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망우리공원 인문학(문학과 풍수)

정종배 2017. 4. 4. 14:49

망우인문학(문학과 풍수)

정종배(시인, 교사)

 

망우묘지공원은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친 망우산(해발 281.7m)에 조성됐는데, 그 규모가 832,800(25만 평)에 이른다. 처음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던 이곳의 명칭은 망우산공원묘지가 됐고, 지금은 망우추모공원으로 잠시 통용하다 다시 망우리묘지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명칭은 왜 변했을까? 그리고 이곳의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망우공원의 변천사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망우산(忘憂山)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가 자신이 묻힐 터(건원릉)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영면에 들어서면 근심이야 당연히 사라지는 법. 그래서였을까. 일제 강점기인 1933년 경성부(현재의 서울시청)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에 분묘 단지를 조성한다.

 

* ‘망우(忘憂)’ 의 철학

 

망우리묘지공원의 망우(忘憂)의 연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사후 장지를 지금의 동구릉으로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과 경기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올라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忘憂)고 하며 그 지역 이름을 망우로 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련되어 그곳에는 태조가 맛있게 마셨다는 우물이 있어 양원수(養源水 혹은 良源水)라 하였는데 지금의 중앙선 양원역의 지명도 이에 유래한다.

또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불망기(不忘記)를 써주었다는 사실 유래이다. 태조는 원래 개국공신 남재(南在)가 장지로 잡아 놓은 터(동구릉)가 명당이라 생각해 남재에게 원래 예정지와 터와 바꿀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남재는 왕릉예정지였던 곳에 자신이 묻히게 되면 불경죄가 될 것을 염려했다. 그러자 태조는 불망기를 써주며 이것으로 증빙을 삼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망기로서 근심을 잊으라는 뜻에서 망우(忘憂)’가 되었다는 설이다.

두 가지 중에 아무래도 첫 번째의 설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어 내려오고 있고, 1760년에 필사 간행된 망우동지(忘憂洞誌)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

 

처음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친히 도성 동쪽의 검암산(儉巖山)에 건원릉을 정하시고 이어 아차산 북쪽 기슭 고개에서 어가를 멈추시고 쉴 때에 선침(仙寢, 왕릉)을 정했으니 나의 근심을 잊을 수 있겠구나라고 말씀하시면서 고개 서쪽 마을을 망우(忘憂)’라고 이름하도록 명하셨다.

 

현재 회자되는 이 망우의 연원 외로, ‘망우는 논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논어의 술이편 제18장에는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운이)" 의미는 배움을 좋아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즘 즐기다는 말을 많이 쓴다. 축구선수 인터뷰에도 게임을 즐기겠다는 말이 나온다. 즐기는 경지라는 것은 부단한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가장 높은 경지의 실력 발휘이다. 요즘의 즐긴다는 말은 아마 영어의 ‘enjoy’에서 온 것 같으나 까마득한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이미 즐긴다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쳤던 것이다.

이성계는 근심의 원인이었던 장지 문제를 해결했기에 비로소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잊고 싶어도 근심은 잊히는 것이 아니다. 이성계는 장지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비로소 장지를 찾았기에 근심이 저절로 잊힌 것이다. 즉 근심이라는 것은 잊자고 생각해서 잊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련, 즉 독서나 명상 등의 행위를 거듭함으로써 어느 날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니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우의 경지는 쉬운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소인이 근심이 많다는 것은 논어의 술이편 제 36장에도 나온다. “子曰 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자왈 군자는 탄탕탕이요 소인은 장척척이니라).” 즉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의 마음은 늘 두렵고 근심에 차 있다는 말이다. 소인은 잡생각도 많고 하늘이 무너질까도 걱정한다. 이런저런 근심이 많다(多憂). 즉 대인은 망우(忘憂)한다.

논어의 망우가 지명 망우에 관련이 있는지 의심하는 현대인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선비들에게 망우 = 낙이망우누구나 아는 상식에 속한다. 논어는 당시 선비라면 모두 다 몇 번이나 읽은 책으로 논어의 글은 생활 속의 지명, , 옥호 등에 많이 쓰였다. 필자의 논거는 망우동지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임금께서 이곳에 행차하시어 근심을 푸시니 우리 백성도 기쁜 마음으로 서로 알려 근심을 잊으니, 아 기쁘도다. 오늘날이여, 망우동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300여 년이 흘렀다. 열성조께서 이곳에 임하시고 선조께서 이곳에 살았으니, 망우는 다르지만 잊었다는 것은 동일하다. 더구나 군자가 즐겁게 망우하는 것이 도를 즐기는 것(樂而忘憂君子之所以樂道也)이니, 그렇다면 선조들이 우리 마을에서 망우한 데에도 분명 망우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선조들이 즐거워했던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어찌 우리 마을의 여러 군자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 닭 잡고 술 마시는 것은 봄가을의 망우,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는 하루의 망우이다. 나도 여러 공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망우할 수 있을 것이다…… 임술년(1742) 가을 9월 의춘 남치관(南致寬)이 삼가 쓴다. <망우동지 p.50, 서울역사박물관>

 

이렇듯, 망우는 지명 그 자체가 이미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의 망우리공원과 연계하여 해석하자면, 이곳 고인의 유택에 올라와 비명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비로소 즐거이 속세의 근심을 잊고(忘憂) 내려가는 곳이 바로 망우리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부가 이곳에 분묘 단지를 조성하려는 했던 이유는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왕조 맥(건원릉)을 끊고 훼손하기 위하여 아차산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정하였다.

1920년대 경성은 이태원, 신사리, 수철리(현재 성동구), 홍제내리, 아현리, 미아리 등의 공동묘지를 사용했는데, 주로 시내에서 가깝고 규모도 가장 큰 이태원 공동묘지를 많이 사용했다.

1930년대 경성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주택이 턱없이 부족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부는 이태원 묘지를 재개발해 주택을 공급할 계획을 잡는다. 또한 곧 만장이 될 미아리 공동묘지를 대체하기 위해 망우산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경성부는 경기도로부터 망우산 일대 75만 평(2,479,338)을 매입하고, 1933년부터 이 중 52만 평에 묘지를 조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경성 사람들은 망우리에 묘지를 쓰게 됐다. 그들 중에는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도 포함돼 있다. 19383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해가 망우리로 운구 될 때 일제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례식은 물론 망우리로 향하는 거리 곳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안창호 선생은 망우리로 모셔진지 35년 만인 1973년 미국에서 온 부인의 유골과 함께 현재의 강남 도산공원에 합장하게 된다.

'님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 선생도 망우리에 모셔져 있다. 그토록 고대하던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타계한 한용운 선생은 일제의 감시 속에 화장돼 망우리로 모셔졌다. 이후 1970년대 말 추모사업회가 발족해 선생의 유골을 국립묘지로 이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2001년에는 선생의 고향인 홍성군으로 이장이 추진되기도 했다.

현재 만해 선생은 189214세 때 결혼했다. 1933년에 재혼한 그의 부인 유씨와 함께 망우리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묘는 201210월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됐다. 개인적으로는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보다 민중들과 함께 있는 망우리이야말로 선생에게는 좋은 안식처가 아닐까 싶다. 만해 선생이 유해가 안치된 1940년대 망우리에는 여우가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전쟁 이후 혼란, 그리고 독재의 흔적

8.15 해방과 6.25 전쟁의 대혼란을 격은 후, 피난 갔다 돌아온 이들은 남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무덤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네 조상이라 다투다 결국 관을 열어보기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회 자체가 여전히 혼란스러웠음으로 말해주는 일화다.

195982일 망우리에는 이승만 정권에게 사법 살인된 죽산 조봉암 선생이 모셔진다. 그는 진보당 당수로서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당시 언론은 단신으로만 보도했고, 이후 30년 가까이 조봉암이란 이름은 우리 사회의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다.

조봉암 선생의 사후 30주기인 1989년이 돼서야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0079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과, 명예 회복을 국가에 권고했고, 선생의 사후 52년인 2011120일 대법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판결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망우리에 억울한 죽음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조봉암 선생의 죽음이야말로 억울하고, 원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봉암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정권의 핵심 권력자도 망우리에 묻혔다. 자유당 정권의 이인자였던 이기붕 일가는 1960428일 자신의 아들 이강석이 쏜 총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고, 이강석도 자살을 한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과 관련해 국민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총살했다는 설도 나돌았지만, 아무튼 이들은 망우리에 안치됐다. 한동안 이기붕 일가의 묘지가 가짜란 말이 나돌았다. 어딘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몇몇 젊은이들이 묘를 파헤치기도 했다. 어쩌면 자유당 폭정에 분노한 이들이 부관참시하기 위해서 파헤쳤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이기붕 일가의 묘는 표지도 없이 풀 속에 방치됐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를 찾기 힘든 상태다. 독재 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는 반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를 추모하지만, 독재와 부정을 저지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는 그 무덤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특히 권력을 쫓고 있는 이들이 새겨야 할 상황이 아닌가 싶다.

196112월 망우리로 정치깡패로 유명했던 임화수가 안치됐다. 이정재와 함께 동대문 사단 이인자로서 이승만 정권을 등에 업고 영화계를 쥐락펴락했던 인사였다. 1959김희갑 구타 사건’(일명 합죽이 폭행사건)은 그가 영화계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망우리를 찾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망우리에서는 묘를 쓸 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662월 자료를 보면 당시 약 65만여 평에 47,754기가 자리를 차지해 가용 공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서울시는 묘지 부족을 우려해 경기 벽제리, 용미리, 언주리(현재의 양재동)등에 공동묘지를 조성했지만, 시민들은 거리가 멀기도 하고, 조상들이 잠든 탓에 망우리로만 몰렸다고 한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73322일부로 더 이상 묘를 쓰지 못하게 됐다. 망우리에는 15,000평의 사용 공간이 있었지만, 서울시는 도시계획 및 조경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중단을 선언하게 됐는데, 1933년 망우리에 묘를 쓰기 시작한 지 40년 만에 일이다. 묘지 사용이 중단됐어도, 한식, 추석 등 조문객이 몰릴 때는 여전히 혼잡스러웠던 것이 망우리였다.

현재는 약 8000여기 정도 남았다. 201410월 윤달에도 500여기 정도가 이장을 하고 있다.

 

야간 담력 훈련장이 된 망우공원

 

1980년대부터 망우공원에 조경 작업이 시작됐다. 1980년 망우 공동묘지 내에 조문객의 편의를 위해 아스팔트 순환로가 만들어지면서 조경이 시작됐고, 1990년대 초반은 망우산 곳곳의 약수터 가는 길에 꽃길을 조성했다. 하지만 말이 조경이지 1980~ 1990년 망우리 고개를 넘을 때 보면, 산에 나무는 몇 그루 안 되고 온통 무덤으로만 가득했다.

이러한 상태를 반영하듯, 1990년대 초 망우리는 특이 훈련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99112월 국가대표 사격 및 양궁팀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겨냥해 한겨울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야간 담력 훈련을 벌였다. 여자 선수들 중에는 별난 장소(?)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는 것이 당시 언론 보도였다.

1992년 구청장 후보로 나선 당시 여당 소속 한 후보는 중랑천 복개 및 망우리 공동묘지 이전이라는 지역 개발 공약을 내놨다. 이러한 흐름들은 망우리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망우리 공원이 변화를 맞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조성된 지 60년 만에 무연고 묘를 정리하면서 부터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무연고 묘 정비 및 이전 등으로 19734만 여기였던 묘지는 2017년 현재 7500여기로 크게 감소하게 된다. 묘지가 빠진 곳에 나무들이 들어서면서 다시 숲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4.7Km의 순환로를 사색의 길로 정비했고,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연보비가 만들어지면서 망우리 공원에 대한 역사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역사·문화·생활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망우공원

 

20064월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문화재 위원들과 함께 망우리 묘지를 직접 답사했다. “만해 한용운, 시인 박인환, 소설가 최학송, 아동 운동가 방정환, 독립유공자 오세창, 화가 이인성과 이중섭, 국어학자이며 국내에서 종두를 처음 실시한 지석영 등 역사적 인물들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거쳐 '문화재' 등록을 본격 추진하겠다."라는 것이 당시 문화재청의 입장이었다.

2000년 중반에는 망우공원 주변에 1만여 평의 나들이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로 망우공원은 숲이 우거졌고, 새들이 찾게 됐다. 맑은 공기에 사람들도 편히 찾게 되는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2009년 서울시는 가을 산책길 베스트 3’에 능동 어린이공원의 은행나무 길’, 청계천 수크령 길과 함께 망우공원의 사색의 길을 꼽기도 했다.

현 박원순 서울시장도 두 번이나 방문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문제를 관계 전문가들과 연구하며 시민들이 찾아 삶의 의미를 깨닫는 장소로 제공하려는 길을 찾고 있다.

 2016년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망우묘지공원의 새 명칭 공모와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인문학길 조성에 10억 5천만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공사를 하고 있다.
 2017년에는 망우역사박물관을 건립하기에 위해 50억 원 여의 예산을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
 
마카오의 신교도 묘지, 스톡홀름의 공원묘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망우리묘지공원도 지금은 풀과 나무가 우거하고 사계절 꽃이 피었다 지고 단풍과 노을이 아름다운 시민의 공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인물들의 안식처라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88올림픽과 한일 월드컵 이후 한류 열풍으로 대한민국을 알고자 하는 세계인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사는 주민조차 대부분 과거의 망우리공동묘지라는 고정관념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이곳 망우리묘지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아는 시민은 거의 없는 현실이다.

‘망우(忘憂)’는 태조 이성계가 건원릉에 신후지지를 정하고 고개(지금의 북부간선도로, 구리 포천 간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공사지)에서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차마 죽음마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삶의 한이 깊었던 시절, 어느 누구에게도 망우묘지공원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잘 살아 보자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근대화 산업화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차분하게 이곳의 역사적 자취를 돌아보고 가꾸는 문화의 시대가 왔다. 우리 민족의 가장 치열한 격동기에 잃어버렸던 ‘망우’의 참뜻이 이 곳에 잠든 선구자적인 선인들의 작품을 읽고 생애와 활동 사상을 받아들여 우리 민족 역사의 디딤돌로 다시 찬란히 빚어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일제가 의도적으로 건원릉(동구릉)의 맥을 끊기 위한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는 망우리묘지공원은 이제 산책과 등산 서울둘레길의 명소이고,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시내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동서남북 막힘없이 훤히 트이는 최고 멋진 전망대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다짐하기 더할 나위 없는 명소이다.  망우리공원의 능선을 따라 걸어가면, 멋진 경관 속의 산책은 기본이고 삶과 죽음의 사이, 과거와 현재, 고인과 나 사이의 길이 이어져 있으니 이곳 망우묘지공원을 가히 한국, 나아가 세계 최고의 인문학 코스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자주 찾아 참배하며 선인들의 고귀한 뜻과 삶을 이어받아 사람이 우선이고 먼저인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 한다.

학생들의 체험활동(문학, 역사, 체육, 음악, 미술, 정치, 의료, 서예, 탁본 등) 및 봉사활동(묘역 및 묘비 관리)과 방과후수업은 물론 자유학기제와 진로탐색을 위한 좋은 교육 현장이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묻힌 이곳을 서울시와 교육청 중랑구청의 관심과 체계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짜임새 있는 진행을 한다면 지역의 교육 열의와 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몇 군데서 각자도생하듯 실시하는 교육을 한 군데로 모아 목적성 있는 계획 아래 예산 집행을 하면 서울시에서 가장 낮은 중랑구의 교육열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절호 기회와 장으로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 역사(학술제)와 문화(문학제, 미술제, 음악회) 및 삶(추모제)의 지남차로 살아 숨 쉬는 교육의 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학 미술 음악 체육 의학 국어학 지리교육 및 생태학 등 우리나라 근현대의 선구자와 최고의 인물을 통해 청소년들의 진로와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일 교류(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로 세계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망우묘지공원의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회 이사와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묘지 관리인과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서 소중한 인연과 책임을 제자들 중심으로 이어 가련다. 아들과 함께 ‘사색의 길’을 한 바퀴 돌며 선인들과 대화를 하겠다. 삶의 지혜를 얻고자 메모지를 배낭에 넣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 저녁노을 아래 다정하게 물들며 걸으련다.

 

망우리묘지공원에 묻힌 저명인사

(김호직, 김말봉, 최백근은 관리사무소 뒤쪽이고 박인환부터는 일방통행 길 따라-관리 사무소 지나 삼거리에서 우측 길 쪽으로, 순서대로 정리 함.

이름에 클릭하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음)

번호

묘 주인공 

묘지번호 

약력 

묘역위치 

 1

김호직

개인묘지

1905.4.16~1959.8.31

영양학자, 문교부차관

망우고개->공원 접어들면서 10m->왼쪽 산 쪽에 계단, 표석

한국인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몰몬교, 말일성도) 회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1차 도미 유학생,

2

김말봉

100768

1901~1961. 여류소설가, 작품 '찔레꽃'

망우공원관리사무소 옆 공원주차장->북 쪽 안테나쪽->능선 길 따라 약 50m->묘지번호확인.30년대 통속소설-순수귀신을 버려라. 이광수와 관계. 금수현 그네 작사, ()-().

3

박인환

102308

1926~1956.시인

연보비아래 전주4번 좌측 나무계단 밑 좌측, 목마와 숙녀,

김수영. 안산 봉황산(송곡여고)-조산(불암산)북향-(검은색)-현무, 김말봉에게만 사과함. 세월이 가면 노래 탄생, 송지영

4

김석영

103459

사회평론가. 1929.1.15~1966.12.20

오재영 연보비아래 수 풀 속. 50년대 제1공화국 사회비평.

오재도 비 세움.

5

이중섭

103535

1916.~1956. 화가

용마천약수->북쪽 소나무아래, 황소, 은박지, 이남덕,

구상. 김이석과의 우정. 이인성 박수근과 비교

6

오재영

103570

1897~1948.독립운동가.건국훈장 애족장

이중섭묘->북쪽 망우천 약수터->윗 쪽 운동기구 아래(오준영지묘로 됨) 안중근 의사 권총 전달(집 한 달간 기숙), 의열단

7

서동일

107266

1893~1966.독립운동가.건국훈장 애족장

삼형제바위(금호어울림아파트 동쪽 능선)-> 묘비 최옥경(부인과 합장)으로 됨(번호로 찾기 매우 어려움), 다물단

8

최학송

205288

1901~1932.소설가.작품'탈출기'

27번 전주, 표지석 바로 위, 빈궁문학, 홍염. 안산(봉화산)-앉아서 눈썹과 가슴높이 .묘지 찾기(곽근-정종배). 우리문학회비

9

계용묵

105383

1904~1961.소설가 작품 '백치아다다'

28번 전주10m전방->길 따라 좌측묘역으로 내려감->큰 소나무 두 그루 보이는 묘역 아래(번호로 찾음). 수맥과 명당 잡풀

10

차중락

105689

1941~1968

대중가수,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36번 전주 건너 오른쪽 숲길아래(20분정도 내려감). 김수영 이종사촌 형. 알린과의 사랑. 조병화<낙엽이 뜻>, 신인가수 낙엽상, 오빠 펜 싸인 북. 밀항와 연애 실패, 소년등과, 건강관리,

11

이병홍

205129

1891~1955 정치가. 1.2대 민의원역임.

반민특위 활동

남부순환도로 삼거리끝 윗쪽에 위치, 이승만 대통령 반박 당화문, 김두봉(국어학자).-처조카 약산 김원봉(의열단-행동, 한용운- 시와 지조, -노덕술, 전봉덕 신익희 묘비 글씨-후취 자녀들의 성공

12

최경국

205130

1910.7.2~1953.10.1. 경기고. 명치대학.

 

이병홍 묘 백호자락, 서울여자학원 창립이사

 

 

13

서광조

108919

1897~1972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연보비 우측 길->끝까지 올라가면 묘 3

(맨 밑 파묘)->맨 윗쪽 묘, 조선국민회 비밀 결사

14

이광래

108899

1908~1968.

극작가. 연출가. 연극이론가

서광조 연보비에서 남부도로 끝까지 가면 산불방지장비보관대가 나오는데 50m 전 좌측 산, 극예술 연구회,국립극단 창립,

서라벌예술대학 초대연극학과장, 동요 <산토끼> 이일래 아우

15

장덕수

109257

1895~1947 정치가, 친일명단

남부순환도로 삼거리 ->언덕으로 돌아가서 사각정 가는 길 우측

부인 덕(경기여중 교장)-아들 미국입양(양자) 동아일보 초대주필-창간사, 송진우 묘(이장) , 란석 박은혜(경기여고 교장 15), 은석 초등 설립.

16

임숙재

109335

1891~19661.6.8 숙명여대 초대총장

사각정->용마산길->시루봉 쪽 (5분정도)->길 우측 시루봉-부 아치울-박완서-개성 고향과 닮음, 숙대초대총장, 김남조 비문

17

노필

204942

영화감독

용마산 등산로와 만나는 사가정->뒷길 내려가는 소로길->우측옆으로 가는 길 20m-> 소로길 윗쪽(번호로 찾음), 영화음악

18

조봉암

204717

죽산 1898~1959 독립운동가.정치가

북쪽순환도로 상 길 옆. 조선공산당 창당 주도, 진보당 1:8. 연대와 생존권 보장. 교육과 언론의 책임, 정남향 딸까지 발복(?)

19

함세덕

109511

1915523~ 1950629

극작가. 인민군

동원천표지 아래길->2분정도 내려가다 -> 우측 소나무쪽

인민군 종군작가-이념 갈등. 동승. 무의도. 산머구리.

목포 극작 김우진. 차범석. 천승세-인걸은 지령. 양근-양평 목포삼절-박화성.이난영. 남농 허건 (천승준 천승걸 천승세 이규희)

20

한용운

204411

만해 1879~1944 승려. 독립운동가

길옆 연보 비 위쪽-시 낭송. 정동. 명당 휠링 지조-박희도,

신채호 비문.

21

설의식

204325

1900~1954 언론인,동아일보 주필, 부사장 역임

한용운 비 남쪽 정규환 묘 좌측 길,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 한용운 묘 우측 위. 해돋이 명소. 부 비문-정인보 글 오세창 서

22

박희도

109628

독립운동가,언론인

한용운 연보비 조금 지나 길 밑. 중앙보육학원 설립(중앙대 전신). 기독교대표 최연소 33, 변절. 경성스캔들, 반민특위 조사.

광복군 비행장교 1호 박희성(동생)

23

김이석

203693

1915~1964 소설가. 작품 '뻐꾸기'

문일평 묘 백호 쪽 두 번 째 묘, 네모난 사각 오석 낮은 비석. 44-303남매 과부 박순녀 소설가(방송작가 1)와 결혼. 이중섭과 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 행려환자 마지막 길 묘지-우정

24

문일평

203742

호암. 1888~1939

독립운동가,민족사학자

연보비 위쪽. 조선심(한글, 실학 실사구시)-이육사 윤동주 유품. 손녀사위- 조선일보

25

오세창

203733

위창 1864~1953 독립운동가, 서예가,언론인

오세창 묘 문일평묘 위 우측. 간송 전형필 문화재 독려와 감별.

33. 금석학자. 부 오경석-역관, 기미독립선언서-요즘 애들이 한문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비문 앞 소전 손재형(세한도 제발), 여초 김응현

26

최영주

109956

아동문학가. 1906~1945.1.12

방정환 묘 입구좌측-소파 전집. 최영주(신복)-가족 묘(아버지, 아들) ,오빠생각 최순애-이원수 10년 사랑, 최영애-꼬부랑할머니

27

방정환

203703

소파 1899~1931 독립운동가,아동문학가

연보비 좌측 위쪽. 손병희 사위 S. 담배 요절-최학송, 다쿠미,

박인환. 이중섭. 삼학사. 함세덕

28

명온공주,김현근

203747

명온공주 1810~1832 왕족, 순조의 첫째 딸

김현근 1810~1868 영의정 역임

방정환 묘에서 백호 쪽 묘하나 건너 윗 쪽 절벽-속발 속패. 김상용 8대손, 신경준 묘와 비교. 산 위-명예, 아래-, 김상용의 5대손 부마- 신립 장군의 맏아들-신경진-괘혈, 산 위 능선 경사-속발 속패 산 아래 능선-돈과 발복 기간, 경북 경남 재벌 비교,

29

오긍선

203636

해관 1878~1963

의학자. 사회사업가. 친일명단

연보비 윗 쪽, 해주오씨 영역, 최초 피부과 의사. 군산 영명 설립.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 3대 의사, 개업하지 않은 집안

감찰오인묵적선비, 가족묘-묘지 관리 및 변화.

30

이영준

203620

오긍선의 제자. 69년 추석에 윤보선 찬

오긍선 묘 아래, 세스란스 의전 교수, 제헌의원, 국회부의장(4)

장덕수 암살 현장 목격.

31

박승빈

203610

1880~1943 한말의 국어학자.

저서는<조선어학강의요지>, <조선어학>

동락천 서쪽,오긍선 연보비 뒤 좌측, 오긍선 묘 올라가는 왼쪽

보성전문 교장. 법률가. 교육자. 주시경 최현배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반대 <정음> 발행, 비주류

32

유상규

203555

1897~1936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연보뒷길->묘역 나올 때까지 올라감->우측. 안창호 유언-옆에 유택 마련해 달라. 이광수 묘비 글. 도시혈-굽은 나무-홍유릉

33

안창호 묘터

 

강남구로 이장함

유상규 묘 위쪽 우측. 자기개조. 무실역행 충의 용감 약속 지키기

34

이인성

203574

1912~1950.화가

안창호묘 터->윗쪽 능선 길->능선 따라 북쪽-

능선의 발복-기룡혈, 3대 이후 자손 수 감소

35

아사카와

타쿠미

203363

1891~1931 친한 일본인, 한국의 수목연구, 민예, 도자기의 전도사, 인류애

동락천 오른쪽 길옆, 동락천 동쪽, 묘비-형 노리다카 청화백자주초모따기항아리, 산림녹화. 한국말과 한복입기 온돌 밥상 민족미술박물관. 서양음악 최초독창회(야니가무네요시 부인)-조선문화(민예) 독자성 우수성, <폐허>동인 등 청량사 감리교회,

전순40%~20% 말자 발복 절손

36

이경숙

203364

1924.3.9~1953.11.18.사회운동가

아사카와 타쿠미 묘 바로 옆. 한글서예-이철경. MRA운동개척자

37

지석영

202541

송촌 1855~1935 의학자.국어학자.

종두법

연보비 북쪽->능선까지 올라감. 국어학자. 종두법 5대 의사 집안, 바위-괘혈(박정희, 노무현, 재벌, 정운찬, 차병원)-가문발복

38

김상용

109956

1902~1951. 시인. 남으로 창을 내겠소

지석영 연보비 지나 북쪽 순환로-> 형제약수터 입구 팻말 바로 아래 첫번째 묘.이장문제. 전원시인-신석정.장만영. 강원지사(미군통역만 사표, 일석 이희승-지월(땅딸보 별호), 누이-김오남 시조시인, 51년 피난지 부산 김활란 사저 필승각 게 중독 별세.

39

삼학병

109954

199955

110000

김명근,박진동,

김성익

김상용 묘 아래 더 내려가면 철책-> 철책 안으로 무덤 셋이 나란히 보임. 이념 갈등. 부모님께 불효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

박진동-LG 구인회 맏사위

40

권진규

201720

1922~1973.

조각가

관리사무소-->좌측순환로-->첫번째 계곡 -->능선타고 오르다-->유인청주한씨묘 지나서-->작은도랑을따라 우측으로-->앞에보이는 언덕위에 있음(찾기힘듦) 묘지번호 No:201743(형권진원)으로 찾아야함. 지원의 얼굴. 테라코타, 동선동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운영하는 시민문화유산 제3권진규 아틀리에

41

최백근

111672

1914~1961.

민족통일운동가

망우관리사무소 화장실 우측아래--> 소나무 보고 내려감-->흰색건물(구리시 장애인 근로복지센터)뒤쪽-->작은언덕위에 있음, 민족일보 조용수와 같은 시각. 사회당 조직부장 사형(3공화국)

 

 

근현대사에서 다양한 분야 최초 최고 인물

No

인물

생애

활동

활동 내역과 역사적 의의

1

계용묵(契鎔默)

1904~1961

소설가

백치 아다다”,

30년대 단편소설 미적언어

2

권진규(權鎭圭)

1922~1973

조각가

근대 조각의 선구자, “지원의 얼굴”, 자살

문화유산기금 3호 동선동 아뜰리에

3

김말봉(金末峰)

1901~1962

소설가

최초의 대중소설가, “그네작시,

순수귀신을 버려라, 박애원, 공창제 폐지

4

김사국(金思國)

1892~1926

사회주의자

서울파 거두, 청년 사회주의 운동 주도, 박원희와 결혼, 대전국립현충원 이장

5

김상용(金尙鎔)

1902~1951.

시인

 

전원(목가), 식중독(), 부산에서 이장.

남으로 창을 내겠소

6

김석영(金夕影)

 

1929~1966

사회평론가

1공화국 사회평론가,

묘비오재도 검사 세움

7

김영랑(金永郞)

1903~1950

시인

<시문학>파 순수서정시,

북에 김소월 남에 김영랑. 최승희와 사랑

남산에서 옮겼다 용인천주교묘지로 이장. 고향 강진 고택 뒤에 모란공원에 모실 예정.

8

김이석(金利錫)

1915~1964

소설가

소시민들의 삶을 그린 사소설, 박순녀(방송작가 1) 재혼, 이중섭 보통학교 1년 선배

9

김정규(金貞奎)

1883~1960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종교인, 대전국립현충원 이장

10

김호직(金浩稙)

1905~1959

영양학자

영양학 선구자, 한국인 최초 예수그리스도후기 성도교회(몰몬, 말일성도) 회원, 개인묘지

11

나운규(羅雲奎)

1902~1937

영화감독

한국영화의 전설, 풍운아, 선구자 아리랑

94년 대전국립현충원 이장

12

노필(盧泌)

1927~1966

영화감독

음악영화의 1인자, “꿈은 사라지고”, “밤하늘의 부르스”, 삼청공원 자살

13

명온공주

(明溫公主)

김현근(金賢根)

1810~1832

1810~1868

순조의 첫째 공주

영의정

순조의 첫째 공주,

신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 8대손, 부마,

동녕위, 증직 영의정, 종암동에서 이장

14

문명훤(文明煊)

1892~1958

독립운동가

수양동우회 회원,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

흥사단 활동, 대전현충원 이장

15

문일평(文一平)

1888~1936

사학자,

언론인

조선학의 선구자,

역사의 대중화(조선심)

16

박동성(朴東星)

 

군인

훼손 묘비에 여식 진주(眞珠)

17

박동훈(朴東薰)

 

학생

4.19혁명 희생자. 묘비에 비문

18

박승빈(朴勝彬)

1880~1943

변호사

국어학자

초대 조선축구협회 회장,

국어학자<정음> 발간-한글학회 비주류

19

박원희(朴元熙)

1899~1928

사회운동가

사회주의 여성운동 선구자,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인, 대전현충원 이장

20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

50년대의 대표 시인, 모더니즘,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종군 작가

21

박찬익(朴贊翊)

1884~1949

독립운동가

대한(무오)독립선언 39, 백범 김구 비서

93년 국립현충원 이장

22

박희도(朴熙道)

1889~1952

기독교인

기미33인 가장 젊은(31) 기독교계 대표, 중앙대학교 전신인 중앙보육학교 설립,

경성기담, 변절(반민특위)

23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아동문학가

아동문학의 선구자

어린이, 어린이의 날 제정

24

백대진(白大鎭)

1892~1967

언론인

독립운동가

필명 걱정업슬, 문명개화지상론자,

민족의식 고취, 88년 대전현충원 이장

25

삼학병

김명근(金命根),

박진동(朴晉東),

김성익(金星翼)

?~1946.

학병

해방 후 학생운동의 선구자(좌우이념 대립)

박진동-LG그룹 창립자 구인회의 맏사위

26

서광조(徐光朝)

1897~1972

독립운동가

조선국민회 비밀결사

27

서동일(徐東日)

1893~1966

독립운동가

일제 앞잡이 처단하는 다물단단원,

부인(최옥경)과 합장

28

서병호(徐丙浩)

1885~1972

독립운동가

한국인 최초 유야세례(부 최초 목사 7), 국립대전 현충원 이장

29

설의식(薛議植)

1900~1954

언론인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편집국장)

30

송석하(宋錫夏)

1904~1948

민속학자

민속학 선구자, 서울대 인류학과 설립, 초대한국산악회장, 초대민속박물관장, 이장

31

송진우(宋鎭禹)

1890~1945

독립운동가 언론인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동아일보 창립(광복 후 복간 초대사장), 암살,

88년 국립현충원이장

32

심명균

1958

국어학자

국어학자, 조선어연구회, 이장

33

안석주(安碩柱)

1901~1950.2.24

소설가, 삽화가, 영화인

우리의 소원(독립) 작사가, 아들 안병원 작곡, 이장

34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독립지사

최고 독립지사(대한민국장), 도산공원 이장

35

오긍선(吳兢善)

1879~1963

의사

최초 피부과 의사, 세브란스 최초 한국인 교장. 3대 의사(개업의가 아닌 사회사업)

36

오기만(吳基萬)

1905~1937

독립운동가

상해한청동맹 집행위원장(조봉암과 동급)

37

오세창(吳世昌)

1864~1953

독립운동가

기미33, 당대 최고의 서화가,

세한도제발 <근역서화징>

간송 전형필 멘토 간송미술관 서화 감식

38

오재영(吳哉泳)

1897~1948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권총 전달(집 한 달간 기숙)

숭신학교 건립, 의열단원

39

유상규(劉相奎)

1897~1936

독립운동가

조선의사협회 창립 주도, 수양동우회,

도산 안창호(유언) 묘지 안장

40

이광래(李光來)

1908~1968

극작가

 

예술 연구회,국립극단 창립, 서라벌예술대학 초대연극학과장, 형 이일래(동요-산토끼)

41

이량(李亮

1896~1955

군인

육군준장, 이장

42

이병홍(李炳洪)

1891~1955

독립운동가

반민특위 위원, 1,2기 민의원,

신익희 묘비 글

43

이경숙(李景淑)

1924~1953

사회운동가

대한민국 MRA개척자, 사리, 유달영 제자

44

이영민(李榮敏)

1905~1954

야구선수

최초의 동대문운동장 홈런타자,

초대 조선야구인협회 회장, 이장

45

이영준(李榮俊)

1896~1968

국회의원

최초의 동경대 의학박사(임상), 제헌의원

오긍선의 후계자

46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화가

근대 최고의 유화가 1(월간 미술)

47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화가

근대 최고의 유화가 2(월간 미술),

, 은박지

48

임방울(林芳蔚)

본명-승근(承根)

1904~1961

판소리

소리꾼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송학원- 김산호주와의 사랑) 춘향가(옥중가) 쑥대머리

120만장 판매, 88년 남한강공원묘지 이장

49

임숙재(任淑宰)

1891~1961

교육자

숙명여대 초대 총장

50

 

장덕수(張德秀)

1895~1947

언론인

정치인

초대 동아일보 주필,

창간사, 암살

51

조봉암(曺奉巖)

1898~1959

독립운동가

진보당당수

초대 농림부 장관, 제헌의원,

진보당, 1공화국 사형

52

조종완(趙鍾完)

1891~1947

독립운동가

상해임정 위한 군자금모집, 수양동우회 민족의식 고취, 94년 대전현충원 이장

53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의사

국어학자

최초 서양의학 도입, 최초 관립의학교 교장 종두법, 5대 의사,

손자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

54

차중락(車重樂)

1942~1968

가수

최초의 '오빠',

펜 싸인 북

55

채동선(蔡東善)

1901~1953

작곡가

정지용 시고향작곡-이은상그리워”-박화목망향”, 보성 벌교 <채동선음악관>, 이장

56

최경국

1910~1953

사회사업가

서울여자대학 창립 이사

57

최백근(崔百根)

1914~1961

민족통일운동가

독립지사, 우리 민족 자주적 통일 운동가,

5.16후 사형, 미복권

(고향 광양에서 복권운동 전개 중)

58

최신복(崔信福-泳柱)

1906~1945

아동문학가

최초의 수필문학잡지 창간<박문>, 방정환 소파전집 발간,

여동생 최순애 오빠 생각” -이원수와 결혼,

최영애 꼬부랑 할머니작사가

59

서해-최학송

(曙海-崔鶴松)

1901~1932

소설가

당대 빈궁문학의 최고봉

홍염”, “탈출기

60

함이영(咸二榮)

~1957

음악가

동요 우리나라꽃작곡

61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독립지사

시인, 승려

기미33, 최고의 독립지사(대한민국장) 동국대학교(명진학교)1회졸업생, <님의 침묵>,

망우리 묘지 중 유일하게 서울시 201210월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

62

함세덕(咸世德)

1915~1950

극작가

유치진과 양대 산맥, ‘마음의 고향최초 해외 교환 상영작, 당시 항일영화 사이에서 보기 드문 문예영화, 한국 첫 번째 불교영화, 당대 최대 관객(원작동승” 1949)

인민군 종군 작가

63

사이토 오토사쿠

1866~1936

영림창장

포플러(미루나무), 아까시 식목,

식목일 제정, 일본식 묘비 밑에 유해 안장.

64

아사카와 다쿠미

1891~1931

산림과,

민예연구가

한일 교류의 상징, 잣나무 노천 매장법 개발 최초 조선민족미술관 건립, 최초 소프라노

독창회 개최, 참배객이 많고 끊이지 않음.

<조선의 선()-소반>, <조선도자명고>

 

 

소년등과: 이인성, 차중락

중년 가정(건강)지키기: 박인환, 방정환, 이영민, 이중섭, 아사카와 다쿠미, 박희도

노년: 과욕(말은 줄이고 돈은 풀기)

 

관계: 소파 방정환-이인성 16세 세계아동예술전람회 특선, 최신복(영주)<소파전집>-잡지[어린이] 최순애 11세 오빠생각, 이원수 15세 고향의 봄 윤극영 설날 반달 등 유지영 한정동 윤석중 서덕출 박목월 강소천 등,

이중섭-김병기 보통학교 같은 반 행려병자 장례식, 일본 선원증 구상 박인환

묘비 한묵 차근호 조각품

최학송-이장준비위 김광섭, 곽근, 동아리활동-정종배(묘지 관리인)

채동선-김상용(새벽별을 잊고)작곡

박희도-육군정훈학교

아사카와 다쿠미-조재명, 홍림회, 임업시험장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조만제), 기요사토(청리은하숙-하정웅,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동아리활동-정종배

 

종두법-지석영

어린이의 날-방정환

식목일-사이토 오토사쿠(아까시나무 미루나무)

노천매장법(잣나무)-아사카와 다쿠미

 

연인: 방정환-신줄려(줄리아)-사랑의 선물 S, 차중락-알린, 김영랑-최승희

오빠부대 원조: 차중락(알린), 이화여고3년 싸인북 펜클럽회장

일본인과 결혼: 이중섭, 권진규

 

암살: 장덕수, 송진우

총기 사고: 이인성(경찰 오발), 이영민(아들 친구 도둑)

유탄: 김영랑

자살: 권진규, 노필, 이기붕 일가

사형: 조봉암(자유당-이승만), 최백근(공화당-박정희)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사이토 오토사쿠

 

유언: 도산 안창호-태허 유상규 묘 옆에 묻어 달라, 오긍선-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 - 천상병(귀천)

 

비문: 신완 신확(증손)-신경진 묘비, 송시열, 박태유-신경진 신도비, 정인보-설의식, 정인보 글 김승렬 서 이규태 컴퓨터 글씨 -문일평, 오세창, 이재철-방정환, 이광수-유상규. 최남선. 신익희-이병홍, 박종화, 이은상, 이철경 유달영-이경숙, 조완구 조지훈() 최중길()-박찬익, 윤보선-이영준, 주요한, 김기승-오한영, 조병화-차중락, 김남조-임숙재, 손재형(), 김응현()-오세창, 김응현-한용운, 송지영-박인환, 한상우-채동선 한묵 차근호-이중섭, 춘원 이광수-태허 유상규, 연보비 강신명-서병호, 곽근 짓고 황재국 쓰다-최학송, 백낙운 글 윤희화 서-지석영, 김활란 글 김기승 서-란석 박은혜(장덕수)

 

이장: 이태원동, 신사리, 이문동, 노고단, 수유리, 미아리, 수철리(금호동) 등 서울 도시 확장으 로 인해 공동묘지를 개발하면서 망우리로 이장하여 1930년 이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주 로 이장하였음.

경서노고단 무연고 이전비. 이태원 공동묘지 이전비, 방정환(유품)

최학송(수유리-김광섭), 아사카와 다쿠미(이문동-70년 후 유명세), 방정환, 이중섭, 김상용 등

 

기념탑: 13도창의군 기념탑(왕산 허위-왕산로)-구미 3인물(야은 길재, 왕산 허위, 중수 박정 희)

 

현재 추모가 가장 활발한 묘지: 아사카와 다쿠미(고향 야마나시현 한국 관광객들의 묘지 탐방 과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와 ()서울친선협회의 관리와 추모제일본인 안내), 청리은하숙(일본 고향-하정웅),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한국-수림문화재단, 중랑문화연구소,)

 

현재 생존 인물: 0- 어머니 묘(60년대 초)배 밭 이장 , 0- 부모님 묘(50년대 중), 분당 0 병원- 모친(60년 대), 0자 여사 조부-밤 이장 헬기 용인군 내사면 금박산 정상(가학상천). 0훈 장관 조부, 0-손자 서경석 목사, 0-전 문화공보부장관 조모(윤보선가 음택), 0하 부모 벌초 손-약사봉 추락사, 역사학자 이0화 모친,

 

 

 

팔자 고치는 6가지 방법-조용헌(조부 유택 필봉(筆鋒)을 바라보는 자리- 문필가)

1. 적선: 적선지가 필유여경-적악지가 필유여앙, 윤보선 일가(?)

2. 스승(만남): 이중섭과 임용연(오산학교 영어 미술교사 프랑스유학 습작 중시- 향토성, 소 스 케치 방안 가득(, 어린이, , 가족, , 물고기, 연꽃 등)-구상, 김이석

3. 명상(기도): 부처 예수 간디, 아사카와 다쿠미-감리교 교인-일본 우익들의 협박과 테러 등을 신앙인(기도)으로 이겨냄

4. 독서: 어렵고 힘들수록... 밖에 나가 깨질수록 집에 앉아 책읽기(, 지혜) 어린이에게 책 읽어 주기.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닌 책 권하는 사회

5. 명당(양택, 음택): 양택-서울 건천동(마른내) 서애 유성룡 충무공 이순신-백의종군과 후원.

서울 4대 양택-건천동, 낙성대, 홍제동 상계동 중 건천동만 남음

음택- 덕소석실마을 장동(신안동) 김씨. 박정희. 윤보선, 김종필

6. 명리(사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같은 사주여도 황제와 거지-주변 환경과 마음 씀 노력)

 

하나 더 덧붙인다면

7. 심상과 실천- 김구(천연두) 역학, 관상공부하다-심상(마음 다스리며 생각대로 살아가기)-인 내(이 세상 가장 힘센 이은 끝까지 참는 사람)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 박인환 ,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백의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나에게 물은즉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웃고 대답하지 않으나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다.

복숭아꽃 실린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모란이 피기 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최순애는 1914년에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인 192511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는 오빠 생각이 방정환의 어린이에 실린다.

 이듬해 416세의 소년으로 불후의 명작 고향의 봄쓴 이원수도 입선하므로 수원과 마산을 오가는 편지 속에 숙명적인 만남이 지속되다 결국 10년 뒤인 19366월 둘은 부부가 된다.

뜸북 뜸북 뜸북새 /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 숲에서 울 때 / 우리오빠 말 타고 / 서울 가시며 / 비단구두 사가지고 /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 북에서 오고 / 귓들 귓들 귀뚜라미 / 슬피 울건만 / 서울 가신 오빠는 / 소식도 없고 / 나뭇잎만 우수수 / 떨어집니다
-최순애의 오빠생각전문. 192511. “어린이”-

동생 최영애도 10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이에 동요 꼬부랑 할머니가 입선되었으니 참으로 영특하고 참으로 정겨운 오누이들이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 집행이 집고서 어데 가나 /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 솔방울 줏으러 가신단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 저녁에 어데서 혼자 오나 /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 솔방울 이고서 오신단다.
-최영애의 꼬부랑 할머니전문. 19254. “어린이”-


1928년 이일래 선생(이광래 형님)이 이방초등학교 재직시절 작곡한 곡으로 1938년에 선생의 동요곡을 묶은 조선동요작곡집이 나왔는데 영문과 삽화, 시편이 실려 있다.

 

1928년 이일래 선생이 이방초등학교 재직시절 작곡한 곡으로 938년에 선생의 동요곡을 묶은 조선동요작곡집이 나왔는데 영문과 삽화, 시편이 실려 있다.

<산토끼>

작사/작곡 : 이일래

 

산토끼 토끼야 / 어디를 가느냐 / 깡총깡총 뛰어서 /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 나혼자 넘어서 / 토실토실 알밤을 / 주워서 올테야

 

가을비 소리에 철든다

 

정종배

 

이제는 봄비보다

가을비가 더 좋다

아니 가을비 소리가 더 좋다

 

봄비에 꽃봉오리 벙글대는 소리보다

단풍잎 물들어가는 소리가 가슴에 못질하듯

파고들어 더 좋다

 

오월의 숲 가득 차오르는 신록의 향기 퍼지는

소리도 좋지만

가을 하늘 뭉게구름 적막하게 흩어지는 소리

그냥 내버려두었다

저녁노을 슬며시 검붉게 타오르며

앓은 소리가 더 좋다

 

시각보다 청각이 더 편하고 오랜 기억으로 가는

내 삶의 계절은

가을비 소리로 철벅거리는지

 

이제야 철들어 가는 소리 아닌지

달 항아리 내 사랑아

 

 

 

 

 

꽃봉오리

 

정종배

 

 

한결같은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지금여기

꽃봉오리 아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