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아사카와 다쿠미

정종배 2018. 1. 8. 09:45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는 1914년, 한 해 전 1913년 남대문 소학교 미술선생으로 온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의 임업연구소의 하급기사(고원, 기사)로 근무하면서, 민둥산이 많은 한국의 산을 녹화하기 위해 토양에 맞는 수목의 연구, 육성에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미술공예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민족미술관 설립에도 힘을 썼답니다.

그의 1922년 6월4일자 일기에는
'조금 내려가면, 조선신사(후일 조선신궁) 공사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벽을 파괴하고, 장려한 문을 떼어내 가면서 까지 굳이 숭경을 강제하는 신사따위를 거액의 돈을 들여 지으려는 관리들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산정상에서 경복궁안의 신축청사(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내려다보면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백악, 근정전, 경회루, 광화문 사이에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뻔뻔하다.

게다가 기존 건축의 조화를 완전히 깨뜨려 정말이지 볼썽사나와 보인다.

백악산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일본인의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다.'



아사카와는 식목일 준비로 과로하여 1931년 40세로 생을 마감하고,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수목원 퇴직공무원들의 모임인 홍림회에서 세운 현창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까지는 일본역사교육연구원(물론 일본의 단체입니다)의 소개입니다. 조금 더 조사해 자세히 설명드립니다.
망우리 그의 묘지는 한국임업연구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일인 매년 4월 2일이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네요.










1. 조선도자기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의 공예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본인들이 돈을 벌기위해 조선으로 넘어왔지만, 그는 이러한 이유로 한국으로 넘어 온거지요.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선은 정치와 정략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보다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예술을 교류하고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노리타카는 조선도자사를 연구하는데, 일본의 명품 다완으로 알려진 다완중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고, 다쿠미와 함께 조선의 많은 가마터를 돌아다녔습니다. 옛가마터를 약 700곳을 발굴조사하였다 합니다.

동행했던 다쿠미는 그 결과를 보고문과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했으며, 1934년 7월 도쿄에서 '조선 고도기 사료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노리타카는 광복이후, 일본인 수집가들이 조선미술,공예품을 일본으로 빼돌리기에 급급할 때, 소장품 3천여 점과 도편 30상자를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합니다.



2. 형인 노리타카와 전국을 돌던 다쿠미는 조선의 산하가 민둥산이라는 것에 안타까워했습니다.

안그래도 헐벗은 조선의 산하에 수탈적인 임업정책을 펼치는 일본을 비판합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는 식목을 거듭해 조선오엽송(잣나무)의 양묘를 위한 '노천매장법'을 개발 성공합니다.

덕분에 2년이 걸리던 잣나무의 양묘를 1년으로 단축합니다.

'현재 한국의 인공림 37% 이상이 다쿠미가 공을 들인 나무입니다' -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


3. 한국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

'길에 나와보니,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즐거운 듯 오가고 있다. 조선의 아이들은 특별히 예쁘다. 왠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오늘은 왠지 조선인의 세상같은 기분이 든다. 일본의 행위가 이 아름다운, 천사같은 사람들의 행복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다면, 하느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에는 조선 민족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들이 혜택받은 민족이라는 것도 느껴진다' (1922.1.28일기)




'나는 믿는다. 이 불시의 천변을 이용하여 계획을 조선인 혼자 세우지는 않았을 거라고, 오히려 일본인 사회주의자 패거리가 주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해서 저지른 일이 아닐까?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대우하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조선인에 대해 이해가 지나치게 빈약한 탓이다.(중략)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도쿄에 사는 조선인들이 지진으로 고생하는 일본인과 그들의 집이 불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조선인들이 그렇게 했을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일본인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도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 (관동대지진후 조선인의 살인방화에 자경단이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조선인이 일상에 사용하는 공예품에 관심이 깊었습니다.

소반, 제례기, 식기와 숟가락, 문방구, 화장용구, 실내용구, 연장과 용기...

그것들을 수집하고, 사진촬영하고, 스케치하여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라는 명저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책의 서문에는 '조선의 목공품은 도자기등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멋을 지녔다. 요즘들어 목공품에 대한 가치를 새로이 인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앞으로 더 인정받을 날이 올것이다. '



1996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기가 일본에서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소개가 되었지요.

'우리도 알지못했던 소반, 도자기미학'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기에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인촌김성수, 장덕수, {폐허} 동인 남궁벽,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김유방 김일엽 등 조선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상, 조선의 임업연구, 민예품연구과정이 자세히 적혀있다고 합니다.





 


)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백조종 편저 부코()

#1, 숲에 조금 이란도 관심이 있는 분, 그 보다 숲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성지 순례하듯 찾는 청량리 홍릉터 임업연구원 내 옛 임업시험장 홍릉수목원을 모르는 사람 없고 안 가본 이 거의 없을 것이다. 거기 임업연구원 본관동 건물과 그 뒤편 나란히 있는 연구동 건물 사이 아담한 잔디밭이 하나 조용히 자리 잡고 동쪽으로는 침엽수림이 하늘을 찌르듯 서있고 본관동 가까이 아주 잘 생긴 노송한그루 앉아 계신 모습 보셨을 것이다. 참 연구동 입구 가까이 한쪽에는 능소화가 이름값 하면서 하늘을 찌르며 초여름임을 과시하는 데. 두어 걸음 비켜선 자리에 해묵은 주목 한그루 세월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4계절에 한번 이상을 꼭 이 장소를 들리는데 어느 날 그 주목나무 식수 한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기록으로는 아니 지만 연구원 관계자가 알려 줬다. 그 주목은 60년대 잘나가던 필리핀 대통령 영부인 이멜다 여사가 한국 방문 기념 식수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그 엄전하게 자리 잡은 그 반송의 식수 주인이 늘 숙제처럼 내 마음 내 머릿속에 남았는데. 그 주인을 이번 여름에 우연히 실로 우연히 알아냈다. 그 기쁨 다른 이는 모르리라.

 

*2) 이번 추석 두주일 전 나는 고향 선산에.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띠 자리에 풀 베러 갔다 왔다. 그리고는 추석 한주일 전. 저 모든 근심 잊어버린다(忘憂里).는 중랑구 망우리, 전에는 망우리 공동묘지라고 했는데. 지금은 망우공원 이란 그 묘역. 사색의 길을 한나절 걸려 다녀왔다. 지금 망우 공원에는 유택도 만원이라. 새죽엄을 오래전부터 받지를 못하고 있으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 한동안 거의 모든 서울 사람들의 유택으로 쓰인 곳. 지금 10만 여기가 관리 되고 있는 곳이다. 나는 그곳을 그 때도 나 혼자 몇 번 다녀온 전력이 있다. 첫 번은 해방 전후기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독립운동가. 이를테면 만해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서동일 등등 애국자의 묘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어린이날 어린이란 말을 만든. 방정환. 의학자 지석영.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 의학자이며 국어학자 지석영. 은박지에 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 그리고 작곡가 채동선 등 여러분을 만나 보기 위해서 이었다. 그러나 이번 세 번 채 행보는 순전히

유명하지는 않으나. 훌륭한 사람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 더운 햇살 받으며 찾아갔다.

내 핏줄과 연관 된 분도 아니고 더구나 우리 한국사람 아닌 일본사람의 한 무덤을 혼자 찾아갔었다. 땀 흘리고 찾아간 그 분의 소박한 묘지 앞 검은 상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의 산과 한국 민예품을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현제 망우리 묘지에 안장된 10만 여기 무덤 중에 일본 사람으로는 유일한 묘지란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홍릉 수목원에서 그 소나무를 만나고. 그가 살던 집터. 지금 세종기념관 위편도 들르고. 그 일본사람이 자주 찾았다는 떡전거리 못 미쳐 있는 청량사라는 비구니들의 절집도 찾아 그의 뭔가를 느껴 보려 다녔다.

그리고 그분에 관한 모든 어떠한 기록이라도 알아보려 신간 구간 할 것 없이 책을 구했다.

7년 전에 한글 번역본으로 나온 평전은 품절이고. 그분의 일생을 소설로 쓴 책백자의 나라에 살다도 비매품으로 헌책방 뒤지고 뒤져서 겨우 구입했다.

 

*3) 자 그럼 숙제를 풀어 보자. 내가 그토록 궁금해 하고 체취 흔적이나마 알려 찾아 나선 그 사람은 누구일까?

임업연구원 본관 뒤편 그 잔디밭 그 곳의 공식이름은 홍림원(洪林苑 -옛 홍릉임업시험장의 뜰)이라 하는 데 그 소나무. 연세가 물경 119, 원래는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30년생 반송을 1922년 조선 총독부 소속 임원시험장 개청 기념식수로 옮겨 심은 것으로 확인 됐다.

그 때 그 소나무를 심은 이가 바로 이름도 낯설고 발음도 수월치 안은 [이시카와 다꾸미 淺川 巧] 선생이시다.

이시카와 다쿠미(淺川 巧) 그는 누구인가?

1891.1.15. 일본 중부 동남쪽으로 후지산이 건너다보이는 산촌 야마나시(山梨)현에서 7살 위 형 노리타카(伯敎), 4살 위 누나 사카에()을 두고 33세살에 죽은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이웃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영림서에서 농업기사로 근무하다가. 먼저 조선으로 건너가 초등학교 미술교사로 있는 형의 권으로 1914.5 그도 조선 땅을 밟는다. 첫 직장이 그의 전문 교육과 전직 산림공무원이란 경력 때문에 막 시작한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 고원(雇員) 지금으로 치면 인턴사원으로 취직한다. 당시 임업사업소는 지금의 아현동 추계대학 중앙여고 자리. 즉 사도세자의 첫 아들묘 의령원(懿寧園) 일원이고 묘목 기르는 묘포장이 담당 이였다. 이듬해 바로 지금 청량리 홍릉으로 임업시험장이 정식 개청 하고 그 때 예의 그 소나무를 심었고 이후 오늘날 우리가 조림 성공 국가라 자랑하는 밑거름과 씨앗을 뿌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단순한 임업공무원으로서 산림에 관한 일과 더불어 거의 모르고 무관심상태에서 버려뒀던 우리나라 백자와 목공예품 소반. 그리고 전래의 놀이기구와 그 사용 방법을 수집해서 이른바 조선의 미를, 조선 민예품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우리뿐 아니라 일본, 인도 서양까지 알게 하는 소중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총독부를 경복궁에 지을 때 그 앞 광화문을 헐려는 일본 위정자들에게 당시로서는 실로 용감하게 항의, 여론을 이끈 잘 알려진 일본 민예학의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이 야나기를 민예로 이끈 다쿠미의 형 노리타카 등 세 사람이 조선반도 전역의 청자 백자. 또는 그 파편을 모아 사라저가는 조선의 미를 보존하려 만든 <조선민족미술관> 건립도 이 사람의 공이다. 더구나 총독부 허가를 받을 때 민족이란 글자를 빼라는 압력에도 글하지 않고 자기 봉급과 결혼 시 사 입으라고 어머니가 주는 양복 값까지 쏟아서 지금 경복궁 향원지 앞에 있는 집경당 건물에 전시실을 만들었다. 그 들은 해방 후에도 몰래 일본으로 빼가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 오늘날 국립박물관으로 넘겨진 보물이 되었다.

 

#4) 사실 나는 다쿠미 선생의 조선 도자와 민예품에 관한 애정과 공헌보다도 그의 휴머니즘과 임업관리로서 한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릴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있었는데, 또 길어졌다.

다꾸미 선생의 1917부터 1931년까지 조선에서 18년간의 생을 마감 할 때까지 임엄시험, 조사 탁월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17 ;잎갈나무 의 양묘 성공보고, 꽃개오동나무 식재 실험.

1919 ; 조선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木名木誌)발간 나는 이 책을 1980년대에 국립도서관에서 특별 관외 대출로 읽은 적이 있음. 국내 유일본, 뒤에 마을숲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줌. 수묘양묘지침 제1호 발간,

1924 ; 노천 매장법 발견. 세계적인 잣나무 묘목생산 기술. 지금도 한국은 물론 미국까지 이용됨.

1925 ; 우리나라 싸리나무 종류 분류.

1926 ; 임목종자 발아촉진법 개발. 조선산 주요수목분포 및 적지 발표. 묘포비료로서의 퇴비에 관한 연구 발표.

1927 ; 민둥산(禿山) 이용에 관한 연구 발표.

 

#5) 그는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조선말을 먼저 익혔으며 우리 옷을 입고 우리식 집에서 우리 음식을 좋아 했고 우리의 젊은이들을 위해 봉급으로 학비를 보태고 조선 사람을 사랑하고 조선의 민속을 존중했고 조선을 위해 산을 푸르게 하는 데 전념 했고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사람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그를 하늘은 그냥두지 않았다.1931.4.2. 그 며칠 전에도 전국을 돌며 강연이다 종자 수집이다. 도자기 가마터 발굴이다. 조선 땅을 종횡으로 누빈 탓에 과로했다. 그리고 다음날 있을 식수 기념행사 준비로 악화, 가벼운 감기로 생각했으나 폐렴으로 번져 책임이 있다을 유언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우리 바지저고리을 수의로 입고 우리식 상여로 장례를 치루는 당일 비가내린 가운데 임업시험장 정문 앞에 발인이 있었다. 이 때 그의 도움과 감화 입은 조선 사람 젊은 이 40여명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다투었다고 하며. 인근 주민. 비구니 절 여승까지 통곡하는 속에 이문동 공동묘지로 상여가 갔다고 한다. 그 후 이문동 묘지가 도시 개발로 도로가 나고 주택이 들어서서 묘지를 지금 망우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로 옮겨 갔고 임업시험장에 전설처럼 남은 이 다쿠미의 뜻을 기리는 전 현직 직원들이 성금을 모와 묘를 손보고 다시 비석을 세웠다. 한편 다쿠미의 고향에서도 이 두형제의 기념관이 생기고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정신대 문제 등등 첨예한 껄끄러운 문제를 완화하고 서로 이해하고 가까운 나라로서 교류하는 데 이런 사람도 있었음을 상기하는 예로서 그 뜻을 선양하는 모임도 생기고 추모의 모임도 생겨 활발히 그 뜻 살리는 운동이 진행 중이다. 이 마당에 우리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우리나라 인공조림의 74%가 이 다쿠미의 공적이다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간 우리는 가장 짧은 기간 안에 녹화사업이 성공한 나라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이런 우리가 몰랐던 다쿠미같은 사람의 땀과 노력이 있었다는데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6) 아사카와 다쿠미- 가까이 갈수록 참 매력 있는 사람이다. 존경심이 가는 분.

이 다쿠미 선생을 더 아시려면

,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타카사키 소지 지음. 김순희 옮김. 효형출판사.2005년에 출판됐으나 절판, 잘하면 구할 수도 있음.

다쿠미의 일생을 소설화 한 책 백자의 나라에 살다미에야 다카유키 지음, 박종균 옮김 비매품. 인터넷 헌책방 뒤지면 만날 가능성 있음이 책 백자의 나라에 살다는 현제 한일 합작으로 영화 촬영 완료, 늦가을에 상영 예정임. 한국배우 이 청림 역에 배수빈이 나옴.

민속 민예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쿠미 저 소선의 소반 과 조선도자명고학고재 편 을 구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도 현재는 절판됨.

다시 한 번, 다쿠미 선생은 일본사람이나. 우리나라 강산을 푸르게 한 은인이며. 우리의 도자문화을 보호 선양한 공로자. 그리고 홍릉 수목원에 있는 그 119된 아름답고 포근한 그 소나무를 손수 심으신 분이라는 걸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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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아는 한국인으로서 그 시절 한국에서 살았던 일본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는 것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 알게 되기 전 사실은 절반 정도 거부감을 안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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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 ‘사색의 길’에는 한국인의 손에 의해 보존되어온 일본인 묘가 있다. 묘비명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혔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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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의 주인공은 일제 강점기 임업시험소 용원으로 조선에 파견됐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1931.4)이다. 그는 사실상 조선 목재 수탈을 지원했던 기관인 총독부 산림과 직원이었으나 일본인이 민둥으로 만들어버린 산야에 열성으로 나무를 심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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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본이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버릴 계획을 세우자 유명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함께 일본 월간지(개조)에 반대기고문을 발표해 열렬히 반대했는가 하면, 3.1운동과 동경대지진 때 무고한 조선인이 살상당할 때에도 이를 당당히 규탄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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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가 조선땅에 온 것은 1914년 24세의 나이였다. 당시 대다수가 서부 일본에서 건너왔던 것과 달리 그는 도쿄 근처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출신이다. 36년 동안이나 지속된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이 겪었던 차별과 굴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조선인이라면 산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도 잡혀가던 당시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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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목재 수탈에 반감 안고 나무심기에 열성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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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아사카와 다쿠미가 일했던 총독부 산하 산림과는 사실상 목재 수탈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의 조만제 회장(87)은 “산림과에서 산림 조성이 아니라 오히려 수탈을 돕는 것에 반감이 생겼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산감’으로 불리던 산림 관리원에 헌병, 경찰처럼 형사권이 주어졌고, 이들이 조선인에게 발길질도 흔하게 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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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이 한일합방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은 조선 임야의 나무를 베어낸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제지회사였던 ‘왕자제지’에 공급된 펄프 대부분이 조선의 나무에서 나왔다”고 조 회장은 증언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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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은 “일본인들은 백두산에서 수백년 된 나무들을 베어서 뗏목에 싣고 압록강을 거쳐 신의주로 내려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실 식민지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산야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수탈하는 일이었을 게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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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산림과의 행태를 지켜보던 다쿠미는 비어버린 야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싸리나무와 아카시아나무를 골라 심었는데 덕분에 지금 전국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 됐다. 그가 아카시아나무와 싸리나무를 선택한 이유는 빨리 자라고 뿌리가 잘 뻗는 특성이 있어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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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는 지금의 광릉수목원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수목원을 계획하고 이곳에 심을 수종도 직접 골랐다. 전국을 다니며 지역에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하기를 거듭한 결과 지금 한국의 인공림 37%는 다쿠미가 공을 들인 나무라고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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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쿠미는 또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전까지 한국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

1859?    부친 오비 사뇨쿠(후에 아사카와 가문을 잇다) 출생
1865     모친 치노 케이 출생
1884. 8  형 노리타카 출생
1887. 12 누나 사카에 출생
1889. 3  야나기 무네요시 출생
1890. 7  부친 사망
1991. 1  야마나시현 기타고마군 가부토촌(현 호쿠토시 다카네정)에서 다쿠미 출생
1897. 4  무라야마니시심상소학교(村山西尋常小學校)입학
1901. 4  무라야마시심상고등소학교 입학
1903. 4  노리타카 야마나시현사범학교 입학
1907. 4  야마나시현립농림학교 입학 - 산림 임학
      6  고후감리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 기도와 명상 마음 다스리기
1910. 8  아카타현오오다테영림서(秋田縣大館營林署)에 취직
      8  일본이 한국 국권 침탈(병탄)
1913. 5  노리타카 한국에 옴(남대문소학교 미술교사 조각)- 조선 도자기(백자)의 신, 광복 후 미군정 부탁으로 도자기 정리 후 1년 늦게 귀국
1914. 5  다쿠미 한국에 옴
      9  조선총독부 산림과 고원(雇員)으로 취직. 노리타카 결혼
1915. 12 노리타카와 함께 아비코(我孫子)의 야나기를 방문
1916. 2  아사카와 미쓰에와 결혼
      9  야나기가 한국에 와 다쿠미 집에 머뭄 - 한국의 미 비애의 미, 다쿠미 멋 흥취 가락으로 봄
1917. 3  장녀 소노에 출생
      6  「조선 잎갈나무의 양묘 성공을 보고함」 발표
      8  『수묘양성지침(樹苗養成指針) 제1집』 출판
1919. 3  3.1독립운동
      4  『조선노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 출판 - 천연기념물 지정 기준
1920. 5  야나기가 한국으로 와서 청화백자진사연꽃무늬항아리와 만남
      6  인도인 싱이 방문
     12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운동 시작
1921. 4  아카바네 고로우가 한국으로 이주
      6  야나기 부부 한국 방문
      7  아루가 기자에몬(有賀喜左衛門)이 방문
      8  야나기 일행과 후쿠나가 마사지로우 방문
      9  미쓰에 사망. 장녀 소노에를 고향의 처남 아사카와 마사토시에게 맡김
     11  야나기와 서양회화 전람회 개최
1922. 1  일기를 쓰기 시작. 사방식재를 둘러싼 장장(場長)과 대립(일기)
         야나기와 관악산 가마터 조사. 「브레이크 전람회」 개최. 야나기와 남궁벽 성묘 - 페허 동인과 교류 청량사 정릉천 피서 차 한 잔
      2  청량리로 이사
      4  노리타카 한국으로 돌아옴
      6  하마구치 요시미쓰 한국으로 이주. 조선신궁(중앙청) 건설. 광화문 철거 비판(일기) - 동아일보 김성수 정원수 장덕수 주필
      8  고원(雇員)에서 기수(技手)로 승진. 오우지(王子) 제지를 비판(일기)
      9  「가마터 순례의 하루」 발표. 야나기와 분원 가마터 조사 - 전국 도요지 700여 곳 답사 정리, 도자기업계서는 중시조로 여김
     10  「조선도자기전람회」 개최
1923. 9  관동대지진. 도쿄 등 계엄령. 조선인 학살을 비판(일기) 재일한국인 오충공감독 제노사이드 불하된 조선인 숨겨진 손톱자국 석남 송석하 태허 유상규 죽산 조봉암 영랑 김윤식 소파 방정환. 김소월 초혼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 저항시 김영랑 저항시 등 
         도미모토 겐키치 다쿠미 집에 머뭄
     10  「부업공진회」 비판
     11  야나기 한국 방문
     12  창작소설 「숭」 집필
1924. 1  야나기와 고후 여행. 모쿠지키불상(木喰仏)과 만남
      2  창작소설 「뇌산소과(雷山小過」 집필
      3  「묘포 담당의 벗에게 보내다」 발표
         노천매장법 발견 잣나무 37% 산림녹화 - 한국인 노동자들의 대화를 듣고 실시함.
      4  조선민족미술관 설립(경복궁 집경당) 민족 고집, 야나기 부인 최초 소프라노 음악회
     12  계룡산 강진 가마터 조사
1925. 3  「싸리나무의 종류」 발표-
      4  모쿠지키불상사진전 개최
      5  「가마터 순례여행을 마치고」 발표
      7  단바의 모쿠지키불상 조사. 오키타 사쿠와 재혼
1926. 6  「주요 임목 종자의 발아 촉진에 관한 실험」 발표
     10  「조선산 주요 수목 분포 및 적지(適地)」 「묘포 비료로서 퇴비에 관해서」 발표
     11  차녀 태어났으나 곧 사망
1927. 4  분원가마터 조사
      7  「민둥산의 이용 문제에 관해서」 발표
     12  「분원가마터고찰」 발표
1928. 7  「조선의 그릇 및 그 용도」에 관한 강연. 다쿠미 집에서 『새로운 마을』 회원 모집
      8  계룡산 가마터 조사
1929. 3  『조선의 소반』 출판
      4  야나기와 마지막으로 만남
1930. 2  「조선의 선반과 장롱류에 관해서」 발표
         이 무렵 「조선 고가마터 조사경과보고」 집필
     12  조선공예회 개최
1931. 4  다쿠미 사망/장례식/ 유고「조선 고가마터 조사경과보고」
         아베 요시시게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하다」 발표 - 문부상, 전후 일본 중학교 교과서 15년 동안 '인간의 가치'로 수록 동강 하정웅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및 세계시민학교 기틀)
      5  유고 「조선다완」 발표
         야나기가 「편자부기」 「편집여록」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를 추도(『공예』)
      7  유고 「조선 요업 진흥에 관한 의견」 발표
      9  유저 『조선도자명고』 출판
1932. 3  유저 『주요 수묘에 관한 비료 3요소 실험』 출판
1934. 3  『공예』 아사카와 다쿠미 기념호 발행. 유고 「김해」 「조선의 절임(김치 등)」 발표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의 고향과 할아버지」
         아사카와 마사토시 「고인이 된 다쿠미군에 대해서」
         하마구치 요시미쓰 「다쿠미 씨와 나」
         도이 하마이치 「다쿠미 씨와 여승」
         나카이 다케노신 「아사카와 다무미군에게」
         최복현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추억」
         야나기 무네요시 「아사카와에 대해서」 「동인잡록」
      8  아베 요시시게 「인간의 가치」가 교과서에 게재
1937. 4  7주기
      8  모친 케이 씨 사망
1945. 9  노리타카 다쿠미의 일기 김성진 씨에게 맡김
      12 사쿠와 소노에 일본으로 귀국
1946. 11 노리타카 일본으로 귀국
1947. 3  사쿠와 소노에가 일본민예관에 취직
1961. 5  야나기 무네요시 사망
1964. 1  노리타카 사망
1966. 6  「아사카와 다쿠미 공덕비」 건립(망우리 묘지)
1976. 10 사쿠 사망
      11 소노에 사망
1977. 3  야마나시현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에 묘지 건립
1982. 7  다카사키 소지가 평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소후칸) 출판
1984. 8  한국임업시험장 유지(홍림회)들이 망우리 다쿠미 묘지 앞에 기념비 설립
1991. 3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에 「탄생의 땅」 비석을 세움
1994. 5  망우리 산소 기념비를 새로 세움
1996. 2  김성진 씨가 다쿠미 일기를 다카네정(현 호쿠토시 다카네정)에 기증
      6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를 그리는 모임」 결성
     11  『아사카와 다쿠미 전집』(소후칸) 출판
1997. 5  『예술신조(藝術新潮)에 아사카와 형제 특집
     11  아사카와 다쿠미 한일합동추모제 개최
2001. 7  야마나시현 다카네정(현 호쿠토시시 다카네정)에 아사카와 노리타가 다쿠미 형제 자료관 개관
2003. 7  아사카와 다쿠미 저 다카사키 소지 편 『조선민예론집』(이와나미문고) 출판
2005. 11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조선의 흙이 되다』 다카사키 소지 저 | 김순희 역 한국어판 출판
2011. 9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학술대회 개최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부키) 출판
2012. 7  영화 『백자의 사람-한국의 흙이 되다』 상영
2014. 3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와 서간』 한국어판 출판
2014. 10 아사카와 다쿠미 묘 재정비
2015. 4.2  아사카와 다쿠미 84주기 추모제


한국 : 홍림회(산림과학원 모임). 서울시국제문화교류회(서울시공무원 모임). 기요사토 긴자쥬쿠(靑里銀河塾) 운영(2015년 12회 일본에서 운영. 하정웅 수림문화 재단 이사장-홍릉 산림과학원 앞 리모델링 후 한국청리은하숙을 운영할 예정).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고 조재명, 현 회장 조만제), 서울국제친선협회(회장 이순주). 망우리묘지공원 저명인사 탐구 및 답사반(교사 정종배), 중랑문화연구소(소장 남화창), 이수현의인문화재단설립위원회(회장 강지원변호사)

일본측 :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기리는 모임(시노부카아-아사카와형제들 고향사람들) 회보 발행

2015.4. 2 정종배


2015.10 제1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설- 주최 수림문화재단 주관 중랑문화연구원

2016.4 아사카와 다쿠미 85주기 추모제 및 제2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학식 

2016.6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참가(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학생 5 교사 4)

2016.9 대향 이중섭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 사생대회

2016.11 제2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종업식 및 윤동주 탄생 100주년 시낭송대회 개최

2017. 2 일본 릿쿄대학교 윤동주 시낭송회 참가(학생 2 교사 2)

2017.4  아사카와 다쿠미 86주기 추모식(서울친선협회,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및 제3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학식

2017.6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참가(학생 5명 교사 5명)

2017.9  재일한국인 영화감독 오충공 제노사이드 촬영(1923년 관동대진재 - 아사카와 다쿠미, 송석하, 조봉암, 유상규, 방정환)

2017.11 제3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종업식 및 윤동주 시낭대회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