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음악인 함이영

정종배 2020. 5. 26. 19:47

음악인 함이영(咸二榮, 1915~1957)

 

우리나라꽃

작사 박종오 / 작곡 함이영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2015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망우리공원 음악인 함이영 묘비를 찾았다.

 

국립현충원으로 1993년 이장한 독립운동가이며 영화 <아리랑>의 춘사 나운규 망우리공원 묘지 터를 찾으려 올랐다. 춘사의 묘지를 현충원으로 이장하며 묘비를 묻고 갔다. 그 묘비를 찾아 다시 세워 독립운동의 노고를 후인들이 찾아와 정신을 배우고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여름 땀을 흘리며 수고했다.

 

망우리공원에서 현충원으로 이장하며 묘비를 묻고 간 독립운동가는 김영랑 조종완 김사국 나운규 등이다. 서훈은 받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시인 김동명 합장한 아내 비석도 묻혀있다.

 

이장한 묘지 터는 거의 다 그 장소를 찾았다. 중랑구청이나 서울시 예산으로 묘비를 찾아 세워 학생들의 나라사랑 교육현장으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인철 목사는 아사카와 노리다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환영회에서 기도를 맡았다. 다쿠미 선생이 감리교회 신앙인으로 살았다. 그 인연으로 망우리공원 답사하며 음악인 함이영 묘비를 찾았다.

 

고등학교 동기인 이인철 목사와 중랑문화연구소 이수종 상임이사 그리고 중랑재미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올라 주변 묘지번호 확인하며 찾아나갔다. 아이들이 훨씬 빠르게 묘지 번호를 찾아 접근해 갔다.

그 동안 이인철 목사는 조금 위로 올라 위치를 추정하여 찾아 내려왔다. 이인철 목사가 여기 음악인 함이영 묘비가 있다며 나를 불렀다. 올라가 확인하니 묘지는 이장하고 묘비만 남아 있었다.

핸드폰으로 인물을 찾아보았다. 동요 <우리나라 꽃> 작곡가로 확인됐다.

 

그 날 이후 함이영 작곡가의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2020. 2. 27일 오후 5시 27분 비로소 함이영 작곡가 큰 따님 함천혜 여사님과 연결되었다. 핸드폰으로 한 시간 넘게 통화했다.

 

자료를 뒤지다 경상대 음악교육학과 조성환 조옥환 교수의 대담 기록을 찾았다. 두 분은 남매로 어릴 적 큰 이모부인 함이영 작곡가 집을 자주 갔다. 이모부 격려와 이모와 이종사촌들의 음악적 분위기에 음악인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경상대학 교학처로 전화했다. 음악교육학과 학과로 전화를 몇 번 했으나 연락 두절이었다. 특별히 급한 일을 아니라 뒤로 미뤄두었다. 올 겨울 방학 시작하면서 음악교육학과 출신으로 작곡가 김용환 선생님과 연결되었다. 아쉽게도 핸드폰 전화번호를 다 날려 연락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시 시도하여 정성환 조교와 연결되었다. 조성환 교수님은 정년퇴임하신 뒤 작고하셨고. 조옥환 교수님도 정년퇴직하여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 찾은 이유를 확인하고 연락하기로 약속했다.

 

2020년 8월 이전에 망우리공원 답사기 책을 내기로 작정하고 방학 중에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학교 공사로 교무실은 전면 사용할 수 없다. 이문동 서고 겸 서재는 반 지하이고 지난여름 역류하여 물이 찬 뒤라 냄새와 습기문제로 오래 있긴 어렵다.

집에 앉아 자료 정리하고 쓰기로 작정하고 한 분 한 분 이어갔다. 호흡이 길지 못하고 얕은 식견으로 당대 최고 최초 인물들의 삶과 작품 및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펼쳐놓고 끊고 맺기가 쉽지 않다. 4년 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인 목의 통증이 재발하여 한 곳을 20분 이상 집중하기도 어렵다.

 

함이영 작곡가는 2남 1녀 중 가운데 둘째로 1915년 부산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를 수료하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원산사범학교를 거쳐 창덕여고 음악교사로 근무하다 6.25전쟁 부산으로 피난을 가, 부산여고에 근무하며 교가를 작곡해 현재도 부르고 있다. 종전 후 숙명여고 음악교사로 부임했다. 숙명여고 운동부 응원가를 작곡해 사랑을 받았다. 농구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이 들썩일 정도로 흥겨운 응원가를 작곡해 선물했다.

 

제일고녀 출신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하여 인왕산 아래 서촌 누하동에 살았다. 딸을 내리 여섯 낳고 막내로 아들을 얻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여섯 째 딸의 이름을 ‘복순’이라 지었다.

 

집에는 음악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작곡가 금수현 조상현 선생이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조상현 선생은 함이영 부부의 중매로 결혼했다.

 

효자동 전차 종점 근처 전후 음악교과서 유일한 출판하는 국민음악연구회 이강명 사장과 함이영 작곡가는 교류하였다. 큰 따님 함천혜 여사 기억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출판사 사장실에 간 기억을 뚜렷하게 전하고 있다.

 

1957년 8월 25일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뇌출혈로 43세 아까운 나이로 운명했다. 큰 딸 천혜가 14살 막내아들이 2살 일곱 명의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어찌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8월 27일 망우리공원 평산 신씨 선산를 지나 지금의 돌산공원 위에 유택을 마련했다. 묘지 번호 0728014는 1991년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며 부여했다. 1966년 춘사 나운규 영화인의 묘지가 함이영 음악인 묘역 아래 자리 잡았다. 함천혜 여사는 가족과 성묘할 때 보았던 묘비가 크고 멋진 춘사의 넓은 유택을 기억하고 있다.

 

함이영 작곡가의 부인 최구자 여사가 1993년 5월 18일 75세 일기로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며 이장하여 합장했다. 이장은 이모부인 함이영 작곡가의 영향으로 음악을 하게 됐다는 처조카인, 당시 경상대 음대 조성환 교수가 주도하였다. 조성환 교수도 정년하고 얼마 되지 않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맏이인 천혜는 숙명여중 2학년으로 아버지를 여의였다. 숙명여중 여고 선생님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최구자 여사는 일곱 자녀를 초등학교 교사와 피아노 레슨으로 꿋꿋하게 생활하며 가정을 지키며,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줬다. 6녀 1남의 자녀들의 근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함천혜(76)는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했다. KBS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로 38년 활동했다. 제1바이올린리스트로 2005년 정년을 맞은 경우는 처음이다. 아들과 딸은 외국계 회사 한국인 지사장을 맡아 일에 매진하고 있다.

 

둘째 함순혜(74)는 홍익대 미대 출신이다.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자녀 둘을 둬 건실한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

 

셋째 함영혜(73)는 한양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했다. 어린이 바이올린 사사하며 지금도 꼬마선생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남편은 스틀스부르그 국립극장 전속 가수로 활동한 국민대 음대 이승목 교수이다.

 

넷째 함혜경(70)은 서울대 음대 피아노 전공했다. 캐나다 이민을 가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다.

 

다섯째 함순자(68) 딸 중에 유일하게 음악을 하지 않고 사회사업학과 전공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여섯째 함복순(66) 서울대 피아노 전공으로 후학을 가르치고, 딸인 최유진이 바이올린연주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곱째 함승우(64)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음악을 공부하지 않고 전자공학을 전공하여 전자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며 교회 관련 예술도서를 출간하고 있다.

 

묘지 번호 0728014 1957년 8월 27일 망우리공동묘지 안장했다. 1993년 5월 18일 천안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함이영 선생님의 큰 따님 함천혜 선생이 카톡으로 김구용 시인의 수필 한 편을 보내 여기에 올린다.

이 수필은 함이영 선생의 맏손자가 구글을 검색하다 할아버지 관련 수필을 찾아 식구들과 공유하였다.

 

[좋은수필 2013년 10월호, 다시 읽 는 좋은수필]

 

돈가스와 가을과 바이올린 - 김구용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함 선생과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방학 동안 산속에 가서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나는 장차 일주일에 몇 번씩 함선생과 그 음식점에서 식사할 것을 기쁘게 생각하다. ‘한 달 만에 만나게 되니 이번은 내가 점심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만나기도 전에 함선생의 부고를 신문에서 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방학도 끝났으나 나는 시간 강사이므로 아직 S여고에 나가지 않았던 만큼 어느 날 오후 다방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신문에서 나는 S여고 이름으로 검은선 내에 들어 있는 함이咸二榮 선생의 부고를 보았다.

어느 분일까? S여고에 나간 지 불과 몇 개월 안 되지만 그뿐만 아니라 항상 모든 일에 등한한 내 자신에 대하여 어떤 반성 같은 것을 느끼었다. 나로서는 필시 알 만한 분일텐데 세상을 떠나신 분의 성명을 보고도 모르니 자못 죄송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늦게야 S여고에 근무하는 시인 K씨가 다방에 나왔기에 “돌아가셨다는 함선생님이 누구시지요?”하고 물었다. “그 작곡하시는 음악선생님을 모르십니까?” 이 대답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 의외다. 이리하여 바로 방학 전의 지난 일이 일시에 회상되었다.

내가 지난 봄 S여고에 나가게 된 지 얼마 후 그분이 작곡가란 것을 들어 알았고, 쉽사리 친해졌던 만큼 새삼스레 성명을 묻기도 실례일 것 같아 그 후 그냥 ‘선생님’으로 부르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날 나는 내 수업시간을 마치자 직원실에서 쉬고 있었다.

저편에서 함선생은 조그만 외국제 약병을 앞에 놓고 영어과 선생님이 새겨주는 주의서注意書를 신중히 듣고 있었다. 어딘지 외롭도록 선해 보이고 살집도 좋으신 분이 무슨 약을 잡수시나 하고 나는 가볍게 생각하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나가서 점심식사를 하러 현관으로 갔더니 함선생이 신을 신는 중이었다.

“점심 잡수러 가십니까?”

“네.”

함 선생은

“싸고 맛있고 많이 주는 음식점을 소개해 드릴 테니 같이 갑시다.” 라고 말하다.

나는 이 말에 구미를 느꼈으나 현금을 넉넉히 갖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내일 가겠다.’고 대답하다. 함 선생은 ‘그런 걱정 말라.’며 나를 데리고 중앙청이 바라보이는 큰길을 횡단하여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과연 2백 환짜리 돈가스가 번화가의 3백50환짜리 못지 않게 훌륭하다. 그것은 내게 있어 콜롬버스의 미주 대륙 발견과 비길 만한 일이었다. 그날 함선생은 식사를 하며

“김선생의 시는 딱딱해서 작곡하기 어렵겠더군요, 적당한 것 있거든 한번 보여주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생각뿐이지 어디 시가 되어줍니까.”

하고 송구스러이 대답하다. 그 이튿날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 음식점에 가서 함선생께 점심 대접을 하고 같이 다방에 들리었다.

“건강해 뵈시는데 언젠가 가지고 계시던 약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혈압이 높습니다. 그래 술도 끊고 홍차를 마신답니다.”

함 선생은 이렇게 대답하며

“김선생도 결혼하셔야지요.”

하며 도리어 나를 걱정해주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함 선생과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방학 동안 산속에 가서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나는 장차 일주일에 몇 번씩 함 선생과 그 음식점에서 식사할 것을 기쁘게 생각하다. ‘한 달 만에 만나게 되니 이번은 내가 점심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것 이다.

그런데 아직 만나기도 전에 함 선생의 부고를 신문에서 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S여고에 나간 어느 날 나는 세상을 떠난 함 선생을 생각하며 점심 시간에 시인 K씨와 함께 그 음식점으로 갔다. 우리는 그 맛나고 많고 값싼 2백 환짜리 돈가스를 먹으며 고인에 관하여 이야기하다. 함 선생의 장례에 갔었다는 K씨가 나에게 이런 이야길 들려주었다. “함 선생은 딸 여섯에 아들이 하납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 날 이발하고 피하노 배우러 온 학생을 지도까지 하는데 갑자기 혈압 관계로 세상을 떠나셨다더군요. 큰딸이 지금 우리 학교에 다니는데 우등생입니다. 영결식 때 그 딸이 떠나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습니다.”

음식점에서 나오니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다. 북악北岳이 새삼 가까워 보이었다.

“가을이구나. 추석도 몇 날 안 남았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난한 이 나라에서 예술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 작곡가 함이영 선생을 생각하였다.

‘좀 더 세월이 흐른 후 언제고 조용히 함 선생의 딸에게 간청하여 그 아버지가 남기신 곡을 바이올린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아니 먼먼 훗날 즉 함 선생의 딸이 울지 않고 바이올린으로 아버지의 곡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하고 다시 생각하다.


김구용 -------------------------------------------

김구용님(1922~2001)은 시인. 경상북도 상주 출생. 《신천지》에 < 산중야山中夜> <백탑송白塔頌>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 시집 《시 집 1》, 《구곡九曲》 번역서 《채근담》, 《노자》, 《열국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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