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평양은 신미술운동 요람

정종배 2017. 3. 30. 12:19

문화문화일반

“평양은 신미술운동 요람…삭성회 첫 미술학교 건립도 시도”

등록 :2017-03-2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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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평양 삭성회의 미술학교 설립 운동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김병기가 태어나던 무렵 1910년대 평양은 근대 신미술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일찍이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부친 김찬영과 선배 김관호는 1925년 최초의 민간 미술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삭성회 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 3년간 해마다 미술전람회를 열고 삭성미술학교 설립까지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사진은 김관호의 <모란봉의 가을>, 미술학교 좌절 뒤 절필했다가 해방 이후 북한 화단에 복귀해 1956~57년 폴란드 바르샤바 북한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말년 작품이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김병기가 태어나던 무렵 1910년대 평양은 근대 신미술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일찍이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부친 김찬영과 선배 김관호는 1925년 최초의 민간 미술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삭성회 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 3년간 해마다 미술전람회를 열고 삭성미술학교 설립까지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사진은 김관호의 <모란봉의 가을>, 미술학교 좌절 뒤 절필했다가 해방 이후 북한 화단에 복귀해 1956~57년 폴란드 바르샤바 북한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말년 작품이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유방 김찬영이 남긴 유일한 붓글씨 작품, <차회내시불이선>(여기 이 모임이 불이선이다). 2013년 10월 성북구립미술관이 근대 미술 수장가들을 주제로 주최한 ‘위대한 유산’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유방 김찬영이 남긴 유일한 붓글씨 작품, <차회내시불이선>(여기 이 모임이 불이선이다). 2013년 10월 성북구립미술관이 근대 미술 수장가들을 주제로 주최한 ‘위대한 유산’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미술학교 신설! 꿈같은 희망사항이다. 미술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미술학교 설립이라, 이는 놀라움 그 자체이기 충분했다. 1910년대 ‘신미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런 새바람의 요람으로 평양지역은 우뚝 솟았다. 바로 선구자 김관호와 김찬영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 중심으로 평양에 미술학교 건립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바로 192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이 땅에는 미술 관련 전문기관이 없었다. 학교는 물론 미술관 같은 공공 기관이 없었다. 게다가 화랑가를 비롯한 미술 시장 같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의 활동 무대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발표 무대라 해봐야 매년 5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공모전 정도였다. 식민지 문화통치 정책의 하나로 운영된 조선미전의 위력과 더불어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물론 서화협회라든가 민간 차원의 소규모 집단은 명멸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 미술교육 기관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황무지에서 평양의 유지들은 들고일어섰다. 신미술 운동의 발진기지로서 평양다운 일이었다.

김관호와 김찬영의 평양 삭성회 회화연구소 조직 소식은 당시 중앙일간지에도 보도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선구적 시도였다. <동아일보> 1925년 6월26일치 기사.
김관호와 김찬영의 평양 삭성회 회화연구소 조직 소식은 당시 중앙일간지에도 보도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선구적 시도였다. <동아일보> 1925년 6월26일치 기사.

삭성회 미술연구소는 평양 유지들과 뜻을 모아 옛 일신학교 교기를 사들여 미술학교 개설을 추진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무산됐다. <동아일보> 1928년 5월20일치 기사.
삭성회 미술연구소는 평양 유지들과 뜻을 모아 옛 일신학교 교기를 사들여 미술학교 개설을 추진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무산됐다. <동아일보> 1928년 5월20일치 기사.
평양에서의 미술학교 건립 운동은 바로 삭성회 회화연구소가 주체였다. ‘삭성’(朔星)은 북녘의 별, 바로 평양을 의미한다. 옛 도읍지로서 평양 문화의 자긍심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삭성미술학교는 개교할 수 있었는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된 내용을 보면, 삭성회는 일신(日新)학교 건물을 인수해서 미술학교 설립을 하고자 운동을 펼쳤다. “미술학교 승격 운동 중에 있는 삭성미술연구소에서 동 교사(校舍)를 차용하는 중으로 금반 교기(校基) 회복 운동을 호기로 동 교기를 매수코저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15일에 대표자 김관호씨(등) 2씨가 송정(松井) 부윤(府尹)을 방문하고 진정하였다는바, 부윤도 크게 찬의(贊意)를 표하고, 노력하겠소 하고, 쾌답(快答)하였음으로 매우 유망하게 관측된다 하며, 삭성회에서 매수하게만 되면 동회(同會)로서는 승격 운동상 막대한 도움이 되리라더라.”(<동아일보>, 1928년 5월20일) 삭성미술학교, 단군 이래 최초의 미술학교, 과연 가능할까. 일본인 평양시장까지 동의했고, 유지들의 의지를 모아 추진했던 미술학교 건립 운동. 이에 대한 대답은 불행하게도 ‘아니요’였다. 이런 결과 탓이었는지, 그 뒤 김관호와 김찬영은 미술계와 결별하는 수순을 밟았다. 불행의 연장이었다.

삭성회 회화연구소는 1925년 7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광덕학관에서 문을 열었다. 후진 양성이 목적이었듯 개설과 함께 연구생 모집요강을 신문에 냈다. 수업 연한은 2년 과정으로 ‘연구과목’은 동양화(수묵, 담채)와 서양화(목탄, 유화)였다. 동양화 20명, 서양화 30명 그리고 속성과 약간 명을 뽑기로 했다. 입회비(1원)와 1개월 회비(동양화 1원, 서양화 2원)를 받았다. ‘담임 강사’는 동양화의 김윤보와 김광식, 서양화의 김관호와 김찬영(김유방)이었다. 이런 사실은 신문(<동아일보>, 1925년 6월26일)에도 보도됐다. 삭성회 회화연구소, 이는 이 땅에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근대식 회화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삭성회는 전통회화 분야보다 신미술이라 할 수 있는 유화 분야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그래서 김관호와 김찬영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다. 평양의 대표적 갑부 집안 출신인 김찬영이 운영자금의 상당 부분을 맡았다.

삭성회는 1926년 6월 개설 1돌 기념 미술전을 연구소에서 개최했다. 연구생 중심으로 50여점의 작품을 진열했다. 이듬해 10월 제2회전은 상품진열관에서 조선일보사 평양지국 후원으로 열었다. 이 전시는 평양지역을 벗어나 전국 단위의 공모전으로 확대하여 416점을 출품받아, 38명의 94점을 입선작으로 선정했다. 입선작가 가운데 동양화부의 김은호, 이상범, 고희동, 이용우, 김규진 등, 유화 분야에 김근수, 장승엽, 주용서, 박인철, 고 강윤호, 최신영, 함희일, 박태현, 이원현, 윤성호, 그리고 일본인 화가가 포함되었다.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생활에 쫓기어 향방 없이 헤매이는 우리의 동포! 여락한 청추(淸秋)를 당하여 평양에서 개최된 미술전람회를 구경하라! 그리하여 한껏 고상한 취미를 맛보고 힘껏 위안을 얻은 후 청신한 기분을 내어 보라!”(<조선일보> 1927년 10월3일) 더불어 전시장에서 관객 참여 즉석평가 제도도 활용했다. 즉, 관객으로 하여금 출품 작품 가운데 최우수작을 선정하게 했다. 투표에 응한 관객을 집계한 뒤 1등 작품을 뽑은 관객 가운데 1명을 추첨하여 유화 1점을, 2등 작품을 뽑은 이에게는 동양화 1점을, 3등에게는 글씨 1점과 <조선일보> 2개월 구독권을 주었다. 흥미로운 관객 참여 방법을 선진적으로 시행한 셈이다. 당시 1등으로 뽑힌 작가는 39표의 최신영이었다.

1920년대 중반 총독부 문화통치 ‘위력’
미술기관도 화랑도 없던 황무지 시절
‘북녘의 별-삭성’ 평양 문화 자긍심 상징

1925년 회화연구소 첫 미술교육기관 열어
서양화 김관호 김찬영 지도…동양화부도
김병기 “운영자금 상당부분 부친이 맡았다”

개설 1돌 기념 미술전…이듬해 전국 공모
1927년 폐교된 일신학교 매수운동 나서
미술학교 설립 기성회도 꾸렸으나 ‘좌절’

최연해·권명덕·주용서·길진섭 등 후학 배출
파리 첫 입선작가 이종우도 1928년 강사로
김병기 “누드 실습 보고온 고모 ‘망칙’ 눈살”

1927년 5월의 조선미전에서 삭성회 연구생 가운데 3명(박인철·장승엽·권명덕)이 입선하여 신문지상을 빛냈다. 같은 해 9월 삭성회는 임시총회에서 사업 확장과 연구생 강윤호 추도회 개최 등을 결의했다. 이들 사업을 위해 준비위원을 선임한바, 장승엽·박인철·최학림·주용서·김근수·최연해·함희일·이칠덕·황호창·김병두·우에키 류조(上木龍三) 등이었다. 1928년 2월 삭성회 연구소는 미술학교 승격 발전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임시위원장 김관호 사회로 임시총회를 열었다. 삭성미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준비위원도 선정했다. 기성준비위원은 김관호·김찬영·김광식·장승엽·박인철·김경빈·김희작 등이었다. 언론 등에서도 ‘평양삭성회연구소 미술학교 승격 운동’(<조선일보> 1928년 2월11일)을 주목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해 5월에는 제3회 전람회를 상품진열관에서 열었다. 당시 동양화 70점, 서양화 90점, 자수 15점, 경성여자미술학교 찬조 자수작품 10여점 등을 출품했다. 하지만 삭성회는 제3회전을 끝으로 해산했다.

삭성회 말기에 참여한 강사로 설초 이종우(1899~1979)가 있다. 그는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도화 교사를 지냈다. 조선미전에 단 한번 참여해, <추억>(1924년)이란 작품을 출품했다. 1925년 프랑스 유학을 단행하여 3년간 체류했다. 파리에서 살롱 도톤에 입선하여 국내 최초의 해외 전시 입선 작가라는 영예를 얻었다. 귀국하여 개인전도 열었다(1928년). 귀국 이후 이종우의 행보에 평양 그리고 삭성회가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살롱에 입선한 이종우씨 삭성회에 입회하여 연구소 강사로’(<중외일보> 1928년 5월15일), 이런 신문 기사도 눈길을 끈다. 이종우의 삭성회 참여가 해산 끝 무렵이라는 점은 안타깝다. 미술학교 설립 운동의 좌절과 함께 이종우도 평양 생활을 접고 상경해야 했기 때문이다. 삭성회 관련 김병기 화백의 증언이다.

“삭성회는 원래 남산현에 있었다. 남산현 예배당이 제일 높은 데에 있고 좀 아래쪽에 삭성회 사무실이 있었다. 거기에 빨간색 벽돌집이 있는데 지붕은 조선식이었다. 그런 것이 당시의 신식 양옥이었다. 평양 시내 동북쪽에는 선교사 등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살아 양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외국인 학교도 있었다. 바로 신식 양옥들이었다. 삭성회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건축비 등 삭성회의 운영비 상당 부분은 아버지(김찬영)가 맡았다. 실기실에는 고급 이젤이 2개나 있었다. 도쿄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빙빙 돌아가면서 넘어가는 고가품이었다. 삭성회가 문 닫고 나서, 이젤 하나는 우리 사촌형의 정미소에서 보관했고, 다른 하나는 김관호 댁을 거쳐 박영선이 훗날 서울로 가져갔다. 박영선은 삭성회 출신으로 월남하여 구상화가로 활동했다.

삭성회는 서양화 중심으로 운영했는데, 나체화 수업도 실시했다. 1920년대 누드모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별세계’였다. 물론 누드모델이라는 용어도 없었지만 모델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고희동의 경험담처럼 기생을 불러 모델을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동자세로 장시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춤추고 노래를 시키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누드모델은 파격이었다. 한번은 화신백화점 박흥식의 장조카와 결혼한 고모가 삭성회 화실을 다녀와서는, 나체 모델을 봤다며, ‘망칙하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망칙하다’라는 표현은 평양 사람들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삭성회 회화연구소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작가인 길진섭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로 1930년대 후반 도쿄에서 고향 후배인 김병기와도 만취 일화를 남길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사진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 <자화상>.
삭성회 회화연구소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작가인 길진섭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로 1930년대 후반 도쿄에서 고향 후배인 김병기와도 만취 일화를 남길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사진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 <자화상>.

길진섭은 도쿄미술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동인 활동을 펼치다 1948년 월북해 다시 평양에 정착했다. 사진은 1934년 10월26일치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협전(서화협회전람회)화첩’에 실린 작품 <얼굴>.
길진섭은 도쿄미술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동인 활동을 펼치다 1948년 월북해 다시 평양에 정착했다. 사진은 1934년 10월26일치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협전(서화협회전람회)화첩’에 실린 작품 <얼굴>.

삭성회 출신으로 기억나는 인물은 최연해, 권명덕, 주용서, 길진섭 등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인물은 길진섭이다. 그는 길선주 목사의 아들로 곱슬머리에 덩치도 크면서 무사처럼 눈이 치켜 올라갔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 나와 도쿄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다. 나보다 선배이면서 대우를 잘 해주었다. 그는 해방 직후 문화인 행진 때 제일 앞줄의 선두에서 기수로 서기도 했다. 한번은 길진섭이 김환기와 내가 있는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로 왔다. 길진섭의 키도 크지만, 김환기가 더 컸다. 우리는 토요일만 되면 긴자의 번화가에 나갔는데, 일본 사람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커 거리에서 돋보였다. 그래서 김환기와 길진섭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언젠가 길진섭이 술을 끊으려고 할 때였는데, 나하고 같이 신주쿠 노바(NOVA)라는 술집에 갔다. 노바는 ‘압생트’라는 독주를 팔았는데, 진짜는 69도이고, 가짜는 71도였다. 우리는 가짜 압생트를 마셨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시늉만 내고 있었다. 당시 우리가 앉았던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이라는 것이었다. 스툴에 앉아서 나는 한 잔 마시고, 길진섭은 두 잔인가 석 잔을 마셨다. 갑자기 수박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났다. 의자에 기대려다 뒤로 넘어진 것이다. 길진섭은 머리를 시멘트 바닥으로 곤두박질해 의식을 잃었다. 거품을 물면서 일어나지 못하니까 일본 주객들은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었다. 큰일이었다. 후배인 내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조금 있으려니 다행스럽게 주영섭이 들어왔다. 주영섭은 연극 운동의 리더였다. 별명이 타조였고, 키가 크고 학처럼 생겼다. 그와 함께 길진섭을 집으로 데려와 밤새 간호했다. 물론 깨어난 뒤 그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만.

최연해는 소위 조선미전의 특선 작가로 유명했다.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그보다 더 잘 그리는 화가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미술학교에 다니지 않고 삭성회에서 공부했다. 나보다 4살쯤 많다. 월남화가 장리석이 노인좌상을 잘 그렸는데, 최연해하고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최연해는 본격적으로 좌상을 그렸다면, 장리석은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권명덕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전에 첫 입선(1926년)한 이래 3번 참여했다. 그는 청도회(靑都會) 결성에 앞장서 상품진열관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1930년). 특히 오월회라는 그룹에 최연해·박영선·현리호 등과 함께 참여했다(1932년). 같은 해 조선미전에 4명 동인 모두가 입선하는 성과를 올려 ‘평양의 자랑’이라고 신문 기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주영서는 나와 같은 교회를 다녔다. 그는 간판업을 하다 그림을 그렸는데 뒤에 미술계에서 사라졌다. 삭성회 전람회 때, 그는 자신의 소품 인물화 판매가를 300원으로 붙여놓아 놀라게 했다. 300원이면 당시 집 몇 채 값이었다. 어차피 팔리지 않는 그림, 장난기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의 동생(주홍서)은 나와 함께 평양의 야학에서 선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포항에서 살고 있는 그를 만난 적도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88571.html#csidx7ff4958e43f135b97868922178463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