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이정애 간호사

정종배 2022. 5. 7. 10:39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이정애 간호사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호
이정애(李貞愛, 1901~1954) 68주기

우리나라 120년 간호사의 첫 장을 연 ‘백의의 선각자’ 이정애 간호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호이다.
이화고녀 3학년 때 3.1혁명에 참가한 독립유공자이다. 1925년 부모에 뜻에 따라 김옥현과 결혼하여 딸 하나 낳고 2년 만에 별거하다 1928년 이혼했다. 당시 장안의 큰 화제였다.

이정애는 1901년 8월 17일 새벽 서울 새문안 오둘골에서 기독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명원은 구한말 주사를 지낸 관리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특히 영어에 능통해 경인철도국에서 외국인기술자를 상대하는 직원으로 일했다. 어머니 박의신은 재색을 겸비한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 이정애의 미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정애는 여섯 살 때 여학교 양규의숙에 입학하여 낮에는 신학문이라고 일컫는 산술이며 국어를 배우고 밤에는 냉천동의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이정애는 중등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고등과에 입학했다. 그녀의 진취적 기상과 아름다운 용모는 뭇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특히 학교 성적이 뛰어나 급우들이 부러워했다.

이정애가 고등과 수업을 받던 중 3·1혁명이 벌어졌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성격의 이정애는 전국에 발송할 편지와 유인물들을 등사하느라고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자신은 옥에서 풀려나오고 친구들이 갇혔을 때는 분연히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거부했다. 3.1혁명으로 연루되어 투옥된 동료들 가정의 생활비를 위하여 삯바느질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일원 오십전 정도였는데 매달 오원씩을 벌어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3.1혁명 여파로 이화여고 고등과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채 집에서 쉬다가 1923년 이화학당 대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학교 규칙으로 기숙사 생활하였는데, 이정애는 줄곧 일등을 차지하였다. 또한, 워낙 빼어난 미모로 학교 안에서는 동료들 간에 즐거운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밖으로는 이 시대의 절세미인이 이화학당에 숨어 있는데 누가 먼저 그 미인을 차지하는가? 내기를 거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조여 버리는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장 용기 있다고 자처한 미혼 남성이라면 이정애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이화학당 교문 밖으로 몰려들었는데,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채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안창남의 청혼 사건이었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한반도 서울 일대 상공을 비행기로 날아다닌 최초의 비행사가 아닌가.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 방문위원회' 주선으로 서울 상공에서 시범 비행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창남이 서울 상공 시범 비행을 마치던 날 그 위원회에서는 각계 유명 인사를 초대하여 멋있는 연회 잔치를 벌였다. 안창남은 그 연회석상에서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일지도 모르는 미인 이정애라는 여대생이 이화여자대학 기숙사에 갇혀 있는데, 용기 있으면 청혼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 대학생이라고요?" 안창남이 매우 흥미 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옆에 있던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다니까! 하지만 안 될걸." 하면서 안창남의 그런 흥미를 비웃듯 까르륵 웃어댔다. "…?" 안창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모 인사가 그 까닭을 소상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용기 있다는 조선 장정들이 그렇게 몰려가 이정애를 만나 청혼하려고 발버둥이지만 만나기는커녕 교문 밖에서 면회조차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오." "그럼 좋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청혼에 실패하면 나는 평생 장가갈 자격이 없는 것으로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정애로부터 청혼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1928년 가을 이정애는 하와이로 떠나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뱃길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그 배에 동승 했던 일본의 황족 지찌부노미야(秩父宮)가 이정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버린 나머지 결혼을 간청했으나 그의 청혼 역시 여지없이 거절당해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25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고, 1931년 하와이 호놀룰루 Queen’s Colleage에서 간호학 전공 학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세브란스병원 간호실 부원장으로 취임하여 간호학과 간호 윤리를 강의했다. 그 당시 간호실 원장은 미국인이었다. 1937년 일제가 적국인 미국 유학 경력을 트집 잡아 세브란스병원에서 물러났다. 당시 이화여전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그녀를 기숙사 사감으로 초청했다. 그년 후배들에게 ‘백의의 천사’의 길을 택할 것을 권유하며 1937년 조선간호원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37년 7월 21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 간호원대회 조선 간호협회장 자격으로 파견되어 조선에도 명실공히 조선인 간호사가 있음을 유감없이 알리기도 하였다. 대회 참가자를 위한 다과회가 영국 왕실 주최로 베풀어졌다. 화려한 왕궁의 특별연회장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흰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흰 고무신의 30대 미인 간호원 한 사람이 200여 참석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국왕과 소녀공주 엘리자베스 현 여왕이 날아갈 듯한 한복 차림의 이 조용한 동양 미인에게 뷰티블을 연발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던 이정애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시기에 신문에 <전시생활을 확립-간편하고 저장할 수 있는 것- 가지수는 적게, 버릴 것도 이용하자>,<쌀을 절약합시다! 저녁은 잡곡밥으로> 등 몇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47년 김활란의 배려로 콜롬비아대학에서 간호행정학을 전공한 뒤 194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간호교육과 창설 초대과장으로 취임하여 후배 양성에 온힘을 다했다. 이정애는 이화여대 의약대학 교수로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6.25한국전쟁 때 죽을 고비가 왔어도 친구의 위기를 더 걱정한 의리의 간호사로 휴전이 되고 안정을 되찾자, 유아기나 다름없는 대한민국 간호계에 선진 간호시스템을 도입했다. 1953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탄생 133주년 정부로부터 최초로 표창장을 받았다. 1954년 5월 8일 금란지교 김활란의 눈물 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유방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망우리 ‘금란동산’이었다. 현재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화여대수목원 이화여대에 공헌한 7인 묘역으로 이장하여 김활란 박사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김활란은 이정애를 망우리 ‘금란동산’에 편히 모셔 놓고 다음과 같은 묘비를 세워 줬다.
“이 티끌 세상에 한 송이 백합 높은 뜻 깊은 사랑 그윽한 향기 우리 맘에 영원히 풍기리.”

김활란은 그러고도 이정애의 타계를 못 잊어 『우리 친구 이정애』라는 조그만 전기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망우리 금란교회 설립도 이정애 친구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다.
두 차례의 미국 유학을 거친 이정애는 간호학 개척을 위해 이화여대에서 혼신의 힘을 쏟았고, 친구인 김활란의 내조자로서 자기 직분에 충실했으며 모든 일에 김활란을 앞세우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겸손과 미덕을 잃지 않았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이정애 간호사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

이정애(李貞愛, 1901~1954) 68주기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이정애.GIF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35pixel, 세로 180pixel

이정애

 

우리나라 120년 간호사의 첫 장을 연 백의의 선각자이정애 간호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호이다.

이화고녀 3학년 때 3.1혁명에 참가한 독립유공자이다. 1925년 부모에 뜻에 따라 김옥현과 결혼하여 딸 하나 낳고 2년 만에 별거하다 1928년 이혼했다. 당시 장안의 큰 화제였다.

 

이정애는 1901817일 새벽 서울 새문안 오둘골에서 기독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명원은 구한말 주사를 지낸 관리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특히 영어에 능통해 경인철도국에서 외국인기술자를 상대하는 직원으로 일했다. 어머니 박의신은 재색을 겸비한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 이정애의 미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정애는 여섯 살 때 여학교 양규의숙에 입학하여 낮에는 신학문이라고 일컫는 산술이며 국어를 배우고 밤에는 냉천동의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이정애는 중등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고등과에 입학했다. 그녀의 진취적 기상과 아름다운 용모는 뭇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특히 학교 성적이 뛰어나 급우들이 부러워했다.

 

이정애가 고등과 수업을 받던 중 3·1혁명이 벌어졌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성격의 이정애는 전국에 발송할 편지와 유인물들을 등사하느라고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자신은 옥에서 풀려나오고 친구들이 갇혔을 때는 분연히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거부했다. 3.1혁명으로 연루되어 투옥된 동료들 가정의 생활비를 위하여 삯바느질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일원 오십전 정도였는데 매달 오원씩을 벌어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3.1혁명 여파로 이화여고 고등과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채 집에서 쉬다가 1923년 이화학당 대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학교 규칙으로 기숙사 생활하였는데, 이정애는 줄곧 일등을 차지하였다. 또한, 워낙 빼어난 미모로 학교 안에서는 동료들 간에 즐거운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밖으로는 이 시대의 절세미인이 이화학당에 숨어 있는데 누가 먼저 그 미인을 차지하는가? 내기를 거는 뭇 남성들의 가슴을 조여 버리는 화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장 용기 있다고 자처한 미혼 남성이라면 이정애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이화학당 교문 밖으로 몰려들었는데,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채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안창남의 청혼 사건이었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한반도 서울 일대 상공을 비행기로 날아다닌 최초의 비행사가 아닌가. 안창남은 19221210일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 방문위원회' 주선으로 서울 상공에서 시범 비행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창남이 서울 상공 시범 비행을 마치던 날 그 위원회에서는 각계 유명 인사를 초대하여 멋있는 연회 잔치를 벌였다. 안창남은 그 연회석상에서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일지도 모르는 미인 이정애라는 여대생이 이화여자대학 기숙사에 갇혀 있는데, 용기 있으면 청혼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미인 대학생이라고요?" 안창남이 매우 흥미 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옆에 있던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다니까! 하지만 안 될걸." 하면서 안창남의 그런 흥미를 비웃듯 까르륵 웃어댔다. "?" 안창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모 인사가 그 까닭을 소상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용기 있다는 조선 장정들이 그렇게 몰려가 이정애를 만나 청혼하려고 발버둥이지만 만나기는커녕 교문 밖에서 면회조차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오." "그럼 좋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청혼에 실패하면 나는 평생 장가갈 자격이 없는 것으로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정애로부터 청혼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1928년 가을 이정애는 하와이로 떠나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뱃길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그 배에 동승 했던 일본의 황족 지찌부노미야(秩父宮)가 이정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버린 나머지 결혼을 간청했으나 그의 청혼 역시 여지없이 거절당해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25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고, 1931년 하와이 호놀룰루 Queen’s Colleage에서 간호학 전공 학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세브란스병원 간호실 부원장으로 취임하여 간호학과 간호 윤리를 강의했다. 그 당시 간호실 원장은 미국인이었다. 1937년 일제가 적국인 미국 유학 경력을 트집 잡아 세브란스병원에서 물러났다. 당시 이화여전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그녀를 기숙사 사감으로 초청했다. 그년 후배들에게 백의의 천사의 길을 택할 것을 권유하며 1937년 조선간호원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37721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 간호원대회 조선 간호협회장 자격으로 파견되어 조선에도 명실공히 조선인 간호사가 있음을 유감없이 알리기도 하였다. 대회 참가자를 위한 다과회가 영국 왕실 주최로 베풀어졌다. 화려한 왕궁의 특별연회장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흰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흰 고무신의 30대 미인 간호원 한 사람이 200여 참석차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 영국의 에드워드 국왕과 소녀공주 엘리자베드 현 여왕이 날아갈 듯한 한복 차림의 이 조용한 동양 미인에게 뷰티블을 연발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던 이정애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시기에 신문에 <전시생활을 확립-간편하고 저장할 수 있는 것- 가지수는 적게, 버릴 것도 이용하자>,<쌀을 절약합시다! 저녁은 잡곡밥으로> 등 몇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47년 김활란의 배려로 콜롬비아대학에서 간호행정학을 전공한 뒤 194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간호교육과 창설 초대과장으로 취임하여 후배 양성에 온힘을 다했다. 이정애는 이화여대 의약대학 교수로 간호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6.25한국전쟁 때 죽을 고비가 왔어도 친구의 위기를 더 걱정한 의리의 간호사로 휴전이 되고 안정을 되찾자, 유아기나 다름없는 대한민국 간호계에 선진 간호시스템을 도입했다. 1953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탄생 133주년 정부로부터 최초로 표창장을 받았다. 195458일 금란지교 김활란의 눈물 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유방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망우리 금란동산이었다. 현재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화여대수목원 이화여대에 공헌한 7인 묘역으로 이장하여 김활란 박사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김활란은 이정애를 망우리 금란동산에 편히 모셔 놓고 다음과 같은 묘비를 세워 줬다.

이 티끌 세상에 한 송이 백합 높은 뜻 깊은 사랑 그윽한 향기 우리 맘에 영원히 풍기리.”

 

김활란은 그러고도 이정애의 타계를 못 잊어 우리 친구 이정애라는 조그만 전기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망우리 금란교회 설립도 이정애 친구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다.

두 차례의 미국 유학을 거친 이정애는 간호학 개척을 위해 이화여대에서 혼신의 힘을 쏟았고, 친구인 김활란의 내조자로서 자기 직분에 충실했으며 모든 일에 김활란을 앞세우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겸손과 미덕을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