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이현우 시인 김말봉 이종하

정종배 2020. 6. 29. 21:09

정처없이 떠돌다 사라진 방랑시인 이현우

 

정처없이 떠돌다 사라진 방랑시인 이현우

그는 김말봉의 의붓아들이다

지금 무덤에 나란히 누워있는 그녀의 마지막 남편 이종하의 전처 소생이다

 

 

이현우의 시문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표지 (1994)

 

시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전쟁을 감성적 언어로 소화

마치 거지꼴로 나타나기 일쑤… 1983년 이후 행방 묘연

 

시인이나 작가가 그의 최후를 어떻게 마쳤는가를 모르는 예는 더러 있다. 프랑스의 경우 여태껏 죽은 해는 알지만 시신을 못 찾은 생텍쥐페리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랭보의 죽음도 있다.

우리 현대시사에는 시인 이현우의 죽음이 그런 예에 든다. 물론 그가 생존해 있어도 칠순을 갓 넘기는 나이다. 전쟁시를 감성적으로 잘 소화한 이현우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

 

그가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1980년대 초반 이후니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현우는 생래적으로 우수의 어두운 그늘이랄까, 그러한 비극적 인자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것 같았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잠깐 그의 가계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1955년에 별세한 그의 선친 낙산 이종하는 잘 알려진 호남형 인사다. 그의 매부되는 시인 노석 박영환은 생전에 낙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동경 유학을 했고 무엇보다 진정한 항일 애국자요, 인격자로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1937년에 이종하는 여류소설가 김말봉과 재혼한다. 광복 이후 두 내외는 아나키스트들이 발기한 독립노동당(당수 유림)에서 낙산은 노동부장, 부인은 부녀부장으로 피선된다. 이때 이현우는 겨우 세 살, 계모 김말봉의 품에서 자란다. 어릴 적부터 이복동생들과 함께 뒹군 그였지만 성장 이후 생모를 일찍 여읜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어쩐지 이복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집을 자주 뛰쳐나와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는 부랑아로 사는 것에 이력이 났다. 몇 달씩 집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동국대를 다녔지만 공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현우는 이 무렵부터 다른 또래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필자의 하숙이 있는 명륜동, 혜화동 쪽에 불쑥 나타나 술과 밥, 잠을 청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시인들과 작가들은 곧잘 폐허나 다름없는 명동 등지의 주점, 몽파르나스 동방사롱 엠프레스 음악 다방이 있는 부근 주점에서 곧잘 어울렸다. 김관식, 천상병, 박봉우, 송기동, 이호철, 고은 등이 그 면면들이다. 이 무렵인 1958년 이현우는 '자유문학'지에 시 '끊어진 한강교에서'가 추천되어 그 감성적 언어의 유려함 때문에 일약 그를 한국의 아폴리네르로 만들어 놓았다.

 

'그 날,/ 나는 기억에도 없는 괴기한 환상에 잠기며/ 무너진 한강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이미 모든 것 위에는 낙일이 오고 있는데/ 그래도 무엇인가 기다려지는 심정을 위해/ 회한과 절망이 교차되는 도시/ 그 어느 주점에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의 비극의 편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취기에 이지러진 눈을 들고 바라보면/ 불행은 검은 하늘에 차고/ 나의 청춘의 고독을 싣고/ 강물은 흘러간다' ('끊어진 한강교에서'의 일부).

 

어느 늦가을 날 친구인 시인 강민이 자주 다니던 음악실 '돌체' 계단에 와이셔츠 바람으로 쓰러져 있는 거지를 봤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얼굴은 오랫동안 씻지 않아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현우였다. 가까스로 수습한 다음 날 강민은 어머니 김말봉을 찾았다.

"이 녀석아, 이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내가 그애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걸 낸들 어떻게 하겠나. 네가 제발 좀 데려와 다오." 그러고 난 다음에 거지꼴로 쓰러져 있는 이현우를 친구들이 메고 집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며칠 뒤 명동에 나타났을 때 깜짝들 놀랄 만한 일류신사 차림새였다. 말쑥한 신사복 차림에 화사한 넥타이, 번쩍이는 구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다음날부터 이현우의 차림새는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의 행색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밤 사이에 윗도리가 사라지고 시계도 넥타이도 온 데 간 데 없다. 그 다음 날엔 얼굴이 숯칠한 것처럼 어디서 뒹굴었는지 거지꼴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술값으로 모두 털어준 것이다. 한 때 걸인 대장 노릇을 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가 거지 집단에 끼어들어 재미나는 소설 얘기를 털어 놓을 땐 거지들이 자못 대장감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그만한 유식한 거지를 보지 못했기에 존경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대학을 중퇴한 것도 등록금을 술값으로 날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울역 앞 양동의 사창굴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술값도 떨어지고 화대도 주지 못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다음 날 어머니가 와서 밀린 돈 다 지불하고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김말봉은 서울 신문 두 곳에 연재소설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인기 작가였다. 1961년 김말봉은 사망했는데 현우의 떠돌이는 변함이 없었다. 부산에 있을 동안에도 거지꼴로 지낸 것은 변함없는 상황이었다. 필자가 보다 못해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한 편에 3만 원씩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한번 약속을 지킨 이래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1933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낙양고를 나왔다. 그의 형은 그를 버린 지 오래됐고 친구들도 모두 고개를 돌린 뒤 착한 시인 이인영이 1983년 마지막 모은 돈으로 부산역 발 서울행 열차에 그를 태워 보냈다. 그 이래 그를 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