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빈궁문학으로 남한 북한 중국 소련 등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가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모악산(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에 수록된 작가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자전거 탄 아이는 큰아들 백)
시조시인 조운과 최학송
최학송 유택
최학송 문학비(우리문학기림회)
최학송 제87주기 추모제(걱정없는 동네 상봉중 신현고 연합동아리)
2006년 단장하기 전 최학송 묘역
이기영은 관념성을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서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자전거 탄 아이는 큰아들 백)
시조시인 조운과 최학송
최학송 유택
최학송 문학비(우리문학기림회)
최학송 제87주기 추모제(걱정없는 동네 상봉중 신현고 연합동아리)
2006년 단장하기 전 최학송 묘역
이기영은 관념성을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서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자전거 탄 아이는 큰아들 백)
시조시인 조운과 최학송
최학송 유택
최학송 문학비(우리문학기림회)
최학송 제87주기 추모제(걱정없는 동네 상봉중 신현고 연합동아리)
2006년 단장하기 전 최학송 묘역
이기영은 관념성을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서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자전거 탄 아이는 큰아들 백)
시조시인 조운과 최학송
최학송 유택
최학송 문학비(우리문학기림회)
최학송 제87주기 추모제(걱정없는 동네 상봉중 신현고 연합동아리)
2006년 단장하기 전 최학송 묘역
이기영은 관념성을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서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서해(曙海) 최학송(崔學松, 1901~1932)
정종배(시인)
2015년 7월 8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도식이 망우리공원에서 다시 열린 것은 1958년 이장하던 해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 최학송 서거 83주기 추도식에는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가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서해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은 동국대 곽근 교수와 필자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서해 최학송 문학 연구와 작품집을 집대성하며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다.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다.
필자는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만든 비자금 통장을 깨서 단장했다. 묘역을 3번 단장한 이유는 비가 오면 갈참나무 나뭇잎에 뭉친 빗방울이 봉분 위로 떨어져 봉분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필자의 한성고 동기인 이호일 제삼한강통운(주) 대표가 “몰래 좋은 일한다”며 후원했다. 이호일 동기 아버지인 이완용 제삼한강통운(주) 회장(해사 2기)의 고향이 서해와 같은 ‘성진’이다. 이완용 회장은 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해군사관학교 교정 충무공 이순신 관련 시설을 도맡아 하였다. 또한, 묘역 주면 아까시나무와 떡갈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달라고 청담고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 동아리활동 중 금중혁 김민성 두 학생 주도하여 몇 차례 중랑구청에 제안했다. 때마침 태풍으로 넘어져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벌목했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묘역을 갖췄다.
서해가 죽고 어머니 부인 두 아들이 서해의 고향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인 이산 김광섭 시인 중심으로 ‘이장준비위원회’에서 망우리공동묘지 현재 자리로 이장한 뒤, 뜻 있는 분들이 벌초는 하였으나, 후원이 끊겨 관리가 되지 않고 봉분이 헐벗어 거의 평지나 다름없었다. 2010년 무연고 묘지 처리 문제로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실 묘적부에 관리인으로 필자가 등록됐다.
2002년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걷던 필자가 묘지 발견한 이후, 학생들과 동아리 및 체험 봉사활동으로 묘지 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과 논술대회 등을 열었다. 2012년 결성한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최학송기념사업회 산파역을 맡았다. 필자의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절망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때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탈출기」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때의 심정을 일호가차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클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교정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3 공상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려와 결혼해 두 아들 백(伯)과 택(澤)을 두었다. 또한, 조운 시조시인 어머니가 관기로 인해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했다.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춘원 이광수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당시 잡지 편집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카프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 일컫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 사소설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저곡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서해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서해 -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이 여일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자아관, 별건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골상학상미남자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별건곤 1931.2)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년 「토혈」 「고국」 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염상섭·현진건·나도향·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곽근 문학평론가)
서해 최학송 소설가 약력을 소개한다.
1901년 1월 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최택은 학성 지금의 김책시라 씀).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냈다.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설봉산인·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다.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하고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다. 1913년 13세 때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하였다.
1915년 15세에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하였다.
1918년 18세에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해 10살 무렵 집 떠난 아버지를 찾으려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을 시작하며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있지 않음)하였는데 그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하고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때 알게 된 시조시인 조운이었다. 전남 영광출신 조운 누이 분려와 결혼하였다.
1921년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았다. 1922년 22세에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났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하며,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했다. 파인 김동환과 연락 시작하고,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경성·성진 등지를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1924년 연초에 단편소설 「토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였다.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했다. 8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물렀다.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개월 기거하며,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했다. 10월 이광수 추천 《조선문단》에 「고국」(제1회 추천 작가, 뒤이어 추천받은 작가는 채만식·박화성·임영빈·계용묵·이은상·이장희 등)을 발표했다. 11월 15일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고쳐 발표했다. 춘원 이광수의 친척인 주지인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 백금을 두고 집은 나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사 입사하며 방인근 집에 기거했다.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을 《조선문단》지를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탈출기」·「박돌의 죽음」·「기아와 살육」 등) 문단에 충격과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 백금이 병사했다.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하고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하였다.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하며 시조시인 조운 아니 아내 분녀의 고향 영광함평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이라 하였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던가? 생애 최고의 기간을 맞이했다.
1926년 1월초 전남 영광에 다녀와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하고, 4월 8일 문우 조운의 누이 분려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하여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했다. 6월 《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일을 했다.
1927년 1월 1일 장남 백(白) 태어났다.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다.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되었다.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였다,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하고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 편집하였다. 이면에 조운의 어머니가 영광 관기 출신이었다.
1928년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2월 둘째 딸 출생했다. 5월 성해·회월·일엽·팔봉·독견·승일·은상·석구·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생』의 문예 추천작가로 위촉되고, KAPF 탈퇴한 뒤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았다. 가을에 주변 친구들이 후원금을 마련하며 극구 말린 《매일신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다. 고영환·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살림을 꾸렸다. 1931년 5월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고, 8월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부친 10년 만에 찾아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났다.
1932년 5월 4일 《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김원주(金元周)·방인근·이광수·현진건 ·최상덕·김억·이익상과 함께 초대되었다.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자리에 누웠다.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하여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겨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로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화가)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웠다.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태허 유상규 이름으로 사인 되어 있다.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 7월 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이광수·김동인·염상섭·김팔봉·김억·방인근·심훈·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진다. 자동차도 서울 시내 500대 중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루었다.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썼으며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섰다.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김동환·박종화·주요한·양건식·이병기·방인근·이익상·이승만·김원주·최정희·현철·최상덕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났다.(최택의 글에서는 서해가 노두에서 죽었다고 기술함)
1933년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하고, 1934년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하였다. 1935년 6월 9일 아내 회령 조분려 사망. 어머니 김씨는 40년 전후로 사망 추정하고 있다.
1945년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1952년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하고, 북한에서는 1955년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년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은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였다.
1958년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하였다. 박웅걸 문화상과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하고,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해방되자 8월말 두 아들 죽어도 외가에서 죽자하며 영광 도착해, 폐병을 앓고 있던 첫째 아들 ‘최백’은 일주일 만에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8월 둘째 아들 택은 북으로 가,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국 서해를 알아본 세계사 담당 엄씨 소개로 북조선 간부학교 기숙사 일을 하다, 1949년 3월 6일 둘째 아들 택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 입학하였다.
1958년 9월 25일 미아리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문예총 이산 김광섭)하였다.
고 서해 최학송 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해한다고 한다(연락처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이장시일 25일 상오 12시(미아리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망우리공동묘지
발기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인
-경향신문 1958. 9. 21
1966년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했다.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중앙위원회부위원장이 참석하고,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하며, 작가동맹중앙위원회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했다.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소설을 발표했다.
1984년 김정일 동지의 지도와 배려의 의하여 60년 전에 창작된 소설 「탈출기」를 신상옥 감독 신필림영화촬영소에서 영화로 옮긴 예술영화 <탈출기> 북한 전역에 상영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영화 최은희 주연 <탈출기>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중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북한의 잡지 《조국》 1985년 9월호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필자 최택씨는 최서해의 둘째 아들이다. 최택씨는 북한에서 어머니 할머니를 여의고 병든 형과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외가인 전남 영광으로 내려왔다. 일주일 만에 폐병을 앓던 형 백은 죽어 외가 선산에 묻었다. 1947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하여,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이영구·이명숙·임헌영·허형만·김원중·곽근·김성진·임영봉 등이 참여했다. 홍명희·조은·최명희 등 20여 작가들의 생가를 중심으로 문학비를 세웠다.
2010년 3월 《문학사상》 3월호에 1985년 9월 북한 잡지 《조국》 둘째 아들 택씨의 「생활의 결론」 수록된 글을 재수록하였다. 최택의 5남매는 전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생활한다.
올 7월 1일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공원묘지관련 개설한 망우리공원과 첫 번째 행사를 치렀다. 초대과장 신은실을 비롯 과원들이 주말임에도 청소와 행사를 함께 했다. 내년 90주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100주기 안에 북한의 후손들이 함께하길 빌었다.
제89주기 소설가 서해 최학송 추모제, 일시: 2021.7.10.(토요일, 10시), 장소: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묘지, 주최: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 주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후원: 중랑구청, 영원한기억봉사단, (재)수림문화재단, 성애병원, 제삼한강통운㈜, ㈜서광알미늄, 법무법인선율, 서울현대정형외과, 수원행복한요양병원, 김도형특허법률사무소, 성도치과, 지노출판, 대학인입시연구소, 반올림피자(정릉점), 망우본동 마을과 아이들 세·모·길.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3시 남산 기슭 문학의 집·서울에서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이 열렸다.
‘그ㆍ립ㆍ습ㆍ니ㆍ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182’ 음악이 있는 금요문학마당, 때 2018년 3월 16일(금) 오후 3시, 곳: 문학의 집·서울, 주최: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ㆍ서울, 후원: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진행 정승재 소설가, 문학세계 이명재 문학평론가, 회고담 김승종 교수, 북에 있는 유족 대신 최학송 묘지 관리인 정종배 시인, 작품낭독 박수진 시인 이진훈 시인, 소프라노 국은선 교수, 음악 성악가 이천서희중창단(동요), 피아노 정수윤.
김대현 교수 하순명 시인 김영식 작가 한철수 시인 홍행숙소설가 중부경찰서 경비과장 김인병 경정 함께 하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제자들 후원과 응원 정말 고맙습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서해의 둘째 아들 최택의 5남매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와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1970년 필자가 중학교 입학 전, 함평군 학교면 면장님 아들인 친구 정병인이네 큰형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읽던 책을 내려보냈다. 그 책 중에 최학송 소설집 『탈출기』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빌려 읽었다. 필자가 40여년 뒤 최학송 묘지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그리고 추모문화제를 치른다는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지 싶다.
최학송과 이승만(화가) 가족(자전거 탄 아이는 큰아들 백)
시조시인 조운과 최학송
최학송 유택
최학송 문학비(우리문학기림회)
최학송 제87주기 추모제(걱정없는 동네 상봉중 신현고 연합동아리)
2006년 단장하기 전 최학송 묘역
이기영은 관념성을 극복하고 농민들이 맞닥뜨린 궁핍과 고난의 삶을 실물대로 그려낸 작가다. 그의 언어는 식민지 수탈 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1930년대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실어 나른다.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된 이래 그는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민촌」·「농부 정도룡」·「홍수」·「서화(鼠火)」 등을 통해 계급 문학의 인식과 새로운 인물의 창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1934년에 이르러 이기영은 그 동안 쌓아온 단편적 성과를 역사적 총체성의 시각으로 꿰뚫는 장편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발표한다. 「고향」은 작가 이기영이 땀 흘려 거둔 열매일 뿐 아니라, 최서해의 신경향 소설에서 비롯되어 조명희의 「낙동강」과 한설야의 「과도기」로 이어진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빛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서해 관련 시
추억追憶/이병기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山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과 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간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에 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棺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를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작), (『동아일보』, 1932. 7. 12일 발표)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病들어 病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病들어 누니
無心타,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여,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 36호, 1932. 8)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오호 서해 형 / 이태준
서해형!
형은 죽었다하오 나도 형의 무덤까지 갔다왔소 그러나 형의 이름을 쓴 관을 보았을뿐 믿어지지 않는구려 진정 형은 땅 속에 들어간 그 말없는 관 속에 들어있었소?
오오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슬픈 사실이어!
서해 형! 형은 갔다한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세상엔 갈곳마다 슬픔이 있다 집집마다 죽음도 있다 돌처럼 생각하면 죽음처럼 흔해빠진 범범한 사고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형의 죽엄, 최학송의 집에 최학송의 죽엄, 그것은 너무나 보기 아픈 비긱이외다 나는 형의 소설을 보고 운적이 많소 그러나 형 자신은 더 몇 배 뼈가 저리게 우리를 울리는구려!
서해형! 형은 강력의 인이었소 형의 작품과 형의 문단적 업적은 이제 문단의 당연한 평가가 있으려니와 형의 문단까지의 경로만도 어떠하였소, 한때는 총을 메고 만주에서, 한때는 대패를 들고 목수로서, 한때는 심령치료선전원으로, 그리고 중노릇, 문패장사, 이 모든 장면은 형의 기구한 일생을 얼마나 잘 설명하오 형은 천산만수를 뛰어넘었소이다 형은 끝끝내 형으로서 설자리에 서고야 말었소이다. 그것만도 형은 커다란 승리자외다. 하물며 비통의 힘으로 가득찬 형의 작품들, 그것은 형과 한가지 비통의 이 시대가 힘있게 힘있게 지지할 것이오
오오 형은 강하였소이다.
서해 형 형은 슬프게도 죽었소이다 바로 지난해 이 달이오 우리는 박연에 앉어 화담의 죽임을 말하던 생각이 나오 “기일귀일(起一 歸一) 이오 기무귀무(起無歸無)라” 하고 죽었다는 화담의 이야기하다 형은 이런 말을 하였소이다
“우리같은 것들은 죽을 때도 더럽게 죽을 것이오 쥐처럼 그저 먹을 것을 찾어 헤매다가 마저 죽듯 죽을 것이오-”
오오 헤매이다 죽은 형이어! 과연 가엾은 인생은 오늘의 우리로구려!
서해형! 억지로라도 형이 죽었거니 마음 먹으니 가슴이 못먹을 것을 삼킨 듯 하오 어디가서 이제 다시 서해형의 그 호연한 웃음소리를 들어보랴
오오 서해의 죽엄을 쓰는 이 꺾고 싶은 붓이어!
동아일보 1932. 7. 18
영광양반이어라우 / 정종배
지방 수령 지내려면
북으로는 황해도 안악 군수
남으로는 전라도 영광 군수
옥당골 굴비와 모싯잎떡
인도승 마라난타 백제불교 첫 도래지
법성포 불갑산 불갑사
정유왜란 일본 성리학의 태두
수운 강항 간양록
남조선 백두산 호랑이 마지막 숨이 끊긴 땅
전라도 출신으로 맨 처음 중앙 문단에 이름 올린 문인이고
시조부흥운동 육당과는 본바타이 다르다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한느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정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 겨레 내림줄기 깊은 것을 짓밟는 서구 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노산 이은상 가람 이병기보다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 했다. 노산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가람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 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영광중학원 작문 선생으로 동료교사
박화성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한 시조시인 조운이 3.1혁명에 들었다가 만주로 줄달음쳤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를 만만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갈팡지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의 옛 자취를 돌아본다
28세 때 세 살 밑인
조운의 막내누이 분려芬麗와 결혼한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간도에서 갖은 고생 밑바닥 생활하며
조운과 벗을 터
남도 여행기에 불갑산을
조선 팔경 버금이라 뻥을 친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둑에도 절을 하듯
입성 먹성 볼성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1920년대 잡지 편집의 일인자
조운의 어머니는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기생
광산 김씨 고마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중 외아들
당신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
그 인연으로 기생조합에 힘을 모아서 만든 기생들의 글만 실은 여성 필자 90%의
잡지 <장한> 까지.....
한 살 많은 처남 조운은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 시조를 썼다
서해曙海야/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恨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북한의 잡지 조국(1985년 9월)에 수록된 최택 씨의 「생활의 결론」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 최택 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의 둘째 아들이다. 서해가 작고하자 할머니 어머니 형 넷이서 서해의 고향 성진으로 가고 난 뒤 서해의 아내 즉 택의 어머니(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막내 누이 분려) 사망까지는 알려졌으나, 그 뒤 서해 가족의 행방은 남쪽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
최택 씨는 고아처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버지 서해를 기억하는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김일성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후 준박사가 되어 사범대학(김형직사범대학) 학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과 배려로 서해의 탈출기 소설을 당시 북한에 머문 신상옥 감독의 제작으로 북한 전역 상영하였다. 남한으로 내려온 신감독은 이 작품을 자기의 여러 작품 충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소중한 예술혼을 꽃 피었다.
한국 문단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간난한 삶의 편린과 문학 활동 등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최서해의 아들 최택 씨의 수기도 발굴하여 실은 글을 올 봄에 찾았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공원에 이장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서해의 유택을 2000년 또랑시인과 인연이 닿아 묘지관리인으로 등록하고 서해 최학송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영광에 묻혔다는 큰 아들 백의 묘지도 확인하고 싶다. 영화도 상영하여 공유하고 싶다. 남북한의 교류로 북한 후손들의 성묘와 기념사업회 추모식을 함께 할 날을 기대하며 어서 통일의 그날까지 제자들과 힘껏 돌봐야겠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이익상(李益相, 1895~1935)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태평동에서 전주 이씨 건한과 김해 김씨 성녀 부부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이윤상(李允相), 호는 성해(星海).
이익상의 문학적 행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20년 김억·남궁벽·우상순·황석우·변영로·나혜석·염상섭 등이 창간한 동인지 [폐허]에 참여했으며, 1921년 '도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편집부원을 지냈다. 1924년 김기진·박영희·안석영·김복진·연학년·이익상·이상화 등과 그들의 성과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 운동을 표방했다. 1925년 파스큘라와 1922년 조직된 최승일·송영·김영팔 등의 좌익 문학 단체 [염군사]를 통합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에 개최된 [카프] 임시 총회에서 자진 탈퇴하는데, 투철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를 필요로 하는 조직과 부합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 원인으로 보여진다.
이익상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1927년 11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한 뒤에 1930년 2월부터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재직하는 등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이익상은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 분야인 영화와 연극에까지 폭넓은 관심과 활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1926년에는 김기진·윤심덕 등과 함께 진보적 연극단체 [백조회]를 결성했으며, 1929년에는 김홍진·박승희·김팔봉 등과 동양영화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에 이익상([매일신보])은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안석영([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 영화 담당 기자들과 영화산업의 진흥을 위해 [찬영회]를 조직했다. [찬영회]에서는 출범 기념으로 최승희의 무용과 극단 토월회의 연극 공연, 영화 상영회 등을 개최했으나, 1931년 1월 나운규가 주도한 '찬영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했다.
작가와 언론인으로, 그리고 문화운동가로, 당대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이익상도 식민지 지식인의 생활고는 비켜 가지 못했다. 이익상은 불안정한 생활과 고혈압, 대동맥경화증 등 신병으로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특히 투병 중이던 최서해에게 대량 수혈한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낙오자](1919), [번뇌의 밤](1921), [연의 서곡](1924), [흙의 세례](1925), [쫓기어 가는 이들](1926), [그믐날](1927) 등과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조선일보], 1927. 1. 1.∼7. 19), [짓밟힌 진주]([동아일보], 1928. 5. 5.∼11. 27), [그들은 어디로]([매일신보], 1931. 10. 3.∼1932. 9. 29)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1926년에 발표된 [흙의 세례](문예운동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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