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관동대지진 조선총독부 건물

정종배 2017. 4. 14. 13:46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는 1914년, 한 해 전 1913년 남대문 소학교 미술선생으로 온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의 임업연구소의 하급기사(고원, 기사)로 근무하면서, 민둥산이 많은 한국의 산을 녹화하기 위해 토양에 맞는 수목의 연구, 육성에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미술공예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민족미술관 설립에도 힘을 썼답니다.

그의 1922년 6월4일자 일기에는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후일 조선신궁)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어내 가면서 까지 굳이 숭경을 강제하는 신사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 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산정상에서 경복궁안의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백악,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사이에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뻔뻔하다.

게다가 기존 건축의 조화를 완전히 깨뜨려 정말이지 볼썽사나와 보인다.

백악산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일본인의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아사카와는 식목일 준비로 과로하여 1931년 40세로 생을 마감하고,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수목원 퇴직공무원들의 모임인 홍림회에서 세운 현창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까지는 일본역사교육연구원(물론 일본의 단체입니다)의 소개입니다. 조금 더 조사해 자세히 설명드립니다.
망우리 그의 묘지는 한국임업연구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일인 매년 4월 2일이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네요.










1. 조선도자기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의 공예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본인들이 돈을 벌기위해 조선으로 넘어왔지만, 그는 이러한 이유로 한국으로 넘어 온거지요.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선은 정치와 정략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보다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예술을 교류하고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노리타카는 조선도자사를 연구하는데, 일본의 명품 다완으로 알려진 다완중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고, 다쿠미와 함께 조선의 많은 가마터를 돌아다녔습니다. 옛가마터를 약 700곳을 발굴조사하였다 합니다.

동행했던 다쿠미는 그 결과를 보고문과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했으며, 1934년 7월 도쿄에서 '조선 고도기 사료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노리타카는 광복이후, 일본인 수집가들이 조선미술,공예품을 일본으로 빼돌리기에 급급할 때, 소장품 3천여 점과 도편 30상자를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합니다.



2. 형인 노리타카와 전국을 돌던 다쿠미는 조선의 산하가 민둥산이라는 것에 안타까워했습니다.

안그래도 헐벗은 조선의 산하에 수탈적인 임업정책을 펼치는 일본을 비판합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는 식목을 거듭해 조선오엽송(잣나무)의 양묘를 위한 '노천매장법'을 개발 성공합니다.

덕분에 2년이 걸리던 잣나무의 양묘를 1년으로 단축합니다.

'현재 한국의 인공림 37% 이상이 다쿠미가 공을 들인 나무입니다' -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


3. 한국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

'길에 나와보니,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즐거운 듯 오가고 있다. 조선의 아이들은 특별히 예쁘다. 왠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오늘은 왠지 조선인의 세상같은 기분이 든다. 일본의 행위가 이 아름다운, 천사같은 사람들의 행복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다면, 하느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에는 조선 민족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들이 혜택받은 민족이라는 것도 느껴진다' (1922.1.28일기)




'나는 믿는다. 이 불시의 천변을 이용하여 계획을 조선인 혼자 세우지는 않았을 거라고, 오히려 일본인 사회주의자 패거리가 주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해서 저지른 일이 아닐까?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대우하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조선인에 대해 이해가 지나치게 빈약한 탓이다.(중략)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도쿄에 사는 조선인들이 지진으로 고생하는 일본인과 그들의 집이 불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조선인들이 그렇게 했을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일본인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도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 (관동대지진후 조선인의 살인방화에 자경단이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조선인이 일상에 사용하는 공예품에 관심이 깊었습니다.

소반, 제례기, 식기와 숟가락, 문방구, 화장용구, 실내용구, 연장과 용기...

그것들을 수집하고, 사진촬영하고, 스케치하여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라는 명저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책의 서문에는 '조선의 목공품은 도자기등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멋을 지녔다. 요즘들어 목공품에 대한 가치를 새로이 인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앞으로 더 인정받을 날이 올것이다. '



1996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기가 일본에서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소개가 되었지요.

'우리도 알지못했던 소반, 도자기미학'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기에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인촌김성수, 장덕수, {폐허} 동인 남궁벽,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김유방 김일엽 등 조선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상, 조선의 임업연구, 민예품연구과정이 자세히 적혀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