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독립운동가 김춘배 정춘산

정종배 2020. 4. 21. 10:17

 

 

 

 

 

 

 

 

 

 

 

 

 

 

 

 

독립운동가 김춘배 정춘산/정종배

 

김춘배(金春培.1904.2.29.∼1946.12.1.)

 

2020년 4월 18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이 단톡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망우리공원 답사 중 찾아 찍은 묘비와 묘역이었다.

 

묘비 앞면 河東鄭公春山之墓

 

묘비 옆면 원적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향봉동 367번지 독립운동 옥살이 후유증으로 돌아가심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시즌(2) 단체 카톡 채팅 방에 김춘배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가 뜨겁게 올라왔다.

 

먼저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공자정보

관리번호133

성명 김춘배

한자 金春培

이명 金相培, 金尙培, 金吉同, 鄭春山, 韓仲海,金相培,金尙培

성별 남

생년월일 1906-02-29

사망년월일 1942-07-08

본적 전라북도 완주 삼례읍 삼례리 1385번지

주소 咸南 北靑 新昌 新昌

 

포상정보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1927년 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정의부(正義府) 부대에 가담하여 권총 2정과 실탄 17발로 무장한 뒤 6차에 걸쳐 자산가를 역방하며 무장항일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간도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영사관 소속의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에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7월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나 재차 붙잡히는 바람에 징역 1년 10개월이란 기간이 가중되어 모두 8년의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에야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1934년 10월 3일 함남 북청군(北靑郡) 양북면(陽北面) 신창(新昌)에 소재한 경찰주재소의 무기고를 단신으로 공격하여 파괴하고 권총 2정과 실탄 100발 및 장총 6정과 동 실탄 600발을 탈취한 후 일경·자경단원(自警團員) 등 2만여 명이 동원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일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한 2명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맹렬한 활동을 펴다가 19일이 지난 1934년 10월 22일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주거침입과 절도·강도·살인미수 그리고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동년 12월 초에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가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朝鮮日報(1934. 10. 22, 12. 13)

東亞日報(1934. 10. 22, 11. 2, 11. 12, 11. 17, 11. 27, 11. 30)

 

독립운동가. 별명은 상배(相倍)⋅상배(尙培)⋅길동(吉同)⋅정춘산(鄭春山)⋅한중해(韓仲海). 함경북도 경흥 출신. 그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시기는 1927년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던 때로 1934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다음 시기는 1934년의 의열투쟁인데, 이로 인해 광복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보내었다.

 

그는 1927년 2월 중국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서 정의부에 가맹하고, 6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천보산분서(天寶山分署)에 붙잡혀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8년 7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10월이 가중되어, 투옥된 지 8년 만인 1934년 5월 14일 출옥하였다.

 

그 해 10월 2일 밤 11시부터 다음날인 3일 새벽 2시 사이에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경찰주재소의 무기고를 단신으로 파괴하고, 권총 2정(26식)과 실탄 100발, 기관총(38식) 5정과 실탄 600발, 단식 보병총 1정 등을 빼앗았다. 18일 동안이나 포위망을 피하는 과정에서 신출귀몰한 변장술을 구사하고, 대담한 결투를 벌였으며, 특히 그 과정에서 일인 순사부장을 비롯한 경관 2명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진발 서울행 열차로 남하하다 10월 20일 신북청역에서 붙잡혔다.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과 절도, 강도 및 살인미수, 공무집행방해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가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옥중생활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이명(異名)은 길동(吉同)⋅정춘산(鄭春山)⋅한중해(韓仲海). 함경북도 경흥(慶興) 사람이다.

 

1927년 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정의부(正義府) 부대에 가담하여 권총 2정과 실탄 17발로 무장한 뒤 6차에 걸쳐 자산가를 역방하며 무장항일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간도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영사관 소속의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이에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7월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나 재차 피체됨으로써 징역 1년 10개월이란 기간이 가중되어 모두 8년의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에야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1934년 10월 3일 함남 북청군(北靑郡) 양북면(陽北面) 신창(新昌)에 소재한 경찰주재소의 무기고를 단신으로 공격하여 파괴하고 권총 2정과 실탄 100발 및 장총 6정과 동 실탄 600발을 탈취한 후 일경·자경단원(自警團員) 등 2만여 명이 동원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일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한 2명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맹렬한 활동을 펴다가 19일이 지난 1934년 10월 22일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게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주거침입과 절도⋅강도⋅살인미수 그리고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동년 12월 초에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가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대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크리스천 독립운동가 김춘배

박세홍 지역기자

승인 2018.08.15 08:00

 

가산을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가문

ㅡ 형 김성배 목사 등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

 

독립운동가 김춘배보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김헌식 영수를 먼저 소개해야겠다. 김헌식 영수는 1902년 한국에 온 맥쿠첸(McCutchen; 한국명:마로덕)선교사에게 이듬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삼례제일교회 초대 영수가 되었고, 1907년 봄에는 교인이 100여 명가량 늘어 김헌식의 사랑채에서 예배드렸다. 김헌식의 아들인 김창언은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인의 갖은 행패를 참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1918년 토지를 처분하여 머슴들에게 나누어주고 53명의 가족이 만주 용정 천보산으로 떠났다. 만주에서 나라 잃은 설움이 짙어졌고, 슬하의 5형제는 이후 독립군 홍범도이 이끄는 부대 등 여러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34. 5. 15 김춘배가 8년 형기를 마치고 만주에서 가족사진 윗줄 왼쪽부터 김성배 목사, 김춘배, 앞줄 오른쪽이 외아들 김종수 장로(당시 8세)

 

먼저 독립군 활동을 했던 이가 김창헌의 큰아들 김성배다. 김성배는 독립군의 무기를 구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오면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의약품이 변변치 못할 때라 민간요법으로 치료하여 많은 고생을 했다. 김성배는 이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상해에서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잠시 의원을 운영했지만 삼례제일교회 장로들의 간청으로 1948년 삼례제일교회에 부임하게 되어 목회했다. 이후 목포양동교회, 광주서석교회, 전주중부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자녀들을 따라 미국에서 소천했다.

 

김헌식의 둘째 아들이 바로 김춘배다. 김춘배는 1905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태어났다. 삼례제일교회에서 세운 영신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 갔다. 만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춘배는 관통상을 입고 공부하러 떠난 형님을 보며, 형님 대신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이청천 장군이 조직한 정의부대에 가담했다. 아버지의 포목상에서 광목을 팔러 나가겠다고 하고, 수십 필의 말 달구지에 싣고 그대로 독립군에 가입했다. 가져온 광목으로 독립군 군복을 공급했고, 그때가 1925년, 그의 나이가 20세에 불과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호외기사 사본

 

이듬해 1926년, 김춘배는 만주 용정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 김춘배를 잡지 못한 일본군은 집안 친척을 고문하고 협박하여 결국 김춘배의 자수를 받아낸다. 김춘배는 6년형을 받고 청진 형무소에 갇혔고, 탈옥의 죄가 더해져, 만 8년만인 1936년에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당시 형 김성배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고, 김춘배의 아내 전명숙과 외아들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아내는 명태 내장을 제거하는 일을 하면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형무소에서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신창읍교회 교인의 주선으로 양복점에서 잠시 일했다.

 

김춘배의 독립심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36년 10월 2일 거사를 치렀다. 신창주재소(치안센터) 무기고를 털어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800발을 탈취했고, 무기들을 신창읍교회 강대상 아래에 숨겼다. 그곳은 평소 성탄절 기물을 넣어두는 장소로 일 년에 한 번밖에 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김춘배는 이후 북청어업조합을 습격해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약 19일간의 도망다니면서 김춘배를 잡으려고 일본 경찰 병력 2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2만 원(당시 쌀 한 가마 : 8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19일 가량을 도망 다닌 후, 한국 청년의 밀고로 신창역 부근에서 잡히게 되었다. 이 일이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단독 호외로 소개될 만큼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조선일보는 삼례에서 김춘배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김춘배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이 사건에 얽혀 지목되고 조사된 사람이 많았다. 대다수가 신창읍교회 교인이었다. 김태선 집사, 이명하 교회간부, 김윤식 집사(양복동업자), 손시라 전도부인, 장인실 유치원 교사들이 조사를 받았다. 이 일을 김춘배 혼자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고문하고 회유해도 공범자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예수님처럼 홀로 짐을 짊어지겠다는 각오로 입을 다물었다. 그 해 11월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지만, 아내는 죽었고, 아들은 어려 그를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해방 이듬해 12월 1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길거리에서 숨을 거뒀다. 망우리 공동묘지 한구석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광복 73주년을 맞이하여 도서출판 흔적에서 ‘독립운동가 김춘배(이승철, 김경근 엮음)’라는 단행본을 냈다. 잊혀진 크리스찬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다시 조명하며 선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발행인 정복량 목사는 말했다.(가스펠투데이)

 

2019년 2월 20일 대전현충원 위폐 봉안하다.

 

독립운동가 김춘배 일명 정춘산 생애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철수 시인 김영식 작가 김금호 국장 필자 등 모든 채널과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찾아 헤맸지만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가 김춘배 손자임을 확인했다. 망우리공원 정춘산 묘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어렴풋이 망우리에 묻혀계신다는 말로 기억되지만, 할아버지 묘지가 망우리공원에 있다는 것으로 매우 당혹스러워 서울에 회의 차 올라오면 필자와 만나 묘지를 확인하기로 하였다.

 

대전 현충원에 위패 봉안 시기가 2019년 2월 20일로 확인되었다. 김경근 목사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필자와 한 시인 김 작가 김 국장 모두 김춘배 독립운동가의 신출귀몰한 삶의 길을 추적하는 통로가 막혀 답답하지만 흥미가 더욱 배가됐다.

 

하지만 위패 봉안 김경근 목사 형님이 동생과 소통 없이 유해 없는 위패로 대전 현충원에 봉안을 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망우리공원 사무실에 문의하여 묘비의 망자와 후손들 이름으로 묘지관리대장 컴퓨터프로그램에 입력하여 찾았으나,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묘비를 세우면서 쓴 도구가 상석 아래에서 나왔다. 묘비를 세운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묘비번호가 나왔다. 묘비번호로 찾았으나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 후손과 통화하였는데 20여 년 전 망우산 능선 너머 조봉암 선생 묘역 근처로 이장을 했다는 것이다.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오후 2시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가 망우리공원 하동정공춘산지묘 묘비와 봉분을 확인하려 올라와 필자도 동참하기로 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도 함께 하여 의문을 조금이라도 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손자인 김경근 목사가 한 시간 앞 당겨

오후 1시에 망우리공원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금호 국장 맹강주 주무관 동행하여

김 목사님 차로 이동하여 넷이서 묘지를 찾았다

장덕수 묘역에서 동락정 방향 사색의 길 굽이돌아

길 아래로 내려가 50미터 지점에서 좌측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묘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마침 옆 묘역에서 산제를 모시고 있었다

김국장이 옆 산소에 대해 물었으나

한 번도 함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묘지번호 나타나 희망의 끈을 이어갔다

김경근 목사와 대화를 정리하면

 

김춘배 의사 가계 독립운동 명가로

조부와 아버지 5형제 후손들

중국 북한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김춘배 의거를 김일성 일대기 초판에

만보산 사건의 모델이라 하여 남쪽 후손들 연좌제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초기기독교 공동생산 분배를 주장하였다는 신문 기사 한 줄에 서훈이 늦어졌다

 

완주 삼례에서 기념관 건립과 교육 등을 계획하고 있는데

망우리공원 묘역이 김춘배 독립지사이길 바라며

 

망우리 묘비 이름으로 경찰의 신혼조회 방법을 이용하는 방법과

묘지 관리인을 찾아 후손들과 연락을 하고 있는지가

연결 고리로 찾아 보기로 약속했다

 

사무실에서 새로 나온 묘지 번호

해당 묘지가 등록되지 않았다

묘적부를 셋이 앉아 뒤적였으나 찾지를 못했다

 

김목사님 차로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회관 안 까페에서 쑥라떼 마시며

이야기른 나누었다

 

4월 29일 중랑구청

용역보고회 때 전수조사 필요성을 역설하여

망우리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지 싶다

 

현충원으로 이장한 독립운동가 김정규 묘지 터를

지도에서 추정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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