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정종배 2021. 1. 20. 23:24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시인 53주기/정종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생활력 강한 어머니 사랑으로 일제와 북한과 남한의 독재에 까칠한 시인 교육자 정치인 정치논객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 ~ 1968)

2020년 봄 초허 김동명 묘지 터를 찾았다. 경주 김씨 강릉 사천 수은공파 9대 종손인 김회기 선생과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망우산 능선을 오갔다. 김동명 시인의 장례식과 성묘와 이장 등을 주관한 종손은 자신 있게 묘지 터 주변의 큰 소나무와 출입하던 오솔길 등을 기억하였다. 만약 망우리공원에서 이장한 분의 묘역을 다시 복원한다면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문중 납골당에 모신 초허 김동명 시인의 재 이장을 재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묘지번호 204707이었다.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 오상순, 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 이희승, 젊은 층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등 《문장》 출신 및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사용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등이다.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ㅡ임종국 『친일문학론』(1966)에서

필자가 파악한 한용운, 김동명, 이상화, 백석, 심연수, 오일도, 오장환 등 시인도 친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망우리공원에 한용운 시인 유택이 남아 있고,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유택은 이장했다.

1923년 김동명은 《개벽》 10월호에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門)을 열어주시면」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는 이 시를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에게 바친다. 이 헌정시는 그가 지닌 퇴폐주의적인 기질을 드러내지만 썩 훌륭한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조선문단》,《조광》 , 《신동아》 등에 많은 시들을 내놓아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0년 이후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자 그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도 한다.

초허 김동명은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근무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 둔 시인 백석이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초허보다 열두 살 아래였다. 초허 김동명 선생을 도와 교지 《영생》을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백철도 백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소설가 한설야도 카프 제2차 검거 때 체포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 함흥에 있었다.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며 초허와 교류하며 객지살이하는 백석의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소천 강용률의 함흥 영생고보 선생님으로 초허 김동명, 백철, 백석 등이 있었다. 특히 백석과는 나이 차이가 세 살 적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소천은 1931년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그 때 이미 강소천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시 「봄이 왔다」 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소년문사였다. 강소천은 1937년 졸업 후에도 백석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사숙을 하였다. 1941년 동시집 『호박꽃 초롱』 ‘서시’를 써 주었다. 백석 시집 '사슴' 33편의 시와 호박꽃 초롱 33편의 동시는 3.1혁명 33인 민족대표를 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명의 일생은 서러운 일생이었다. 생활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친정살이를 하였다. 망우리공원 신립장군과 같은 평산 신씨 신희공파인 동네였다. 원산으로 이사 가기 전 인사드리려 간 사기막리 갈미봉 외가동네에서 열린 시 짓기에서 9살의 김동명이 장원을 하였다.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3년 만에 영생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근처에 있는 동진소학교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일생은 그때부터였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를 쫓겨났다. 3·1만세운동 두 해 후인 1921년이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을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1혁명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두 번째 추방은 서해안 남포 근처의 강서소학교에서 당했다. 속이 뭣같이 상했지만 그래도 대동강 둑을 걸으며 시를 생각하는 재미 하나로 버티어 오던 학교생활을 별 수 없이 청산하고 시 원고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돌아섰다. 그 후 신안주에 있는 유신학교에 세 번째로 취업, 여기서는 입조심을 대단히 해서 데뷔작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을 썼고 쫓겨나는 것도 한 학기만이 아니고 1년 만에 파직 당하는 '행운'(?)도 있었다. 네 번째는 C여학교로 옮긴 지 두 달 만이었다. 그러니 취직 최장기간은 1년이고 최단 기간은 2개월이었다. 오직했으면 딸을 입 하나 덜기 위해 친구 집에 양녀로 보낼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이렇게 4차례 실직의 비운을 겪은 다음부터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린 셈이다. 몇 개월 조카 집에서 식객 노릇을 착실히 하다가 유림회 강습소의 일을 일 년 정도 보았다. 29세 되던 해에 그는 동경 유학을 떠나게 된다. 우연찮게 기독교 계층의 장학금을 받고 또 처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시인 김동명의 대표작 ‘파조’ 시를 소개한다.

파초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초허는 작곡가 김동진을 가르쳤다. 김동진은 김동명을 스승으로 높이 알리고 민족시인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높았다. 김동진은 스승 시를 작곡했다. '내 마음'은 널리 알려졌으나, '수선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 이유는 김동명 시인이 제자 김동진도 친일한 것을 알고 서운한 점을 밝힌 뒤로는 '수선화'는 자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수선화'는 김동명이 시인 백석을 위해 쓴 시라고 알려졌다.

그는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 한다. 첫 아내는 그의 첫 직장인 동진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사위를 삼았다. 첫 부인 지정덕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남 2녀를 낳고 금슬 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별세했다.

42세에 김동명은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이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로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 「천환 180도」에 써 놓았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둘째 부인도 둘째딸 월령을 낳고 1959년 대학 수련회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첫날 입수하다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으로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68세 되던 1968년 1월 그가 중풍으로 타계할 무렵, 그는 직업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없는 빨간 맨손이었다. 살던 집을 줄이고 줄여서 약값 대다가 마지막은 '서울의 시골 지역' 남가좌동 모래내의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를 비롯 31명이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난 그날 신산스런 삶을 마감했다.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렀다.

망우리공원 지금의 구리둘레길 솔샘 약수터와 설태희 가족묘지 사이 능선에 부인 이복순 옆에 안장됐다. 2010년 10월 10일 고향 강릉 선영으로 납골 봉안했다. 망우리공원 본인 묘비는 세우지도 못하였다. 부인 이복순 묘비는 묻고 갔다

40대부터 김동명은 흥남을 떠나 서울에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신문지에 세면도구를 싸서 들고 '어슬렁어슬렁' 동해안 금강산 산기슭을 걸어 그만 월남을 해 버렸다. 해방 후에 생긴 정당에 관여했다가 별재미를 못보고 흥남에서 여러모로 물을 먹은 그는 서울살이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잇달아 불러들였다. 서울에는 김사익, 김재준, 송창근 등 신학 계통의 선배들이 있어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곧 이화여대 교수직을 얻게 된다.

학자의 일을 하는 한편, 그는 정치가적 기질도 발휘해서 조선 민주당 정치부장도 하고 민주 국민당 문화부장도 한다. 흥남에 있을 때는 조선 민주당 흥남시 지부당 위원장까지 했는데 최용건에게 밟혀서 내쫓기고 그는 흥남중학교 교장직을 맡는데, 1946년 3월 13일에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절치부심하다가 월남을 결심했다고 한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물 중 해방 후 월남한 인물은 평양의전 박인환, 소설가 김이석, 화가 이중섭, 아동문학가 강소천, 독립운동가 이영학 등이다. 반면 월북한 인물은 통일운동가 수암 최백근, 극작가 함세덕 등이다. 수암 최백근은 간첩으로 검거되어 형을 살고 5.16쿠데타에 사형을 당해 현재도 미복권이다. 함세덕은 북한군 선무반 종군작가로 6.25한국전쟁 일어난 나흘 뒤인 6.29일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사고로 인해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결국 4.19혁명 이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60세 되던 해에 참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그 자리마저 잃은 후로는 정해진 수입 없이 정치 평론, 시, 수필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 정치에 날카로운 정치평론을 발표했다. 그래도 특별히 위해를 당하지 않는 이유는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 여사의 동향 강릉 출신이라는 뒷배 힘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김동명 시집 6권에 총 370편의 시를 발표했다. 시집은 『나의 거문고』(1930년), 『파초』(1938년), 『3.8선』(1947년), 『하늘』(1948년), 『진주만』(1954년), 『목격자』(1957년) 등이다. 시화집은 『내마음』(1964년)이고 수필집은 3권 『적과 동지』(1955년), 『역사의 배후에서』(1958년), 『나는 증언한다』(1964년) 등이며 수기집은 2권 『암흑의 장』, 『어둠의 비탈길』 등이다.

시인 김동명은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경주 김씨 수은공파 납골당에 계신다. 시인 김동명 유택이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당시 서울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는 옛 묘지 터에 다시 모시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문화예술인들의 유택이 자리잡아 세계적인 명소가 되길 거듭 기도하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