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내 고향 마산리 표산 고분군 황의돈 1938.6.30. 조선일보

정종배 2021. 3. 10. 15:55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 김시민 장군 마지막 3장수 신재 정감 장군 신도비

 

숲에라고 부른 당산나무 10여 그루 중 한 그루 남은 상수리나무 80여호 되던 고향은 30여호로 줄어 빈 집과 무너지고 헐어내 동네 한 가운데인 곳에 담장이 무너지고 텃밭으로 쓰이고 있다.

8장수 무덤을 1938.6.30. 조선일보 황의돈 기자가 '향토문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마산리 표산 고분군을 취재하였다.

 

신문을 한글로 풀어 소개한다

항토문화를 찾아서 함평행 마산리 고분군 황의돈

 

다음으로는 학교면 마산리 고분군이 가장 재미스럽게 본 중에 하나이다.

이는 마산리 후록 표산에 있는 7기의 대형고분으로서 그 분포상태는 다음에 있는 도면과 같다.

이 도면과 같이 7기의 고분이 산재하여 있는 중에 제1, 2 고분은 표주박 형과 같이 연결하여 있으므로 경주에서도 흔히 보는 바와 같이 1기의 분이 표주박 형으로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이 산을 표산이라 한 것도 아마 이 무덤을 보고 자루있는 산이라하여서 한자로 표산이라 쓴듯 하다.

제1호분의 외형은 주 60미 고 13.7미요 발굴된 현실의 이면은 오장 4미 고 2미 폭의 상부 1.3미 동굴부 2.2미로서 입구는 파괴되어 원으로 변별하기 어려우나 좌우후3면의 벽엔 인공을 가하지 않은 전대의 자연석편으로 겹쳐 쌓아 올렸고 천정엔 광대한 자연석 3편이 이어덥혔있다. 현실엔 도굴자의 소위로 인하여 해골과 부장품은 1편도 찾아볼길이 없게 되었다. 

2호분의 외형은 주(둘레), 고(높이)가 1호분과 유사하나 후면의 일부가 파괴되어 원형을 실측하기 어려우며 묘정도 또한 도굴자의 손으로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아직 현실에 까지는 미치지 못한듯 하다. 

그리고 제3호분의 외형은 주 52미 고 11미로써 그 도 또한 도굴자에게 파괴되었으며 그도 다 파괴되었음을 무엇보다도 가장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그러면 이 고분은 어느 때 누구의 무덤인가? 전선로부터보면 무안군 고이도(고려와 동음)에 있던 고려국 왕이 적군에게 쫓겨서 이 부근 고이동(학교면 화산리)에 와 은거하다가 죽은 후 이곳에 매장였으므로 이를 고려왕릉이라한다고 이른다. 

만은 고려시대엔 역대 왕릉이 이곳에 와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시대엔 영토가 이곳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니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백제 시대 혹은 그 이전이 고분인듯 하다. 부장품이 없어 무엇으로 시대를 추측키 곤란하나 외형이 어떻든 웅대하면서도 현실의 구조가 지극히 단순조잡하여 벽도적 장식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벽을 쌓은 돌 또한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뿐 되었음을 보면 비교적 공예 기술이 발달치 못한 원시시대나 백제의 초기 혹은 삼한시대에 어는 소봉건국의 왕릉이거나 또흔 귀인 부호의 유기있듯 하다. 

그리고 제2호분은 제1호분의 배우자 혹은 부장품의 장매지인 듯 하며 그밖으로 오기의 부속묘는 시종자 혹은 그 자손의 유기인듯 하다. 함평. 나산 양천 유역에서 지석군의 분포상황으로부터 유사이래 인류생활의 잔적을 엿보게 되었어고 마산리 고분군으로부터 봉건시대의 문화적 정도을 더불어 보게 되었음은 이번 함평행 중에서는 이가 가장 큰 2종의 수확이라 할만하다.

 

표산이란 마을 이름이 지금 알고 있는 표주박 형국 풍수에서 온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고분의 형태를 장고형이 아니라 표주박으로 보고서 표주박 표자의 표산으로 보고 기사를 썼다.

일제가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로 쓰기가 어렵다고

표주표瓢가 아닌 북두자리 표杓를 써 현재 표산이 되었다.
고구려와 관련이 없고 이미 도굴을 당했지만 석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엄청난 규모로 봤을 때 백제시대 지방 호족의 무덤이라고 인정했다.


도굴한 유물이 일본 어느 공간에 있을까
어릴적 들었던 내용은 일제시대 도굴꾼을 머슴으로 위장시켜 3년 동안 부장품을 싹 쓸어 갔다. 20여년 전 일본인들이 버스 한 대로 옛 고분 지도를 놓고 어떻게 관리하는 지 확인차 방문한 적도 있었다.

장흥 해산토굴 한승원 소설가의 영산강 유역의 인문학적 탐사기인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김영사, 2012)의 에세이에 내 고향 마산리 표산 고분군의 도굴과 영산강 사포나루 어부가 생업을 이어가는가? 또랑시인 인사차 들렸을 때 한작가님이 부탁하여 두 가지를 확인하여 책에 수록했다.


1960년대 말 새마을운동 마을 앞 길 확장할 때 작은 고분 석실 돌을 빼내 석축을 쌓았다.
학다리중앙국민학교 통학로 꾸정다리 한자로 군정교群政橋이다 고분을 쓴 뒤 참배객들이 몰려들어 물이 꾸정물이 되었다고 이름을 지었다.
놋두개 노자돈을 놓고 넘는 고개였다. 장멧동이라는 산 이름이 있는데, 지금은 동함평산업단지로 평지되었다. 광주광역시 시장 이용섭 시장과 건명원 최진석 교수 김태희 탈랜트 부모님 고향인 함평군 대동 향교의 앞산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장수의 무덤으로 알고 있었다. 60년말 호남 한해 때 헬기장을 만들어 귀빈들이 드나들고 학생들의 축구장이었다. 동함평 산업공단 공사 때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으로 천제의식 제단터도 발견되었다. 공사 현장 보조 일을 맡은 당시 이장인 육촌 동생의 증언이다. 고분군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노자돈은 놓고 넘는 고개라 놋두개라 이름지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새마을운동 시작할 무렵 고개를 신작로로 낼 때 구경하였다. 불도저로 밀어내는데 정상 부근에서 성황당 돌무더기와 상당량의 엽전이 나왔다. 지금의 동함평 IC 톨케이트 통과비가 쌓이는 것도 지명과 연관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동함평공단을 조성할 때 마을 뒷산에 주거지와 옛무덤 형태가 무수히 발견되었다. 아마 고분군을 쓸 때 소개하지 않았을까. 9대조 표은 관자 충자 할아버지께서 정자동에서 분가하여 입향한 1779년 때 심은 당산나무가 30여년 전부터 거의 죽고 상수리나무 한 그루만 남았다. 새로 몇 그루 심었다. 250년 넘으면 너희 땅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고향 친구들이 모이면 지금도 종종 입에 오른다.


옛날 옛적 아기를 낳았는데 배에 임금 왕자가 새겨져 있어 궁궐에 알려질까봐 바로 엎어버려 묘를 썼다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였다.
어릴 때 아이들은 종영이 형네 할머니라 말하였다. 그 종영이네 할머니 딸이 함평읍 수호리 해동 출신 노동자 시인 조영관의 할머니이다. 또랑시인 대고모할머니이다. 영관이도 어릴적 할머니 손을 잡고 진외갓집에 자주 왔었다.
영관은 학다리 중학교 동기로 군밤타령을 잘 불렀다. 서울 성동고 문예반 활동과 서울시립대 도시행정과 입학 후 영문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인천 부평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였다.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동공동체 설립을 추진하는 등 더불어 일하고 나누는 평화로운 세울 꿈꾸었다. 영관이는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작시를 남긴 박영근 시인과 막역한 사이로 박시인의 마지막을 지켰다.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영관이는 간암으로 2008년 2월 20일 문학의 길을 시작하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다.
1주기를 맞아 유고 시집 '먼지가 부르는 차돌맹이의 노래'를 펴냈으며, 10주기를 맞아 동료 작가들과 추모사업회와 유족들의 합심으로 '조영관 문학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제11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작품 공모 안내문을 소개한다.
일생을 시대의 아픔 곁에서 삶의 변두리에 투신하여 시와 함께 빛나는 먼지가 된 사람. 한 권의 유고 시집 속에 잠든 한 시인이 있습니다. 소탈했으나 비범하였고, 단단했으나 따뜻했던 그의 마음과 태도를 기려 '조영관문학장작기금' 수혜 작품을 다음과 같이 공모하오니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또랑시인 인천에서 1990년에서 2000년 10년 살 때 두 번 만났다. 백마장 길 위에서와 인천지역문화패의 장구를 배우면서 그 곳에 들른 영관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때 할머니와 내 고향 진외갓집에 자주 들렸다며 근황을 이야기하였다.
지난 3월 6일 토요일 모란공원 영관이 묘역에서 치른 창작기금 수여식과 추모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전날 춘천 김유정 문학관을 일군 전상국 선생님을 뵙고 난 뒤라 몸 상태가 허락하지 않았다. 요즘은 외출하고 난 뒤면 이틀은 쉬어야 한다. 추모식을 이끈 영관이 동생인 조영선 변호사와 창작기금 수여 작가 선정에 힘쓰는 박일환 시인께 미안했다.

 

문화재

본문

 

함평 마산리 고분군

주소세부명칭지정번호지정일분류수량/면적시대

전남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 산16-2
함평 마산리고분군
전남기념물 제122호 1988년 12월 21일
고분
백제시대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에 있는 고분군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됐다. 이 고분군은 일명 왕무덤[王陵] 또는 8장수무덤[將帥墳墓]으로 불리며 모두 9기로 구분된다.

주민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대형고분인 1호분과 2호분은 석실의 규모가 커서 석실 내에는 7∼8명이 함께 앉아 놀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1호분과 2호분의 봉토는 서로 연접돼 누에고치 모양의 표형고분으로 이 고분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 모두 도굴됐는데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1호분에서 놓치고 간 금귀걸이, 옥목걸이를 취득해 팔았다는 전언이 있다.

2000년 10월 '전남지역 고분측량 보고서'(책임조사원 임영진 전남대교수)에 의하면 지금까지 2기의 고분으로 알려진 표산 1호분이 1기의 장고형고분(전방후원형고분) 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회원 창작 詩 함평군 마산리 고분 발굴에 대한.....

 

함평 마산리 고분은 왕릉급 지방수장층 무덤

내 어릴적 뛰놀던 고향(표산) 뒷산입니다. 그 고분 위에서 놀았던 놀이는

호박잎을 말려 대나무 파이프로 담배 피우기. 쌀을 훔쳐내 고분 황토를 파내 이리저리 구들장을 놓아 통조림 깡통으로 밥지어 나눠먹기, 모의간첩잡기, 술래잡기 및 땅따먹기 만경. 돼지오줌보 및 쌔끼로 돌돌 말은 공으로 축구시합. 단오날 그네 타기. 가뭄에 기우제 지내며 남자들 오줌싸기 그걸 받아 냇가에서 아녀자들의 오줌싸기. 백중날 머슴들의 씨름장 등 다목적 놀이터와 신성함이 공존하는 마을 공동체 난장이었습니다.

 

어릴적 이야기 어느 할머니께서 아들을 낳았는데 등에 왕자가 새겨져 있어 역적으로 몰릴까 우려해 아들을 몰래 죽여 여기에 묻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로 이야기 샘이었습니다.ㅡ일명 왕구데미, 팔장수 무덤, 후백제 토호세력의 무덤으로 불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측에서 머슴으로 위장한 전문 도굴꾼들이 싹쓸이 도굴로 인해 유물 출도가 많지 않아나 싶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석실 안에 들어가 소꼽놀이 및 일탈 장소였다합니다.

70년대 전후 새마을 운동 시작할 때 석실을 빼내 도로 석축으로 사용하는 무지함을 드러냈습니다.

요 근자에 일본인들이 관광버스로 관리 상태를 보러 와 안내를 부탁하여 집안 동생이 안내하며 보았는데, 지도에 낱낱이 기록 되어 복사본이라 하나 주라하였으나 주지 않고 갈 정도로 일본인들의 기록과 사후 관리에 대한 철저함과 관심에 놀랐습니다.

 

작년 소설가 한승원 장흥 해산토굴 집사람과 인사차 방문하였을 때, 마침 <영산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김영사) 집필 중 내 고향 함평 사포나루에 어부가 현재 작업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여 주라 하여 학다리 중고등학교 단골 소풍과 행군지지인 사포나루를 찾아가 한승원 소설가와 어부를 연결하여 원고를 마무리함. 그 책에 이 고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꼭지 넣었습니다.

 

현재 함평군에서 고분공원을 조성하려 사전 조사차 발굴한답니다.

내 고향은 원래 표주박형국이라 표주박 표산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조정시 무안군에서 함평군으로 편입하면서 북두칠성 표로 고쳐 현재 표산으로 불립니다.

그 고분으로 인해 초등학교 등하교 시 건너다니는 다리가 꾸정다리라 하였으나 한자로는 군정교(무리군 정치할 정)로, 고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 꾸정물(흙탕물)이 흘렀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 하였습니다.

고향 터(진주 정가 집성촌 번성하였을 때는 80여호였으나 현재는 35여호)를 잡을 때 선조들이 250년 지나면 너희들 땅이 아닐 것이라 하였답니다.

당산나무 고사와 앞 구렛들 들판으로 무안공항 고속도로. 뒷산 가까이 동함평 IC, 그리고 군에서 동함평산업단지 유치와 고분공원 조성으로 섬 아닌 섬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실향민으로 살아야 할 형편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엄마가 몸이 아파 외가에서 요양을 할 때, 엄마 보고파 견딜 수 없을 때 달려가 고분 위에 앉아 노을이 물들 때까지 엄마 생각만 하다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봄 방학 끝날 무렵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어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그날도 엄마 생각나 고분 황토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노을이 사라져 터벅터벅 내려와 집에 오자, 베 짜는 소리가 들려 문을 벌컥 열였습니다. 그렇게 보고싶던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춤까지 추며 좋아라 한지가 벌써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흘러 그 엄마는 지난 2월 영면하시어, 이제 영원히 불효자 가슴 안에 모시었습니다.

그래 지금도 노을이 들면 어머님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렇기에 노을 보러 그렇게 서해바다로 내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노을 앞에 한참 서서 어머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아프신 몸으로 자식들을 위해 웃으시는 마음으로 저희 앞길을 열어주시길.....

싱거운 불초자 샛째 엄마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오늘 꿈 속에 오시어 생전 싱거운 놈이라 다시 한번 씽긋 웃어주시길......

 

【뉴시스와이어】- 백제에서 온 동전무늬 새김 전문도기 출토

동신대학교 유적조사단(단장 이정호 교수)과 함평군(군수 안병호)이 지원하는 함평 마산리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22호) 제1호분에 대한 학술발굴조사 성과를 최근 중간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27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공개한다.

마산리고분군은 전남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 산16-2번지 일대에 소재하는 삼국시대 고분 떼이며, 현재까지 13기가 존재한다고 보고됐다. 이들 고분에 대해서는 제1호 이래 13호까지 편의상 번호를 붙여 구별한다.

 

↑ 함평 마산리 고분은 왕릉급 지방수장층 무덤

이 중에서 이번 학술발굴조사를 벌인 곳은 제1호분. 이 고분은 무덤 주인공을 묻은 봉분이 평면 원형인 데 비해 그 전면에는 방형 단을 마련했다 해서 이른바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혹은 장고형 무덤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13기가 보고된 이런 전방후원형 고분은 고대 일본의 무덤 양식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분의 성격과 관련해 한일고대사의 논쟁이 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 무덤 주인공을 안치한 석실은 장방형으로 길이 523cm, 너비 250cm, 높이 290cm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같은 석실 규모는 현재까지 확인된 전남지역 삼국시대 고분 중 최대 규모이며, 백제지역에서도 최상위 그룹에 속하는 초대형급에 속한다. 견주자면, 지방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인 셈이다.

이 고분의 석실구조는 입구에 문이 있고, 그 안쪽에 석실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무덤은 이미 극심한 도굴로 인해 출토 유물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석실 내부에서 백제 토기 조각 약간과 함께 시유도기(施釉陶器), 즉, 겉면에 유약을 칠한 도기의 일종인 전문도기(錢文陶器. 동전무늬장식 도기)가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이런 시유도기는 서울 풍납토성 등지의 백제 중심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 항아리로서, 간혹 백제 영역 내에서 활동한 지방세력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한다.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도기 일종으로 알려진 데다,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한 기종(器種)인 까닭에 당시 백제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의 정치적 관계를 표상하는 유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전문도기가 해남 용두리고분(2008년 발굴)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으나 작은 파편이어서 고분의 성격을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함평 마산리고분에서 확실한 개체가 출토됨에 따라 이 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 고분의 시기는 석실구조와 토기 등 출토유물로 보아 6세기 초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편, 마산리고분군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방후원형 고분과 원형분 13기가 집단으로 조성된 고분군이다. 따라서 향후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각 고분의 상호관계를 파악한다면 한일고대사 연구의 논쟁이 되고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설명 : 마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된 동전무늬장식 전문도기

출처 : 함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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