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3.1혁명 102주기 항일 5대 명가 및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독립운동 명가 유관순 오기만

정종배 2021. 2. 28. 22:12

 

3.1혁명 102주기 항일 5대 명가 및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독립운동 명가 유관순 오기만 / 정종배

 

 

 

구한말 의병에서부터 일제 말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이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에 나섰다.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2017년 말 기준으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분은 여성 265명 포함 총 14,830명이다.


애국선열 가운데는 단신으로 나선 분들도 계시지만 더러는 집안, 또는 가문 차원에서 집단으로 나선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5대 항일가문을 꼽는데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이 그 주인공이다.


왕산 허위 가문 왕산 허위 선생 가문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우선 허훈·허신·허겸·허위 왕산 4형제와 그 직계 후손, 왕산의 사촌 허형 선생의 형제들과 후손, 그리고 항일시인 이육사 선생 집안까지 아우른다. 이육사 선생의 모친 허길 님은 허형 선생의 딸이다. 전부 합쳐서 10여 명에 달하는 분이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는데, 뒤에 나오는 석주 이상룡 선생 집안과는 겹사돈이다.


안중근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은 직계·방계를 포함해 총 15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윗대에서는 삼촌 안태순 선생을 비롯해 안 의사와 두 동생 정근·공근, 사촌동생 명근·경근·홍근, 조카 원생·낙생·춘생·봉생·우생, 여성들로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 여동생 성녀, 백범 맏며느리이기도 한 조카 미생, 조카며느리 조순옥·오항선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대부분은 안 의사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분들이다.


석주 이상룡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은 고성이씨 종손 집안으로 경북 안동의 99칸 종택 임청각으로 상징된다. 3천석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부하였으며, 직계 및 방계 포함해 총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석주 선생의 당숙 이승화 선생을 비롯해 형제 상동·봉희, 아들 주형, 손자 병화, 조카 형국·운형·광민, 매부 박경종, 처남 김대락, 처제 김락 등이 그 주인공이다.


우당 이회영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불린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는데 현 시가로 600억대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투쟁 전선에 바쳤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등 6형제는 해방 때까지 한 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살아서 귀국한 분은 다섯째 시영뿐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의 상징이다.


일송 김동삼 가문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선생 가문 역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일송 선생을 비롯해 숙부뻘인 김대락 선생, 아우 동만, 형제 장식, 사돈 이원일 등 총 5명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다. 일송 선생은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193759세에 옥사하였으며, 아우 동만은 19209월 일제의 간도 토벌 경신참변 당시 일본군에 피살되었다.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만해 한용운 시인의 주도로 심우장에서 치렀다.


이밖에도....... 백범 김구 선생 가문을 비롯해 집안 전체가 독립투쟁에 헌신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우리는 이들 가문에 존경과 예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관순 가() 사람들의 독립운동 망우리공원 이태원분묘무연고 28,000여명의 유해와 함께 이장되었으리라 추정하고 2018년 유관순유족회 기념사업회 이화여고동창회 등 관련단체에서 표지비를 세웠다. 2020928일 순국 100주년. 중랑구에서 방치되었던 무연고 분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추모제를 지냈다.


유윤기(1845 ~ 1919) 유관순의 할아버지, 지령리교회 처음 교인으로 장남 유중권 내외가 일본군에게 학살된 것과 차남 유중무, 손자 유우석과 손녀 유관순이 투옥되는 아픔을 겪고, 두 달 보름 후에 별세하였다.


유빈기(1883 ~ 1927) 유관순의 7촌 할아버지인 재종조이자 유윤기의 사촌 동생. 지령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공주읍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됐다.


유중권(1863 ~ 1919) 유관순의 아버지. 아내 이소제와 함께 19194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지령리 집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1919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소제(1875 ~ 1919) 유관순의 어머니, 41일 당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군 헌병에게 학살되었다.


유우석(1899 ~ 1968) 유관순의 오빠. 41일 공주읍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검에 자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유관순(1902 ~ 1920)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만세운동 때 입은 자상과 3.1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당한 고문으로 19209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유중무(1875 ~ 1956) 유관순의 숙부. 지령리교회 최초 교인으로 전도사와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194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와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령리교회를 지켰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유예도(1896 ~ 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 4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도피하여 홍성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노마리아(1898 ~ 1982) 유관순의 사촌 올케, 남편 유경석이 유관순과 유예도를 도피시키고 있는 동안 유중권을 간호했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유윤기, 어린아들 유제경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일본헌병의 온갖 횡포를 당했다.


유제경(1917 ~ 2012) 유관순의 5촌 조카이자 유중무의 장손, 191941일 이후 어머니 노마리아와 함께 지령리 집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중 19417월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소위 불경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해남도에서 노역으로 형기를 마쳤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망우리공원 오기만 독립운동가 집안도 이에 못지않아 소개한다.
그 가족의 수난사는 가족사이면서 민족사의 대하장편소설이다.

 

부친 오세형 고향 배천의 3.1혁명 주동자로 투옥됐다.
모친 윤인의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을 감당했다.
본인 오기만(吳基滿, 1905~1937)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상해 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받고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했다.
동생 오기영 3.1혁명으로 11세에 투옥, 사상범으로 투옥, 수양동우회 등 총 4회 투옥됐다.
동생 오기옥(1919 ~ 1950?)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제수 김명복 오기만의 동지 치과의사 시숙 오기만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원으로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했다.

누이 오탐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됐다.
매제 강기보는 오탐열의 남편, 3차 고려공산청년회의 평북 도책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조카 오장석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된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 놓고 그 앞에 서서, 오기영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오기만, 그리고 오기만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를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하였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친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사슬이 풀린 뒤를 비롯한 오기영 전집의 역사적 가치

 

사슬이 풀린 뒤는 처음에 해방공간에서의 최고의 잡지라고 할 <신천지>4회에 걸쳐 초고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내서, 일부 학교에서는 이 부분을 복사하여 교재로 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를 증보하여 단행본 출간을 하려고 출판사에 맡긴 뒤 2년이 되도록 출간이 미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좌우익 투쟁의 혼란으로 접어들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하여 오기영은 처음에 쓴 서문에 이렇게 덧붙이기에 이른다; “3년 전 해방의 감격은 벌써 하나의 묵은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기쁘더니, 그렇게도 감격스럽더니,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 기쁨과 감격 대신에 새로운 슬픔과 환멸이 자리를 바꾸어 들어찼다. 이제 제2해방이 있어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요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누구나 초조하다. 그런지라, 3년 전의 해방을 정말 해방으로 알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엮은 이 책을 읽을 때에 누구나 달라진 세월에 부대끼며 다시금 슬픔을 아니 느낄 수 없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잘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고 인민은 여전히 호령 밑에서 불행과 무지와 빈곤에 울어야 한다면 이것은 인민의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잡은 지배 세력이 바뀐 것뿐이지 인민 전체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 뒷날에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 한 번 사슬이 풀린 뒤를 써야 할 까닭이 있다.”

 

빛나는 역사의식, 미래를 투사하는 시선

 

오기영이 194812월에 쓴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서,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회상하며 쓴 대목은, 전집을 통틀어 백미라고 해도 좋을 혜안을 담고 있다. 그것은 1945815일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통일독립/독립통일의 그날을 예견하는 시선이요, 그래서 염원이자 예언이며, 비원이자 선언이다;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서만 해방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몇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제도가 생길 리 없으니, 우리는 실로 4천 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모두 이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 이 기쁨에 참예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요, 거기서 조각 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뿐일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고초가 끔찍하나 나는 오늘 쥐구멍에 숨어야 할 무리에 들지 않고 이렇게 거리에 나서서 민족의 기쁨 속에 섞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또다시 가슴은 감격에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