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조선 식물분류학의 유일한 학자 장형두 선생님

정종배 2021. 6. 24. 09:53

 

 

 

1906년 광주 출생

 

1923년 9월 15일 관동대지진 피란 동포 11명 도착 광주군 광주면 동면 장형두(조선일보, 1923.09.18.)

 

1924년경(18)부터 도쿄대 식물학 강사로 연구하던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선생에게 사사

 

? - ?동경원예학교 연구과 입학(졸업)

 

? - ?이리농림학교 졸업

 

1928(22)동경원예학교 고등조원학과 3년 졸업

 

광주고보맹휴사건 후문 (동아일보, 1928.07.12.)

 

? - ?조선일보 문화부, 숭실전문학교, 경성약전 식물학교실(도봉섭),동경제대 연구실(이시도야)등에서 연구

 

1933(27) 거금 2만원을 들여10여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점의 식물석엽표본을 연희전문학교

에 기증 (1년만에 정리)

 

"이만원(二萬圓)의 거비(巨費)와 십개년의 적공(積功)"

식물표본 칠천여조

<광주장씨로부터 연전에 기부>

동양일(東洋一)의 표본실 창설

[광주] 곡성의 정씨 문중에서 만권의 한서적을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다는 사실은 세상의 긔억에 아즉도

새로운 바이려니와 광주읍 대정정(光州邑 大正町) 사는 장형두(張亨斗)씨는 2만여원의 거대한 자금을 들여가면서

10개년이란 긴 세월을 전심력을 기울여 수집연구하야 오던 식물표본 7천여종을 또한 연희전문학교에 긔부하얏

다고 한다.

그런데 표본으로 말하면 우리 조선에서는 물론이오 전동양에서 별로 어더보기 어려운 진귀한 조선의 보물이라

는바 이것을 완성하기까지에 장형두씨는 그 가정에 반역자가 되엇슴은 물론 전 가산을 탕진하얏슬뿐외라 험한

산과 거치러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길 번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물은 벌서 장형두씨의 손에서 연희전문학교 수리과장(數理科長) 리춘호(李春昊)씨를 통하야 완전히

접수되엇다는데 장형두씨는 그것을 정리하야 주기 위하야 불일간에 상경하리라는바 그것을 정리하뉴면 장씨

자신이 그 방면에 상당한 소양이 잇는 사람 5, 6명을 데리고 불철주야로 3개월 동안은 걸리리라고 한다.

장형두씨 경력

그런데 장형두씨는 방금 27세의 청년인바 일즉이 어렷슬때부터 이 방면에 뜻을 가지고 18세 되던 해에 동경에

건너가서 동경제대 강사로 전일본식물학계의 태두인 목야부태랑(牧野富太郞) 선생에게서 분수학(分數學) 연구

의 지휘를 바더가지고 동경원예학교 연구과(東京園藝學校 硏究科)를 마치고는 다시 동경고등조원(東京高等

造園)을 소화 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얏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 건너와서 경성제대(京城帝大) 강사 석호곡(石戶谷) 선생의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잇섯는바 지금

에는 연구비의 조달이 극히 곤난하야서 고향인 광주에 도라와 있는 터다.

장형두씨담(張亨斗氏談)

저는 원래 누구에게 치하를 밧고 십거나 자아를 선전하기 위하야 긔부한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나 알으시고

차저주신데 대하야 사실을 숨기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아프로 일이 내 뜻과 가티 되기만 한다고 하면 연전(延專)

에다가 동양 제일의 식물표본실을 만드러 볼가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조선에서는

아즉까지도 이 방면에 리해를 가지고 잇는 이가 별로 만치 못한 것이 큰 유감인 동시에 외국 사람에 대하야서는

퍽 부끄러운 노릇이나 아프로는 점점 이 방면의 사람이 생겨날 줄 밋습니다. 저는 평생을 여긔에 마칠 작정입니

. 운운.

 

1933년 연전식물표본 정리 완료

"연전식물표본 정리완료"

청년식물학자 장형두씨로부터 기증된 식물표본 수천점은 일개성상을 걸려 학리에 근거를 둔 분류적 정리가 일단락을

찾어 교내 명물의 하나가 되엇다하며 체경중(滯京中)이던 장형두씨는 신포부를 가지고 근일중 채집차로 남조선을

향하여 떠나리라 한다.

 

19335'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

 

19342'경성식물회' 창립(조선향토식물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도와 애호가들이 참여)

장형두와 박만규(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

시험을 통과)가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이 열렬히 활동.

 

1934년 7월 과학지식보급회 발기인으로 참가 망우리에 묻힌 분 박길룡, 박승직, 송진우, 장형두 등이다

 

19353월 경성식물회는 '조선식물연구회'로 개칭

1935년 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우리나라 학자들로만 구성된 조선박물학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조선박물학연구회는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분야의 초석이 되었던 학회로 해방 이후 한국생물학회를 거쳐 한국식물학회와 동물학회로 발전했다. 이 학회에서는 조선식물향명집, 조선식물명집을 발간했다. 1935년 조선식물연구회에서 창간한 잡지 조선향토식물(1935)에는 장형두의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다.

1935년 조선식물연구회 <조선향토식물> 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평양식물지(平壤植物誌), p.25-42', 조선식물소보(朝鮮植物小報), p.43-54'

<조선향토식물>1937년 제2호까지 발간한 것으로 보임(서지 사항만 존재).

이미지 출처: 서효원 박사 칼럼에서 재인용

 

1936(86일~8월 18일)사학자 유홍렬, 동물학자 조복성, 조류학자 원홍구, 나비학자 석주명 등등 각계의 권위자들로 구성된 백두산대탐사에 참여

 

1938년 5월 15일 전남 일원 과학 답사

 

1938년 전남산림회 기관지 '청구(靑邱)''전라남도 수목의 종류와 분포지' 논문 기고

 

1940년 조선산림회보에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1)' (186, 9월호)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2)'(188,

11월호)연재(전의식 선생님이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한글로번역한 자료가 선생님 블로그에 담겨 있다.)

 

http://blog.daum.net/kplant1/7903500

1940년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 연구.출판 직전에 의견차이로 탈퇴.

 

전국의 수많은 식물표본을 수집하며 이전 일부 우리나라 식물에 대한 나카이(中井猛之進)의 연구결과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다. 지리산을 포함한 남부지역의 식물조사를 위해 전라남도에 머물면서 전라남도식물(1940) 발간을 주도했다. 광복 이후 서울대 사범대에 재직할 때 학생식물도보(수문관, 1949)를 저술했다. 그는 식물 이름을 한글학자 최현배의 도움을 받아 식물묻사리’, ‘고산식물높산묻사리로 하는 등 한글로 표기했다.

 

? - ? 성대강사, 서울중학교 교유(敎諭)

 

서양 근대 생물학의 국내 도입에 관한 연구 : 생태학(김준호, 한국생태학회지191, 1996, 82~83)에 따르면 “1900~1945년 한반도에서 발표된 생태학 논문은 210, 연구자는 81명이다. 그 중 일본인 66(84%), 구미인 5(6%), 한국인 10(10%)이었다. 한국인 중에서 7명의 연구자는 광복 이후에 근대 생물학 및 생태학의 국내 도입에 공헌했다고 한다. 10명 중에 장형두가 나온다. 장형두의 주요 분야는 Plant geography(식물지리학)로 논문 2편이 있다고 한다. 또한 장형두(1940a, b)한국식물 중에서 식물지리학적으로 특이하게 분포하는 39종을 기재했다고 한다. 여기에 언급된 장형두의 논문은 조선식물과 그 분포상의 탐구(1), (2)(조선산림회보(186188. 1940)이다.

 

 

제주어와 석주명(강영봉, 탐라문화22, 7)에 따르면, 석주명의 제주도 방언집(서울신문사, 1947)에는 장형두가 비교한 제주도방언과 전라도방언 공통어 785개가 실려 있다.

 

1948(단기4281) 91일자로 국립 서울대학교 부교수에 임명(사범대학)

 

1949년 학생 조선식물도보(朝鮮植物圖譜) 발간(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

3판까지는 '학생 조선식물도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고, 4판에서는 '학생 식물도보"로 발간한 것으로 추정.

식물을 완전 한글로 '묻사리'로 표현한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1949년 7월 대한산악회 서해안 탐사 보고 강연회 방송국 출연 

 

19491023일 좌익 연루로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사

 

 

근대 식물분류학의 국내 도입에 관한 연구(이상태, 식물분류학회지(19943, 49~50)에서는 장형두는 일찍이 일본 千葉園藝高等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분류학자 小泉源一에게 분류학을 지도 받아 대학생 식물감정대회에서 2등을 한 적이 있다 하며, 小泉의 조교로 일하면서 일본 각지의 식물을 채집하는 한편, 한국 식물상의 규명에 장기간 사재를 드려서 수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조선향토식물이라는 잡지를 편집 발간하였으나 2호만 나오고 잡지는 더 이상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어서 중단되고 말았다. …… 장형두는 평양부근의 식물조사를 했고(1935), 전라남도 수목의 분포를 조사하였으며(1938), 또한 각 지방의 식물 鄕名을 수집하는데도 힘을 썼었다고 나온다.

 

한반도 식물지명 사전(국립수목원, 2015)에는 장형두가 수집한 식물표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한반도에서 식물표본을 채집한 기록은 약 7만점 정도가 남아있다. 이 중 채집 개수가 많은 10명으로는 Nakai15,000점이 넘는 기록으로 가장 많고, …… 그리고 DB에 구축된 Taquet의 표본 기록은 현재 3천개 정도이나 실제 채집 표본 수는 약 6천개로 추정되며, 주로 지리산에서 채집한 Okamoto가 약 3천개, Koidzumi 2,200, 장형두 2,100, Uchiyama 2,100ro, Mori 1,800개 이상이다” (15)

 

장형두(1906~1949). 1906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1917~1928년까지 東京高等造園(현재 Tokyo University of Agriculture)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대에 University of TokyoMakino, T로부터 분류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1923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문화부, 숭실전문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지만, 194943세로 일찍 순직하였다. 일본에 소장된 표본은 2,177점이 확인되며, 주로 Kyoto University1,252, Museum of Nature and Science Japan923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일부가 University of Tokyo에 소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표본이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남한 지역에서 채집된 표본이며, 일부 표본 정보에는 K.T.Cho로 기록되어 있다. 채집기록은 1927(21)부터 1943(37)까지이며, 1928, 1931, 1932, 1933 8월에는 제주도에서 채집된 표본이 있다. 1927~1933년까지의 채집기록은 약 32건만이 남아있으며, 대부분 제주도에서 채집된 표본이다. 1932(26)에는 그전에 채집한 표본 7천여 점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해당 표본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University of TokyoKyoto University에 소장된 표본은 1934(28) 이후 채집품이 대부분이다. 주로 5~10월 전라남도 광주의 무등산, 순천 조계산, 구례 지리산, 영암 월출산, 고흥반도, 완도 보길도, 백양산 등에서의 표본 기록이 남아있다. Nakai, Ohwi, Tagawa 등에 의해 기재된 학명 중 7개의 학명이 인용이 된다. 이영로 교수에 의해 기재된 Miscanthus cangii Y,N.Lee는 장형두 교수의 정을 따서 명명한 종이다. 19348월에는 전라남도 백운산, 경상북도 청송 및 함경북도 청송에서의 채집 기록이 있고, 9월은 주로 평양에서 채집된 표본이 있다. 1935. 주로 5~9월까지 전라남도 광주와 무등산에서의 채집 기록이 있으며, 일부 백운산과 제주도, 금강산에서의 표본이 있다. 1936년 전남 영암 월출산, 대둔산, 완보 보길도, 순천 조계산, 지리산, 제주도, 백두산, 광주 무등산에서의 채집 기록이 있다. 1938. 제주도, 대흑산도, 고흥반도의 외나로도, 팔영산, 영광 불갑산, 거제도, 담양, 무주군, 백양산, 강진군, 광주, 나주의 표본 기록이 남아 있따. 1939. 백양산, 내장산, 제주도, 서울, 동해안의 표본이 남아있다. 1940. 광주 무등산, 서울, 제주도, 인천, 태릉, 가평, 남산, 전주, 완주, 장수 덕유산, 광주, 1942. 여수, 순천, 장성, 무등산, 백양산, 무등산, 목포의 채집 기록이 있다.(20~22)

 

인동장공형두지묘

 

묘비 앞면, 서울대학교 사범대 부교수 인동장공형두지묘

묘비 옆면, 단기 4239년 10월 8일 생 4282년 10월 23일 졸

묘비 뒷면, 처 김영이 자 일성 득성 녀 혜경

묘비 옆면, 사자 윤득성 자부 김경숙 손녀 장윤희 장윤하 서기 2019년 9월 8일 근립

 

중랑망우공간 묘적부 바탕 전산자료

19491022-044

묘지번호 201271

장득성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265-311

 

 

 

'망우리공원(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 박인환 음악낭독극  (0) 2021.06.25
조선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선생님  (0) 2021.06.24
망우리 묘지번호  (0) 2021.06.21
중랑구 방정환교육지원센터  (0) 2021.06.20
하트  (0) 2021.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