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한글날과 망우리공원

정종배 2021. 10. 9. 05:41

한글날 망우리공원/정종배


오늘은 575돌(1446년) 한글날이다

망우리공원에는 우리말을 갈고 닦다 앞서간 사람들이 잠들어 계시거나 이장하였다.

송촌 지석영(1885~1935) 선생은 종두법을 처음 실시하고 최초 의학교 교장으로 5대 의사 집안이다. 한글보급 및 국어 개혁 운동에 참여하고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했다.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아학편에 영어를 추가했다.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저서로 한글로 표시한 '자전석요' '우두신설' '국문신설 6개조 상소' 등이 있다.

 

옥파 이종일(1858~1925) 3.1혁명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1인 독립지사는 1898년 8월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한 것은 그의 개화운동에서 큰 전기를 이뤘다. 그는 신문을 문명과 개화를 추진하는 모체이자 개명을 위한 나침반으로 여기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0여 년 간 『제국신문』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제국신문』은 순한글판으로 발행되었으며, 독자층을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제국신문』을 통해 여성을 국가발전에 유용한 잠재적 자원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여성해방론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제국신문』을 ‘암(雌) 신문’이라 하고, 국한문 혼용체로 지식인들을 독자층으로 발행되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숫(雄) 신문’이라 불렀다. 이러한 보수적 유생들의 공격과 성토에도 아랑곳 않고 『제국신문』을 독립협회 여성 회원의 기관지임을 자처하며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신문을 발행하였다.

1907년 9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2년여 동안은 정3품인 학부(學部)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문 연구에서도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종성관(終聲觀)은 『훈민정음해례종성해(訓民正音解例終聲解)』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며 오랜 관습을 중시하여 실용주의적인 견해를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발음기관설(發音器官說)의 제창도 탁견이다. 1966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나용환 박동완 홍병기 등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개화기 선각자 설태희(1875~1940)와 첫째 아들 사업가 설원식 부자는 조선어학회 한글 연구 보급 큰사전 편찬 비밀후원 지원했고
둘째 아들 언론인 설의식(1901~1954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최초 한글 번역 충무공 나라사랑 정신을 알리는데 노력하여 '충무광'이라 불렀다

학범 박승빈(1880~1943)은 법조인 교육자 사회운동가 국어학자이다.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어학회'와 쌍두마차를 이뤘다.
조선어학회 '한글'에 대항에 '정음'을 창간해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통일안'을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공세를 폈다.
학범의 표기법 이론은 일종의 역사주의적이고 음소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훈민정음 창제 이래 우리 민족이 사용해온 표기법을 거의 그대로 따르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다. 오늘의 규범문법과 어문규범의 전통이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반대쪽에 서서 논쟁을 벌이고 상호 경쟁했기에 지금의 우리 문법과 철자법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최근 학계에서는 학범의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재평가하려한다.

지기 문명훤(1892~1958) 독립운동가 연보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말에는 본 있고. 글에는 본이 있다. 말과 글이 같은 민족의 사회에는 말의 본이 글의 법이오, 글의 법이 곳 말의 본이다." '고등 한국말의 본'에서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콩박사 김호직(1905~1959) 한국인 최초 말일성도(몰몬교)교인으로 운명하며 명함의 직함 26개 중 한글학회 이사장도 함께 했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어린이' 잡지를 통해 동시 동요 발굴(윤극영, 유지영, 한정동, 윤석중, 서덕출, 박목월, 강소천, 최순애, 이원수)과 보급에 힘을 썼다. 최신복(1906~1945) 강소천(1915~1963) 함이영(1915~1957) 등도 뒤를 이어 활동했다.

작곡가 산남 채동선(1901~1953) 민요를 채록 교과서에 수록하여 우리가 현재 부를 수 있게 했다. 2012년 보성 벌교 채동선음악당 뒤 부용산에 이장되었다.

만해 한용운(1879~1944) 김상용(1902~1951) 김동명(1900~1968) 김영랑(1903~1950) 박인환(1926

`1956) 김말봉(1901~1962) 최학송(1901~1932) 계용묵(1904~1961) 함세덕(1915~1950) 김이석(1914~1964) 시인 등 우리말로 시와 소설 희곡을 써 민족의 정서를 북돋았다.

명재 이탁(1898~1967) 북로군정서 청산리대첩 치른 후 1932년 조선어학회 가입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 사정위원 역임하고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 묘비가 남아 있다.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 안장되었다.

 

주산 신명균(1889~1940)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1921년 장지영·이윤재(李允宰)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으며, 1931년 조선어학회가 발족되자 주요구성원으로 활약했다. 기관지 〈한글〉을 통해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앞장섰으며, 〈한자음 문제에 관하여〉·〈된시옷이란 무엇이냐?〉·〈조선글 철자법〉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편 출판사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집대성된 고전문학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집〉(2권, 1936~37)·〈가사집 歌詞集〉(1936)·〈시조전집 時調全集〉(1945) 등을 간행했고, 어린이 잡지 〈신소년 新少年〉을 발행했다. 저서에 〈조선어문법 朝鮮語文法〉·〈세종어제훈민정음원본 世宗御製訓民正音原本〉 등이 있다.

직계 후손이 남한에 살지 않아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인 박용규 역사학자 노력으로 두 번에 걸쳐 보훈처 신청하여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은 창씨개명 압박에 대종교인 나철 사진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생을 끊은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을 역임하였다.

망우리공원 묘지는 무연고 처리로 용미리시립묘지로 합장하였다는데 실전되었다. 망우리공원에 초혼장을 다시 쓸 수 있도록 관계 기관에서 힘을 써 주길 바란다

 

오봉 박현식(1894~1954) 한영중고등학교 설립자이며 교육자로 1924년 조선어학회 전문 위원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및 표준말 모음' 전문 위원으로 활동했다.

 

장형두(1906~1949) 관동대지진 참상을 경험한 천재 식물분류학자로 비록 일본인에게 배웠으나 식물 이름을 우리말로 지은 당시 조선인으로 거의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로 1949년 반공이란 이름으로 고문사 당하여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2019년 70년만에 유족들이 새 묘비를 세웠다. 신원을 풀어 드려야 한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한국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한국말을 배워 주민들과 원활하게 소통했다

올해 자주 내리는 가을비에 차갑게 젖는 한글날

우리말을 갈고 닦아 고운말로 아름답게 살아가자

 

'망우리공원(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비꽃  (0) 2021.10.14
구름 성묘  (0) 2021.10.14
망우리공원 유택찾기  (0) 2021.10.05
망우리공원 희망유스나래 오리엔티어링 축제  (0) 2021.10.03
3.1운동 민족대표 박희도 망우리공원  (0) 202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