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102주기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김활란과 이정애의 금란동산 금란지교(金蘭之交) / 정종배
‘금란지교’는 쇠보다 견고하고 난초보다 향기롭다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매우 친밀한 사귐이나 두터운 우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역경』의 '계사상전'에 나오는 말이다. 친구 사이의 매우 두터운 정을 이르는 말 중에서 ‘금란지계, 금란지의, 금란교, 금란계’라는 말도 있다.
낙이망우 중랑구 망우본동의 김활란에서 유래된 명칭과 간호사 1호인 이정애와 금란지교를 소개한다. 특히 이정애 간호사의 생애는 지금까지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인물 중 처음 그의 삶과 활동을 이야기한다. 이정애의 미모는 장안의 뭇 남성은 물론 1920년대 최고의 사나이 떴다 봐라 우리나라 최초 비행사 안창남과 일본 황족은 청혼 딱지를 맞고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영국 왕실 파티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여인열전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제7대 총장인 김활란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성씨인 김(金)과 이름의 끝인 란(蘭)에서 딴 ‘금란’의 명칭이다. 여기에서 유래된 학교와 시설과 교회 등이 남아 있다.
활란은 세례명 헬렌을 한자음을 가차한 이름이다. 오긍선의 며느리도 힐러리를 '정희라 라고 묘비에 새겼다.
1954년 어머니 별세 후 신촌에 대신교회를, 그의 형제 같았던 이정애 별세 후 망우리에 금란교회를 각각 설립하고,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던 날, 총장실에서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한 일 등이 모두 그의 말년의 전도 열정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서울 중랑구 망우본동에 있는 금란교회의 명칭은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활란 박사가 1957년 이화의 교직원과 학생들로 ‘금란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전도를 시작한데서 유래한다. 그 해 7월 당시 망우리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1958년 11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금란동산’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15평의 천막교회를 짓고 10여명이 모여 하나님께 첫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금란교회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김활란 박사의 이름 첫 자와 끝 자의 ‘金’과 ‘蘭’을 따서 금란교회로 명명하였다. 현재는 세계적인 감리교회로 교세를 확장했다.
금란교회 인근에 있던 ‘금란동산’은 공원으로 이 공원 안에 김활란의 유택을 마련했다. 김활란의 어머니인 박도라, 김활란과 금란지교 절친인 대한민국 간호사 1호인 이정애의 묘지도 있었다. 그 묘역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화여자대학교수목원 안으로 이장하였다. 2012년 8월 그 자리에 중랑숲 LIG중랑숲 리가 아파트가 들어섰다. 위의 교회와 공원 명칭의 영향으로 주변에 있는 가게 명칭도 금란이라는 명칭을 쓴 금란동물병원 금란통닭과 금란마트와 금란주차장도 있다.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이화여대 교정에 세워진 김활란 총장 동상에 새겨진 내용을 간추리면, 그에게는 여성운동가, 교육자, 최초의 여자 박사 1호, 신앙인, 외교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실제 경력은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재단이사장,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이화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전시내각 공보처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코리아타임즈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미국 유학 중 "무지와 구습의 타파"를 이유로 공개 단발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1931년 10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구 최초 여성 박사 1호이다. 트레머리를 잘라 버린 최초의 단발여성,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으로 상징되는 그를 신문화, 신교육, 신여성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김활란은 1899년 1월 18일 인천 배다리마을 동구 창영동의 작은 초가지붕 아래서 3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진연는 선비풍의 섬세한 용모를 지닌 침착한 분이었다고 한다. 평북 철산의 농토를 조카들에게 맡기고 개항이 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인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겨 창고보관업에 종사했다.
부모님이 지어준 그의 이름은 아명은 기득(己得)이고 아호는 우월(又月)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에서 7살 때 '헬렌(Helen)'이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인천 내리교회에는 김활란 박사의 사진과 약력이 패널로 걸려 있다.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제1회로 졸업해, 여성으로는 최초로 대학 졸업자가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이화학당 고등보통과 교사가 되었으며, 재직 중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생전의 유언에 따라 한국 최초로 장례식을 음악회와 간단한 다과회로 대신했으며, 사망 후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발행한 친일행위자 704명에 포함되어 교육학술 분야에 등재됐다.
“이 땅에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날까지 기필코 이화를 여자대학으로 키워나가겠다.”는 구호는 김활란 박사의 확실하고 단호한 다짐이었다.
인천인물 100인으로 뽑힌 영원한 '이화인' 우월 김활란 박사는 가르침과 봉사와 남녀평등 등 외길 60여년 여성운동과 교육의 어머니로 일컬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에 묻힌 조봉암 함세덕도 인천인물 100인에 뽑혔다. 김활란은 김애마, 서은숙, 김영의와 함께 인천 출신 이화인 4대 여걸로 꼽히고 있다.
이정애(李貞愛, 1901 ~ 1954)
우리나라 120년 간호사의 첫 장을 연 ‘백의의 선각자’ 이정애 간호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호이다.
이화고녀 3학년 때 3.1혁명에 참가한 독립유공자이다. 1925년 부모에 뜻에 따라 김옥현과 결혼하여 딸 하나 낳고 2년 만에 별거하다 1928년 이혼했다. 당시 장안의 큰 화제였다.
이정애는 1901년 8월 17일 새벽 서울 새문안 오둘골에서 기독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명원은 구한말 주사를 지낸 관리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특히 영어에 능통해 경인철도국에서 외국인기술자를 상대하는 직원으로 일했다. 어머니 박의신은 재색을 겸비한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 이정애의 미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정애는 여섯 살 때 여학교 양규의숙에 입학하여 낮에는 신학문이라고 일컫는 산술이며 국어를 배우고 밤에는 냉천동의 어느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이정애는 중등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고등과에 입학했다. 그녀의 진취적 기상과 아름다운 용모는 뭇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특히 학교 성적이 뛰어나 급우들의 부러워했다.
이정애가 고등과 수업을 받던 중 3·1혁명이 벌어졌다. 모든 일에 앞장 서는 성격의 이정애는 전국에 발송할 편지와 유인물들을 등사 하느라고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자신은 옥에서 풀려나오고 친국들이 갇혔을 때는 분연히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거부했다. 그런가하면 3·1혁명으로 연루되어 투옥된 동료들 가정의 생활비를 위하여 삯바느질로 당시 쌀 한가마 값이 일원 오십전 정도였는데 매달 오원씩을 벌어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3.1혁명 여파로 이화여고 고등과 졸업식도 제대로 못한 채 집에서 쉬다가 1923년 이화학당 대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은 학교 규칙에 의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이정애는 줄곧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워낙 빼어난 미모로 학교 안에서는 동료들 간에 즐거운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밖으로는 이 시대의 절세미인이 이화대학에 숨어 있다는 등 누가 먼저 그 미인을 차지하는가? 내기를 하느라고 뭇 남성들의 가슴을 조여 버리는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장 용기 있다고 자처한 미혼 남성이라면 이정애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이화대학 교문 밖으로 몰려들었는데,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채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안창남의 청혼 사건이었다. 안창남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아닌가.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 방문위원회' 주선으로 서울 상공에서 시범 비행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창남이 서울 상공 시범 비행을 마치던 날 그 위원회에서는 각계 유명인사를 초대하여 멋있는 연회 잔치를 벌였다.
안창남은 그 연회석상에서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일지도 모르는 미인 이정애라는 여대생이 이화대학 기숙사에 갇혀 있는데, 용기 있으면 청혼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 대학생이라고요?" 안창남이 매우 흥미 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옆에 있던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다니까! 하지만 안 될걸." 하면 안창남의 그런 흥미를 비웃듯 까르륵 웃어댔다.
"…?"
안창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모 인사가 그 까닭을 소상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용기있다는 조선 장정들이 그렇게 몰려가 이정애를 만나 청혼하려고 발버둥쳤지만 만나기는커녕 교문 밖에서 면회조차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오." "그럼 좋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청혼에 실패하면 나는 평생 장가갈 자격이 없는 걸로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정애로부터 청혼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1928년 가을 이정애는 하와이로 떠나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뱃길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은 그 배에 동승했던 일본의 황족 지찌부노미야(秩父宮)가 이정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버린 나머지 결혼을 간청한 일이었다. 지찌부노미야의 청혼 역시 여지없이 거절당하며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25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고, 193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간호학 전공 학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 간호실부원장으로 취임했다. 그 당시 간호실 원장은 미국인이었다. 1937년 일제가 적국인 미국유학 경력을 트집 잡아 세브란스병원에서 물러났다. 1937년 조선간호원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37년 7월 21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 간호원대회 조선 간호협회장 자격으로 파견되어 조선에도 명실공히 조선인 간호사가 있음을 유감없이 알리기도 하였다. 대회 참가자를 위한 다과회가 영국왕실 주최로 베풀어졌다. 화려한 왕궁의 특별연회장에서 열린 이날 다과회에서 흰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을 30대 미인 간호원 한 사람이 200여 참석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국왕과 소녀공주 엘리자베드 현 여왕이 마거리트는 날아갈 듯한 한복 차림의 이 조용한 동양미인에게 뷰티블을 연발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4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간호교육과 창설 초대과장으로 취임하여 후배 양성에 온힘을 다했다.
6.25한국전쟁 때 죽을 고비가 왔어도 친구의 위기를 더 걱정한 의리의 간호사로 휴전이 되고 안정을 되찾자, 유아기나 다름없는 대한민국 간호계에 선진 간호시스템을 도입했다. 1953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탄생 133주년 정부로부터 최초로 표창장을 받았다. 1년 후 금란지교 김활란 친구의 눈물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유방암 투병 끝에 저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망우리 금란동산이었다. 현재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화여대수목원 이화여대에 공헌한 7인 묘역으로 이장하여 김활란 박사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김활란은 이정애를 망우리의 양지 바른 곳에 편히 모셔 놓고 다음과 같은 묘비를 세워 줬다.
“이 티끌 세상에 한 송이 백합/ 높은 뜻 깊은 사랑 그윽한 향기/ 우리 맘에 영원히 풍기리.”
김활란은 그러고도 이정애의 타계를 못 잊어 『우리 친구 이정애』라는 조그만 전기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지금의 망우리 금란교회 설립도 이정애 친구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다.
두 차례의 미국 유학을 거친 이정애는 간호학 개척을 위해 이화여대에서 혼신의 힘을 쏟았으며 친구인 김활란의 내조자로서 자기직분에 충실했으며 모든 일에 김활란을 앞세우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겸손과 미덕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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