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삼학병

정종배 2021. 1. 17. 22:25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삼학병/정종배
ㅡ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삼학병 75주기

학병동맹사건 일제강점기 학병 출신 희생자 3학병(김명근, 박진동, 김성익)의 묘소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자리 잡은 지 75년이 흘렀다.

독립운동가를 비하한 웹툰작가 2021.1.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을 비교하는 사진을 게재하며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까. 사실 알고 보면 100년 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씨가 웹툰 작가 윤서인의 독립운동가 폄훼 발언에 "화가 나기보다는 슬프다"고 말했다. 미국 코네티컷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장씨는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말을 듣고 보니 내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고, 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더라"며 "물론 어떤 미친놈의 헛소리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뒤돌아보면 나는 대충 산 것이 아니라 헛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어 그는 "화가 나기보다는 슬프다"며 "좀 더 독하게 열심히 살아 봐야 하겠다"고 덧붙였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시인 김상용 유택을 지나 50미터 오솔길을 내려가 형제약수터 쪽 길을 버리고 철조망 울타리 왼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1946.1.19. 새벽 삼청동에서 일어난 학병동맹사건에서 희생당한 김명근, 김성익, 박진동 등 3학병의 묘역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는 1943년 10월 20일 육군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학도병 지원병제'로 조선의 대학생 및 졸업생에게 군대 지원을 명령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지원 상황은 극히 부진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학생들의 고향까지 찾아다니며 부모를 협박하는 방식으로 지원을 강요하였다. 그래도 지원하지 않는 학생들은 휴학 처분을 시켜 공장, 광산 등의 노동자로 징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아울러 친일 부역자들에게 학도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시키는 등 갖가지 지원을 독려하였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는 당시 노해면장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직접 행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홍재설 전임 군수 묘역도 자리하고 있다. 또한 김활란, 박희도, 장덕수, 최신복, 함세덕, 김상용, 임숙재, 오긍선, 윤상필 등도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1943년 최남선이 동경제국대학 대강당에서 조선 학생을 대상으로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법학부 학생 한명이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당신들 자식부터 내보내라”고 일갈하였다. 당시 최남선의 아들 최한검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학생이었는데, 학병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을 곤혹스럽게 한 이 학생의 이름은 신상초였다. 이렇게 물불 가리지 않은 일제의 공작으로 전국에서 수천 명이 억지로 입대하였다. ​이날 입대하는 학병들을 위하여 해당 지역의 군수, 서장, 지방의 유지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축사가 아니라 조사(弔辭)였다. 친일시의 한 전형으로 춘원 이광수의 대표적인 학병을 독려하는 시 「조선의 학도여」를 소개한다.

조선의 학도여 / 이광수

그대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내일 지원하려는가/ - 특별지원병을 -//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승패의 결정은 지금으로부터/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한 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1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그대는 벌써 뜻이 정하였으리/ - 나가리이다, 나가 싸우리이다 -/ - 싸워서 이기리이다 -/ - 미영(米英)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싸움
아세아 10억 -/ 칠 같은 머리/ 흑보석 같은 눈/ 황금색 살빛//
(중략)
- 이 성전의 용사로/ 부름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그대,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있으리//
그대 처자를 돌아보는가/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디 있으리/ 부모길래, 처자길래, 가라, 그대여/ 병역의 의무 없이도/ 가는 그대의 의기(義氣) -/ 그러므로 나라에서/ 특별지원병이라 부르시도다/ 의무의 유무(有無)를 논하리/ 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제만사(除萬事) 제잡담(除雜談)하고/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그대들의 나섬은/ 그대들의 충의(忠義), 가문의 영예/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生光)이오, 생로(生路)/ 1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남아 한번 세상 나/ 이런 호기(好氣) 또 있던가/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삼천만 동향인(同鄕人)의 앞잡이 되라/ 총후(銃後)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11월 2일 새벽 네시 「매일신보」 1943.11.4.

학병에 대한 학생들의 입장은 두 가지였다. 학병을 거부하거나, 징집에 응하거나. 학병 거부의 대표적 인물은 빨치산 지도자 일명 남도부인 하준수였다. 경남 함양의 부잣집 아들인 하준수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해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공산당 간부 이현상을 만나 보광당을 결성해 해방 때까지 항일활동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보성전문대학의 이철승과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등이 주동하여 한 달 동안 학병 거부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철승과 이혁기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강제 징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직후 이철승은 반탁학생총연맹을 결성해 우익의 행동대장이 되고, 이혁기는 조선국군준비대를 결성해 좌익의 행동대장이 된다. 하준수는 잠시 이승만 박사의 경호대장을 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궁지에 몰리자 1944년 1월 20일 한국인 학병 강제 징집이 시작되었다. 이 결과 김수환 추기경, 작가 이병주,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고려대 교수 국무총리 현승종, 황용주 전 MBC 사장 등을 위시한 조선인 학병 4385명은 일제히 입대했다. 조선 학생들이 초보적인 군사훈련만 받은 채 중국과 동남아전선에 배치되었다. 대다수 학생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학병에 응했다. 학병세대의 수기 중 걸작으로는 '사상계' 발행과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장준하의 『돌베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사학자 김준엽의 『장정』,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의 실존인물인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 정치학자이자 4선의 국회의원인 신상초의 『탈출』 등을 들 수 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시인 박인환은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평양의전을 입학했다. 당시 일제는 농대, 의대, 사범대 등 일부 학생들은 징병에서 제외했다. 장정들은 전장에서 부르면 곧바로 뛰어들기 위하여 머리를 빡빡 밀고 있었다. 망우리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사진 속 의문이 풀렸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미국 영국 소련 등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즉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있어 남북 양쪽은 모두 다 큰 과오를 범했다. 민주적 방법과는 너무나 큰 거리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전세계에 폭로하고 만 셈이다. 반대하는 방법에 있어서나, 찬성하는 방법에 있어서나 더 좀 신중하고 민주주의적이었어야 했다. 남쪽의 첫 번째 희생은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였고 두 번째 희생이 바로 3학병이었다. 송진우와 3학병 묘지가 당시 망우리공동묘지였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북조선민주당 대표 조만식이 그 희생자였다. 이북에 있어서 소련군 정치부와 김일성은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동분자로 탄압하고 체포했다.

남한 사회는 반탁의 우파와 찬탁의 좌파로 갈려 격렬한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반탁과 찬탁 서로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학병동맹’은 일제가 학병 제도 실시 후 8.15광복 후 곳곳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의 모임이다. 학병동맹은 학병 출신의 70%를 흡수한 대규모 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다.

1월 20일은 전국 학병대회가 예정됐던 날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학병출신자 1백40여명이 18일 밤 삼청동 학병동맹 회관에 유숙하고 있었다.

16일 낮 반탁학생들의 조선인민당, 서울시 인민위원회, 조선인민보사 습격에 이어 19일 새벽 3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접 지휘아래 무장경찰대가 학병동맹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이때 피살된 학병출신자는 박진동ㆍ김성익ㆍ김명근 등 3명이었다.

학병동맹에서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삼청동 그 자리가 일제 때 교원연수소였기에 그들이 군사훈련 때 쓰던 목총 10여정과 일본도 한 자루가 있었다 한다. 경찰에서는 학병동맹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했으나 조선 신문 기자회에서 조사 발표한 대로 무기는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학병동맹 회관 가까이에 일제 때 부터 친일 부호 민모의 저택이 있었다. 학병동맹에서 회의 때 식기가 모자라 그 집에 쟁반을 몇 개 빌리러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민모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좌익으로 알려진 학병동맹이 식기를 빌리러오자 겁이 나서 장택상에게 '학병동맹에 식기를 빼앗겼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하다'고 호소했던 모양이다. 당시 학병동맹은 군정청과 보수진영에 있어서는 거북한 존재였다. 또한 16일 반탁 학생들의 테러에 대해 보복을 준비한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이에 장택상은 그것을 구실로 삼아 하지 사령관에게 '학병동맹은 민모 씨의 집에 와서 식기를 강탈해간 강도'라고 보고해 해체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경찰의 동맹습격 과정에서 동맹원 3명이 사망했는데, 학병동맹의 군사부장 박진동은 전후 6발의 관통총상으로 즉사하고, 이달(李達)이라 잘못 알려진 학병동맹 부위원장 김명근도 머리에 권총 직격탄을 받아 즉사했으며, 김성익은 하복부 여러 곳에 총창을 받아 쓰러졌으나 경찰이 개머리판으로 난타하여 치명상을 입히고 경성의전병원에 입원시킨 후에도 가료도 하지 않은 채 물마저 주지 않아 결국 사망했다.

전 남노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은 중앙일보에 사상편력 회상기를 연재하며, 사촌동생인 학병동맹 부위원장 박진동 등 세 학병은 밤중에 돌연 총을 쏘며 쳐들어오는 부대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강당 앞문 쪽으로 가서 "누구냐"고 물으며 "경찰대라면 총을 쏘지 마라! 만나서 이야기하면 오해가 다 풀릴 수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으나 경찰대는 계속 총을 쏘며 돌격해 왔다는 것이다. 박갑동의 박진동의 부위원장은 군사부장을 착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진동은 총을 맞고도 기둥에 기대 사격중지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강당 안에 돌입한 경찰대에 의해 그는 결국 죽고 만 것이다. "그의 무참한 시체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은 쪼개지는 것 같다. 숙부모님의 비통해 하시는 얼굴, 그리고 청상과부로 일평생을 홀로 늙어가는 제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애국선열들이 이런 나라를 만들려고 피를 흘리며 희생되어 갔을까. 나는 사촌동생의 죽음에 너무나 분하고 기가 차서 처음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찬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동생을 쳐다보니 그때서야 눈물이 쏟아졌다. 벌써 날은 어두워 캄캄해지는데 나 혼자서는 두 시체를 거둘 수 없어 사람을 찾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 혼자만이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알게 된 것 같았다."

3학병의 장례식은 1946년 1월 31일 거행됐다. 그해 조선일보 2월1일자는 ‘천일(天日)조차 무색(無色)하다. 3학병 연합장의 성대’라는 제목으로 장례식을 상세히 보도하며 애도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오른쪽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좌우익은 회개하라. 난국에 비분. 비정치 인사 궐연(蹶然).’

1946년 1월 22일 시인 임화는 3학병 영령에게 추모시 '초혼'을 바쳤다.

초혼(招魂) / 임화

1946년 1월 19일 새벽에 서울 삼청동(三淸洞) 조선학병동맹회관(朝鮮學兵同盟會館) 전투(戰鬪)에서 사몰(死沒)한 세 용사(勇士)의 영령(英靈) 앞에 드리노라//
돌아오라//
박진동(朴晋東)/ 김성익(金星翼)/ 이 달(李 達)//
외로운 너희의 영혼(靈魂)은 어느 하늘 가에 있나뇨/ 밤하늘 차운 길에 간단 말도 없이 호을로 나서/ 너희는 동무도 없이 어디로 어디로 걸어 가나뇨//
어느 동족(同族)이 있어 너희를 죽이되 전사(戰士)로서 하지 아니하고/ 도적의 떼와 같이 어두운 밤 소리도 없이 하였나뇨/ 원수의 쫓임에 어린 사슴처럼 주검의 땅에 이르러서도/ 조국(祖國)의 하늘을 우러러보던 눈은 다시 어디메서 조국(祖國)을 바라보나뇨//
너희의 영혼(靈魂)은 아직도 조국(祖國)의 하늘에 있느냐/ 돌아오라 가던 길 멈추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라.

필자는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 조선인 참상을 세계 유일 다큐 제작하는 오충공 감독을 후원하는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 일제시대 남해군수 박해주의 아들이며 LG그룹 설립자 구인회의 맏사위인 진주고보 11회 박진동과 관련 있는 인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감독 나 홀로 다큐 제작의 힘을 보태주고 싶으나, 한일관계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을 고려하여 어렵다는 답이 왔다. 망우리공원 3학사 묘지 관리는 김명근 김성익 두 분이 함남 출신이라 박진동 후손들의 정성으로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 오후 사가정역 가까이에 있는 청소년자율공간 희망유스나래 사무실에서 정칠화 대표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활용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었다.
눈은 바람받이 그늘진 곳을 제외하고 거의 녹았다. 면목고 후문이 잠겨있어 한참을 돌아 서일대 정문을 지나 국채표 기상학자 묘역, 작년 가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 김병진 독립운동가 묘지 터, 극작가 이광래, 독립운동가 서광조, 진보당 조봉암, 만해 한용운, 소설가 김이석, 사학자 문일평, 민족의 어른 오세창, 동요 오빠 생각의 오빠 영주 최신복, 소파 방정환, 한국을 사랑하고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여성운동가 이경숙, 시인 김상용 묘역을 답사 참배하고 땅거미가 완전 지고 눈이 채 녹지 않은 3학사 묘역에서 섣달 초 엿세 달과 한참을 머물렀다. 유관순 묘역 이태원합장분묘, 시인 박인환, 사회비평가 김석영, 화가 이중섭 묘역을 참배하고 달빛보다 서울의 야경과 잔설의 안내로 용마랜드 평산 신씨 문희공파 전첨공계파 선산 옆을 통과 봉화중학 정문 앞을 지나 망우본동 이화여대병설방송고등학교 앞 서재 아니 책창고 방으로 향했다.

3학병 묘역 들어가는 출입구 계단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유지라며 철조망을 치면서 막아버렸다. 땅 주인인 종교단체 및 산하 학교 그리고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관리 관계자 분들의 관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