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2021.3.1. 3.1혁명 102주기 유관순 열사 명성 얻는 과정과 유해가 묻혔다고 추정하는 망우리공원 이태원무연합장분묘까지

정종배 2021. 2. 27. 15:01













3.1혁명 102주기를 맞으며 유관순 열사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 과정과 유해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이태원무연합장분묘에 이르기까지 / 정종배


2021년 3월 1일은 3.1혁명 102주기이다. 3.1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유관순 열사 또는 누나라고 대답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물어도 대부분 유관순 열사를 꼽는다.

2021년 3.1혁명 102주기를 맞으며 유관순 열사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 과정과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이태원무연합장분묘와 관련을 맺게 된 내용을 밝혀 궁금한 이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유관순에 관련된 자료는 서대문(경성)감옥 수형자카드와 1심 공주지방법원과 2심의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 등 셋뿐이다.

유관순이 독립운동을 한 활동과 업적보다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의견과 부정하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유관순이 훌륭한 만세운동 활동과 특히 목숨 건 옥중 투쟁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3.1혁명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였다. 1945년까지 발행된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 ~ 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서사를 갖게 된다.

유관순은 해방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혁명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1947년 유관순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유관순을 가르친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된 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특히 이화학당의 전설적인 인물인 김활란 박사의 대표적인 친일 행위로 학교가 곤경에 처했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6.25한국전쟁 흥남철수 때 피난 내려와 부산 영도다리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 곧바로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문교부 편수국에 취직시킨 당시 문교부장관 비서였던 영생고보 동창인 박창해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3년 동안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한국 최초 국민학교 국어교과서를 제작했다.

전시 국어 교재를 편찬한 강소천 작시의 동요 ‘어린이 노래, 금강산, 스승의 은혜, 유관순, 눈사람, 산토끼야, 태극기, 코끼리 아저씨’ 등 많은 노래가 교과서에 게재된 것이 이해되었다. 강소천 작시 나운영 작곡인 ‘유관순’은 1952년 청소년의 애국심과 국가관 고취를 위해 문교부 편수국 의뢰로 만들어졌다.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어교과서가 박창해의 손에서 나왔다. 중년 이상의 세대에 낯익은 ‘철수’와 ‘영희’ 캐릭터의 산파역이었다. 그는 2010년 타계했지만 2006년 한 학술잡지에 ‘나의 국어 편수사 시절’이라는 회고의 글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유관순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과정을 전하고 있다.

어느 날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을 논의하다가 3·1혁명 때 우리 여성 가운데 프랑스의 잔 다르크처럼 활동한 사람을 찾아내기로 했다. 그와 함께 교과서를 만들던 사람은 소설가 전영택이었다. 박창해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3·1혁명 때 맹활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이화여고를 찾아갔다. 그는 신봉조 이화여고 교장을 만났고, 신 교장은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던 사람이 서명학 교감이니 그분에게 물어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3.1혁명 전날 밤 유관순과 6인결사대를 함께 한 서명학 교감은 “이화학당 학생 200여 명이 3·1혁명에 참여했으므로 누굴 내세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창해가 이 사실을 교과서 제작진에 알린 며칠 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유제한이 찾아왔다. 그는 유관순의 집안 먼 조카뻘이었다. 유제한은 “집안에 3·1혁명으로 옥살이한 이화학당 학생이 있다”고 전했다. 전영택은 이후 유관순 스토리를 교재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에 따르면 유관순을 널리 알린 주인공은 전영택 박창해와 유관순의 조카 유제한이다. 이 시기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유관순 전기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전영택이 1948년 펴낸 것을 보아도 이 회고는 꽤 신빙성이 있다.

박인덕과 신봉조가 1978년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대담을 하면서 박인덕이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한국 여성의 애국자로서 유관순을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과, 신봉조가 “박인덕 선생이 유관순에 대해 열렬하게 하던 그 말씀이 한국 민족에게 알려진 거죠”라고 밝혔다.

이들이 유관순의 존재를 외부에 전하는 역할은 할 수 있었겠지만 유관순이 영웅으로 떠오르기까지는 훨씬 여러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참여한 김구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도 역할을 맡았다.

기독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천 5백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 분들이 희생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2019년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운동 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편 사람도 있었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 (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대한민국장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왜경에게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혁명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실제 4.1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병옥 박사 아버지인 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유독 유관순만 3.1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린 것은 과한 처사다.

한국영화 개척자로서 친구 나운규와 함북 회령에서 1919년 4월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영화감독 윤봉춘은 1948, 1959, 1966년 총 3차례에 걸쳐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윤 감독은 생전에 '유관순 전문 감독'으로 불렸다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 위인전 등지에서 거의 전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비롯된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고문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며 설명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겼다고 주장했다.

결국 1920년 10월 12일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 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관순의 유해를 받들어 조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일본이 고의적으로 이장 전에 무덤을 훼손하고 유골을 파괴했다는 설이 있다.

이태원 공동묘지 유연고 4,800기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무연고 28,000여기는 일제가 건원릉의 조선 왕조를 훼손하기 위해 1933년에 지정한 망우리 공동묘지로 1935년부터 이장을 추진하여 1936년 4월 마무리 했다. 1936년 12월 이태원무연분묘이장합장묘비가 세워졌다. 망우리공동묘지 관리사무실에서 명절에 제사를 지냈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병천 아우내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이태원 미아리 공동묘지에서 소설가 나도향 시인 이상 묘지는 실전됐고 미아리에서 1958년 소설가 최학송 33인 대표 박희도 두 분은 망우리로 1960년 이육사 시인은 고향 안동 원촌 뒷산으로 이장했다

2015년 9월 용산구에서 이태원공동묘지 터를 바라보는 유관순길 이태원부군당에 유관순열사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식을 치르고 있다.

또랑시인 2018년 월간 ‘작은 책’에 망우리공원 인물 열전 연재하기 위해 유관순 유족회, 기념사업회, 이화여고동창회 등에 연락하여도 어느 누구도 유관순 열사와 망우리공원과의 연관을 알지 못했다. 2018년 10월 망우리공원 이태원무연분묘합장묘 옆에 유관순 관련 단체에서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다.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추서할 것을 의결하여 서훈했다. 20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에 맞춰 중랑구청에서 무연분묘를 정비하고 추모식을 치러 오늘에 이르렀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뒤 무후선열제단은 독립운동을 하다 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133위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그 곳에 ‘순국선열 유관순 영위’ 54번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관순이 아우내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유명세는 후세 사람들이 3.1혁명의 상징적인 존재로 유관순을 지목해 그 가치를 끌어올린 덕분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실질적인 주동자로 나오는데 그 사람이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만들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5대 항일가문은 허위, 안중근, 이상룡, 이회영, 김동삼 집안을 일컫는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독립운동가 40여분 중 독립운동 명가를 소개한다.

13도창의군탑의 왕산 허위 가문이다.

이태원무연고합장분묘에 묻혔다고 추정하는 유관순 열사 집안이다.

망우리에 동강정사 별서를 짓고 생활한 오성 이항복 대감의 삼한갑족 후손인 이석영 6형제 가족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석영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남양주 화도읍의 토지를 포함한 당시 땅을 판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처분해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무장독립투쟁 근간이 된 독립군 양성에 몰두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안타깝게도 일제 탄압에 쫓기다 중국 상해 빈민가에서 굶주림으로 생을 마감했다

남양주시와 국가보훈처 후원을 통해 2021년 2월 16일 남양주시 화도읍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서 이석영 선생 순국 87년 만에 장례식과 첫추모식이 마련됐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오기만 가족사도 대하장편소설이다.

김사국 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 짧고 굵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 모든 분들의 맵고 짠 삶과 순국을 통해 배운 올곧은 정신으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라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