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근현대 문화예술인의 교류 성북동 이야기

정종배 2019. 9. 14. 22:17

 

근현대 문화예술인 교류의 성북동 이야기 / 정종배(신현고 교사, 시인)

 

 

서울교원문학회와 서울문학교육연구회 2019년 하계 연수가 성북동 문학기행으로, 8월 12일 월요일 열렸다. 여름방학 내내 무더위가 이어졌다. 오전 일찍 시작하여 점심 먹고 끝내기로 기획했다. 8시 30분까지 혜화문 옆 정자에서 모이는데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성북동 문학기행 해설은 전임 회장인 이진훈 선생님이 맡았다. 우중에도 20여 분의 회원이 참석했다. 회장인 김완기 선생님이 연구회 근황과 서울시 교육청 주관 『울림』 간행에 대해 설명했다. 오기쁨 총무 선생님께서 자료 준비와 간식을 정성스레 준비했다.

 

이진훈 선생님 해설과 발걸음 소리 좇아, 고등학교 시절 친구 집부터 현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위원으로 40여년 드나든 성북동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울성곽의 공식 명칭은 서울 한양도성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을 짓고, 태조 5년(1396)부터 성곽을 축성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성곽을 쌓았다. 부실공사를 막으려 성벽을 쌓은 돌에 공사를 맡은 고을과 담당자의 이름(각자성석)을 새겼다. 숙정문과 혜화문 구역 성곽 돌에는 강릉江陵이 새겨져 있다. 세종, 숙종, 순조 때까지 몇 대에 걸쳐 구간 확장과 보수를 한 성곽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구간이 훼손되었다.

 

1915년부터 일제는 경성시 구역 개수계획을 세우고 성문과 성벽을 없애고 길을 내거나 건물을 세웠다.

 

해방 후 서울 경계가 확장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성곽 바로 밑까지 집이 들어섰다. 성북동 풍치보호림 지대까지 학교를 세우며 성곽을 허물기도 했다. 집과 학교를 지을 때 성벽의 돌을 쓰기도 하였다.

 

성북동. 성 밖 북쪽 동네. 한양 도성 혜화문 밖, 조선시대 한양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어영청 소속 북둔北屯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성부에 속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관할 지역이 몇 번 바뀌었다.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 1914년 경성부 성북정, 1943년 동대문구에 속했다. 해방 후 1949년 성북구 성북동으로 정해졌다.

 

조선시대 도성 풍속에는 봄맞이 산이나 계곡으로 나아가 유람하는 풍속을 꽃놀이花柳라 하였다. 북둔의 복숭아꽃, 필운대의 살구꽃, 동대문 밖 버들,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이 유명하였다. 성북동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마을로 알려졌다. 주변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 오십년 전만 해도 길을 따라 물이 흘렀다.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1765년 영조 41년 성북동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한 생업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나라에서 마전麻田을 하는 권리를 줬다. 물이 많고 넓은 돌이 있던 성북동은 마전하기 좋은 지역이었다. 명륜동 혜화동 사람들도 도성을 넘어 와, 시장에서 거둔 광목을 삶거나 빨아서 볕에 말리는 마전 일로 생활을 꾸렸다. 현재 성북초등학교 아래쪽이 마전터였다. 빨래를 한 모시와 광목 따위를 간송미술관이 있는 자리 뒤쪽 풀밭에 널어 말렸다. 현재 마전터는 1970년대 개울을 복개하여 도로가 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전터>라는 국밥집이 옛 마전터의 자리를 알려준다. 지금도 성북동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한양도성을 쌓고 성저십리 안에는 함부로 나무나 작목을 심거나 베지 못하였다. 민가를 허가 없이 짓거나 묘지도 쓰지 못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린벨트로 지정하여 보호했다. 1941년부터 성북동은 자연공원보전을 위한 풍치지구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보호되었다.

 

예로부터 경관이 수련한 명승지에는 자연을 아끼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시인 묵객들이 찾아들곤 하였다. 서울성곽 북쪽 마을을 이룬 성북동은 서울 시내를 벗어나 바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로부터 별장지대로 알려졌던 이곳의 아름답고 조용한 산자락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교 해방 후 서울대학교 및 고려대학 등이 들어서며 교수와 예술가들이 성북동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의친왕의 별서정원이었던 명승 제35호인 성락원과 현재 덕수교회 목사관인 상인 이종석의 서울민속자료 제10호인 별장은 지금도 풍류와 자연이 어울린 한옥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서울에는 부자양반이 많이 산다. 그러기에 서울 근방에는 부호의 별장이 수두룩하다. 조선인 부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는 수석水石이 좋은 성북동 일대를 가리키리라....... 어쨌든 성북동 안에는 십만장자의 별장이, 가장 산수가 좋은 자리에 지어진 백인기 별장, 2층 양옥집으로 지어진 백상규 별장 등 14소가 있다는 것만큼 온 곳이 모두 눈을 부시게 하는 별장이다. <부호의 별장지대 풍경, 성북동 일대>, 『삼천리』. 1935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이지용 이근택 별장이 동소문 밖에 있었다. 이지용은 성북동에 있던 별장에 내외국 관리들을 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1907년 7월,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 위임과 군대 해산 등 국권침탈의 야욕을 드러낸 정미늑약丁未勒約을 강요하였다. 이에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인 이지용 이근택의 별장도 불에 타 사라졌다.

 

 

그때만 해도 성북동은 맑은 개울이 흐르는 산협. 드문드문 인가 있는 별장지대였다. 아침에 파삭파삭한 모시옷을 입고 나갔다가 저녁에 계곡을 걸어 들어오려면 그냥 옷이 후줄근 젖어버렸다. 집안에 들어앉으면 깊은 산중에 묻힌 듯 적요寂寥했다.

-김향안金鄕岸, 1944년 5월 1일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2005

 

해방 후 시내로 나가려면 혜화동 쪽으로 가는 언덕을 넘어가거나, 걸어서 삼선교까지 간 뒤 역마차나 전차와 같은 교통편을 이용했다. 서울국제고등학교 남동쪽 담장 근처 서울성곽 암문을 이용하여 와룡동 성균관 쪽을 이용하여 시내를 오갔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경저京邸 집터 우암구거尤庵舊基를 찾아갔다. 그 곳 암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 새겼다. 이는 옛날 “증자 주자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벽과 같이 서 있겠다”는 우암의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완전히 무당에 기대어 살았다. 임오군란 때 망우리고개를 넘어 장호원에 피신했을 때, 입궐할 날을 맞춰 민비 눈에 든 장호원 무당 박창렬이다. 조선시대 미증유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받고 창덕궁에 함께 살던 이 무당을, 노론의 거두 우암의 집터에 사당을 짓고 기거했다. 사당 이름은 북묘北廟다. 진령군은 수양아들(내연남이라는 말도 있다) 이유인과 함께 살며 국정을 농단했다. 고종 부부는 진령군이 시키는 대로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봉봉이 쌀 한 섬씩 바치며 국태민안을 빌었다. 밤에 무당이 왕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명으로 내려오곤 했다. 망우리공원에 유택을 마련한 종두법과 국어연구 등 구한말 선각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1894년 “요사스런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사람들이 씹어 먹으려 한다.”고 상소했다.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 당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에 촛불혁명과 겹쳐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깨닫는 장소였다.

 

1768년 영조 44년 메주 쑤는 권리를 성북동 주민들에게 주었다. 선잠단이 있는 곳에서 성락원城樂苑으로 올라가는 길 주변에서 가마솥을 걸고 콩을 삶아 메주를 쑤는 훈조막熏造幕 장소가 있었다. 보인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재력가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던 덕수교회에서 서울성곽 아래까지를 ‘북정골’, ‘북적골’ 이라고 한다. 궁중에서 쓰는 메주를 이곳에서 만들어 메주 쑤는 소리가 ‘북적 북적’ 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현재는 ‘북정마을’로 부른다. 북정골 사람들이 성곽 아래에서 연을 날리며 노는 곳이라고 해서 ‘연나산’ 또는 ‘연단산’이라고 불렀다.

 

심우장 오르는 길목 버스종점 건너편 현대빌라 자리에 정치가인 백상규白象圭의 별장이 있었다. 유럽식 양옥과 아담한 한옥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삼인암三人岩’이라 새긴 바위가 있었다. 바위 주변 소나무가 있고, 주변 풍경이 좋은 집이었다. 주인이 납북되고 다른 사람에게 집이 넘어가, 개발되며 소나무와 바위가 모두 없어졌다.

 

승설암勝雪岩은 종로 화신백화점 옆에서 ‘백양당서점’을 하던 인곡 배정국이 살던 집이다. 삼인암이 있던 백상규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규모가 큰 집이었다. 안채는 기와집이고 사랑채는 초가집이었다. 배정국은 책을 많이 수집했다. 당시 출판하는 책뿐만 아니라 고서古書들도 모아 놓았다. 집 앞 개울이 일 년 내내 흘렀다. 담 안으로 들어서면 이끼가 낀 작은 우물과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뜰에는 괴석이 놓여있어 보기가 좋았다. 산정 서세옥 화백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승설암에 있던 괴석을 늘어놓은 것을 보고 사려고 하였다. 파는 사람이 없어 돌아왔다. 며칠 뒤 다시 가서 눈여겨 두었던 괴석을 찾았다. 이미 다른 사람이 사가서 없었다. 장사치에게 누가 사갔느냐 묻자 벙어리가 와서 사갔다고 하였다. 그가 바로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서도를 서예라 이름 붙인 소전 손재형은 ‘승설암도’를 그렸다.

 

배정국은 같은 시기에 성북동에 살던 김용준, 이태준과 교류가 깊었다. 구보 박태원에게는 성북동 초가집을 1947년 9월에 백양당 출판사에서 나온 『약산과 의렬단』 인세로 주었다. 가로공원 만해의 좌상이 있는 만해의 산책공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곳이 박태원이 살던 초가집터이다. 박태원은 초가집을 운치 있게 만들어 ‘싸리로 울타리를 친 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명의이전을 하지 않고 살다 6.25때 배 사장 친척들에 넘어가고 말았다. 박태원이나 배 사장 가족들이 월북했기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 봉준호 감독이 박태원 둘째딸 아들로 외손자이다.

 

북한에서 박태원은 더 이상 <천변풍경>으로 알려진 모더니즘 작가가 아니었다. 북한에서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평가 받았다. 1986년 7월 10일 사망하는 순간까지 3부작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다. 완전실명과 전신마비의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구술 집필하였다. 받아쓰는 사람은 월북하여 재혼한 부인 권영희이었다. 북한에서 작가로서의 자기 삶을 마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월북 작가였다.

 

‘꿩의 바다’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마을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꿩이나 여우같은 산짐승이 많이 출몰하던 곳이다. 이곳의 음벽정飮碧亭은 명성황후 조카이며 을사늑약 때 자결 순국한 민영환이 99칸 한옥과 양옥을 지어 놓은 아름다운 별장이었다. 민영환이 벼슬에 있을 때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이곳에서 교류했다. 민영환이 순국한 후 원세개는 혼자 찾아와 추도하는 시를 읊었다. 음벽정은 1920년부터 요정으로 운영되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후에 불타 없어졌다. 개성에 태어난 동원 이홍근 사업가가 30대에 개성박물관장이었던 우현 고유섭에게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문화재 수집가로 평생을 살았다. 이곳에 동원미술관을 건립했다. 당대에 간송 전형필, 호암 이병철, 동원 이홍근은 3대 수집가로 알려졌다. 작고 후 그의 유언에 따라 5천여 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과 공예품 도자기 등 다양한 문화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1960~70년대부터 고급 주택과 외국 대사관저들이 들어왔다. 1971년 독일 대사관저를 시작으로 일본 호주를 포함하여 30여개 넘은 대사관저가 모여 있다. 꿩의 바다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올라가면 ‘쌍다리길’이 나온다. 개천에 다리가 두 개가 놓여있던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처음에는 돌다리와 나무다리가 한 개씩 있었다. 1970년대 철근다리로 바뀐 이 곳 쌍다리 사이에 살던 필자의 고향 ‘학다리’ 친구가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 여름철 개울가에 앉아 술 한 잔 나누던 추억이 벌써 40여년이 흘렀다.

 

성북동은 ‘한국판 베벌리힐스’, ‘성북동 마님’ 으로 대한민국 최고 부촌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청와대와 가까워 권부 실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삼청터널을 뚫은 이유도 정경유착의 산물이다. 1980년대 접어들어 재벌 오너 회장들이 이사 오면서 성북동은 ‘회장님’이 모여 사는 정재계 인사들의 사교장으로 변했다. 서울의 3대 요정 중 삼청각, 대원각 두 곳이 자리 잡았다.

 

대원각은 길상화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께 시주한 뒤, 1997년 길상사 절 송광사 서울포교원으로 명소가 되었다. 기생 진향으로 시인 백석과 <나와 나탸사와 흰 당나귀> 사랑이야기,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마리아상 닮은 관음보살상, 법정 스님의 절제와 무소유 실천 등으로 차와 산책과 명상을 아우르는 최적의 장소이다. 필자는 길상사 주지 스님을 5년 동안 역임한 양평 서종 적광암寂光庵 덕운德雲 스님과 인연이 닿아, 철따라 보이차로 차담을 나누고 있다.

 

성북동의 풍수는 성곽을 쌓은 남쪽 능선이 우백호이다. 북악 스카이웨이와 동소문동 능선이 좌청룡이다. 청룡과 백호가 성북동을 감싸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명당이다. 중심지맥 용은 마전터를 향해 동남방으로 뻗어 내렸다. 마전터 가까이에는 선잠단先蠶壇이다. 선잠단은 누에치는 것을 처음 시작한 중국의 서릉씨西陵氏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던 제단이다.

 

성북동 형국은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 놓은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이다. 비단은 높은 벼슬아치 부자만이 입을 수 있는 귀한 옷감이다. 또 성북동은 마을 입구 수구막이 닫힌 듯 보인다. 그 안쪽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어 대를 이어 부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성북동 곳곳에 절이 많았다. 미륵당은 작은 절이었다. 미륵당 옆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옆으로는 폭포가 흐르고,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하루는 고종 황제가 미륵당에 몇몇 시종만 데리고 와 기도를 올렸다. 소나기가 쏟아져 좁은 길까지 개울물이 넘쳐 건널 수가 없었다. 미륵당 아래 마을 구 척 장신의 청년을 불렀다. 고종을 업고 개울을 건너 고종은 무사히 환궁하였다. 미륵당은 6.25전쟁 후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1987년 운산 동욱 스님이 서울 봉원사에 있던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무원을 유치하여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과 종립기관인 동방대학원이 들어와 있다. 미륵당 위로는 기도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이 기도를 올린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졌다. 삼청터널이 뚫리고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1853년 김좌근이 창건한 청룡암은, 1972년 7.4 남북조절위원회의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어진 삼청각 자리에 있던 절이다. 절로 오르는 길은 숲이 우거지고 산짐승이 나타나는 깊은 산 속이었다. 대웅전과 요사채를 갖춘 짜임새 있는 절이었다. 우물에는 이끼가 끼어 운치가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청룡암 방 한 칸을 빌려, 그곳에 머물며 글을 썼다. 독립운동가인 임규林圭는 청룡암과 미륵당에서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며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국어학자 이윤재는 한글보급에 적극 나서면 민족운동을 했다. 어느 해 수개월이나 준비했던 조선어 강습회가 최소 되자 청룡암으로 길을 나섰다.

 

성북동 성라암은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절이다. 《청춘을 불사르고》의 신여성인 일엽(김원주)스님이 이곳에 머물며 집필했다. 또한 일본인과 낳은 일당스님(화가 김태신, 김일성대학 김일성 초상화를 그림)의 유골이 자신이 기거하고 글을 썼던 성라암 뒷산에 뿌려졌다. 일당스님께서 망우리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어머니 일엽스님이 함께 한 <폐허> 동인 염상섭, 번영로, 남궁벽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이 소통하고 교류한 인연을 말씀했다. 수덕사 견성암 어머니 일엽스님을 찾아가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듣고 상심해 수덕여관으로 돌아와, 일엽스님의 친구인 나혜석 화가가 어머니 대신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던 추억을 말씀했다.

 

장승업張承業은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인물화와 기명절지器皿折枝와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다.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근대화풍을 받아들인 작품을 남겼다. 그 화가가 지내던 작은 초가집이 성북동에 있었다. 현재 성북치안세터 뒤쪽 집들이 들어선 곳이다.

 

성북동에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인들이 많이 살았다. 산 좋고 물 맑던 성북동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성북동에 살던 예술가들의 자취 속에 성북동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다.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우리나라 화단에 큰 영향을 끼친 서세옥, 전성우, 송영방, 임송희 화백 등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이 성북동에 살았다.

 

성북동에서 살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뚜렷한 자취를 남겨, 교과서에서 뵐 수 있는 한용운, 오세창, 김용준, 이태준, 박태원, 김환기, 채동선, 김광섭, 전형필, 김기창, 조지훈, 윤이상, 김광균, 최순우, 임종국 등을 만나보자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국내에 머물러 해방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가. 사상가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전국을 떠돌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산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지방 아전 군속인 한용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 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만해萬海는 법호이다. 어릴 때 글을 일찍 깨우치고 영특해 신동집이라 불렀다. 일찍이 열네 살에 부모에 뜻에 따라 천안 전씨 집안의 정숙과 혼인을 했다.

 

열여덟 살에 평범한 삶과 가족을 뒤로 한 채 충북 보은 속리사로 출가한다. 건봉사에서 안거 수행하고, 만화선사에게 당호인 ‘용운’을 받는다. 유점사에서 서월화徐月華에게 화엄경을 배운 뒤, 서른 살에 일본 유학을 간다. 한용운 불교 자주화를 주장하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허상을 비판, 3.1혁명을 계획한다. 불교계를 대표해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주동한다. 3년간 옥고를 치른다.

 

석방 뒤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를 딱하게 연긴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당시 잡지 『불교』를 인쇄하던 대동인쇄소 사장 홍순필 등이 도움을 준다. 홍순필과 송진우가 건축비를 대기로 하였는데, 홍순필은 종로금융조합장을 겸하고 있어 건축비를 무기한 대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식산은행이 제공하겠다는 대지불하도 거절한 처지라 땅 한 평도 가진 것이 없었다.

 

때마침 백양사에 있던 승려 벽산 김적음이 한용운을 방문하였다. 한용운이 집을 장만하려고 하나 땅이 없어 곤혹스럽다는 말을 하자 김적음이 집을 지으려고 사둔 성북동 송림 땅 52평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라고 선뜻 땅을 내주었다.

 

심우장 건축 설계는 당시 중동중학 수학교사 최규동이었다. 일본식 호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 호적 없이 산 한용운. 심우장은 북향한 산비탈에 지어졌다. 그 이유는 한용운이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 하여 등을 돌려 지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 전체가 감옥과 마찬가지인데 어찌 불을 피운 따뜻한 방에서 잠을 편히 잘 수 있겠느냐”며 항상 냉방에서 지냈다. 어찌나 꼿꼿했던지 ‘저울추’라는 별명을 얻었다.

 

심우장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 「흑풍」과 「죽음」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듬해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후회」를 연재하였으며 유마경維摩經 원고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정신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지훈 시인도 젊은 시절 심우장으로 한용운을 찾아가 만났다.

 

일제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만해 한용운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영양실조와 중풍으로 심우장에서 숨을 거둔다.

 

당시 홍제동 화장장은 일본인이 운영하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시설이 낙후된 미아리 화장장에서 화장하여 망우리공원 부인 옆에 묻혔다.

 

성북동 예술인들은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서 수석과 석물 소박한 조선시재 목가구 따위를 모아 집을 꾸미고 안분지족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뤘다.

 

조선시대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 화가이며 미술사가와 교육자로서 큰 족적을 남긴 《근원수필》의 근원 김용준, 상허 이태준이 지어준 근원의 집 ‘노시산방老柿山房’에 이어 살며, 수화 김환기와 부인 김향안의 수와 향의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 이름 붙이고 작품 활동을 한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1세대로 산, 강, 달, 항아리 등 자연을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한 근대회화의 선구자였다, 운우미술관의 바보산수라 불리는 화풍을 선보이며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한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과 여류화가 우향 박래현 부부는 근대 화단에 이름을 남긴 예술인들이다.

 

문단에서는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이산 김광섭, 순수문예운동을 이끈 소설가 상허 이태준, 구보 박태원, 화가 구본웅 이복 이모로 이상 시인과 동거한 본명 변동림으로 수필가이자 수화 김환기 화백의 부인인 김향안, 청록파 시인으로 현대시의 정립에 큼 영향을 끼친 조지훈, 일제강점기 《훈민정음 해례본》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민족문화 수호자이며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을 건립한 간송 전형필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발전을 이끈 박물관인 혜곡 최순우, 소설가 방인근, 염상섭, 전광용, 시인 김종삼, 허영자와 같은 문화예술인들이 성북동에 살면서 교류하며 큰 발자취를 남겼다.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과 교류가 있었다. 6.25한국전쟁 당시 북쪽 문화재 관련 인물들이 문화재를 평양으로 반출하기 위해 혜곡과 소전 두 사람을 차출했다. 두 사람은 몸이 아프다 술이 취했다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치료할 정도로 갖은 핑계를 대며 지연작전을 펴 한 점도 북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간송이 고마운 마음으로 혜곡의 본명 희순熙淳의 순과 아들들의 항렬 우를 합쳐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지어주었다. 이 때 작업한 경험이 열차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주요 문화재를 옮길 때 긴요하게 쓰였다.

 

1916년 생으로 현역 최고령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태경台徑 김병기 화백은, 평양 종로보통학교 동기인 이중섭과 친구인 유영국 김환기 등 근현대 대표 작가들과 교류했던 한국근현대미술사의 산증인이다. 김병기 화백의 아버지 포경抱耿 김찬영(『창조』, 『페허』, 『영대』 동인 김유방, 문화재 수집가 김득영) 화가의 문화재 수집은 “남은 간송, 북은 득영”이라 할 정도로 유명했다. 간송의 문화재는 고스란히 남았고, 득영의 문화재는 9.28수복 당시 미군이 폭격으로 후암동 수장고가 폭삭 주저앉아, 득영이 3개월을 울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공을 바꾼 근원 김용준은 산정 서세옥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목이다. 서양화가인 우송 전성우는 간송 전형필의 큰 아들로 매듭장인 부인은 <와사등>, <설야> 등의 시로 우리나라 모더니즘이 기수로 평가받는 시인 우두 김광균의 딸인 송리 김은영,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인 현대음악의 산파 산남 채동선 등이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의 기틀을 다진 친일문학 자료를 모은 임종국 선생, 동백림사건에 연류 되어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서 숨을 거둔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동양화가 신영상, 송영방, 임송희, 서양화가 고희동, 윤중식, 변종하, 조각가 송영수, 서예가 유치웅 등이 성북동에 오래 거주하며 해방 후 문화예술계를 이끈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함께 활동하며 교류했다.

 

성북동을 고향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는 이 지역 예술인들은 뜻깊은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1978년 산정 서세옥의 발기로 결성된 ‘성북장학회’는 현재까지 40여 년 간 13회 작품전을 열어 7억 3천만 원 모아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조선시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며 제자를 키운 학자 성수침, 일제 독립운동가는 백범 김구, 서장환, 3.1혁명 천도교 민족대표 33인이고 간송 전형필의 멘토이며 8대 역관 집안 《근역서화징》의 오세창, 임창무 등이다. 문인으로 시인 김소월, 정지용, 박두진, 정한모, 소설가 춘원 이광수, 이종린, 정한숙, 김내성, 한운사, 아동문학가 이원수, 박화목, 문학평론가 김기진, 홍효민, 이어령 등이다. 음악에는 음악가 현제명, 이인범, 음악평론가 박용구 등이다. 화가로는 고희동, 권옥연, 권진규, 김관호, 김복진, 김인승, 김정숙, 김태, 남관, 노수현, 서진달, 신영상, 이규선, 이대원, 이마동, 장우성, 정탁영, 제백석, 한묵 등이다. 미술사학자로 정양모, 진홍섭, 황수영, 고고학자 김원룡 등이며 미술평론가 이경성, 이구열 등도 성북동에 거주했다. 서예가로 김용진, 김태석, 손재형, 우우임, 유창환 등이 있다. 양명학의 대가 위당 정인보, 정치인 장면, 매듭장 김희진, 손기정 우승 일장기말소 사건의 주역 이길용 기자, 진단학회 이병도,《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지》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 복식연구가 석주선, 만화가 신동우 등이 성북동에서 거주하며 자신의 길을 갈고 닦아 일가를 이루었다.

 

평온했던 성북동은 한국전쟁으로 역사의 아픔을 겪고 상처를 입었다. 인민군의 침입과 좌우사상 대립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식인들을 납치해가는 중간기지가 됐다. 맑은 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슬픈 눈물이 되었다. 성북동에는 외부로 비밀이 유지된다는 뜻의 안전가독 이른바 ‘안가’가 있었다. 서울수복 하루 전인 1950년 9월 27일 ‘신변안전과 보호’라는 명분과 ‘친인행위’의 죄목을 내세워 정부와 학계의 많은 인사들이 납북되었다. 안가에 감금당한 사람들이 밤마다 미아리고개 넘어 북으로 끌려갔다. 성북동 주민 중 납북된 인사는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 제헌의원 조헌영, 손기정 일장기말소사건의 이길용 기자 등이 있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큰 바위 위로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던 옛 성북동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그러나 제 모습을 찾고 있는 서울도성과 성북동 문화유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성곽, 선잠단지, 성락원, 이종석 별장, 심우장, 이태준의 수연산방, 간송미술관, 길상사, 삼청각 같은 문화유산과 우리나라 최초의 구립미술관인 성북구립미술관, 변종하 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최순우 선생의 안목과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집은 2002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으로 지켜낸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시민문화유산 제1호 ‘최순우 옛집’이 되었다. 문화예술인들의 아틀리에와 발자취가 현재와 어울려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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