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서해 최학송 89주기 추모문화제까지 이야기

정종배 2021. 7. 9. 00:35

 

 

 

 

1954년 11월 14일 망우리공동묘지 <우리의 소원>의 작사가인 석영 안석주 묘비와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 김윤식 시인의 이장 및 묘비 제막식을 주도한 <성북동 비둘기>의 이산 김광섭 시인은 신문 기고문에

"자연의 경건한 형성을 사랑하는 인간의 지순한 노력에 의하여 다시 형성된 것이 문화라면 그것을 이루어 인류의 마음에 새기는 사람 그가 가는 것을 산천과 세월에 맡긴다하더라도 그를 지키고 그에게 하나의 표석을 세워줌이 또한 문화의 마음일진대 앞으로 이 나라의 저명한 문인 학자 예술가의 공동한 묘지가 설정되기를 바라며"(경향신문 1954.11.14.)

이산 김광섭 시인이 빗돌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으로 망우리공원에 대한 해석과 현대화에 대한 가이드라 볼 수 있다.

 

서해 최학송 살아생전 자신에 대한 글을 남겨 소개한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전남 영광 출신 조운 시조시인 누이 조분녀와 결혼하며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지만 남도 여행 중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8대경승이라 여행기를 남겼다.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토혈」 「고국등으로 '조선문단' 첫번째 추천작가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의 작품은 남북한 중국 러시아 등 중고교대학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서해 최학송의 사인인 유문협착증은 굶기를 밥먹듯 하여 즉 창자가 붙어 꼬인 환장해 죽는 것이다. 이중섭 화가도 같은 사인으로 볼 수 있다. 서해의 사람다움에 병상기록과 진료 기록이 남아있다. 이익성 작가는 헌혈을 많이 하여 일찍 죽는다는 글도 남겼다. 사망진단서 사인은 망우리공원 태허 유상규 당시 경성의전 교수가 하였다.

 

1932년 9월 11일 최초 문인장으로 미아리공동묘지로 향해 가는 장례행렬 당시 서울의 자동차가 500여대 정도였는데 50여대가 이어졌다. 추모시와 인물평을 남긴 문인은 이병기 박종화 조운 김억 심훈 이태준 김동인 이종명 양건식 박상엽 등이다. 유족구제회모임과 문인회에서 묘비도 제작하여 세웠다.

1958년 9월 25일 이산 김광섭 시인의 주도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처음에는 묘지가 관리되었으나 차츰 잊혀져 2000년 이후 필자와 곽근 교수의 재발견되기 전까지 폐묘나 다름없었다. 곽근 교수가 최학송 문학 집대성하면서 서해의 묘지가 알려졌고, 2004년 7월 9일 우리문학기림회(이영구 김효자 이명숙 이명재 고임순 김원중 이응수 하혜정 노영희 임헌영 허형만 곽근 김성진 홍혜랑 임영봉 등, 곽근 짓고 황재국 씀)에서 '작가 최학송 문학비'를 서해 최학송 묘역 앞 사색의 길 길섶에 세우고,

필자가 2006년 이후 묘역 단장을 3번 하였다. 청담고 청량고 신현고 상봉중 학생들의 봉사활동 체험활동이 이어졌다. 마지막 단장은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제삼한강통운(주) 이호일 대표가 "알리지 않고 좋은 일한다"며 후원하고, 아사카와 다쿠미 추모행사와 지금도 망우리 일에 후원하고 있다. 제삼한강통운(주)을 설립한 이완용 회장은 해사 2기 출신으로 해군사관학교 이충무공 관련 시설은 물론 해군 및 국군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최학송 소설가와 같은 함북 성진 출신이다.

 

서해 최학송 유족들의 부재로 2010년 무연고 처리문제가 있어 관리사무소에서 필자에게 묘지관리인이 되어주었으면 하여 묘적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2003년 망우리공원 무연고 묘지를 정리하여 용미리공원묘지로 옮겼는데 그 장소를 누구도 알지 못하여 안타깝다. 올 5월 중랑구청 발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에서 전수조사하면서 찾아낸 한글학자 주산 신명균 독립운동가 묘지도 무연고처리되었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2012년 서해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교수)를 조직하였다. 2015년 (사)중랑문화연구소(이사장 남화창) 주관 최학송 83주기 추모제가 열리기 시작하여 (재)수림문화재단 후원에 이어 2020년부터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7월 10일 토요일 비가 내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지만 예방수칙을 엄격히 지키며 행사를 치를 예정입니다. 시간 나시는 분들은 오시어 따끈한 피자와 국밥 한그릇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최서해의 아들 백과 택은 1932년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서해의 고향 성진을 향해 북으로 갔다. 어머니가 죽고 뒤이어 할머니마저 운명하여 고아처럼 떠돌다, 해방되자 죽어도 영광 외가에 가서 죽자며 남으로 내려왔다. 영광 외가에 도착한 지 일주일만에 폐병을 앓던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외숙인 조운마저 북으로 가버려 택도 1947년 다시 북으로 갔다. 평양의 중앙당 교육장에 찾아가 서해의 아들임을 말하자 그곳에 숙식을 제공하고 1949년부터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여 준박사로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을 역임할 때, 198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신필림영화제작소 신상옥 감독에게 서해의 소설 <탈출기>를 영화로 제작하길 명하여 최은희 주연 북한 전역에 상영하였다. 이에 택이 아버지 최서해의 맵고 짠 삶과 문학 활동 내력 가계 상황도를 일화 중심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글을 북한 잡지 '조국'(1985.9.)에 <생활의 결론>이라 발표하여, 서해의 가족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그 당시 택의 자식들은 다섯으로 모두 대학을 나와 평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과 북이 어서 교류하여 서해의 후손들이 망우리공원 묘지에 성묘 오는 날을 기대한다. 최택의 수기는 문학사상(2010.3.)에 재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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