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제65주년 현충일 71주기 반민특위 습격 사건

정종배 2020. 6. 6. 07:59






제65주년 현충일 71주기 반민특위 습격 사건/정종배

현충일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기념일. 1956년부터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추념식과 참배행사, 각종 추모기념식이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되며, 기업·단체·가정 등에서는 조기를 게양하기도 한다.



1956년 4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고 공휴일로 정하였다. 현충일을 6월 6일로 제정한 이유로, ‘6월은 6·25 사변일이 들어있는 달이고, 24절기 중의 하나인 제사를 지내는 망종이 6월 무렵이며, 1956년의 망종이 6월 6일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1975년 1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현충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82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기념일에 포함되었다.
(출처: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에 따르면(국가기록원도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단순히 설로 표현) 현충일이 6월 6일인 까닭은 6월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24절기 중의 하나인 망종을 따라 제사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1956년 6월 6일 제1회 현충 기념일이 열렸습니다. 당시 현충일 행사는 ‘제1회 전몰장병추도식’으로 거행됐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함태영 부통령과 대법원장, 정부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조포와 국민의례 행사 뒤에 당연히 있어야 할 대통령 추도사가 갑자기 생략되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해서 국방장관이 헌화하고 함태영 부통령의 기도 후에 행사는 끝났습니다.

이런 일화를 보듯 현충일은 얼떨결에 만들어지고 6월 6일이라는 날짜가 입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현충일을 6월 6일로 제정하고 기념하게 된 명확한 근거를 말 할 수 없습니다.

현충일에 대한 공식적인 제정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면 굳이 현충일을 따로 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는 의문도 듭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화수분인 망우리공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이후 4.19혁명까지 망우리공원과 관련 된 인물은

대한독립선언(2인) ㅡ 39인 중 안창호 박찬익

기미독립선언(7인) ㅡ 33인 중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이종일 나용환 박동완 홍병기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19명)

한용운, 유관순, 서동일, 오재영, 김병진, 오기만, 문일평, 오세창, 유상규, 방정환, 서광조, 이강덕, (이병홍, 장덕수, 조봉암, 이영학, 김분옥, 김기만, 정춘산), ( ) 안에 계신 분은 서훈을 받지 못한 분

망우리공원에 묻혔다가 이장한 독립운동가(23명)

안창호, 김영랑, 김정규, 나운규, 강학린, 문명훤, 김승민, 박찬익, 김진성, 서병호, 김사국, 박원희, 이종일, 나용환, 박동완, 홍병기, 송진우, 백대진, 최백근, 조종완, 김봉익, 이탁, (김동명) ( ) 안에 계신 분은 서훈을 받지 못한 분

13도창의군탑/ 왕산 허위
4.19혁명/ 박동훈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오기만, 유상규, 오재영, 서동일, 서광조 등의 묘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본인 묘비가 없는 분은 김병진, 서동일, 고향 강릉 사천으로 이장한 김동명 시인도 부인 묘비만 있었다.

이장할 때 묘비를 그대로 세워 두고 가신 분은 박찬익, 박원희, 문명훤, 강학린, 김승민, 김진성, 서병호, 김봉익, 이탁 등이고,

묘비를 묻고 가신 분은 김영랑, 김정규, 나운규, 김사국, 조종완, 김동명 등이다.


반민특위습격사건 및 와해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그해 10월 23일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박흥식, 김연수, 이광수, 최남선 등 친일파 688명을 체포했다(이 중 37퍼센트는 친일 경찰).

친일파는 '반민특위 안에 공산당이 있다.'라며 특위 구성원 암살 음모를 꾸몄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경찰 노덕술이 체포되자 '반민특위가 치안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라며 친일파를 비호했다. 또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노덕술을 풀어 주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며, 정부 내 친일파를 비밀리에 조사한 뒤 선처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 습격을 자신이 지시했다고 6월 9일 외국 언론에 밝혔다.

피습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무력해졌고 친일 청산은 미뤄진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 앞장섰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5~6월에 '남로당 프락치(간첩)' 혐의로 체포했다.(국회 프락치 사건).

현포(玄圃) 이병홍(李炳洪, 1891~1955)

독립운동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1부장/ 정치인 2. 3대 민의원/ 묘지번호 205129

묘비 앞면
民義院議員
玄圃李炳洪之墓

묘비 뒷면
檀紀四千二百八十八二十二日
同志一同建立
海公申翼熙書

이병홍(李炳洪), 1891년~1955년 10월 17일)은 제2,3대 국회의원(민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했다.

오성학교 졸업/ 경상남도 진주 3.1혁명 주도/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 위원장/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경남 산청) 낙선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에 있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로 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진주 또한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진양군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만세 시위운동은 정촌면과 미천면을 들 수 있다. 단성면 배양리에 거주하던 이병홍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에게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숨겨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넘겨주고 동지 이종언과 수백장의 선언서를 찍어내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여 다 같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등 조국 광복에 힘썼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도 활약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 1,2대 민의원과 반민특위(36년 일제 침략기 동안 일본에 아첨한 사람을 가려 벌주는 위원회) 제1조사부장을 역임했다.

반민법 개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대하여, 1949년 2월 17일자 연합신문의 「대통령 담화는 경악할만한 거라는」제하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장 이병홍 명의의 반박 담화를 보면,

“15일부 대통령담화는 그 내용이 너무도 우리들의 상식과 상치되므로 다시금 그 담화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는 사실 대통령이 그런 담화를 발표하였다고 믿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일국의 원수로서 국회에서 결정되고 대통령 자신이 서명 공포한 법을 그 법이 아직 때도 되기 전에 조변석개한다면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하여도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더욱 반민법은 민족의 대의를 세계와 후세 자손에게 밝히는 것이므로 말이 법률이지 우리들은 그 법률을 일종의 민족적 성전으로 생각하고 이 법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옷깃을 바르게 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 감정은 전 민족이 동일하게 가지리라고 믿는다. 그런 법률을 대통령이 만약 개정을 요청하였다면 우리는 참으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흔히 와전이 많은 세상이므로 동 발표가 진상이 아니기를 빈다. 더구나 고문 운운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일국의 원수로서 반민자들의 허위적 낭설을 믿고 부화뇌동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

라는 담화로 반민법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키려는 이승만 정권의 반민법 개정을 경계하고 있다.

반민특위 출범부터 소멸까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을 통과시키고, 9월 22일 정부가 이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민특위는 이후 1년 동안에 걸쳐 전국민적 기대 속에 총 682건의 사건을 취급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던 친일파들과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승만은 3권 분립에 어긋난다며 반민법의 공포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거듭 담화를 발표하여 반민특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지지를 배경으로 경찰은 반민특위 관련자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기도했고,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이후 공소시효기간을 1년 1개월이나 단축한 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특위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 자리를 메꾸어 반민특위의 활동은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682건의 사건 중 체형판결이 내려진 것은 12건에 불과했으며, 그 중 5건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고, 실형으로 복역한 사람들도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기간 동안 모두 석방되었다.

망우리공원 관련 인물 중 반민특위 피의자와 소환된 자 명단에 들어가거나 조사를 받은 박희도와 오긍선 두 명이다.

박희도(朴熙道)
3.1혁명 민족대표 시중회 회원, 창간, 국민총력 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으로 활동한 박희도는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김제선 조사관이 출두명령을 받고 이튿날 출두하였다.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최종결과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해관(海觀) 오긍선(吳競善)
교육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경성부회 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으로 활동 하였다. 1949년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자,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해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이병홍은 1955년 10월 17일 새벽 심장마비로 삼청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소에는 해공 신익희가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 이병홍 묘역은 용마산 방향과 독락정 정자 쪽으로 갈라서는 사색의 길 삼거리 전 화장실 지나 전파 송신탑 전, 좌측 위에 눈에 띄는 묘비가 있는 이병홍의 묘지다.

인물보다 묘비에 써진 글씨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는 유택이다.

임 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金九 지시로 작성한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에 들어간 망우리공원 관련 인물은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이자의 변절 행로 박희도(정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설산 장덕수(언론),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ㅡ천성활란(교육),

근대 예술을 빛낸 팔방미인 일제강압으로 내선일체 합리화 영화 감독과 작사한 석영 안석주(문학, 영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일제말 전쟁 지원 강연 숙명여대 초대 총장 임숙재ㅡ풍천숙재(교육)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 708에 수록된 인물은

박희도(교육자), 오긍선(교육자), 장덕수(정치인), 김활란(교육자), 임숙재(교육자), 함세덕(연극)/ 온재 이광래(연극)/ 영주 최신복(아동문학)/ 월파 김상용(문학)/ 윤상필(군인)/ 홍재설(군수, 노해면장) 등이다.

망우리공원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화수분으로 전수조사를 통해 나라 사랑과 문화 사회 교육 정치 경제 등의 기틀을 다진 분들의 삶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행복한 나라 국민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시 중랑구 구리시 등이 묘역을 관리하고 이장하신 분이나 관련 인물들의 묘역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인물들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에 바탕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주최 교보생명 중랑구 한국내셔널 트러스트 수림문화재단 후원 청소년들의 퀴즈프로그램 도전 러닝맨이 열린다. 코로나19로 엄중한 가운데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을 통해 아무 탈 없이 행사가 마무리되기 위해 힘을 보태겠다.

독립운동가 단체인 광복회는 올해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에 대한 경찰청장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71년을 맞는 6일 오후 3시에는 광복회 회원과 당시 특위 관계자 유족들이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 모여 '인간 띠 잇기' 행사를 연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충일인 6월 6일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날이다"라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독립유공자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월남전 참전하여 나트랑전투에서 전사하여 동작동 현충원 이종형 김태식 묘지 참배하고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