 김희수의 회사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부동산 임대 회사들이 많이 있었다.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을 했지만 그 회사들이 모두 다 잘되고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안에 문을 닫은 회사에서부터 처음엔 곧잘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업들이 부지기수였다.

  김희수는 현장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파악한 생생한 자료를 바탕으로 심도 있는 연구와 학습을 통한 빈틈없는 계획을 수립해 의지와 행동으로 실천했다. 다른 사업가와 차별화되는 자기 분야,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와 계획, 그리고 결연한 의지와 과감한 실행은 김희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최고의 자산 정직과 신용

  그는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정직(正直)과 신용(信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한국인 사업가임을 먼저 밝히고 내세웠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정직과 신용을 조금이나마 더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한 번 믿고 거래를 시작한 사람이나 거래처와는 상대방이 정직과 신용을 변함없이 지키는 한, 자신이 먼저 이를 어기거나 거래를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관계했던 사람이나 거래처는 대부분 수십 년 이상 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였다. 상대방 역시 그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온 사람들이었다.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늘 늘 똑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이라…… 그건 거짓말 안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지요. 엽전이라고 아시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화기에 쓰기 좋은 종이돈이 나왔는데도 옛날에 쓰던 엽전을 그냥 사용한다고 해서 봉건적 습관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쓰던 말이지요.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우리 민족성이 열등하고 게으르며 정직하지 못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국인들을 비하해서 엽전이라고 불렀어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거짓말 안 하는 엽전이다라고 말이에요. 거짓말을 안 하는 정직한 한국인이라는 말이죠. 평생 이걸 지키며 살아왔어요. 이게 바로 제 성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 생활철학

 

재벌과 칼국수

  김희수 이사장은 생전에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돈을 잘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가 없었다. 걷거나 전철을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는 가정부나 파출부가 없었다. 김희수 이사장의 식탁은 언제나 할머니가 된 그의 아내가 차렸다. 한 번 산 옷은 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입고, 밖에서 식사할 때는 누구와 식사를 하건 된장찌개나 몇 천 원짜리 밥상이면 족했던 사람이다.

  김희수는 어딘가로 이동할 때 꼭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동경 외곽에 있는 집 근처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을 했다. 낡은 6층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일곱 평짜리 작은 방이 한때 서른 개가 넘는 빌딩과 일곱 개의 자회사를 거느렸던 금정그룹을 움직이는 야전사령관의 집무실이었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원들이 거의 다 퇴근하고 나면 그는 저녁 7시쯤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가끔씩 저녁 약속이 있거나 행사에 참석할 일이 있으면 지하철이나 버스가 닿지 않는 곳에 한해서 택시를 탔다. 버스로 서너 정거장쯤이면 조금 일찍 나서서 걸어가는 게 편하다고 했다.

  그가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김희수를 만나기 위해 집무실을 찾았다. 그들은 값비싼 양탄자와 으리으리한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호화로운 집무실 앞에서 잘 갖춰 입은 여러 명의 비서들이 도열하여 자신들을 맞이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개 그의 허름한 방 앞에서 두리번거리거나 우왕좌왕하곤 했다.

오래된 책상에 낡은 의자 하나, 서너 명이 앉으면 딱 맞는 응접세트가 김희수의 방에 있는 집기 전부였다. 놀란 표정을 짓는 방문객들은 그를 앞에 두고서도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살폈다. 유달리 한국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언젠가 어떤 지인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희수 사장님을 만나면 누구나 세 번 놀라는데, 첫 번째는 그분의 재산을 보고 놀라고, 두 번째는 그분의 집무실을 보고 놀라며, 세 번째는 그분의 검소한 모습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저는 이게 꼭 좋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야 그렇다 쳐도 이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집무실 좀 번듯하게 꾸미시고 기사 딸린 승용차도 좀 타고 다니십시오. 뵙기 민망합니다.”

  이것 보시오. 집무실이야 일을 하는 공간이니 내가 일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으면 그만인 것 아니오? 그리고 아직은 걸어 다니는 데 지장이 없으니 차가 무슨 필요가 있겠소? 걸어 다니면 건강에도 좋고, 돈도 절약하고, 환경오염도 시키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요?”

 

  먹는 것도 그랬다. 그는 몸에 좋은 음식을 저렴하게 잘 먹으면 그만이지 음식에 사치를 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면 오래 전부터 다니던 작은 우동 가게를 자주 갔고, 한국에 있을 때면 된장찌개나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 지나치게 비싼 음식을 탐하거나 많이 시켜 놓고 잔뜩 남기는 것은 낭비 중의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점심 한 끼 먹는데 어떻게 몇 만 원짜리를 먹습니까? 저는 한국을 오가면서 만 원짜리 이상 되는 음식을 거의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5천 원짜리 된장찌개면 족합니다.”

 

  김희수에게 돈이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몇 시간만 지나면 또 배가 고픈 게 인간이다.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다녀도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지 못한다. 돈은 내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1987년에 한국의 어떤 신문기자는 그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

 

  신임 중앙대학교 김희수 이사장은 칼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1 5천억 원의 부동산 재벌

 

그 기자가 보기에재벌칼국수는 기사 제목으로 뽑아도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재벌들에 비해 일본에 있는 그의 집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서민들의 집에 가도 다 볼 수 있는 소박한 가구들뿐이었다. 그나마 그 집도 개인 재산이 아니라 회사 소유의 관사였다. 그가 한국을 오갈 때마다 타던 비행기는 늘 2등석이었다. 가장 비싸고 좋은 자리에 앉아 오간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양주를 마시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일로 선물을 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파는 면세 양주를 사서 보관해 두었다가 선물을 하곤 했다. 술을 마실 자리가 있으면 대개 소주 몇 잔이면 충분했다.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한 뒤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동안 묵을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학교 근처에 집을 마련했지만 이렇다 할 세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경에서 서울을 나올 때마다 집에서 쓰던 이런저런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그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자 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자신에게 재물을 내리신 것은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먹이고 입히는 데 자신의 재물이 따뜻한 밥 한 그릇 되게 하기 위함이며, 어둡고 그늘진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데 자신의 재물이 밝은 등불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재물을 가진 자의 소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은 더욱 근검절약하며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와 성공은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자신이 이룬 부와 성공을 통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뭔가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부자들이야 말로 사회와 국가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희수

최고의 지지자 아내 이재림

이런 그의 물질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지해 준 사람은 바로 아내 이재림이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처럼 승용차를 타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볼일을 봤다. 세탁기를 사용해서 빨래를 해본 일도 없었다. 모두 직접 손으로 빨래를 했다. 세탁기를 사주려 해도 손으로 빨아야 개운하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친 까닭이다. 아이들 셋을 낳아 키우면서 한 번도 가정부나 파출부를 부른 일이 없었다. 물론 음식들도 모두 본인 손으로 만들었다.

  장을 볼 때는 언제 어디를 가야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어, 반드시 그곳을 가서 사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할인 쿠폰이나 특별 행사 초대권, 경품 교환권 등을 받으면 꼭 챙겨 두었다가 활용하곤 했다. 옷은 늘 수수한 차림을 좋아하고, 액세서리도 별다른 걸 하지 않았다. 그 흔한 보석반지 하나 끼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업이나 학교 일로 아내와 함께 외국에 나갈 때면 관광지나 쇼핑 타운 등을 둘러볼 기회가 생기곤 했다. 이럴 때도 그의 아내는 여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가구나 보석, 패션용품들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떨 때는 내가 그래도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인데, 아내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걸 제일 싫어하는 것처럼 그의 아내 역시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이었다. 살림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틈틈이 가야금을 배우러 다니고, 꽃꽂이나 요리, 수예 등을 배워 나중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설 만큼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생전에 집에 있던 침대보나 이불, 베개, 쿠션, 테이블보 같은 것들은 모두 아내가 만들었다.

 

  그가 중앙대학교를 맡게 된 어느 날 그의 아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여보, 저 이제부터 한국어를 좀 체계적으로 배워 보고 싶어요.”

  한국어를? 느닷없이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본격적으로 한국 교육계에 뛰어들었으니 앞으로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가 점점 더 많아질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저도 함께 가야 할 모임이 늘어날 텐데, 그때 제가 한국어를 잘하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당신 일을 돕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이재림은 그 후 연세대학교 부설 한국어학당에 등록하여 1 6개월 동안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다. 공부를 하는 사이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부부 동반으로 가야 하는 모임들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한국말로 모임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한국어 공부에 푹 빠져 있던 그녀가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보, 한국 여성들은 일본 여성들에 비해 훨씬 더 화려한 것 같아요.”

  그래요? 어떤 점이 그렇소?”

  옷도 비싼 옷을 많이 입고, 액세서리도 명품들을 선호하고……. 집만 해도 일본인들은 토끼장 같은 집에 살곤 하는데, 한국 여성들 사는 집에 초대받아 가봤더니 거의 다 수십 평 대 맨션아파트에 살고 있더라고요.”

  한국은 부자들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오고, 가난한 사람들은 조금 더 위로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참 보기 좋을 텐데…….”

 

  김희수는 이런 아내가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한다고 했지만 남편 또한 아내를 존경했던 것이다. 김희수가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그는 형과 함께 어군탐지기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뒤 수금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지자 회사를 그만두고 제강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녀는 묵묵히 그를 지지해 주었다.

  얼마 후 제강사업마저 접고 다시 부동산 임대업에 뛰어들었을 때도 아내는 남편을 믿어 주었다. 빚을 얻어 겨우 지은 금정 제1빌딩이 임대가 되지 않아 한겨울에 난로도 없는 사글셋방에서 생활할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아내는 불평 없이 잘 참아 주었다.

  그가 인재양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조국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의 아내는 과거의 고생을 추억 삼아 일본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의 교육을 위해 쏟아 부으며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녀는 또 다시 남편을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학생들이 이사장실을 점거하고 데모가 끊이지 않을 때면 그녀는 새벽마다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나갔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집을 나서는 날 그녀는 남편 등 뒤에 대고 속삭였다.

 

  요즘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힘을 내세요. 여보!”

 

  이런 아내를 위해 김희수 나름대로 작은 보답을 한 일이 있었다. 교육 분야에 첫발을 내디디며 일본에 외국어전문학교를 세울 때의 일이다.

 

  여보, 학교 이름을 정했어요.”

  뭐라고 정하셨나요?”

  수림외국어전문학교예요. 어때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김희수의자와 이재림의자를 합쳐서 만든 거요. 한자로 하면빼어날 수()’수풀 림()’이니까빼어난 숲혹은아름다운 숲이라는 뜻이니 좋지 않소?”

  그러네요. 우리 이름을 합치니 그런 좋은 뜻이 나오네요. 괜찮아요.”

 

  수림외국어전문학교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고, 계속해서 수림이라는 이름은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을 목적으로 세워진 재단에도 사용되어 수림재단이 만들어졌다.

 

남의 밥을 먹어 봐야 세상을 안다

  김희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그에게 단 한 푼의 재산도 물려주신 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사업가를 대표할 정도로 큰 기업을 일구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께서 그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에게 돈 대신 돈을 벌고, 관리하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눈에 보이는 물질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정신과 지혜를 남겨 주셨기 때문이다. 이건 돈보다 훨씬 더 크고 오래 가는 진정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수의 자녀들은 부자인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처럼 뼈에 사무치는 고생을 겪으며 살지 않아도 됐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학비가 마련되면 학교를 다니고, 또 돈이 없으면 휴학을 하느라 3년만 다니면 되는 학교를 4~5년씩 다니고, 20대 중반 이전에 끝마칠 학업을 30대가 다 돼서야 끝마치는 일은 당하지 않아도 됐다. 주린 배를 채우느라 진달래꽃을 따먹고, 그 쓰디쓴 소나무껍질을 씹으며 눈물 흘리는 일은 경험하지 않아도 됐다.

  한창 유치원에서 뛰놀거나 초등학교를 다닐 만한 어린 시절에 먹고 살 길을 찾아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 버린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 틈만 나면 마을 언덕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던 그런 체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김희수와 그의 아내는 세 자녀를 정성껏 사랑으로 돌보며 키웠다. 공부는 본인들이 했지만 아무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끔 뒷바라지를 했다. 김희수는 평소 부모로서 그가 자식들에게 해줄 몫은 바로 여기까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자신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배운 대로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같은 말이라도 받아들여지는 게 다를 수 있겠지만 할 수 있는 대로 본인이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첫째, 그는 자녀들에게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수림재단의 장학생들 중에는 정말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그런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데도 공부를 안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자녀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손자손녀들까지 공부를 잘한다. 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둘째, 그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수재(秀才)는 학문에 의해 형성되지만 인재(人材)는 고생과 노력에 의하지 않고는 형성되지 못하는 법이다. 부귀의 원천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그는 자본과 자원이 없어도 근면과 성실로 얼마든지 부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운명을 개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은 게으른 사람에게 그 어떠한 보상도 내려 주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셋째, 그는 자녀들에게 절대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거나 피해를 끼치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베풀고 돌보고 나누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신세지고 피해를 끼치며 산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비록 남에게 속거나 피해를 입더라도 자신은 결코 남을 속이거나 못할 짓을 하지 않는다면 비로소 그 삶은 가치 있게 빛날 거라고 말했다. 이런 자세로만 산다면 정직과 신용은 저절로 자신을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키웠다며 자식 자랑 하는 부모들이 있다. 김희수에 따르면 이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무엇이 될 것인가?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일부러라도 고생을 시켜가며 키워야 한다. 김희수의 아내는 두 딸이 결혼하기 전에 시장을 봐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빨래하는 일을 돌아가며 골고루 시켰다고 한다. 아이들도 불평하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이며 집 안 일을 거들었다는 것이다. 김희수 자신도 시간이 나는 대로 집 안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이건 그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생전에 자식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따라줘서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 없이 열심히 자기 맡은 바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늘 대견하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회사는 아들에게 물려주실 건가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재단 이사장 자리를 아드님에게 물려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서서히 훈련을 시키고, 이사진에도 참여할 기회를 주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는 이럴 때마다 아무리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해도 사람마다 타고난 개성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른데 다른 것도 아니고 학교나 사업과 관련된 일을 어떻게 억지로 할 수 있겠느냐며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자녀들 인생은 자녀들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그의 간단명료한 대답은 참으로 김희수다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양호 씨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일이었다. 회사 임원들은 당연히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김희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닙니다. 내 아들이라고 해서 회사에 쉽게 들어와 일한다면 제대로 땀 흘려 일하는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고생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남의 밥을 먹어 봐야 비로소 세상을 아는 법입니다. 알아서 잘 할 겁니다. 다른 회사에 취직하게 그냥 놔두십시오.”

 

윤리 없는 금전은 다 쓸 데 없는 것이다

 동경에 있는 김희수의 집 부엌 앞에는 자그마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만당(晩堂) 이혜구 선생이 직접 쓴 글씨를 담은 액자다. 액자에 담긴 글의 내용과 그 뜻은 이렇다.

 

  國正天心順(국정천심순): 나라가 올바르면 하늘도 순조롭다.

  官淸民自安(관청민자안): 관리가 깨끗하면 백성들은 자연히 편안해진다.

  妻賢夫禍少(처현부화소): 부인이 현명하면 남편이 입을 화가 적게 된다.

  子孝父心寬(자효부심관): 자녀가 효도를 다하면 부모의 마음이 넓어진다.

 

  이 글귀의 의미가 바로 김희수 가정의 생활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면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모두 다 편안한 법이다. 제 분수를 모른 채 자기 자리를 벗어나고, 정도를 비켜나 요행이나 술수에 빠지면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파탄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흔들림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자기 분수를 잃지 않는 삶을 살아 왔다.

  1982년 여름부터 1983년 가을까지 일본에서 발행되는 교포계 신문인 통일일보에서는내일을 열고 있는 재일동포 상공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연재한 일이 있었다. 교포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한 사람씩 소개하는 코너였다. 김희수는 이 연재물에 열 번째로 소개 되었다.

 

  사업체를 이끌어 가시려면 굉장히 바쁘실 텐데, 평소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건강이라…… 안 쓰면서 없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돈 쓸 일이 없으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좋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다니면 운동이 되어 좋고, 적게 먹고 뭐든지 맛있게 먹으면 소화 잘 돼서 좋고…… 안 그렇습니까?”

 

많은 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부자가 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윤리관 없는 금전은 사실 아무 쓸 데가 없는 것이지요. 부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올바른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진심이었고, 확고부동한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넌 이래 일본에서 반드시 성공하여 일본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기술을 배우고 기업을 일으켜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다져야 했다.

둘째, 언제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지닌 채 살아야 했다.

셋째, 사업을 하는 동안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경영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했다. 그가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면 그 결과는 이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얻어진 것이다.

  한국 속담에 이런 게 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김희수는 이 말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윤리관이 전혀 없는 배금주의 사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개처럼 벌어서라는 말 속에는 부자만 될 수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도 괜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돈을 버는 과정은 반드시 청렴하고 윤리적이어야 하며, 땀 흘려 정당하게 번 돈만이 이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촉매가 된다는 것이 김희수의 생각이었다.

  정승처럼 써라는 말 속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일단 자신이 번 돈은 다 자기 것이므로 어떻게 써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담긴데다가, 마치 적선하듯 돈 없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베풀어 준다는 권위적인 생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잘 쓰기는 더 어렵다고 했다. 김희수는 겸손하고 조용하게 나누는 돈만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기운이 된다고 믿었다.

  그가 일본의 한 은행 간부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성공하기를 원하는데, 왜 성공한 사람은 늘 소수일까요?”

  성공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성공에 대한 기준도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요즘은 부자가 되는 걸 다들 성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 아닙니까?”

  글쎄요……. 저는 사람이란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재가치가 있는 인물로 인정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웃과 사회로부터 자기 존재를 충분히 가치 있게 평가 받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그 위치가 어디든 무엇을 하든 그는 성공한 사람일 겁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성공이란 그가 이룬 업적이나 그가 가진 소유의 정도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 온 내면의 품격과 그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주변 사람들의 평에 의해 가늠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중앙대학교 이사장 시절 신규 직원을 채용할 때나 신임 교수를 면접할 때마다 그가 빠뜨리지 않고 던졌던 질문이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뭔지 아시오?”

 

  외국 대학에서 그 어려운 박사 학위를 받고, 최첨단 학문 분야에서 선두를 달린다는 쟁쟁한 실력자들도 이 질문 앞에서 다들 땀을 뻘뻘 흘렸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지식과 위대한 사상을 가득 담고 있다 해도 가슴속에 윤리와 도덕이 없으면 그 학문과 지식이 우리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김희수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병폐를 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철저한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질주한다면 그 사회와 공동체엔 희망이 없다. 공부도, 사업도, 성공도 이웃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사회 속에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희수는 교육을 통해 젊은 세대들이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바른 지식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사람이다. 그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조국의 교육에 투신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회에 대한 기여나 국가에 대한 충성, 인류에 대한 봉사는 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잉태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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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당 선생은 1931년 경성제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방송국에 취직한 뒤 국악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우리 음악과 인연을 맺은 분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 음악부 교수로 부임을 했고, 1959년 서울대 안에 국악과를 창설하여 초대 과장으로 재직했다. 국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해 국악을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 시킨 한국 음악학의 태두로 꼽히는 분이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부동산 재벌, 돈 많은 재일교포,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인 긴자에 수십 개의 빌딩을 가진 남자, 자산 10조 엔을 소유한 사나이 등 그를 둘러싼 수식어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차츰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돈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사람을 마음으로 대했지 결코 소유를 보고 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그는 돈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김희수는 돈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여겼다.

 

  오로지 돈을 버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라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 것인가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목표가 불분명하거나 건전하지 않다면 돈을 많이 벌수록 그 사람의 삶은 황폐해질 것이다.

―김희수

 

  김희수 이사장은 오직 정직과 신용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조국과 사회를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고 싶어했다.

  예전에 종로 금정빌딩에 있던 금정상호신용금고의 김희수 이사장 집무실에 가면 커다란 휘호 하나가 걸려 있었다.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이 글귀는 서예가 권창륜 선생의 휘호로 김희수의 인생관을 담고 있는 좌우명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손에 뭔가를 잔뜩 쥐고 나오는 사람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 그 어떤 권력자도, 부자도, 과학자도, 대학자도 죽을 때 뭔가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났다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인생길에서 예외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늘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간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욕망이나 탐심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매사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긍정의 철학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면 누구나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좀 더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김희수

 

  김희수가 1987년 중앙대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이래 사업을 확장하고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동안 축적해 왔던 부를 사용하여 조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소유를 환원하려는 뜻이었던 것이다.

  김희수 이사장은 그의 인생철학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났다. 그는 늘 돈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돈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인생에서 돈을 남기면 그가 떠난 자리에 다툼과 욕망만 남지만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남기면 그가 떠난 자리에 사랑과 평화가 퍼져나갈 거라고 믿었다. 김희수 이사장은 누군가 자신을 사람을 남기는 일에 헌신하다 간 사람으로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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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창륜(權昌倫), 호는 초정(艸丁). 경북 예천 출신으로 중앙대 국문학과를 나온 그는 20세기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과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 형제의 학맥을 계승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다. 청와대 인수문과 춘추관, 운현궁의 현판도 그가 썼다.

 

 

5장 인재양성의 꿈 교육철학

 

조국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 남은 일생을 걸다

 김희수는 평생 가슴에 한을 담아 둔 채 살아 왔다. 배우지 못한 한, 가난하게 살아온 한, 나라를 잃은 한이었다. 가난으로 인해 늘 굶주림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고,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 태어나 이국 땅에서 온갖 차별과 업신여김 속에서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한이 마음속의 한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현실 속에서 정당하게 극복하고 넘어섬으로써 한을 풀 날을 기대하며 살아온 것이다.

김희수에게 한풀이는 자기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한풀이가 민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인식 하고 있었다. 조국의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야 말로 자기 가슴에 담아둔 세 개의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토대가 갖춰져 있지 않는 한 국제사회에서 절대 좋은 대우나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에서 살며 뼈저리게 절감한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우리 민족이 가진 우수한 역량을 길러낼 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는 길은 바로 교육이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일본에서의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조국의 교육 분야에 뛰어들어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 남은 인생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수림 외국어 전문학교의 설립

  좋지 않은 여건으로 금정고등학교를 세우는 일이 좌절되고, 당시 제5공화국 정부의 대학 신설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대학을 설립하는 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의 학교 설립이나 인수 계획에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김희수는 결국 일본에 먼저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985년부터 동경 시내에 수림외국어전문학교를 설립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앞으로 세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긴밀히 연결되어서 국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재들을 배출하는 대학을 세운다면 시대에 맞는 경쟁력을 갖춘 좋은 학교로 성장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를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우리말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나아가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재일교포 2세나 3세 등에게도 모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일본의 젊은이들은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면 이 학교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해와 교류의 폭을 넓히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1985년 가을부터 시작된 학교 설계와 건축공사가 2년 만인 1987년 가을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988 1월 마침내 수림외국어전문학교는 학교법인 금정학원의 2년제 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배우는 4개 학과를 개설하고, 최신식 설비를 갖춘 신축 교사에서 첫 입학생 320명을 뽑아 개교하였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서방세계와 교류가 거의 없던 냉전시대의 상대진영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인구가 세계 인구의 25퍼센트 가량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중국어는 국제화 시대를 대비하는 주요 외국어라고 판단하였다. 머지않아 개방만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인재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 예상한 것이다.

 

중앙대학교 이사장 김희수

수림외국어전문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전념하는 중에도 그는 어떻게 하면 한국에 학교를 세워 본격적으로 인재양성에 매진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였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대학입시 과정으로만 여겨지는 고등학교보다 대학교를 인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최고학부인 대학교를 통해서만 그가 꿈꾸는 진정한 교육의 목표를 이룰 수가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설립자가 있는 대학을 인수한다는 건 많은 위험 부담을 안는 일이었다. 운영을 포기할 정도로 학교의 재정이 심각한 상태라면, 그런 학교를 정상화 시키기 위한 자금이 웬만한 대학을 새로 설립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비슷할 만큼 큰 자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대학에 남아 있는 잘못된 관행과 질서를 바꾸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희수에게 대학의 운영은 순수하게 조국의 인재를 양성하자는 차원일 뿐이지 명예를 얻거나, 재산을 늘리거나, 어떤 파벌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경영 상태가 부실해서 위태로운 대학이 있는데도 이를 모른 채 하고 새로운 대학을 설립한다면 국가적으로나 우리 민족 전체로 봐서도 대단한 낭비라고 판단했다.

  결국 김희수는 기존에 있는 대학 중 한 곳을 인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나중에 대학을 인수한 이후를 대비해서 한국에 사업체를 따로 두기로 했다. 학교 재단의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 금정그룹과의 연계를 위해서도 이런 작업이 필요했다. 1986 5월 서울에 있는 일양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여 회사 경영을 한국에 있던 고모의 아들, 즉 고종사촌인 조병완 사장에게 맡겼다. 그는 국회사무차장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후 김희수가 한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대학을 인수할 즈음 실무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쯤 또 다시 정부 관계자로부터 지금 중앙대학교가 매우 위험하니 인수를 검토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대주상호신용금고 변칙예탁금 및 고소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에 각 은행에서는 임철순 이사장이 발행했던 어음들을 부도처리 하면서 713억 원의 학교 부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건이 커지자 임철순 이사장은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김희수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는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기로 전격 결정하였다.

일단 빚부터 갚아야 했다. 그 많은 현금이 있을 리 만무하니 일본에 있는 땅과 빌딩들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들여왔다. 그런 다음 엔화를 우리 돈으로 환전을 해서 전임 이사장이 발행한 어음을 전부 회수해 현금으로 변제해 주었다. 정확하게 확인하고 대조해서 구분하지 않고 회수된 어음은 전부 학교 부채라 생각하고 변제를 한 것이다. 심지어 전 재단에서 학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끌어다 쓴 사채까지도 전부 갚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막대한 학교 부채를 다 청산한 후 1987 9 12일 김희수는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중앙대학교의 교육이념은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것이었다. 의롭고 참되게 살자는 것이니 김희수의 인생관이나 교육철학과도 잘 맞았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중앙대학교를 반드시 한국 최고의 사립대학, 나아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유수한 대학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일본의 대학들처럼 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인재들을 배출하여 일본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그런 대학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중앙대학교를 인수하였을 무렵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인터뷰 전문

Q. 중앙대학교를 인수하게 된 동기와 육영사업에 대한 이사장님의 견해를 밝혀 주십시오.

A. 사실 고국에서의 육영사업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앙대 인수 이전에도 4~5개 대학에서 인수 교섭이 있긴 했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연구 중에 있었는데, 하늘의 뜻이었는지 70년 전통의 중앙대학교를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간혹부족한 것 없이 생활하고 있으면서 고민스런 대학 운영은 왜 하려 드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중앙대학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면 역사, 전통, 규모 등 모든 면으로 미루어볼 때 반드시 세계적인 일류 대학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작년 재단 인수 직후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서명원 장관을 만나서도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범적인 경영으로 반드시 훌륭한 대학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약속은 제가 제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Q. 학생 교수 교직원을 포함한 모든 대학인의 바람직한 자세는 어떤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A. 한마디로 혼연일체가 되어야지요. 대학의 발전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학생, 교수, 교직원 모두가학교 발전이라는 대명제를 염두에 두고 각자 맡은 일에 열의를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은 우선 학업에 충실하며 자기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수님들은 연구와 교육에 몰두해야 합니다. 진지하게 연구하여 얻어낸 결과가 강의에 반영되는 작업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 교직원들은 모든 학교 행정업무의 효율 극대화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행정업무의 선진화도 대학 내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겠지요. 물론 오늘날 대학의 현실을 보면 학교와 학생, 교수와 학생간의신뢰회복이 선행되어야 할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믿고 존경하는 풍토가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합니다.

 

Q. 앞으로 중앙대학교가 나아갈 방향과 계획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 주시겠습니까

A. 일류 대학이 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모든 것을 이루려면 긴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우선은 세 가지에 힘써 볼까 합니다. 첫째, 졸업생의 취업 문제에 좀 더 관심을 두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 리크루트를 인수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5백여 교수님들의 노력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업을 위한 적성검사, 기술교육 등 인력관리를 충실히 해나가겠습니다. 둘째, 두 개의 부속병원과 의대를 통합하는메디컬 캠퍼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폭 피해자 3만 명을 치료할 원자력병원도 세울 계획입니다. 이를 위한 재원으로는 일본인들의 침략을 사죄하는 의미의 기부금과 재일교포 실업가들의 조국동포를 위한 재산의 사회 환원 차원의 기부금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므로 강력히 추진해 나아갈 것입니다. 셋째로는 교내의 비리와 부조리의 청산입니다. 이것은 저 혼자 힘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모든 중앙대학교 가족들이 한마음이 되어 함께 노력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유일한 부채 없는 대학, 중앙대학교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 셈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구체적으로 학교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희수는 한국과 한국 대학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밝은 금정상호신용금고 조병완 사장을 재단 상임이사로 임명해 자신을 돕도록 한다. 그리고 그의 추천으로 이재철 총장을 자신과 함께 일할 첫 번째 총장으로 모셔 온다. 그런 다음 김희수는 한국의 사정과 교육계의 현실 등에 대해 많은 조언을 듣곤 했던 이백순 선생을 찾아간다. 그는 이백순 선생께 중앙대학교 재단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선생은 흔쾌히 이를 수락해 재단 이사로서 많은 힘이 되어 주신다.

 

  이사장 취임식이 끝난 후 김희수는 아내와 함께 흑석동과 안성 캠퍼스의 곳곳을 둘러보며 학교의 문제점들을 직접 파악하고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듣는다. 한창 자라나는 학생들이 쓰기에 좁고 숫자도 적은 기숙사, 실습시설이 부족한 과, 지원이 필요한 과 등 여러 문제들을 파악해 나간 것이다. 김희수는 이를 통해 참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 재단 문제와 어수선한 시국 등으로 학교 안팎에 많은 문제들이 있는 줄 압니다. 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저의 순수한 뜻을 이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사장으로서 앞으로 우리 중앙대학교를 공부하는 학교, 연구하는 대학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따라서 우선 면학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생각입니다. 기숙사나 도서관 시설을 확충하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제도를 개선하며, 교수님들과 교직원들의 보수를 사립명문대 수준으로 인상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마음을 모아 도와주신다면 10년 안에 중앙대학교를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으로 키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희수는 전체 교수회의를 통해 이렇게 다짐하고 선포했다. 다시는 우리 세대가 겪었던 것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실력을 길러야만 했다. 자신처럼 평생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그가 할 일은 대학을 통해 이런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것, 오직 이것밖에 없었다.

  김희수는 이런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해 대학에서 달성해야 할 교육의 목표를 인격 형성을 위한 전인교육(全人敎育)으로 설정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용(中庸)의 덕을 쌓은 지성인(知性人)을 육성하여 사회와 국가에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겸허한 인간, 정의로운 인간, 창의적인 인간,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데 교육의 목표를 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지성인이란 바로 이런 덕목을 고루 갖춘 인간을 말하며, 대학 교육은 이런 인재를 배출하는 데 모든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학교 분위기가 살아나려면 교수들이 먼저 기운을 내야 했다. 그때까지 중앙대학교는 몇 년째 교수들의 봉급을 올려 주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최근에는 제때 지급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교수들의 봉급을 30퍼센트 정도 인상하여 지급했다. 언제 페인트칠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흉물스럽던 건물 외벽과 내부를 산뜻하게 다시 칠하고, 깨진 유리창이나 문짝들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영하 5도 이하일 때만 겨우 공급했던 난방용 유류를 수시로 공급하여 냉난방 시설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새로운 시설을 갖추고, 제도를 도입하고, 필요한 건물을 신축하고, 실력 있는 우수한 교수들을 채용하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약속했던 기숙사는 1991년 봄까지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면적 1800여 평 규모로 건설을 하였고, 도서관은 지하 1층 지상 5층에 연면적 5000여 평 규모로 1988년 봄에 완공을 하였다. 계속해서 학생회관, 법과대학, 조소과 실습동, 전산센터, 경영대학, 대학원, 교수 숙소, 건설대학, 복지관, 여학생 기숙사, 이과대학 건물 등을 새로 지었으며, 산업대학, 사회과학관, 공과대학, 서라벌 홀, 예술대학 건물 등을 증축하였다. 근검절약을 평생 신앙처럼 여기며 살던 김희수가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돈을 아낌없이 펑펑 쓰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 그를 알던 많은 일본사람들은 일본에서는 돈을 벌기만 하더니 한국에서는 돈을 쓰기만 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김희수가 미처 생각하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은 너무도 다른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정서나 풍토, 기업이나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 공무원들의 생각과 자세, 대학의 분위기, 학생들과 교수들의 관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국은 자신의 조국이고, 그는 한국 사람이니 본인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평생을 살며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일본식 사고방식과 정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당연히 이런 사고방식과 정서가 쉽게 받아들여 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기업을 하듯, 새로운 사업을 벌이듯 그렇게 학교 일을 시작하고 싶지가 않았다. 자기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학생들이나 교수들, 교직원들, 그리고 학부모들과 한국 사회 나아가 정부에서도 이런 자신을 이해하고 협조하며 한마음으로 믿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를 연일 돈 나와라 뚝딱 하고 방망이 한 번 휘두르면 얼마든지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사람처럼 묘사하고 있었고, 교수들은 그 동안 참아왔던 목소리를 한꺼번에 내기 시작했으며, 학생들은 학교가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듯 바뀌리라는 장밋빛 환상을 갖기에 이르렀다. 교직원들과 보직교수들은 민주화 열기에 편승하여 인기 발언만을 일삼으며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허망한 약속들을 남발하고 있었다.

김희수가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면서 공식적으로 약속한 것은 기존의 학교 부채를 전액 청산하고, 중앙대학교의 숭고한 창학 이념을 받들며, 교가와 교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70년 학교 전통을 이어나가고, 서울과 안성 두 캠퍼스를 분리하지 않고 공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고 임영신 박사의 동상 등 그분을 기리는 유물들을 잘 보존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외에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당장 급한 것부터 우선 실행을 하되 중장기적인 것은 좀 더 학교 현황을 파악한 뒤에 면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세워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에 취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가 학교에 얼마를 더 투자할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즉 학교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중에 몇몇 학교 책임자들에 의해 엉성하기 짝이 없는,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게다가 이사장인 김희수에게 일언반구조차 보고되지 않은 그런 마스터플랜이 불쑥 발표되고 말았다. 그것은 신임 이사장이 사재를 출연하여 흑석동과 안성 캠퍼스 시설을 획기적으로 확충 또는 개선하며, 1000병상 이상 크기의 대학병원을 새로 지어 동양에서 가장 큰 최신식 병원으로 만들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 무렵 이 정도 규모의 병원은 서울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밖에 없었다. 이런 내용은 전혀 여과 없이 그대로 언론에 발표되었다. 그러자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빚 때문에 학교가 곧 부도날 위기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일순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버리고 말았다. 물론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연구와 분석 작업 끝에 모두의 지혜를 모아 중장기적으로 그런 계획을 세워 합리적인 비용이 산출되었다면 김희수는 이를 얼마든지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이건 그야말로 느닷없이 튀어나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니 마스터플랜에 있는 사항들을 단기간에 이루어 내려면 1000억 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비용은 점점 더 불어나 2000억 원이 들어갈지 3000억 원이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재단 이사장에게 보고도 없이 이런 발표를 할 수가 있었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 후유증은 너무도 컸다.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표를 했든 간에 최종적인 책임은 이사장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재단 이사회를 통해 실무진을 구성해서 상세한 연구 검토를 거쳐 이듬해 봄에 수정된 마스터플랜을 발표하였다. 수정안은 양 캠퍼스의 균형적인 발전을 기초로 하여 제1캠퍼스는 3 3941평을 신축 또는 증축하거나 기존 시설을 대폭 보수하고, 2캠퍼스는 1 6000평을 신축 또는 증축하여 총 5년 동안 395억 원의 예산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필동 성심병원과 용산병원의 2개 부속병원, 그리고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메디컬 캠퍼스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1만여 평에 달하는 부지를 물색하고, 부지 매입과 건설 등에 약 5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워낙 규모가 큰 사업이라서 대상 부지가 마련되는 대로 별도의 건설 계획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한 직후 그가 누렸던 벅찬 감격과 환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학교 도처에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 전임 이사장과 함께했던 일부 교직원들과 교수들, 총동문회 인사들이 서서히 김희수를 궁지로 몰아갔다. 김희수는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온갖 비리로 인해 물러난 전임 이사장과 친분 관계에 있었던 교직원들, 그리고 그가 임명한 보직교수들과 재단 관계자들을 한 사람도 징계하지 않고 그대로 감싸 안았다. 그들로서도 조직 체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기에 새로운 재단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 자신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김희수 이사장에 대해 반감을 가진 세력들은 범민족 중앙양심소리 투쟁위원회라는 이상한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학교 여기저기에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으며, 김희수와 재단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대다수 학생들과 교수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는 김희수 이사장 개인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이어 재단 측의 학교 발전에 대한 투자 의혹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마스터플랜을 왜 빨리 실행하지 않느냐면서 재단 퇴진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툭하면 우르르 몰려다니며 총장실과 이사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게다가 집무실에 있는 집기들을 끌어내 본관 앞에 있는 연못에 빠뜨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왕성한 활동은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심지어 일부 학생들은 일본에까지 건너와 금정그룹 대표 김희수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를 한 의혹이 있으니 철저한 세무조사를 해야 한다며 국세청에 고발장을 접수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족들과 일본에 있는 지인들의 걱정스러운 만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위해 50년을 기다려 왔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지금은 저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 진심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본인이 한 일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기에 흔들림도 후회도 없었다. 생전 겪어 보지 못했던 시련들이 거듭해서 밀려들었지만 김희수는 그럴수록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더욱 굳게 다졌다.

 

  저는 앞으로 목숨을 걸고 중앙대학교를 운영할 것입니다. 이 대학이 발전해서 일류 대학이 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도 없습니다.”

―김희수

 

  김희수는 한국에 있는 중앙대학교와 이에 속한 유치원과 초고등학교, 그리고 일본에 있는 수림외국어전문학교의 모든 학생과 교사, 교수들이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실력을 기르는 일에,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열심을 다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다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모든 뒷바라지를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그 일에 장애가 될 만한 것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87년 가을부터 그는 한 달의 반은 일본에서 보내고, 나머지 반은 한국에서 보내는 생활을 계속했다. 비행기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혹시 일본에 있는 교재나 학술 자료 중에 서울에 필요한 것이 있는지, 반대로 서울에 있는 교재나 학술 자료 중에 동경에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가며 필요한 것들을 가방에 넣어 다니곤 했다.

  중앙대학교는 예전부터 국내 다른 어느 대학들보다 예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다양한 장르에 걸쳐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를 선도해 온 학교였다. 김희수 역시 이 분야에 뜨거운 애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중앙대학교의 이런 전통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들을 경주하였다. 1992 8월에는 예술대학 건물을 증축하고 1995 11월에는 예술대학원을 설치하였으며, 1999 9월에는 첨단영상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99 10월에는 약 300억 원을 들여 아트센터를 준공하였다. 또한 김희수는 음대 박범훈 교수가 상임지휘자로 있는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연주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람하며 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그 후 김희수는 중앙대 총장으로도 일했던 음대 박범훈 교수와 함께 갖은 노력 끝에 2000 10월 국내 최초로 국악대학을 설치하고, 이듬해 봄부터 신입생을 맞이하였다. 국악대학 안에는 극음악, 창작극음악, 관현악, 성악 등의 전공이 개설되었다. 다른 대학에도 국악과는 많이 있었지만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당당히 위용을 갖추어 출범함으로써 국내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과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2001 9월에는 국악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김희수는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을 지어 메디컬 캠퍼스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말에 터진 한국의 소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그때까지 이룩했던 김희수의 경제적 기반을 한일 양국을 통해 모두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다.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인해 흑석동 캠퍼스에 딸린 부속유치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부속고등학교를 강남구 도곡동으로 옮긴 뒤 그 자리에 부속병원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2000 5월 말 흑석동 캠퍼스에 부속병원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고 자금이 여의치 않자 2004 2월 필동에 있는 부속병원을 동국대 법인에 매각하여 그 대금으로 공사를 계속 진행하였다. 오랜 진통 끝에 2004 12월 공사를 모두 마치고, 2005 1 18일 드디어 연건평 1 8217평에 562개의 병상을 운영하는 중앙대학교 병원을 개원하였다. 김희수는 흑석동에 웅장하게 들어선 중앙대학교 병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다.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을 지어 메디컬 캠퍼스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데 대한 안도감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병원은 그냥 병원이 아니다. 김희수라는 한 인물이 살아온 시대를 마감하는 피와 땀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일하던 22년 동안 여러 가지 부족하고 미비한 점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는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을 계속해 왔다. 학교 소유의 토지는 약 1 2000여 평이 증가하였고, 양 캠퍼스와 부속학교에 신축한 건물은 9 2000여 평이나 늘어났으며, 이로 인해 학교 재산은 3500여 억 원이 증가하였다. 신임 교원들을 꾸준히 채용하여 처음 300여 명이던 교수들이 퇴임 시 80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

 

조림사업과 인재양성

  김희수는 1960년대 중반부터 부동산 사업과는 별도로 산에 나무를 심는 조림사업을 진행해 왔다. 그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 사람이 자라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어린 묘목을 땅에 심을 때는 혹시 바람에 넘어지지나 않을까, 빗물에 쓸려가지나 않을까, 물을 너무 적게 주면 말라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다가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고 키가 성큼성큼 커 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나중에 거목이 되어 무성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면 그 보람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 된다고 한다.

  사람을 돌보고 키우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뭔가 부족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이고, 어리석게 보여도 꾸준히 믿고 격려하면서 열심히 가르치는 가운데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거목처럼 우뚝 자라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많은 그늘과 공기와 열매를 공급하는 인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약간 부실해 보인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잘라 버리거나 뽑아 버린다면 묘목이 거목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 또한 훌륭한 인재로 자라날 수 없는 법이다. 나무나 사람이나 이를 잘 돌보고 가꿔서 키워 내려면 상당한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김희수가 생전에 나무 심는 일과 사람을 키워 내는 일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 두 가지 일이 결국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희수는 교육을 사업이나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봉사와 기부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을 사업이나 투자로 봤을 때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나 등록금은 매출이며 이윤이 된다. 학생들은 소비자들이며, 교사나 교수들은 자신의 사업이나 투자를 도와주는 직원일 뿐이다. 학교는 단순한 사업장이나 투자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무릇 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봉사와 기부의 정신을 가지고 오직 인재양성에 대한 사명감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만 이 일에 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육은 다시 사업이 되고, 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적지 않은 허물과 단점을 가지고 이런저런 실수를 거듭하며 살아왔지만 사업을 하는 동안에는정직신용의 정신을, 교육을 하는 동안에는봉사기부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왔다. 그는 돈은 소유하기 위해 버는 게 아니라 분배하기 위해 버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돈의 마지막 사용처는 기부였다. 그는 이런 말들을 남겼다.

 

  다음 세대에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인생의 하()이며,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중()이고, 인물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상()으로 최고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희수

 

  대한민국을 보시오. 러시아, 중국, 일본 사이에 낀 작은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에요. 사람 몸으로 비유하자면 맹장 정도나 될까요? 그런 나라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문자를 만들어 쓰면서 수 천 년 동안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워 왔다는 건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대한민국이 가지는 이런 독특한 존재감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그렇게 이어받은 우리의 정신이나 저력을 잊지 말고 발휘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지요.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내가 겪었던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길은 바로 배움에 있어요. 살아남으려면 배워야 해요. 인재를 키워야 우리 민족이 살아요. 결국 이것밖에 없어요. 배워야 삽니다.”

―김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