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어머니와 주일미사

정종배 2020. 2. 13. 14:20

주말편지 정종배(베드로) 시인

 

어머니와 주일미사

 

국민학교 입학 직전 2월 마지막 주일 아픈 엄마 손을 잡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전라남도 함평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국민학교 2학년 겨울방학 첫영성체 교리교육을 받았다. 고향인 전남 함평 마산리 표산 집에서 함평읍은 거리로 10여리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중간에 해찰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도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읍내 성당 가는 길목인 향교국민학교 앞 길섶의 천연기념물 제108호인 줄나무 숲 터널을 통과했다. 아름다운 나무와 숲 향기에 젖어 성당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거나 싫증나지 않았다.

당시 주일미사 성체 모시기 전, 고백성사는 의무였다. 죄 지은 게 없는데 고백소 앞에서 무릎 꿇고 고민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리저리 어린소견 궁리하다. 삼형제 앉혀 놓고 형제간에 다투거나 할머니 아버지 맘 상하시게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며, 외가에서 치료중인 엄마의 말씀을 어겼다고 거짓으로 고백했다. 매주 하나씩 돌려가며 죄를 고백하는 대죄(?)를 범했다. 그 죄가 두고두고 내 삶과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미국 지부 한신부님은 미사 후 사제관에서 어린이들을 살폈다. 추운 날씨에도 미사를 빠트리지 않아 대견하다며 의자에 앉히고 언 몸을 녹여주려 발바닥을 문질렸다. 구멍 난 양말을 보고 구호품인 미제 양발 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한 주 동안 생활을 물어보며 칭찬을 주로 했다. 나에게는 어머니 병환의 상태를 자주 물었다. 지금도 발음은 어색했지만 머리에 남아있는 신부님의 말씀은

그래요. 할머니 아버지 말씀 잘 듣고 형제간에 잘 지내야. 어머니 병 빨리 나아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제 과자, 쵸코렛, 통조림, 껌 등을 받았다. 한 보따리 품에 안고 20리길을 줄달음쳐 감방산 너머 도산 외갓집에 도착했다. 곧바로 엄마 앞에 펼쳐 놓고 얼른 집에 가자고 조르며 떼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로 부끄럽고 한심한 짓이었다. 그 못난 짓거리도 반세기 넘어 이제 추억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몰래 외갓집 작은방에서 어머니의 성치 못한 몸으로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과 메마른 품안의 온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머니 무병이 심하였을 때, 무당을 불러와 굿을 했다. 우리 집 큰방 삼면에 떡시루와 촛불이 즐비했다. 친척들이 대나무를 붙잡고 돌아가신 어른들의 목소리로 공수하는 모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고향은 80여 호 집성촌이라 동네 분위기가 보수적이고 완고했다. 가문과 외가와 자식들에게 무당의 멍에를 씌우지 않으려는 어머니가 내림굿을 거부할수록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백방으로 용하다는 한의원과 병원을 다녀 봐도 차도가 없었다. 외가에 가면 그런대로 일상적인 생활인으로 돌아왔다.

학다리중앙국민학교 입학 전 1, 2학년 봄방학 전까지 3년 넘게 외가에서 간병했다. 그 사이 식구들이 함평읍내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점점 나아졌다. 2학년 봄방학 시작하는 날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손에 들고 힘없이 대문을 들어섰다.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고모 집에 갔다. 베틀에 앉아 있는 이는 누구일까? 방문을 활짝 열었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계셨다. 오매 좋아라!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어머니를 맞이했다.

어머니 묵주기도 끊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골골 팔십을 거뜬히 넘기시고 여든 셋, 201324일 운명하셨다. 기도 속에 어머니 마지막 함박웃음 되새기며, 신앙인으로 벗어나거나 주일미사 건너뛰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간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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